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주님 만나기 -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법이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998

[진리를 찾아서 - 주님 만나기]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법이란

 

 

‘종교’(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숭배하다’(relego)와 관련이 있습니다. ‘relego’는 ‘다시’(re)와 ‘읽다’(lego)가 합쳐진 말로 ‘다시 읽다.’ ‘주의 깊게 보다.’를 뜻합니다. 이는 ‘신이나 조상을 잘 모시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또 다른 이해는, ‘다시’(re)가 ‘묶다’(ligare)와 합쳐진 ‘다시 묶다.’로 보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하느님과 다시 묶는 통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해를 따르든, 종교라는 말에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전제됩니다. 인간이 신을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발생적이기도 합니다. 무속과 같이 원시적인 상태에 있는 종교가 비록 경전이나 세련된 제도적 면모는 없어도 이승과 저승의 삶을 연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선험적으로 어떤 초월적 존재를 추구하고 지각하는 능력을 가진 듯합니다.

 

 

경험

 

우리가 바쁘고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음을 가라앉힌다면 능력에 따라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연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고독한 상태를 거부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신앙인은 이 연상을 ‘하느님을 느끼는 상태’라고 자연스럽게 알아들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 고요한 시간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회상하기도 합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하셨고, 그런 아버지와 결혼하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신앙을 배우고자 하셨습니다.

 

가족이 신앙을 공유하는 분위기에서 저는 당연히 ‘하느님은 존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제게는 ‘어떻게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중요했지, 그분의 존재유무를 따지는 것은 논외였습니다. 제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단순하고 굳건하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믿음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그렇게 알려 주시는 대로 믿었고, 저의 믿음은 커 가면서 굳건해졌습니다.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세월을 겪으면서 하느님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 삶에 감동을 주는 ‘하느님을 만났던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제게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며 무엇인가를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리에서 배운 내용보다 더 생생한 깨달음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존재’로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큰 특징입니다.

 

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오신 하느님’은 바로 구세주 예수님이시라는 점이 커다란 매력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고해실에서 한 중학생 소년과 만났습니다. 엄마에게 떠밀려 고해실로 들어온 그 소년은 억울해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그러니 이런 신앙을 더는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소년의 말에 담긴 팽팽한 거부감이 고해소 가리개 너머로 전해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현재 상황을 고백한 소년에게 저는 만일 지금 강압으로 뭔가를 고백했다면, 더 지내보고 다시 와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엄마로 말미암은 그 믿음을 거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강요받는다고 느끼는 청소년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임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당황하지 않고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친한 친구는 누구니?” “엄마에게서 사랑을 느낄 때는 언제니?” “친구의 도움을 받아본 적은 있니?” “친구를 도와준 적이 있니?” “그럴 때 기분은 어떠니?” “존경하거나 본받고 싶은 사람은 누구니?” 다행히도 소년은 이 같은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해 주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표지’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부모님과 친구들,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벌어지는 사건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소년은 그렇게 여기며 살아보겠다고 말하고 떠나갔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실재를 믿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기로 결정한다면 나를 포함하여 나를 둘러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소년도 그런 능력을 키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성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신앙 고백은 우리가 ‘익명의 그리스도’를 뵐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익명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면에 담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곧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면모입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 5장의 ‘참행복’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거나 박해받고, 모함받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은 이가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따라서 누구든지 환대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여기서 손님은 이방인입니다. 곧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환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분이 있는 이들도 챙기기 쉽지 않은데 낯선 사람마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기꺼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어색한 ‘거리의 사람들’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선배가 오지로 함께 봉사 활동을 떠나자고 제안합니다. 그곳에서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만일 돌아온다면 역사에 남을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배는 말합니다.

 

혹독한 추위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몇 날 며칠을 견뎌야 할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에게 필수라고 하는 와이파이(Wi-Fi)가 터지지 않는 상황에 내던져질 것이 뻔합니다.

 

황당합니다. 한편으로 마음속에서 갈등도 생깁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선배를 봐서라도 저는 선배가 초대하는 이 모험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 선배와 같습니다. 힘들 것이 뻔하기에 거절하고 싶어도 나는 그 선배를 사랑하고 깊이 신뢰합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청하신다면 별로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실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뿐이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이 초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응하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알아 가고 친밀감을 쌓고자 나날이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여럿이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함께 일한 보수는 언젠가 영원한 생명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헛되이 초대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초대에 내가 응했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나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가? 나를 구하고자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나를 이해해 주시려는 분이심을 믿는가? 정작 나는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여 스스로도 목숨을 내어놓을 의향이 있는가….’

 

그리고 기도 안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보세요. 앞서 말한 봉사 활동에 함께 떠나자고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주저하지만, 결국 그 손을 맞잡습니다. 기도 안에서 바라본 그 장면이 내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박종인 요한]



4,2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