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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보기: 어느덧 다가온 이름, 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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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6 ㅣ No.1472

[복음으로 세상보기] 어느덧 다가온 이름, 홈리스!

 

 

몹시도 낯선 ‘홈리스 추모제’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2001년부터 매년 동짓날, 밤이 제일 길어 머무를 곳 없이 거리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가장 힘든 날에 한 해 동안 거리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며 지내는 빈곤과 관련된 시민단체들의 행사입니다.

 

2017년에는 154명의 홈리스 사망자들을 기억했습니다. 2013년 77명, 2014년 87명, 2015년 99명, 2016년 111명, 해마다 늘어만 갑니다.

 

아주 오래전에도 길거리에는 걸인들이 있었고, 추운 겨울이 오면 거리에서 숨을 거두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 것은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 구제 금융요청 시기부터였습니다. 한때는 산업의 역군으로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을 일구어낸 이들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살 곳을 잃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요 기차역인 서울역과 용산역, 그리고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거리가 집이 된 이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홈리스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출신이나 연유도 다양해졌습니다. 사업을 하다 망해서 온 사람들, 어려서부터 정착을 하지 못할 환경에서 지내온 사람들, 노인부터 청년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가슴에 묻은 채 노숙인, 부랑자, 걸인, 성가신 사람 취급을 받아가며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처음부터 삶의 자리를 거리에 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듯 나만의 사연을 가지고 거리에 나와 언젠가는 돌아갈 집과 가족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 집은 사라졌고 가족은 연락이 끊긴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거리에서 지내다보니 건강도 많이 상했습니다. 대포폰이라든지, 대포통장이라든지 싼 값에 명의를 팔고 사는 검은 유혹에도 시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명의도용 사기도 당하고 신분으로도 육신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야말로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한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맘 편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홈리스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안 된 수용소 차원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다시 거리로 나오고, 또 다시 다른 시설을 전전하거나 일용노동을 하거나 병을 줍기도 하면서 월 15~20만원을 내는 쪽방이나 고시원에 거주지를 잡기도 합니다. 안정적인 주거와 생활, 그리고 치료와 요양을 위해서 수급자 신청을 하면 지연되거나 거부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도 안 되면 다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쫓겨나는 노숙인,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냐

 

부끄러운 것은 그분들을 대하는 저의 태도였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사람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그분들을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 행복한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분들이 충분히 쉴 수 있고, 치료와 요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지가 드디어 거리의 사람들에게까지 폭넓게 펼쳐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뿐이었습니다. 눈앞에 없다고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러는 사이 그분들은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노숙인 출입금지’, 민자화를 통하여 점점 사유화되어가고 있는 공공장소에서 거리 홈리스들을 효율적으로 내쫓기 위한 조처들이 전략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노숙행위와 구걸행위에 대한 단속과 제재가 날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실제로 거리 홈리스들은 숫자가 감소했습니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발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들이 다 따뜻한 집과 정겨운 가족에게로 돌아갔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고시원에, 쪽방촌에, 그리고 어딘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인 2017년 6월13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을 제정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담화문을 통하여 교황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 봉사의 수혜자로 여기거나 우리의 양심을 채우는 즉흥적인 자선행위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를 민감하게 하고 아픔의 원인인 부당함을 알게도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될 때에 의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영성체 때에 주님의 몸을 직접 만지고 영하듯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 받는 몸에서 주님의 몸을 대하듯 해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곧 자선행위를 넘어서 우리의 삶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 받는 몸을 가까이 다가가고, 만나고, 마주하여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 고독의 고리를 끊어내어 우리의 사랑스런 온기를 느끼게 하는 부르심을 그리스도인들은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

 

우리는 습관처럼 차별을 살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 이 피조물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근접하지 못할 사람을 만들고, 나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사람을 만듭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영광이고, 누군가를 만나면 귀찮고 짜증납니다. 이는 그가 나와는 다른 차원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분류를 통해 사람들을, 피조물들을 나누어 놓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이렇게 나누어 놓았습니다.

 

도시의 미래를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조감도라는 이름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마련될 아름다움을 그린 어떤 그림에서도 홈리스들이, 거리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 없는 사람으로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분들의 인권은 우리와는 다른 권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분들도 세상에 태어날 때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으며, 어느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고, 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관리하고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기투성이의 몸이 되어 부자의 식탁에서 배제된 라자로입니다. 그가 부자의 집 문간에서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바라보며 굶주린 배를 달래게 했다면, 그리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배를 채웠다면 이에 상응한 대가를 고통과 목마름으로 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을 위하여서라도 부자와 라자로는 같은 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지난 2017년 12월22일 추모제에서 늦게나마 공부에 마음을 쓰는 홈리스 야학 학생들의 세상에 대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차별하지 마라!

우리도 환자다. 치료다운 치료를 원한다!

무료급식, 공짜가 다가 아니다. 우리에게 존중받는 밥상을!

쫓겨나고 내몰리는 악순환은 그만! 우리에게 머물 권리를!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 홈리스를 표적 삼지 말라!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제대로 투표권을 보장하라!

지원을 무기 삼지 말고 우리 의사를 존중하라!

존엄한 죽음을 맞을 권리, 추모와 애도의 권리 보장하라!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2월호,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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