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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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43: 참된 고독과 침묵의 영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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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03 ㅣ No.1425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3) 참된 고독과 침묵의 영적인 의미


머튼, 끊임없이 완벽한 고독을 갈망하다

 

 

“사람들이 기계적 힘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비인격적인 무리와 함께할 때 그들의 참된 인간성, 성실성, 사랑할 능력, 결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회가 내적인 고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때 그 사회는 더 이상 사랑으로 결합하지 못한다.”

 

토마스 머튼은 저서 「고독 속의 명상」에서 우리 사회가 사랑으로 결합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내적 고독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외로운 사람, 고독한 사람이 참으로 많다. 홀로 있어 외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 있어도 소외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부유한 이들 곁에서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지만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기에 외롭지 않은 사람도 있다.

 

머튼에 따르면, 이 모든 외로움과 외적 고독, 소외감은 우리가 진정 내적 고독 속에서 홀로 있는 법과 그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머튼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과 글로써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는 머튼이 말하는 참된 고독과 침묵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느님과의 더 깊은 영적 유대를 위해

 

고독(孤獨)이란 무엇인가? 문자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을 뜻하는데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외롭다”, “고독하다”라고 할 때, 그 이면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거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사랑받고 싶다, 관심받고 싶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반면 머튼이 말하는 고독은 더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며 영적이다. 하느님과의 더 깊은 영적 유대를 위해 그분 앞에 홀로 머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그래서 머튼에게 있어서의 고독은 ‘기도’이기도 하다. 이 고독을 위해 실제로 일상과 사람들로부터 물러나는 외적인 고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번잡한 생각과 원의로부터 물러나 하느님께 집중하는 내적인 고독도 필요하다.

 

초기 머튼(1940년대~1950년대 중반)은 외적으로 고독한 장소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봉쇄 구역에서 생활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도승이 된 것은 이곳이 고독을 위한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공동으로 생활하는 (물론 엄격한 침묵을 지키지만) 트라피스트 수도생활 속에서 그는 만족을 찾지 못했다.

 

끊임없이 홀로 있고자 하는 갈망은 급기야 더 완벽한 고독의 장소를 찾기 위해 홀로 은수생활을 하는 까말돌리회나 카르투시오회로 수도회를 옮길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노력은 장상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이를 통해 그는 고독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즉, 완벽한 장소로서의 고독을 찾기를 그만두고 더 내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완벽한 고독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52년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단순히 나 자신의 욕망과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문제라면 나는 십 분도 못돼서 당장 까말돌리회를 향해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나를 겟세마니에 잡아두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무엇인가 하느님 지혜의 신비라 결국 겟세마니가 내가 있을 곳임을 가르쳐 주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 첫 은둔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수도승의 자세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의 완벽한 장소로서의 고독을 향한 갈망은 완벽한 고독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졌으며, 1965년부터는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 최초의 은둔자가 됨으로써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은둔처에서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고독과 만나면서 비록 완전한 고독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으며, 희망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머튼에게 있어서의 고독은 ‘자기-비움’을 통한 ‘자기-초월’의 길이었다. 결국, 나의 자아가 온전히 비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 나를 넘어 초월된 자아에 도달하기 위해 머튼은 진정 하느님 앞에 홀로 머무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독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위한 도구이며 관상의 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3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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