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신약] 거룩한 독서: 새로운 눈, 새로운 믿음(태생 맹인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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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5 ㅣ No.3650

[이달의 거룩한 독서] 새로운 눈, 새로운 믿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 그들이 “ …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 “예수님이라는 분이 …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 몇몇 바리사이가 …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1-41).

 

 

읽기 Lectio - 본문을 자세히 읽고 살핀다

 

본문에서 눈뜬 맹인이란 죄의 상태(41절)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태생 맹인의 치유 이야기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죄가 있고 없음의 기준이 믿음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어떤 믿음인가? 치유된 태생 맹인의 변화에 주목해 본다.

 

먼저 그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라는 질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치유 과정)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 있소?”라는 질문엔 ‘모르겠다’고 대답하며 예수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10-12절).

 

그다음,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죄인이라 여기는 바리사이들의 물음에 그는 유다인으로서 알고 있는 최고의 호칭(예언자)으로 예수님을 말하지만, 아직도 그분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16-17절).

 

이후 유다인들은 부모를 불러 그가 태생 맹인인지 확인하고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회유한다. 그 과정에서 치유된 맹인은 점점 ‘그분의 제자’로 변화되어 가고 마침내 유다인들 앞에 놀라운 고백을 한다(30-33절).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치유된 태생 맹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일”(3절)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반대자들에게 신문받는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유다인들에게서 내쫓긴 그는 예수님과 다시 ‘직접’ 만난다. 믿음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에 그는 ‘스스로’ 믿음을 갈구하는 자가 되고, 마침내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다. 처음엔 치유된 사실만을 인정하던 그가 이제 치유하신 분을 믿게 된 것이다. ‘새로운 믿음’을갖게 된 것이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결정짓는 ‘새로운 믿음’이란 자신에게 벌어진 일(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반대자들은 일어난 사건에서조차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눈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눈뜬 맹인’이며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하신다.

 

 

묵상하기 Meditatio - 본문의 의미를 우리 삶에서 바라본다

 

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더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의 길에서 더는 아무런 진리도 발견하지 못할 때,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또 그래서 아무에게도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때 말이다.

 

자기 자신의 탓이든, 타인의 탓이든, 세상의 탓이든 그 ‘캄캄함’은 내 전 존재를 마비시키고 결국은 ‘죄의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 버린다. 더 큰 문제는 내 영혼이 ‘캄캄하여’ 더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지금 무언가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눈뜬 맹인’의 상태이다.

 

눈뜬 맹인이요 죄인이라는(41절) 예수님의 선언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새로운 봄(見)’과 ‘새로운 믿음’에 대한 초대로 들린다. 내 생각과 욕심과 교만은 ‘하느님의 일’은커녕 구세주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나아가 잘못된 믿음과 왜곡된 하느님 공경은 바리사이들처럼 회유와 욕설과 배척의 ‘악한 열매’만 맺게 된다(24-28절).

 

나와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과 사건을 통해(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리라. 그분을 ‘직접’ 만나고 그분께 온전히 믿음을 고백하기까지 믿음을 갈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리라. ‘제가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36절)

 

 

기도하기 Oratio - 묵상한 것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말씀을 건넨다

 

주님,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죄와 고통과 죽음에 허덕이는 인생 광야를 살아가는 저희가 ‘당신의 일’을 제대로 알아보고 당신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눈과 귀와 마음(영)을 열어 주소서. 아멘.

 

 

되새기고 실천하기 Ruminatio et Actio - 말씀을 되새기며 삶과 연결시킨다

 

1. 나의 인생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일’은 무엇인지, 그 일을 통해 나는 어떤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는지 되새겨 봅시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되새겨 봅시다.

 

2. 눈뜬 맹인이 되지 않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것을 실천해 봅시다.

 

* 허광철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현재 4대리구 사목국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7년 3월호, 허광철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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