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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아름다운 성화66: 부부의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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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30 ㅣ No.444

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66) 바티칸 박물관 ‘부부의 석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이다

 

 

‘부부의 석관’, 325~350년, 대리석, 성 비오 크리스천관, 바티칸 박물관.

 

 

성경의 많은 장면이 묘사된 이 석관은 로마의 외곽에 자리 잡은 성 갈리스투스(St. Calixtus)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 석관의 주인공은 원 안에 새겨진 두 인물상으로 보아 신자 부부임을 알 수 있다. ‘부부 석관’은 325년부터 3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시대 지하묘지였던 카타콤에는 이 같은 대리석 석관뿐 아니라 프레스코 벽화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미술품으로 꼽힌다.

 

카타콤의 벽화나 석관에는 착한 목자와 병자의 치유, 죽은 사람의 소생처럼 생명과 관련된 주제가 즐겨 등장한다. 이것은 세상을 떠난 사람이 하느님의 아버지 품 안에서 온전하게 돼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깊고 어두운 곳에 사랑하는 이를 묻으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거두어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이런 작품들을 그렸던 것이다.

 

상단과 하단으로 구성된 이 석관에도 성서의 여러 주제가 고부조로 표현돼 있다. 상단에는 라자로의 소생, 빵과 물고기의 기적, 아브라함의 이사악 봉헌, 십계명을 받는 모세(?), 소경치유, 베드로의 배반, 아담과 하와의 일이 묘사됐다. 하단에는 신발을 벗는 모세, 하혈하는 부인의 치유, 가나의 기적, 요나 이야기, 사자 굴의 다니엘, 감옥에 갇힌 베드로, 세례주는 베드로의 모습이 있다.

 

상단의 왼쪽 끝에는 죽은 라자로가 되살아나는 장면이 있다. 라자로의 소생은 석관에 즐겨 등장하는 주제인데 이것은 죽은 이가 라자로처럼 부활해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장 1~44절에는 라자로의 소생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싼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 43~44).

 

죽은 라자로가 되살아나는 장면의 묘사 부분.

 

 

젊고 힘찬 모습의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움켜쥐고 라자로가 묻힌 동굴을 바라보시면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명령하신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라자로는 수의도 채 벗지 않은 채 두 눈을 벌떡 뜨고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나오고 있다. 생명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힘찬 모습과 죽음에 사로잡혔던 라자로의 초라한 모습이 강한 대조를 이룬다.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이야말로 죽음에 사로잡힌 인간을 살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본당 신자 가운데서 27분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이해 다가오는 주일에는 그분들과 세상을 떠난 조상과 부모, 형제자매와 친지들을 위한 합동 위령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주보에 게재된 임종하신 분들의 이름을 보니 병자영성체나 병자성사 등을 통해서 만났던 이런저런 추억이 떠오르며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 백명기(요셉)님은 지난 상반기에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성당에서 뿐만 아니라 성당이 속한 동대문구에서 최고령이셨는데 이제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셨다.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성당에 나오지는 못하셨지만 대신에 연로한 아들을 시켜 성당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셨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화초나 화분을 보내주시어 성당의 모습은 더욱 정겹게 변화됐다.

 

요셉 할아버지께서 주고 가신 편백나무들이 찬바람이 부는데도 성당 곳곳에서 푸르게 자라고 있다. 그 나무들을 바라보면 병고에서도 성당을 걱정하며 아름답게 꾸미려고 했던 할아버지의 착한 모습이 떠오른다.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면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는 차가운 무덤이 아니라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의 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7일, 정웅모 신부(서울 장안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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