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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아름다운 성화65: 씨 뿌리는 사람 유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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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30 ㅣ No.443

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65) 캔터베리 대성당 ‘씨 뿌리는 사람’


가을 숲에 오시어 꽃의 아름다움을 보소서

 

 

- ‘씨 뿌리는 사람’, 1250~1260년, 유리화, 캔터베리 대성당, 영국.

 

 

‘씨 뿌리는 사람’은 캔터베리 대성당의 드넓은 내부를 장식한 수많은 유리화 가운데 한 점이다. 한 농부가 손에 씨앗을 한 움큼 들고서 밭에 뿌리고 있다. 씨앗이 가득 담긴 무거운 망태기를 목에 메고 있지만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다. 그는 양발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서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앞으로 나가며 씨앗을 뿌리는 중이다. 드넓은 밭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난다. 그가 뿌린 씨앗 중에 많은 것들이 유실될 수 있지만 그는 이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오로지 파종 작업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다.

 

이 유리화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 마태13,1-9 루카 8,4-8)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루카 8,5-8)

 

예수님께서도 파종하는 농부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셨다. 공생활 초기에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따랐지만 후반에는 고작 열두 제자와 몇몇 사람들만 그분의 뒤를 따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들판에서 파종하는 농부가 유실되는 씨앗에 대한 걱정보다는 엄청난 결실을 보게 될 소수의 씨앗에 기대를 두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떠나간 사람들보다는 12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셨을 것이다.

 

지난 10월 초순, 깊어가는 가을에 성당 마당과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변두리에 있는 꽃 시장을 방문하였다. 꽃시장에는 여러 종류의 국화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국화를 차에 가득 싣고서 돌아오는데 국화와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한 사제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전숭규(아우구스티노)신부님은 우리나라 북단에 위치한 의정부교구 연천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해마다 국화축제를 열어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주곤 하셨다. 성당 마당과 텃밭에는 온갖 종류의 국화들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운 채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사람들은 국화를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신부님은 국화축제가 열리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꽃을 통해 지역 주민을 만나고 그들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기 위해서 시작했습니다.…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휴전선 아래 동네에서도 꽃은 이렇게 피어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지며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 신부님은 국화를 피워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아름다움이 다시 깃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서 사람들은 진선미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해마다 국화를 피워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주던 신부님은 올봄, 부활대축일 새벽에 52세를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기셨다. 신부님께서 농부처럼 쉼 없이 뿌린 아름다운 씨앗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싹트며 꽃을 피우고 있다. 올해의 국화축제는 신부님의 마지막 사목지였던 의정부 한마음청소년수련원에서 10월 11일부터 22일까지 열렸다. 이 국화축제를 알리는 포스터에는 국화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신부님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그대, 내 마음의 꽃이여! 가을 숲에 오시어 꽃의 아름다움을 보소서.”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27일, 정웅모 신부(서울 장안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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