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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위대한 창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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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13 ㅣ No.689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위대한 창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시스티나 소성당.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최소 두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전 세계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시스티나 소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곳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모여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이기도 하니 바티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아흔 살 가까이 장수했던 미켈란젤로(1475~1564)의 생전에 8명의 교황이 바뀌었는데 이 분들은 하나같이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주문하기 위해 교황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주문한 첫 교황은 율리오 2세로 베드로 성전을 재건축한 바로 그 교황이다. 두 사람은 성격이 강하고 고집이 세기로는 막상막하였다. 율리오 2세가 길이 40m가 넘는 방대한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라고 명령하자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절대군주에 가까웠던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대놓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유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황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미켈란젤로는 14m가 넘는 높은 천장에 조수 한 명만 데리고 올라가 무려 4년간 홀로 고독한 작업을 하여 마침내 완성했다.

 

“물감은 내 얼굴에 흘러서 모자이크를 만들었고, 내 가죽은 앞에서 당기어 마치 시리아의 활처럼 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고통을 호소했다. 작업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가죽 부츠가 살에 붙어 칼로 도려내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바친 순교였다. 그로부터 30년 후 이번에는 예순살이 넘은 노구로 미켈란젤로는 같은 장소에 또 다른 걸작 <최후의 심판>을 그림으로써 인류의 시작과 종말을 완성했으니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이런 대작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소성당에서 작업을 한 시기는 가톨릭교회가 큰 위기를 맞은 시기와 일치한다. 천장화가 완성된 5년 후인 1518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개신교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완성된 4년 후 가톨릭교회는 트렌토 공의회(1545~1563)를 개최하여 프로테스탄트의 반종교개혁에 맞서는 가톨릭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같은 위기의 시기에 하느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가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교황청의 심장부인 시스티나 소성당에 그리게 함으로써 가톨릭교회가 인류의 시작과 끝의 중심에 있음을 분명히 해주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몇 년 전 나는 서로 다른 기관으로부터 1년을 사이에 두고 미켈란젤로에 관한 논문과 책을 집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두 기관 모두 연구비를 지불하고 책도 출판해주겠다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 무렵 나는 밀라노에서 중요한 전시를 개최한 후 전시가 끝날 때까지 남은 기간 이탈리아 몇몇 도시들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특별히 정해진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발길 닿는 곳을 순례할 생각이었는데 나의 발길은 생각지 않았던 오르비에토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나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나오게 된 비밀을 꿰뚫을 수 있었다. 예전에 그곳에 갔었을 때는 깨닫지 못한 것들이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있다. 피렌체에서 살았던 미켈란젤로는 로마를 드나들며 오르비에토에 들러 대성당의 미술품들을 여러 차례 꼼꼼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평범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역사상 단 한 명을 꼽으라면 꼽히는 위대한 미술가의 대명사다. 오르비에토 대성당 정면에는 구약성경 창세기를 주제로 한 부조들로 가득한데 바로 시스티나 천장화에 그려진 주제들이다. 이 성당 내부는 또한 당대 유명화가 루카 시뇨렐리가 그린 엄청난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형 벽화들로 가득하다. 과감한 색채와 누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바로 이들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탄생시켰다.

 

 

파괴를 통한 예술의 창조

 

시스티나 천장화는 길이 40m 폭 13m의 거대한 공간으로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7일간의 천지창조와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의 선조들을 그려놓았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르네상스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천장화에서는 르네상스 회화의 절대법칙이었던 원근법이 더 이상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았다.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나오기 전인 18세기 말까지 서양회화가 원근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시스티나 천장화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1508~1512, 프레스코,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바티칸.

 

 

또 하나는 색채 혁명이다. 시스티나 천장화는 90년대에 복원작업이 완성되기 전까지 수백년 동안 촛불의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색채를 알 수 없었다. 그을음을 벗겨내고 나니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니,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 강렬한 색으로 가득했다. 미켈란젤로에게 영감을 준 가장 결정적인 작품은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정면 벽화와 내부에 그려진 시뇨렐리의 그림이었다. 평범한 화가는 모방에 그치지만 천재는 모방하고 파괴하여 새것을 만들어낸다. 미켈란젤로가 바로 그랬다.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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