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

삼위일체 신비와 신앙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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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6-16 ㅣ No.2225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기획] 삼위일체 신비와 신앙인의 삶


우리를 위한 성삼위의 사랑 이해하고 신비로운 ‘사랑의 친교’ 참여 노력해야

 

 

우리가 가장 알아듣기 힘든 신비 가운데 하나가 삼위일체의 신비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말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현대교회는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 삶과 유리된 형이상학적인 사변이나 초월적 신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사랑 자체이시며,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하느님의 구세경륜을 표현하는 가르침으로 알아듣고,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를 알아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생각해 본다.

 

 

삼위일체 교리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3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세 하느님이 아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 위격들은 신성을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삼위는 서로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

 

그런데 이 위격들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4항) 

 

일반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적 존재는 서로 다른 역할과 활동을 통해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성부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견돼 계시와 구원 활동을 하시며, 성령은 우리 곁에 함께하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 나라로 이끄신다.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은 한 마디로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영원으로부터 “자유로이 당신 복된 생명의 영광을 나누어 주고자”(「가톨릭교회 교리서」 257항)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은 삼위일체의 사랑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고,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가톨릭교회 교리서」 258항)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가톨릭교회 교리서」 260항)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정하려는 역사상의 많은 시도들에 대항해 오랜 신학적 성찰을 통해 믿을 교리로 확립되고 선포됐다. 신학은 삼위일체에 대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을 지칭하는 ‘내재적 삼위일체’,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로 나눠 설명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존재하시는지에 대해 사변적으로 고찰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이 인류와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행업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한다.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가 아니라, 오히려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다. 

 

 

성경의 가르침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교리는 성경에서 출발한다.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업적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활동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 구약성경에서는 암묵적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구약성경은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지만, 하느님께 서로 구별되는 위격들이 있음을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다. 창세기(1,26)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했다. 다른 여러 곳에서는 말씀, 영, 지혜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반면 신약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다 명시적으로 계시한다. 예수 탄생 예고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라며 삼위의 신비를 표현한다. 예수 세례 장면에서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고 서술된다. 

 

수난 전 제자들에게 예수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라고 했으며, 부활 후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고 당부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삼위일체의 경배’(Adoration of the Trinity), 1511년작, 린다우어 제단화.

 

 

삼위일체, 사랑의 친교

 

현대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사변적 삼위일체론이 신자들에게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심을 키워주기보다는 거리감을 느끼도록 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칼 라너(Karl Rahner)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그 대표적인 신학자다. 라너는 인류와 만물의 구원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전달’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가 나누는 그러한 사랑의 친교에 우리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하시며 우리를 성삼위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초대한다.

 

서공석 신부(부산교구 원로사목자)는 2018년 5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에서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세 분의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삶을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에 협조해 하느님의 자녀 돼 신앙인으로 삽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6월 16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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