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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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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11 ㅣ No.1791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지난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로서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그들에 관한 자료를 함께 읽어보면서 ‘평신도 희년’을 맞아 역사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직암(稷菴) 권일신의 십자가(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 권일신은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의 교주(敎主)로 지목되었고, 홍낙안의 고발로 11월 28일(음 11월 3일)에 체포되었다.

 

 

세례명에 선교의 원의를 담다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년) 집안은 이벽 요한 세례자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었다. 이벽은 복음의 빠른 전파를 기대하며 학문과 명성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그가 적임자로 본 집안이 양근(楊根)에 살고 있던 권씨였다. 권씨 집안에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일신 이외에 철신(哲身), 제신(濟身), 득신(得身), 익신(翼身)이다. 그 집안은 고려 때부터 고위직에 있었고, 뛰어난 친척들 외에도 그들 곁에서 학문과 덕행을 배우러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이유로 이벽도 그들을 천주교의 뿌리와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784년 음력 9월, 말을 탄 이벽이 양근 고을 감산에 있는 권씨 집안에 들어섰다. 이벽의 기대에 가장 먼저 부응한 이는 일신이었다. 그는 ‘천주교를 놀라운 열심에다 견식에 근거한 열성을 근거하여 믿었다.’고 한다. 일신은 천주교의 진리를 확신하자마자 스스로 믿기 시작하였으며, 즉시로 집의 남녀 식구들을 가르쳤다. 친구와 친지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자 그들도 곧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의 명성과 학문과 행실의 권위가 이미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일신은 특히 선교에 열과 성을 바쳤으며, 이에 양근 고을은 조선 천주교의 요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음을 널리 선포하는 데 헌신하고 싶은 원의를 담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택했다. 이를 입증하듯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전주 출신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를 전함으로써 충청도와 전라도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도록 하였다. 1785년에는 명례방(현 명동)의 천주교 모임에 아들 상문과 함께 참석하였다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중인 출신 김범우만 형조에 투옥되고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 다수가 석방되자, 아들과 이윤하 · 이총억 · 정섭 등과 함께 형조 판서에게 나아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처벌해 달라고까지 하였다.

 

샤를르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이승훈이 임명한 사제들 이름이 나오는데, 그 처음이 권일신이다. 중국교회의 세 기둥(聖敎三柱石)으로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을 지목하듯, 조선교회의 지도층 3인방으로 이승훈, 이벽과 함께 권일신을 꼽는다. 그는 가성직 제도의 독성죄 문제를 문의할 때, 이승훈과 함께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밀사는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유일 바오로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교회의에서 출판한 『자료집』에는 교회 기록으로 다블뤼(Daveluy)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꽤 많은 분량의 자료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정부 기록으로 『정조실록』과 『순조실록』, 『승정원 일기』, 『일성록』과 개인 기록으로 『벽위편』과 『수기(隨記)』의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권일신이 형조에 들어와 함께 죄를 받기를 원한 것은 명백한 증거가 되는 일로서 그가 요학(妖學)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正學)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정조실록』)

 

“죄인 권일신이 소지를 올려 말하기를, 일전의 전술에서 이미 예수의 학문은 요사하고 부정하다는 것으로 공초를 바쳤으니 당연히 남김없이 환하게 아셨을 것입니다.”(『일성록』)

 

“성상(정조)의 하유를 받으니, ‘권일신이 영원히 사학을 끊고 기꺼이 정도로 향하였으므로 호서 지방으로 내려 보내 마음을 다해 그의 무리들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스스로 힘써 공을 세우는 방책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권일신이 우두머리인데 우두머리가 이와 같으니 추종자들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권일신의 「자명서」를 성상의 하교대로 이존창에게 보였더니 그가 더욱 깨닫는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박종악, 『수기』)

 

“권일신이 배소로 출발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진실로 감화되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매우 애석하다.”(이만채, 『벽위편』)

 

“그때 80세의 노모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바다 저편으로 유배가면 어머니와 헤어져 그 임종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배교에 대해서는 직접 말하지 않고 임금에 대한 극히 ‘작은 굴복’만을 권고하였다. 권일신은 이 생각에 절실히 감도되어 그 자신이 또는 어떤 사람들이 단언하는 것처럼 같이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대신하여 어떤 굴복의 표시를 했다.”(다블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다블뤼 주교는 이 대목 바로 아래 “우리는 진실이 우리에게 쓰지 않을 수 없게 한 이 페이지를 우리 역사에서 찢어버리고 싶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부모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고려해야 하며,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애쓴 그간의 행적이 하느님 앞에서 은총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구전에는, 애초에 권일신은 “서양인의 교리는 다르다. 공맹의 교리는 나쁘고 올바르지 않다(西洋之學異 孔孟之學 娛誕不正).”라고 썼으나, 단 한 글자 ‘어(於)’가 추가되어 왕에게 올려졌다. 그 바람에 “서양인의 교리는 공맹의 교리와 완전히 달라서 나쁘고 올바르지 않다(西洋之學 異[於]孔孟之學 娛誕不正).”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세 부류의 기록들 모두 권일신이 천주교를 믿고 앞서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초점은 그의 마지막이 어땠느냐는 것이다. 회오했다는 쪽과 설사 겉으로는 그리 보였을 수 있지만, 끝까지 한마음이었을 것이라는 쪽이다. 모든 사건이나 기록에는 보여지는 면과 보여지지 않는 면이 있다. 환하게 드러나 있기에 보이는 것과 가려져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으며,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지 않을 듯 보이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의 틀’에 갇혀 순교와 배교를 가리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에 그를 맡기는 것이다. 표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말이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안에서만 시비(是非)가 가려질 일이다.

 

[평신도, 2018년 가을호(VOL.61),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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