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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순암 안정복의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문답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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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847

順菴 安鼎福의 <天學設問>과 <天學考> · <天學問答>에 관한 연구

 

 

국문 초록

 

조선 후기 순암 안정복의 《覆?稿》에 천주교 관계 저술인 <天學設問>, <天學考>, <天學或問>이 수록되어 있다. <천학설문>은 <천학고>, <천학혹문>과 구별되는 저술로, 내용이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며, 천주교가 중국과 조선에 들어온 역사를 밝힌 <천학고>와 천주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천학문답>의 내용이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천학설문>은 <천학고>와 <천학혹문>으로 분리해서 저술하기 이전 단계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은 <천학설문>을 1784년 겨울 동안인 11월 14일 이전의 초 겨울에 저술하였다. 그러나 1784년 겨울부터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천주교에 휩쓸리는 경향이 갈수록 더욱 심해짐에 따라 이를 막기 위하여 <천학설문>을 보다 체계적인 <천학고>와 <천학혹문>으로 개편하여 1785년 3월에 그 초고본을 완성하고 그해 12월에 그것을 수정 보완한 수정본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천학혹문>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남한조의 지적에 따라 1790년에서 1791년 7월 20일 사이에 그 제목을 <天學問答>으로 바꾸었다.

 

<천학설문>은 안정복이 아직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은 온건한 소장학자인 沈?의 천주교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가 천주교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자 저술하여 준 것이다. 또한 <천학설문>은 안정복의 제자인 권진도 필사해 갔는데, 스승을 도와 천주교가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지침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권진의 경우로 보아 <천학설문>이나 이를 개편하여 저술한 <천학고>와 <천학혹문>(또는 <천학문답>)은 성호학파의 온건한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해져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침서로 활용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편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안정복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남한조, 신치봉, 정종로, 이천섭 등에 의해 영남 지역에도 전해졌다. 특히 이상정의 제자인 남한조는 <천학혹문>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저술하였고, 역시 이상정의 제자인 신체인은 안정복의 <천학설문>, 이헌경의 <천학문답>, 조술도의 <운교문답>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한 <천학종지도변>을 저술하였다. 이로써 보아 안정복의 <천학설문>이나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영남의 유학자들이 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正學인 性理學을 수호하는 闢衛思想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1. 머리말

 

안정복의 천주교에 관한 저술로 <天學設問>, <天學考>, <天學或問>, <天學問答>이 있다. 이들 저술은 일찍부터 학계의 관심을 받아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왕의 연구는 주로 이들 저술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 저술의 서지적인 사항에 대한 연구로는 姜世求, 車基眞, 함영대 등의 것이 있을 뿐이다.1) 우선 강세구는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그 최초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도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그 결과 그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천학혹문> → <천학설문> → <천학문답>의 과정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였고, 그 최초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1782년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강세구의 연구 성과를 차기진과 함영대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안정복의 《覆?稿》2)(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10책과 13책에 보면, 기왕의 연구에서 자료로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고>가 들어 있고, <천학혹문>과 <천학고>의 저술 연대도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나 그 최초의 저술 시기에 관한 기왕의 연구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부부고》 10책과 13책에 들어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와 그 최초의 저술 시기 등에 대해 새롭게 연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혹문>(또는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를 밝혀보고, 다음으로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혹문>(또는 <천학문답>)의 저술 시기 등을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혹문>(또는 <천학문답>)의 저술 대상과 그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2. <天學設問>과 <天學考> · <天學問答>

 

안정복의 천주교에 관한 저술인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에 대해 최초로 주목한 연구자는 강세구이다. 이미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이, 강세구는 <천학혹문> → <천학설문> → <천학문답>의 과정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 <천학혹문>을 지은 뒤 이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 <천학설문>이고, 이 <천학설문>을 다시 수정 보완한 것이 <천학문답>이라는 것이다.3) 그리고 강세구의 이러한 연구 결과를 차기진과 함영대는 그대로 따랐다.4)

 

그러나 이러한 <천학설문>, <천학혹문>, <천학문답>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안정복의 《부부고》 10책과 13책에 수록되어 있는 천주교에 관한 저술들을 이용하여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부부고》 10책과 13책에는 <천학설문>, <천학고>, <천학혹문> 3편이 수록되어 있다. 뒤쪽에 수록한 자료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우선 《부부고》 13책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와 <천학혹문>에는 모두 1785년 3월에 저술했다고 표기되어 있고, 수정 보완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또한 <천학혹문>은 내용의 전문이 다 수록되어 있지 않고 앞부분 7조목 일부만 실려 있는데, 《순암집》 권17에 실려 있는 <천학문답>과 제목만 다를 뿐 내용이 대체로 같다.

 

다음으로 《부부고》 10책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설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뒤쪽에 수록한 자료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우선 서양 선교사들이 말하는 天主는 우리 유학의 上帝이지만 그들의 말은 허무맹랑하고, 그들의 학은 말이나 일이 실제적이어서 老佛의 虛無 · 空寂과 차이가 있지만 우리 유학과 다르다고 서론 격으로 언급하고 나서, 《北史》, 明나라 鄭曉의 《吾學篇》, 알레니의 《職方外紀》, 宋나라 司馬光의 《自治通鑑》, 明나라 錢謙益의 《景敎考》 등 모두 5종의 문헌을 이용하여 서학이 중국과 조선에 전래된 지 오래되었음을 역사적으로 밝혔다. 이 부분은 <천학고>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이들 5종 외에 마테오 리치의 《天主實義》, 《漢書》, 전국시대의 《列子》, 唐나라 杜佑의 《通典》, 《鴻書原始秘書》, 《明史》, 淸나라 顧炎武의 《日知錄》, 李?光의 《芝峯類說》, 李瀷의 <《천주실의》 跋> 등을 추가하여 모두 14종의 문헌을 두루 이용해서 밝힌 <천학고>와 비교하여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서학 가운데 부처가 천주의 가르침을 훔쳐서 따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 점, 살아서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게 놔뒀다가 죽은 뒤에 영혼은 단죄하는 점, 밤낮으로 천주에 기도하여 지옥을 면하기를 구하고 천당에서 살기를 바라는 점, 천주가 서방에만 내려와서 크게 교화한 점, 《七克》에서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모두 마귀가 하는 짓이라고 말한 점, 옛날에는 지옥이 없었는데 천주에게 대항한 사람 때문에 천주가 화가 나서 지옥을 만들어 가둠에 따라 지옥이 있게 되었다는 점, 천주가 사랑하는 예수가 사람을 대신하여 지옥의 괴로움을 받았다는 점, 현세를 고생스러운 금수가 사는 곳으로 여긴 점 등을 차례로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이 부분은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인데, 역시 모두 32조목의 문답으로 되어 있는 <천학문답>과 비교하여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 서술 방식이 문답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문답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과 구별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학설문>의 내용에는 천주교가 중국과 조선에 들어온 역사를 밝힌 <천학고>에 들어 있는 내용과 천주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 함께 담겨 있고, <천학고> · <천학문답>과 비교하여 그 내용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서술 방식도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과 같이 문답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내용의 구성과 분량과 서술 방식이 서로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천학설문>은 <천학고>와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으로 분리해서 저술하기 이전 단계의 글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천학설문>을 저술한 뒤에 다시 이를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천학고>와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으로 나누어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저술 시기를 검토해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가 있는데, 저술 시기는 절을 바꾸어 논의하기로 한다.

 

 

3. <天學設問>과 <天學考> · <天學問答>의 저술 시기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강세구가 <천학혹문>을 초고로 이해한 뒤 그 저술 시기를 1782년 이전으로 이해하였다.5) 그가 이처럼 이해한 근거는 우선 大山 李象靖(1711~1781)의 문인 損齋 南漢朝(1744~1809)가 <安順菴天學或問辨疑>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임인(1782) · 계묘(1783)년간에 내가 과거시험 때문에 순암 안 선생 문하를 왕래하였다. 안 선생의 말씀이 邪學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총명하고 말솜씨 있는 선비들이 더욱 그 가운데에 빠져 들어 장차 사람들과 가정과 국가가 반드시 화를 입은 뒤에는 곧 영원히 후회할 것을 심히 우려하여 “내가 사악한 설을 막아 물리치려는 하나의 글을 썼는데 자네가 나를 위해 그것을 바로잡아 주게나”라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며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사람을 통해 한 소책자를 보내왔는데 곧 <天學或問>이라고 하는 것이었다.6)

 

즉, 남한조가 1782~1783년 사이에 안정복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안정복이 천학 비판에 관한 글을 써놓고 남한조에게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남한조가 그 자리에서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물러난 뒤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나타내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을 시켜 <천학혹문>이라는 이름의 작은 책자를 보내와서 이 <천학혹문>을 보고서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썼으므로 남한조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의 저술 시기는 1783년 이전으로 판단되고, 안정복의 <천학혹문>의 저술 시기는 1782년 이전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7) 그리고 안정복이 1784년에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天學設問>을 베껴 보내고 싶었으나 베껴 쓰기가 너무 힘들어 보내지 못하네. 우사(于四)가 등사해 갔으니, 어쩌면 볼 수도 있을 것일세”8)라고 한 사실로 볼 때, <천학설문>은 1782년 이전에 저술한 <천학혹문>의 제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9) 차기진도 강세구의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따랐다.10)

 

물론 남한조가 언급한 기록만 가지고 보면 강세구의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안정복의 천주교에 관한 최초의 저술인 <천학설문>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선 <천학고>와 <천학혹문>의 저술 시기가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 및 《순암집》의 <순암선생연보>에는 모두 1785년 3월로, 《순암집》 권17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에는 1785년과 1785년 12월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한 <천학설문>의 저술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784년 겨울에 쓴 글들 속에 들어 있는 점과 안정복의 1784년 12월 14일자 편지11)에 <천학설문>이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저술 시기는 1784년 12월 14일 이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조가 1790년에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에,

 

벗 申致鳳이 그곳에서 돌아와 <天學或問> 한 책을 전해 주었는데, 논의가 올바르고 당당하며 취지가 간절하고 지성스러워 무너진 풍속을 구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조금 있어서 여쭙고 작은 책자를 기록하여 올립니다. 만약 채택할 만한 내용이 있어 다시 수정과 윤색을 가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12)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남한조에게 <천학혹문>을 전해 준 사람은 그의 벗 신치봉이며 그 시기는 1790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울러 남한조가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저술한 시기는 1783년 이전이 아니라 1790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정복이 1789년에 李獻慶에게 보낸 편지에,

 

제가 과연 이 천주학을 배척하는 문자를 쓰기는 썼는데 남의 구설에나 올랐지 효과는 하나도 없어 금방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 정본은 영남 선비가 빌려 가고 없고 초본만 여기 있어 보내 드리니, 보시면 그 대개를 아실 것입니다.13)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치봉이 남한조에게 전해준 <천학혹문>은 초본이 아닌 정본이었고, 그 시기는 안정복이 이헌경에게 편지를 보낸 때인 1789년에서 그리 머지않은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안정복이 <천학혹문>을 저술한 시기가 1782년 이전이 아니라 1785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또한 안정복이 1784년 겨울 무렵에 천주교에 관한 서적들을 다시 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던 책을 급히 회수하는 것을 통해서도 <천학혹문>의 저술 시기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안정복이 성호 이익의 손자인 李載南과 李載績 형제에게 보낸 편지가 참고가 된다.

 

《七克》 한 책을 예전에 성호 선생께서 주셔서 삼가 보고 돌려드렸네. 그 안에 진실로 골수를 찌르는 말이 많지만 그 맥락을 따져보면 결단코 이단이네. 지금 다시 상고하고자 하니, 다행히 다시 빌려 주면 곧 마땅히 돌려주겠네. 이런 내 부탁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 참으로 다행이겠네. 지금 듣자니, 우리 무리 중에 쓸 만한 재주가 있는 소장학자들이 모두 서양의 학문을 한다고 하네. 그 이야기가 파다하여 가릴 수가 없으니, 그대도 필시 들었을 것인데, 그대의 견해도 또한 이와 같은가? 이는 중화를 오랑캐로 변화시키는 기미이니 크게 불행한 일이네.14)

 

이에 의하면 안정복은 예전에 성호 선생이 빌려 줘서 보고 돌려준 《七克》을 다시 상고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재남, 이재적 형제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하였는데,15) 그 시기는 재주가 쓸 만한 소장학자들이 모두 서양의 학문을 하는 때였다. 또한 안정복이 柳玉卿에게 보낸 편지에도 천주교 서적을 돌려 달라는 내용이 보인다.

 

요사이 서양의 학문이 아주 성하여 지구(知舊) 중에 재주와 식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공은 필시 들었을 것이네. 이 학문은 과연 어떠한가? 내가 보건대 전적으로 불교에서 나온 것이며, 그 설을 조금 바꿨을 뿐이네. …《畸人十篇》과 《靈言?勺》 두 책을 곧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책들을 긴급하게 상고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다 열람하지 못했으면 다시 이 책들을 빌려보는 것이 좋겠네.16)

 

이에 의하면 안정복은 긴급하게 상고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빌려주었던 《畸人十篇》과 《靈言?勺》 두 책을 돌려달라고 하였는데,17) 그 시기 역시 서양의 학문이 아주 성하여 지구(知舊) 중에 재주와 식견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가는 때였다. 이 두 편지는 작성한 일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784년 겨울에 쓴 글들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1784년 겨울 이후에 작성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천주교 서적들을 긴급히 상고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빌리거나 회수한 것은 1785년에 저술한 <천학고>와 <천학혹문>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안정복이 천주교가 중국과 조선에 들어온 시기를 밝힌 <천학고>, 소회를 읊은 詩, 師友 간에 주고받은 편지, 죽은 이를 위해 지은 墓誌銘 등을 통해서도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처음 천주교에 관한 설을 제창한 시기와 대거 천주교에 휩쓸린 시기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소장학자들이 처음 천주교에 관한 설을 제창한 시기와 관련해서는 <천학고>의 서두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이 주목된다.

 

연래에 어떤 士人이 使行을 따라 燕京에 갔다가 서양에 관한 책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계묘년(1783, 정조 7)과 갑진년(1784, 정조 8) 어름에 才氣 있는 젊은이들이 천학에 관한 설을 제창하여 마치 上帝가 친히 내려와서 일러주고 시키는 듯이 하였다고 하였다.18)

 

위의 내용으로 보아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재기 있는 젊은이들이 천주교에 관한 설을 처음 제창한 시기를 1783년과 1784년 어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소회를 읊은 시를 통하여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린 동향을 살펴보면(<표 1> 참조), 모두 6편의 시에서 그러한 동향을 언급하였는데, <天學問答>을 저술한 李獻慶의 죽음을 맞아 1791년에 지은 애도하는 시를 제외한 5편 가운데 2편은 1784년 겨울에 지은 것이었고, 3편은 1785년에 지은 것이었다. 이로써 보아 안정복이 소회를 읊은 시에서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린 동향을 1784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1785년에 집중적으로 읊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사우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와 같은 동향을 살펴보면 (<표 1> 참조), 모두 15통의 편지에서 언급하였는데, 그 가운데 4통은 1784년 겨울에, 4통은 1785년에,19) 2통은 1786년에, 1통은 1787년에, 1통은 1788년에, 1통은 1789년에, 1통은 1790년에 작성한 것이었고, 1통은 작성 연도가 미상이다. 이로써 보아 안정복이 사우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소회를 읊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린 동향을 1784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1785년에 집중적으로 거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위해 지은 묘지명에서 그와 같은 동향을 살펴보면(<표 1> 참조), 모두 2편의 묘지명에서 언급하였다. 즉, 요절한 그의 제자들인 權진과 權?의 묘지명에서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리는 시기를 모두 1785년으로 언급하였다.

 

이상에서 안정복의 여러 글을 통해서 알아본 바와 같이,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재기 있는 젊은이들이 천주교에 관한 설을 제창한 시기를 1783년과 1784년 어름으로 보았고, 또한 그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리는 동향을 1784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1785년에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바로 이러한 사실과 그의 제자인 黃德吉이 <순암선생 행장>에서 “서양의 서적이 연경으로부터 우리나라로 마구 들어와 正道를 해칠 조짐이 크게 있자 선생이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지어 본말을 궁구하고 시비를 판별하여 분명하게 이를 막았다”20)라고 밝힌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안정복이 <천학혹문>을 저술한 시기는 1785년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남한조가 <안순암천학혹문변의>에서 언급한 임인(1782) · 계묘(1783)년간은 안정복이 천주교에 관한 글을 써 놓은 시기가 아니라 남한조가 과거시험 때문에 순암 안 선생 문하를 왕래하기 시작한 시기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말해서 “임인(1782) · 계묘(1783)년간에 내가 과거시험 때문에 순암 안 선생 문하를 왕래하였다”라고 번역한 부분은 “임인(1782) · 계묘(1783)년간부터 내가 과거시험 때문에 순암 안 선생 문하를 왕래하였다”라고 풀이하여 안정복이 천학 비판에 관한 글을 써놓고 남한조에게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한 시기와 구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안정복이 천주교에 관한 최초의 저술인 <천학설문>을 지은 시기는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리기 시작한 1784년 겨울 중에서도 11월 14일 이전의 초겨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안정복이 <천학설문>을 저술한 뒤 곧 다시 이를 <천학고>와 <천학문답>으로 개편하여 저술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1784년 겨울부터 대거 천주교에 휩쓸리기 시작하여 1785년에 이르러 그러한 동향이 더욱 심화되어 갔는데, <천학설문>의 내용은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여 그러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안정복은 <천학설문>을 마무리하면서 “이 밖에 분별할 수 있는 것이 많으나 대략 큰 줄거리만 거론하였다”라고 밝혔듯이 그 내용이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소장학자들이 갈수록 더욱 천주교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서 이를 막기 위해 보다 상세하고 체계적인 <천학고>와 <천학문답>으로 개편하여 저술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면 안정복은 <천학설문>을 언제부터 <천학고>와 <천학문답>으로 개편하여 저술하기 시작하였고, 이 두 글을 완성한 시기는 정확히 언제였을까? 우선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을 시작한 시기는,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1784년 겨울에 안정복이 다시 상고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재남, 이재적 형제에게 《칠극》을 빌려 달라고 부탁한 점과 긴급하게 상고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유옥경에게 빌려주었던 《기인십편》과 《영언여작》을 돌려 달라고 했던 점이나 柳厚祚가 1787년 4월 29일에 안정복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면서 “甲辰年(1784)에 이르러 서양 서적이 한번 나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는 폐단이 일어나자 <천학고>와 <천학혹문>을 지어 근원을 따지고 시비를 바로잡아 깨끗이 물리쳤습니다”21)라고 언급한 점으로 보아 <천학설문>을 저술한 직후인 1784년 겨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음으로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을 완료한 정확한 시기는 자료 간에 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즉,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에는 그 저술 시기가 모두 1785년 3월로 기록되어 있고, 《순암집》의 <순암선생연보>에도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 시기가 모두 1785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순암집》 권17의 <천학고>에는 1785년으로 되어 있고 <천학문답>에는 1785년 嘉慶日, 곧 12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안정복의 친필본으로 생각되는데, 곳곳에 수정 보완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저술은 초고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안정복이 <천학혹문>을 저술한 뒤 남한조에게 그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뒤에 <천학혹문>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 및 《순암집》의 <순암선생연보>에 표기되어 있는 1785년 3월은 두 저술의 초고가 완성된 시기를 가리키고, 《순암집》 권17의 <천학문답>에 표기되어 있는 1785년 12월은 초고본의 수정본이 완성된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부부고》와 《순암집》에 들어 있는 두 글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순암집》 권17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에는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곳이 여러 곳 있다(뒤에 수록한 자료 참조). 이러한 사실은 《부부고》 13책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1785년 3월 저술된 초고본이고, 《순암집》 권17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은 같은 해 12월에 수정 보완한 수정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초고본과 수정본은, 안정복이 1789년에 이헌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천학혹문>의 초본과 정본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이 1785년 12월에 수정 보완한 수정본인 《순암집》 권17에 실려 있는 <천학문답>의 본래 제목은 <천학혹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정복이 1787년 4월 10일 이천섭에게 보낸 편지에 <천학혹문>으로 표기되어 있고,22) 1790년에 안정복이 신치봉을 통해 남한조에게 보낼 때에도 그 제목이 <천학혹문>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23) 그런데 남한조가 안정복이 보내준 <천학혹문>을 보고 지은 <안순암천학혹문변의>의 첫머리에서 “지금 이 서학은 곧 사악한 마귀의 이단 가운데 심한 것으로 막아 물리쳐야 하는데, 오히려 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혹문으로 편명을 하게 되면 마치 진흙에 물기를 띠게 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니 고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여, 그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나타냈다.24) 바로 이러한 남한조의 지적에 따라 <천학혹문>의 제목은 뒤에 <천학문답>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25)

 

그러면 <천학혹문>의 제목을 <천학문답>으로 바꾼 시기는 언제였을까? 《정조실록》 15년(1791) 11월 3일 기사와 《순조실록》 1년(1801) 4월 29일 기사에 <천학문답>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91년 11월 3일 이전에 <천학문답>으로 그 제목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한조가 신치봉을 통해 <천학혹문>을 전해 받은 때가 1790년이고, 안정복이 세상을 떠난 때가 1791년 7월 20일이므로 그 제목이 <천학문답>으로 바뀐 시기는 1790년에서 1791년 7월 20일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785년 3월에 저술한 <천학혹문>의 내용을 1785년 12월에 보완하여 수정한 뒤 1790년에서 1791년 7월 20일 사이에 그 제목을 <천학문답>으로 바꾼 것이 《순암집》 권17의 <천학문답>이라는 것이다.

 

 

4. <天學設問>과 <天學考> · <天學問答>의 저술 대상과 그 영향

 

그러면 안정복은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문답>을 누구를 대상으로 저술하였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 것은 안정복이 <천학설문>의 頭註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沈士潤에게 주었다. 심사윤이 전에 질문했기 때문에 이것을 써서 답변하였다.26)

 

위의 내용으로 보아 <천학설문>은 심사윤이 천주교에 대해 물어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써 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심사윤은 李基慶의 외사촌 형인 沈?로, 李承薰 등과 학문적 교류를 하였으나 정통 유학을 따르는 온건한 사람이었다.27) 이승훈은 1801년 심문을 받을 때 1785년에 자신이 배교한 뒤에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진술하면서 이를 증명하고자 이기경의 외사촌이자 正學을 한 사람인 심유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은 사실을 증거로 내세웠다.28) 이로써 보아 <천학설문>은 이미 천주교를 수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은 온건한 소장학자인 심유의 질문을 받고 그가 천주교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자 저술하여 준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정복의 <천학설문>은 그의 제자인 권진도 등사해 갔다. 이와 관련해서는 안정복이 1784년 12월 14일에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참고가 된다.

 

<천학설문>을 베껴 보내고 싶었으나 베껴 쓰기가 너무 힘들어 보내지 못하네. 于四가 등사해 갔으니, 어쩌면 볼 수도 있을 것일세.29)

 

위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권철신에게 <천학설문>을 베껴 보내고 싶었으나 필사하기가 너무 힘들어 보내지 못한 사실과 당시로부터 며칠 전에 于四가 <천학설문>을 등사해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천학설문>을 필사해 간 우사는 1785년 12월 8일에 요절한 안정복의 제자 권진이다.30) 이 권진에 대해서는 안정복이 그의 묘지명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참고가 된다.

 

수년 이래 이른바 天學이라는 것이 나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파도에 쓸리듯이 그것을 따르자 君이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으나 마침내 그 그릇됨을 깨닫고 그의 벗 金源星 군과 바른 논의를 힘껏 견지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일찍이 오염된 적이 없었다. 이는 모두 군의 큰 절개이다.31)

 

위의 내용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권진은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어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에 휩쓸릴 때 그 그름을 깨닫고 벗 김원성과 함께 정론을 주장하여 조금도 꺾이거나 굽히지 않았던 인물이다. 아울러 권진과 관련해서는 안정복이 1784년 12월 14일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참고가 된다.

 

일전에 于四가 와서 유숙하면서 얘기가 천주학에 미치자 그가 말하기를, “서양에서도 이 학을 금하려고 죽인 사람이 천 명, 만 명이 넘었으나 끝내 금하지를 못하였고, 일본에서도 이 학을 금하려고 수만 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라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당론이 분열되어 피차 틈만 노리면서 상대편의 좋은 점은 가리고 나쁜 점만 들추어내는 판국에, 가령 누가 이를 빌미로 상대편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이라도 세우는 날에는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는 욕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 가서 천주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세화가 닥칠 염려가 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네.32)

 

즉, 권진은 스승인 안정복과 더불어 당론이 분열되어 상대편을 일망타진할 틈만 노리는 당시 상황에서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대거 천주교에 휩쓸리는 사태가 장차 빌미를 제공하여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는 욕을 당하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이렇게 볼 때 권진이 <천학설문>을 등사해 간 것은 스승인 안정복을 도와 천주교가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지침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천학혹문>의 전해짐과 관련해서는 안정복이 1789년에 吳錫履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참고가 된다.

 

美台는 누차 풍상을 겪었으니만큼 으레 두려워 움츠러들 것이므로 이에 충효대절로써 서로 권면하고자 합니다만, 상투적인 편지글이나 쓰게 되니 인사가 끊긴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에 굽히지 않았다고 하니, 이 늙은이가 그처럼 굳건합니다. 다만 나처럼 지옥의 고초를 면치 못할까 염려되니, 혹시 그를 만나면 이 뜻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천주교의 학문에 관한 문답을 그대의 종제에게 보인 것도 나의 의도였습니다. 공께서 이미 한 통을 보셨는데 어찌하여 가부의 말씀이 없으십니까? 답답합니다.33)

 

위의 내용으로 보아 <천학혹문>은 오석리와 그의 從弟에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천학혹문>은 1789년에 近畿 南人인 참판 李獻慶에게도 전해졌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천학설문>은 성호학파 가운데 아직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은 온건한 소장학자인 심유의 질문을 받고 그가 천주교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자 저술하여 준 것이었다. 또한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베껴 보내고자 했으나 필사하기가 힘들어 보내지 못한 <천학설문>을 그의 제자인 권진이 등사해 갔는데, 스승을 도와 천주교가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지침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권진의 경우로 보아 전겸익이 지은 《경교고》의 일부를 적어서 안정복에게 보내 천주교의 전파를 막고자 하는 스승을 도우려 했던 유옥경이나,34)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어 세상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에 휩쓸릴 때 권진과 더불어 그 그름을 깨닫고 함께 정론을 주장하였던 김원성이나, 1785년 2월에 병이 심하게 들어 죽게 된 상황에서도 사람을 그르치는 서학을 막고 儒道를 부식하는 데 함께 힘쓰고자 했던 권호와 그의 벗들 黃德吉과 趙愼行이나,35) 1788년 6월에 徐祖修가 이익이 서학을 하였다고 배척한 일을 스승인 안정복에게 편지로 알린 黃德壹36) 등도 물론 <천학설문>을 등사하여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침서로 활용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천학혹문>이 오석리와 그의 종제, 이헌경 등에게 전해졌던 사실로 보아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혹문>은 성호학파 이외의 기호남인들도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침서로 활용하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편 안정복의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혹문>은 그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인물들을 통하여 영남 지역에도 전해졌다.37) 우선 <천학고>와 <천학혹문>을 영남 지역에 전한 인물로는 李象靖의 제자인 남한조가 주목된다. 앞에서 이미 알아보았듯이, 남한조는 1782 · 1783년부터 과거시험 때문에 안정복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인물이다. 안정복은 천주교를 비판한 글을 지어 놓고 자신의 집을 방문한 남한조에게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남한조는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 뒤 1790년에 안정복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영남 사람 신치봉에게 <천학혹문>을 주며 남한조에게 전해 주게 하였다. 마침내 신치봉을 통해 <천학혹문>을 전해 받은 남한조는 그 글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저술하였다.

 

또한 안정복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鄭宗魯와 李天燮도 주목된다. 이상정의 제자인 정종로는 1790년에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천주교가 이미 호서 지역까지 전파된 상황을 언급하면서 그 피해를 우려하였고,38) 또한 남한조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가 안정복의 <천학혹문>을 보고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지은 사실을 언급하였다.39) 그리고 안정복이 1787년 4월 10일 이천섭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 보면, “금세에 우리 유도가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異端에 물들고 있는데 나의 손으로는 막을 수 없으므로 오직 山南의 여러 벗들이 더욱 大業에 힘써 우리 유도를 다행스럽게 해 주는 것이 나의 생사 간에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고 나서 <천학고>와 <천학혹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40)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정종로와 이천섭도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접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柳長源, 柳健休, 柳致明도 주목된다. 이상정의 제자인 유장원은 일찍이 안정복의 <천학혹문>을 보고 그 미진한 점에 대하여 논평한 적이 있었고,41) 또한 1791년에 남한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천학혹문>의 제목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異學을 辨破하려고 한다면 ‘변파’ 두 자로 제목을 달아야 한다고 하였다.42) 또한 유장원의 제자인 유건휴는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한 글이 담겨 있는 《異學集辨》을 저술하였다.43) 그리고 이상정의 제자들인 남한조, 정종로, 柳範休 등의 문하에서 수학한 유치명도 <損齋先生遺事摠敍>에서 남한조가 일찍이 안정복의 <천학혹문>을 보고 <천학혹문변이>를 저술한 사실을 소개하였다.4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은 그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남한조, 신치봉, 정종로, 이천섭 등에 의해 영남 지역에 전해졌다. 이들 대부분은 이상정의 제자들이었는데, 특히 남한조는 <천학혹문>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유장원은 <천학혹문>의 미진한 점에 대하여 논평하였으며, 유장원의 제자인 유건휴는 천주교를 배척한 글이 담겨 있는 《이학집변》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이 영남 지역에까지 전해져 영남의 유학자들이 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正學인 性理學을 수호하는 闢衛思想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천학설문>도 영남 지역에 전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이상정의 제자인 申體仁이 1791년에 안정복의 <천학설문> 10조, 이헌경의 <천학문답>45) 1편, 趙述道의 <雲橋問答>46) 1통을 보고서 천주교를 배척한 글인 <天學宗旨圖辨>을 저술한 것47)을 가지고 살필 수 있다. 여기서 신체인이 <천학종지도변>을 저술하면서 보았다는 <천학설문>은 안정복이 1784년 겨울에 저술한 <천학설문>을 가리킨다. 그러한 사실은 신체인이 <천학종지도변>에서 <천학설문> 10조의 내용으로 인용하고 있는 “성인이 가르친 바는 모두 천주의 가르침이다”(聖人所訓 皆天主之敎)라고 한 대목이나 “서양 선교사의 학문은 말마다 모두 실제적이고 일마다 모두 실제적이어서 노불(老佛)의 공적(空寂)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지만, 그 언어나 모양이나 거조는 끝내 이단이다”(西士之學 言言皆實 事事皆實 比諸老佛空寂有間 而特其言語貌樣擧措 終是異端)라고 한 대목이 모두 안정복이 1784년 겨울에 저술한 <천학설문>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천학고>와 <천학문답>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저술한 <천학설문>도 영남에 전해져 영남의 유학자들이 사학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는 벽위사상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5. 맺음말

 

이제까지 기왕의 연구에서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안정복의 <천학설문>을 이용하여 <천학설문>과 <천학고> · <천학문답>(또는 <천학혹문>)에 관한 문제를 여러모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글을 통하여 알아본 몇 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천학설문>은 <천학고> · <천학문답>과 구별되는 저술로, 내용이 소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며, 천주교가 중국과 조선에 들어온 역사를 밝힌 <천학고>와 천주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천학문답>의 내용이 함께 들어있다. 그러므로 <천학설문>은 <천학고>와 <천학혹문>으로 분리해서 저술하기 이전 단계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정복은 <천학설문>을 1784년 겨울 동안, 즉 11월 14일 이전에 저술하였다. 그러나 1784년 겨울부터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천주교에 휩쓸리는 동향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자 이를 막기 위하여 <천학설문>을 보다 체계적인 <천학고>와 <천학혹문>으로 개편하여 1785년 3월에 그 초고본을 완성하고 그해 12월에 수정 보완한 수정본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남한조의 지적에 따라 <천학혹문>의 제목을 1791년 죽기 직전에 <천학문답>으로 바꾸었다.

 

<천학설문>은 안정복이 아직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은 온건한 소장학자인 심유의 질문을 받고 그가 천주교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자 저술하여 준 것이다. 또한 <천학설문>은 안정복의 제자인 권진도 등사해 갔는데, 스승을 도와 천주교가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지침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권진의 경우로 보아 <천학설문>이나 <천학고>와 <천학혹문>(또는 <천학문답>)은 성호학파의 온건한 소장학자들에게 널리 전해져 천주교를 배척하는 지침서로 활용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편 <천학설문>이나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주로 안정복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남한조, 신치봉, 정종로, 이천섭 등에 의해 영남 지역에도 전해졌다. 특히 이상정의 제자인 남한조는 <천학혹문>을 보고 <안순암천학혹문변의>를 저술하였고, 역시 이상정의 제자인 신체인은 안정복의 <천학설문>, 이헌경의 <천학문답>, 조술도의 <운교문답>을 보고서 <천학종지도변>을 저술하였으며, 유장원의 제자인 유건휴는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혹문>을 보고서 《이학집변》을 저술하였다. 이로써 보아 안정복의 <천학설문>이나 <천학고>와 <천학혹문>은 영남의 유학자들이 사학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는 벽위사상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1. 기초자료

《高宗實錄》

《純祖實錄》

《正祖實錄》

南漢朝, 《損齋集》.

安鼎福, 《覆?稿》(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 《順菴集》, 여강출판사, 1984.

柳長源, 《東巖集》.

柳健休, 《異學集辨》.

柳致明, 《定齋集》.

李晩采 편, 《闢衛編》.

李獻慶, 《艮翁集》.

鄭宗魯, 《立齋集》.

趙述道, 《晩谷集》.

《推案及鞫案》 25권, 아세아문화사, 1983.

黃德吉, 《下廬集》.

 

2. 참고 논저

姜世求, <벽위론의 전개 - 서학인식과 천주교 배척>,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혜안, 1996.

―――, 《순암 안정복의 사상과 학문세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2.

김현영, <순암 麗澤齋 장서의 형성과 散逸>, 2012년 10월 8일 국립중앙도서관 ‘순암 안정복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발표 자료집’.

서종태, <順菴 文集의 정본화를 위한 일 방안>, 《성호학보》 10, 2011.

李元淳, <順菴 安鼎福의 天學論攷>, 《李海南博士華甲紀念私學論叢》, 일조각, 1970.

―――, 《朝鮮西學史硏究》, 일지사, 1986.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함영대, <순암 안정복의 西學認識과 《天學問答》>, 《성호학보》 7, 2010.

 

----------------------------------------

1) 강세구,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혜안, 1996 ; - -, 《순암 안정복의 사상과 학문세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2, 294~300쪽 ; 차기진,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51~264쪽 ; 함영대, <순암 안정복의 西學認識과 《天學問答》>, 《성호학보》 7, 2010, 108~113쪽.

 

2) 이에 대한 연구로는 서종태, <順菴 文集의 정본화를 위한 일 방안>, 《성호학보》 10, 2011.

3) 강세구, 앞의 책, 294~300쪽.

4) 차기진, 앞의 책, 252~257쪽 ; 함영대, 앞의 논문, 110~112쪽.

5) 강세구, 앞의 책, 298~300쪽.

 

6) 壬寅癸卯年間 余因科行往來順菴安丈門下 安丈語及邪學之懷 襄聰明才辨之士 尤多沈沈於其中 將必禍人家國而後 已爲之深憂永歎 因曰 我有闢邪一文字 子其爲我訂正之 余謝不敢當 其後因人投示一小冊 乃所謂天學或問也(<安順菴天學或問辨疑>, 《損齋集》 권12).

 

7) 강세구, 앞의 책, 298~299쪽.

8) <與權旣明書 1784>, 《順菴集》 권6.

9) 강세구, 앞의 책, 299~300쪽.

10) 차기진, 앞의 책, 251~252쪽.

11) <與權旣明書 1784>, 《順菴集》 권6 ; <與旣明第三書兼呈士興 1784. 12. 14>, 《覆?稿》 10책.

 

12) 申友致鳳 歸自那邊 傳示天學或問一冊 議論之正大 旨意之懇惻 足以救拔頹俗 而其間有些疑 稟錄呈小帙 若有可採 更加修潤 豈非幸耶(<與順菴安丈 1790>, 《損齋先生文集》 권2). 이 자료는 강세구 선생이 찾아서 준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드린다.

 

13) 弟果有斥此學文字 徒取人言而無其效 旋自悔恨 後來正本嶺儒借去 初本在此 故玆以奉呈 可知其?矣(<答艮翁李參判夢瑞獻慶書 1789>, 《順菴集》 권5).

 

14) 七克一書 昔年先生投示 敬玩納上 其中寔多刺骨之語 究其脈絡 決是異端 今欲更考 幸更俯借 旋當奉完 勿泛幸甚 今聞吾?中 年少有才足者 皆爲洋學 其說狼藉不可掩 哀必聞之矣 哀見復如是耶 此爲用夏變夷之機 其不幸大矣(<與李載南載績書>, 《覆?稿》 10책).

 

15) 안정복의 1785년 장서 목록 속에 들어 있는 천주교 서적은 《天主實義》, 《畸人十篇》 2, 《靈言?勺》 1, 《辨學遺牘》 1, 《職方外記》 2로 밝혀져 있다(김현영, <순암 麗澤齋 장서의 형성과 散逸>, 2012년 10월 8일 국립중앙도서관 ‘순암 안정복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발표 자료집’, 52쪽). 이로써 보아도 안정복이 당시 《七克》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 近來洋學大熾 知舊中 以才識自許者 皆入其中 公必聞之矣 此學果何如耶 以愚觀之 專是筑乾之緖餘 稍變其說耳…畸人靈言二書 此便付送如何 此有緊考故耳 如未盡閱 更此爲好(<與柳玉卿書>, 《覆?稿》 10책).

 

17) 안정복의 1785년 장서 목록 속에 들어 있는 천주교 서적들을 보면, 《畸人十篇》과 《靈言?勺》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의 각주 14) 참조.

 

18) 年來有士人隨使行赴燕京 得其書而來 自癸卯甲辰年間 少輩之有才氣者 倡爲天學之說 有若上帝親降而詔使者然(<天學考>, 《順菴集》 권17).

 

19) <與李載南載績書>와 <與柳玉卿書>에는 연도 표시가 없지만, 1784년 겨울에 작성한 편지들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84년 겨울에 쓴 것으로 이해하였다.

 

20) <順菴先生行狀>, 《下廬集》 권16.

21) 《高宗實錄》 4년 4월 29일.

22) <答李仲章 1787. 4. 10>, 《覆?稿》 13책.

23) <與順菴安丈 1790>, 《損齋集》 권2.

24) 강세구, 앞의 책, 300쪽.

25) 강세구도 수정 보완된 것 중에서 <천학문답>을 최종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강세구, 앞의 책, 300쪽).

26) 贈沈士潤 沈士潤前有所問 故書此答之(<天學設問>, 《覆?稿》 10책).

27) 차기진, 앞의 책, 256쪽 각주 79).

28) 《推案及鞫案》 25권(아세아문화사, 1983), 1801년(순조 1) 2월 10일 이승훈 심문기록.

 

29) 天學設問 欲爲錄送 而書出甚難 不得送呈 于四謄去 則似有可見之路(<與權旣明書 1784>, 《順菴集》 권6 ; <與旣明第三書兼呈士興 1784. 12. 14>, 《부부고》 10책).

 

30) <權 墓誌銘 幷書 1786>, 《順菴集》 권23.

 

31) 數年以來 有所謂天學者出 而世多波靡而從之 君始疑而終覺其非 與其友金君源星 力持正論 不少撓屈 未嘗有所染汚也 此皆君之大節也(<權 墓誌銘 幷書 1786>, 《順菴集》 권23).

 

32) 日前于四來宿 語到此學 乃曰 西國嘗禁此學 誅殺不?千萬人 而終不能禁 日本亦禁此學 誅殺亦數萬人云 安知我國亦無此事乎 ?此黨議分裂 彼此伺? 掩善揚惡之時 設有人爲一網打盡之計 而受敗身汚名之辱 則到此之時 天主其能救之乎 竊恐天堂之樂未及享 而世禍來逼矣 可不愼哉 可不懼哉(<與權旣明書 1784>, 《順菴集》 권6)

 

33) 美台累經風霜 畏約例也 欲以是相勉以忠孝大節 而書尺邊幅人事絶已久矣 又能不挫於新學云 此老之??如此 但恐與僕未免地獄之苦 如或相見 幸傳此意也 天學問答之傳示令從 亦余意也 公旣見一通 則何無可否耶 是?(<答吳聖道錫履書>, 《順菴集》 권9).

 

34) <與權旣明書 甲辰(1784)>, 《順菴集》 권6.

35) <權?墓誌銘>, 《順菴集》 권23.

36) <答黃莘?書>, 《順菴集》 권8 ; <順菴先生年譜>, 《順菴集》.

37) 이에 대해서는 차기진, 앞의 책, 261~263쪽과 함영대, 앞의 논문, 123~263쪽에 이미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38) <與安順菴>, 《立齋集》 권9.

39) <損齋南公行狀>, 《立齋集》 권45.

40) <答李仲章>, 《覆?稿》 13책 ; <答李仲章天燮書 1787. 3. 10>, 《順菴集》 권8.

41) <附錄 行狀>, 《東巖集》 권14.

42) <答南宗伯 1791>, 《東巖集》 권5.

43) 함영대, 앞의 논문, 123~127쪽.

44) <損齋先生遺事摠敍>, 《定齋集》 권36.

45) 《艮翁集》 권26에 수록되어 있다.

46) 《晩谷集》 권8에 수록되어 있다.

47) <天學宗旨圖辨>, 《晦屛集》 권6.

 

[교회사 연구 제41집, 2013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서종태(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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