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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가족 여정: 붉은 여왕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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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0 ㅣ No.1019

[가족 여정] 붉은 여왕 이론

 

 

영국의 작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달리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앨리스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보지만, 이상하게도 운명의 족쇄가 채워진 듯 늘 제자리에 멈추어 서 있습니다. 앨리스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자 붉은 여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주변 세계도 그에 따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서 있고 싶으면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해.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곧 뒤처지는 것이 되지. 그래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해.”

 

‘붉은 여왕 이론’(Red Queen Theory)이란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겨우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곧 열심히 달리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결국 뒤처지고 만다는 냉혹한 사회의 분위기를 붉은 여왕을 통해 풍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제자리에 서 있고자 직장이나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특히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면 기성세대로서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멈추어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율법 학자의 지혜는 여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고,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지혜롭게 될 수 있다”(집회 38,24).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여가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암담합니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고용 통계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국민 1인당 연평균 근로 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2위에 해당합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1,719시간보다 약 400시간이나 많습니다.

 

‘여가’(Leisur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Licere’로, ‘허용되다’, ‘자유스러워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의 목적은 지혜로운 여가 사용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학교’(School)라는 단어의 어원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Scole’에서 유래했습니다. 곧 학교의 원초적인 기능은 국어, 영어, 수학을 잘 가르쳐서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여가를 활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통해 경쟁에 길들여집니다. 남보다 더 앞서려고 앞만 보고 달립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달리는 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워낙 빠르게 달리다 보니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집니다.

 

“속도를 줄이세요. 그리고 집중하세요. 어쩌면 지금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톰 맥그래스의 「스트레스 테라피」에서).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완전히 멈추어 서서 주위를 돌아봐야 합니다. 멈추어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나와 가족의 삶이 시속 몇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여가의 즐거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완성된 날도 ‘푹 쉬셨던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만들어 주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주일’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은 ‘주 5일 근무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가와 휴식은 인삭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여가의  즐거움을 ‘pleasure’와 ‘enjoyment’로 구분합니다. 둘 다 ‘즐거움’과 ‘기쁨’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pleasure’는 자신의 심리적 에너지를 투자하여 단순하고 순간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시청, 웹 서핑(불특정한 웹 사이트를 이곳저곳 둘러보는 것), 스마트폰 게임 등의 활동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 반면, ‘enjoyment’는 자신의 심리적 에너지를 투자하여 더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획득하고, 일시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삶의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즐거움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독서, 운동, 여행, 기도 등의 활동이 이에 해당합니다.

 

올바른 여가 활동은 ‘pleasure’와 ‘enjoyment’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나치게 순간적인 즐거움만 추구합니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급이 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뇌파는 평온한 상태에서 나오는 ‘알파(α)파’와 긴장한 상태에서 나오는 ‘베타(β)파’로 구분됩니다. 이 두 가지 뇌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었을 때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긴장한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베타파’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이 늘 불안하고 온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부족한 ‘알파파’를 보충하려면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며 그분을 고대할 때 우리는 진정한 평온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조용히 침묵 중에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변화에 좌우됨 없이 언제나 평온하며 고요 속에 머뭅니다”(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의 「365일 당신을 축복합니다」에서).

 

 

오늘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인용된 유명한 말입니다.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오늘의 삶을 담보 잡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내어 주시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갈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과거를 살아갈 때

과거의 실수와 후회 속에서 살아갈 때

네 삶은 참으로 힘들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나는 있었던 나다’(I was)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미래를 살아갈 때

미래의 문제와 두려움으로 살아갈 때

네 삶은 참으로 힘들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나는 있을 나다’(I will be)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때

네 삶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I am)이기 때문이다.

 

- 헬렌 말리코트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평화와 휴식이 함께하는 시원한 여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권혁주 라자로 - 한 여인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빠로서 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 여정’, ‘부부 여정’ 등의 가족 관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글 권혁주 · 사진 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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