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사제의 삶과 고뇌, 그 안에 숨겨진 신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4 ㅣ No.1042

사제의 삶과 고뇌, 그 안에 숨겨진 신비

 

 

본당 공동체의 목자이자 성사 집전자인 사제. 신자들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겉으로 보이는 직무만으로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가? 혹은 다르다는 이유로 관심을 두지 않는가? 성품성사는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신비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이 제대 앞에 서있다. 그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로서 제물을 봉헌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성별한 이를 통해 그 일을 하신다. 교회 공동체는 그를 ‘사제(司祭)’라 부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사제와 신자들은 제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며 미사를 바치게 되었다. 본당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목활동 - 강론부터 면담, 행사 등 - 사제는 공동체와 마주한다. 오늘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정보에 빠르게 적응해가는 신자들은 궁금해 한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신부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2009년 6월, ‘사제의 해’가 선포되어 교회는 사제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사목 활동과 삶의 증언을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 안팎에 알리는 한 해를 보냈다. 2010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사제의 해’ 폐막 미사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지만 인간이 당신을 대신하여 활동하고 현존할 수 있다고 여기시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맡기십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용단이 ‘사제직’이라는 말에 담긴 참다운 위대함입니다.” 과연 사제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에 그와 같은 감정들이 담겨 있을까. 진정 사제에게 필요한 원천은 무엇일까.

 

 

신부님도 누군가 필요해?

 

최근 교황청 성직자성 연례 총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2017년 6월 9일 가톨릭평화방송 <가톨릭 시시각각>에 의하면 “사제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말고 아버지처럼 그들 곁에 머물라. 아무리 바빠도 신부들 전화는 받고, 못 받으면 밤에도 좋으니 다시 걸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신자들은 ‘신부님도 누군가가 필요한가?’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사제의 34.9%는 사제직에 심한 회의와 갈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78.3%의 사제들이 정체성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가톨릭 사제들의 스트레스 실태분석과 관리 방안에 대한 조사연구, 송동림, 한남대학교 학제신학대학원, 2002).

 

오늘날 본당의 사목범위는 넓어지고 있고, 사제가 신자 한 명 한 명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신자들이 바라는 기대 역시 다양해졌다. 어떤 신자는 사제가 사회문제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한편 어떤 신자는 사회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어떤 이는 사제가 말씀에 충실하길 바라고, 어떤 이는 신자들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길 바란다. 한편, 사제의 어려움은 성직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본당사제는 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처럼 인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본당 내 성직자 만능주의가 퍼지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짊어지는 비능률적인 사목으로 이어진다(가톨릭신문,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6], 2014년 7월 27일 참조).

 

 

기꺼이 서약한 독신

 

가톨릭교회에서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고 또 결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직자의 신분에서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투신하고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도록 교회는 요구한다. 그러나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흠이 되지 않는 시대에 사제가 지키는 독신은 오히려 점차 어려워진다. 왜일까?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추구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오늘날이다. 그리고 결혼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가 제한을 받는다는 인식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이전과 다르게 보는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2010년 6월, 사제의 해 폐막 기념 국제 사제 모임에 즈음한 밤기도에서 슬로바키아의 한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답을 구했다. ‘그리스도를 찾는 제게는 독신이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에 대한 세상의 비판을 너무 많이 듣다보니 저는 어리둥절합니다.’ 그에게 교황은 ‘독신은 우리를 몸소 당신께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해진, 부활의 세상에 대한 선취이고 그 세상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며,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직면한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상이 하느님의 미래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시지 못하는 세상에서 독신은 커다란 걸림돌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분을 실재로 여기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는 길이기도 하다(1코린 1, 18-31참조).

 

 

사제를 위한 기도

 

“저희 본당에 새로운 신부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본당 공동체에 사제를 위한 기도를 청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기도가 전해졌을까?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제는 신자들을, 신자들은 사제를 알아야 한다.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피상적인 겉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으로 다가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한 기도보다 개인사에 치우친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 사이에서 사제는 영성적으로 메마를 수밖에 없다.

 

우리 앞의 ‘신부님’은 인간이자 사제로 서품(敍品) 받았다. 사제 서품식에서 주교는 수품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교우들에게 말한다. 수품자들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린다. 오랜 전통의 이 자세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을 표현한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저서 「성품성사」에서 사제직의 핵심은 ‘파견’이라고 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뭔가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서 사제품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제가 진정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스스로 느끼고 주님과 신자들을 위한 사랑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원천이 필요하다.

 

사제직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성사(聖事)이다. 인간의 나약함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제가 내면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지닐 수 있도록 고요함과 기도로 함께 했는지, 아니면 그 내면의 불이 다 타버릴 때까지 바라봤는지 돌아보자. 서로 신앙의 불을 지켜줄 때 우리는 난롯가에서 심신을 녹이며 하느님 품 안에 편안히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외침, 2017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이지원 팀장]



1,17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