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강론자료

2018-09-02.....연중 제22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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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8-09-01 ㅣ No.2265

 

연중 제22주일 (나해)

신명기 4,1-2.6-8      야고보서 1,17-18.21-22.27      마르코 7,1-8.14-15.21-23

2018. 9. 2.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오늘은

9, 순교자성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 신앙은 경기도-광주에 있는, 주어사의-천진암에서, 1776년 시작된 학문연구모임으로 시작했고, 8년 후 이승훈이 베드로로 세례를 받은 이후, 신앙공동체인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가 100년이 가까운 박해의 시간동안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냈는데, 그중에 9월에 가장 많은 분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9, 순교자성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순교자성월은 신앙을 증거(證據,=증명할 수 있는 근거)하는 방법으로 목숨을 내어놓고, 신앙을 이유로 삶을 마친 사람들을 거룩하게 여기자는 뜻으로 함께 지내는 기간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일에 순교(殉敎)나 신앙을 드러내는 죽음이 필요하냐고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순교자성월을 정하고,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자는 것은 무조건 그들의 죽음을 찬미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이니, 죽음을 중요하게 여길 내용도 아닙니다. 죽음이나 순교는 내가 드러내야 할 중요한 신앙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지, 죽음을 목표로 할 일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9월 순교자성월의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만, 오늘 연중22주일에 들은 말씀은, 순교자성월에 관한 설명도 아니고, 순교를 칭송하는 내용도 아니며, 순교와 관련된 내용도 아닙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의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 첫째독서는, 하느님의 명령을 담은 계명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히브리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법령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발휘하는 행동에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지혜와 슬기를 찾아내고 우리를 우러러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하느님의 법에 대한 자세가 충실하다면 현명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둘째독서, 야고보사도의 편지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공손하게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받아들이고 실천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말씀은 우리의 귀를 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실천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는 경고의 말씀도 야고보사도는 덧붙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상의 전통과 음식을 대하는 문제를 이용하여 하느님의 율법과 그 율법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어떻게 일치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법을 실행할 때 사람이 갖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대하기는 하되, 올바른 자세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몸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의 몸을 더럽힌다는 지혜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젠체하는(=잘난 체 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얼마나 옳다고 여기겠습니까?

 

철학에서는, 사람의 외부에서 다가와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타자(他者,=otherness)'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이 타자(他者)라는 대상이 나를 향하여 좋은 소리를 해준다면, 그 때 내 삶이 올바르다는 선언이 되니, 나의 의지와 구별되거나 떨어져있는 타자의 의도를 잘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타자'로서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 영향을 주시려고 할 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서 내 삶의 모양은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삶을 이끄시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삶을 간섭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행동입니다. 올바른 신앙이라면 당연히 전자의 의미를 강조하겠지만, 모든 사람을 한 가지 생각으로 억지로 묶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니, 둘째의 의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사람의 삶은 다양한 모양으로 좋아지기도 하고, 사람의 삶에 이익보다는 손해를 가져오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끄시고 인정해주시는 하느님의 고귀한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훌륭한 결과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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