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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결혼과 가정: 그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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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7 ㅣ No.1009

결혼과 가정 - 그 이상(理想)과 현실의 경계에 서서

 

 

혼인의 필수 조건인 사랑

 

혼인은 성적 육체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스스로 내어 주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룩한 결합을 하여 한 몸이 되는 순간이다(「사랑의 기쁨」, 13항 참조). 이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가페’를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처럼 인간 역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나누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외모, 성격, 가정 형편 등 인간의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계약으로서 인간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혼인의 필수 조건이다. 사랑을 통해 거룩하고 온전한 혼인 계약을 맺을 수 있으며, 이 계약을 맺는 남녀는 비로소 한마음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가정의 참의미를 발견한다.

 

 

사랑과 조건 앞에서 갈등하는 젊은이들

 

불행하게도 젊은이들은 혼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첫 번째 자리에 놓지 않는다. 물론 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방의 직장, 연봉, 집안, 성격 등의 조건을 따지지 않을 수 없고, 그 조건에 따라 상대방을 사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요즘 분위기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 없다. 그들이 처한 현실을 볼 때 서로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로 서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려면 상대방이 지닌 다양한 조건을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혼인을 준비 중인 고민정 씨(30세, 가명)도 사랑이 혼인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랑이 나중의 문제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저뿐만 아니라 제 또래 친구들도 마음에 드는 남자 선배나 동료를 보면 남자 친구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든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이기 때문에 좋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사회 현실을 보게 되면서 상대방이 지닌 조건을 따지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게다가 혼인이라는 것이 남녀 간의 결합의 차원을 넘어 집안과 집안 문제로 확대되기 때문에 양가(兩家)가 원하는 조건을 따져볼 수밖에 없어요.”

 

상대방을 정말 사랑하고 악조건이라도 감내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인간이 지닌 조건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조건을 초월할 수 없는 사회 및 문화적인 구조를 안고 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보이는 현실에서 혼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신앙의 힘으로 무장하여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라는 교회의 목소리는 젊은이들에겐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하며 다른 이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때로는 우리가 오늘날 비난하고 있는 상황을 야기하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겸손하게 현실적으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전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사랑의 기쁨」, 36항).”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시선으로 사랑이 아닌 조건을 먼저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무작정 나무라고 다그치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다. 젊은이들도 진정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정을 교회가 인정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이혼에 대한 두려움

 

사랑과 조건에 맞아서 결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연애를 하면서 몰랐던 배우자의 단점을 적나라하게 접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완만하게나마 이혼 건수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혼인율의 저하에 따른 결과이지 이혼율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오랜 기간 혼인생활을 이어 왔음에도 서로 갈라서는 ‘황혼이혼’도 생각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혼은 서로에게 아픈 상처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혼한 사람이라고 각인되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여러 이유로 이혼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본인도 모르게 위축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결혼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오랜 기간 연애를 했다 하더라도 함께 살기 전에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에 결혼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혹시 연애 기간 동안 본인에게 철저히 숨긴 치명적인 단점이나 비밀이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주변 사람들의 이혼 사유와 상대방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나도 결혼하고 이혼하는 상황이 일어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들이 겪은 결혼의 실패를 본인은 피하고자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이혼에 대한 시선이 서서히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 드라마에서 이혼은 단골 소재로 나올 만큼 인식의 변화가 커졌다. 과거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는데 요즘에는 결혼 횟수나 나이, 이혼 경험 등 과거의 결혼 여부를 결정짓는 주요 요소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들이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당하게 이혼했음을 밝히는 경우들이 많다. 이혼한 여성이나 남성을 지칭하는 ‘돌싱’(돌아온 싱글의 준말)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혼이란 총각과 처녀의 상태로 다시 돌아온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유명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조사에 따르면 미혼남녀 73.8%가 “이유가 있다면 이혼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54.8%는 “행복하지 않다면 이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분명하게 변화했음을 각종 통계 수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남녀가 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양육하고,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혼인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행복이 중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개인이 가정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 살아 보고 결혼을 결정하자는 생각에 동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동거를 하면 법적인 혼인 관계를 따지지 않아도 되고, 함께 살기 때문에 상대방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서로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갈라서면 되는 것이니, 혼인과 이혼의 경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에 동거를 선호한다.

 

가톨릭교회는 혼인이 남녀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넘어 상호 간의 거룩한 일치이며 성사라고 여긴다. 훗날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서로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약점을 극복하고 희망을 바라보며 가정을 설계한다. 혼인하여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이기적인 행복이 될 수 있다. 행복은 서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관계의 어려움과 역경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서로 노력할 때 진정한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가정에 위로가 되고 그 여정에 함께하시기 때문이다(「사랑의 기쁨」, 22항 참조).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기 두려워하는 마음

 

자녀는 혼인의 결실이다. 자녀는 남편과 아내가 식탁에 앉아 있는 집에서 힘과 생명력이 가득한 ‘올리브 나무 햇순’(시편 128[127],3)과 같다(「사랑의 기쁨」, 14항 참조). 이 세상의 부모들은 ‘가정의 축복이며 충만함의 표시’인 자녀를 어떻게 해야 훌륭하게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저출산 현상을 볼 때 자녀는 가정의 축복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의 출산율을 놓고 봤을 때 서기 2800년경에 마지막 한국인이 태어나고 그 한국인이 기대수명을 다해 숨을 거두는 시기가 2900년 즈음이라는 섬뜩한 결과를 봤다. 물론 정확한 수치에 근거를 둔 조사는 아니겠지만 그만큼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생길 만큼 저출산을 장려하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출산장려정책을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한 명의 자녀만 둔 부모들의 반응은 그리 곱지 않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저출산율을 무조건 신혼부부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여러 조건이 맞아서 혼인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압박감에 시달려 출산을 고민하는 젊은 부부들의 고충을 듣게 된다.

 

하지만 결혼을 했음에도 자녀를 두지 않으려는 이유는 비용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맞벌이가 대부분인 젊은 부부들은 자녀를 낳았을 때 얼마나 아이의 양육에 신경을 쓸 수 있을지에 걱정을 한다. 종로구에 사는 이수진 씨(40세, 가명)는 한 자녀를 두고 있는데 자녀 양육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녀가 축복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을 꾸려 나가려면 부부가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어떻게 교육을 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해야 건강하다는데 바쁜 직장생활에 치이다 보면 자녀를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어요. 저 한 몸 돌보기도 벅찬데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싶어요.”

 

아이를 키우기 싫어서가 아니라 한 아이의 인생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출산을 주저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물론 합리화될 수 없는 핑계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이를 위해 헌신해야 할 부모의 고귀한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지 못할 바에 아이의 출산을 포기하려는 그들의 마음도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저출산을 우려하면서도 이 시대의 부모가 겪는 아픔과 고민 등을 함께 아파하며 공감해야 한다.

 

 

혼인과 가정의 소명을 찾으려는 노력

 

젊은이들이 느끼는 혼인과 가정에 대한 갈등의 요인은 이외에도 많다. 그동안 교회는 원론적인 입장만 고수하고 이 시대를 사는 부부들이 겪는 아픔에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반성을 한다. 하지만 쇄신의 길을 걷는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가르침과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을 못 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가르침으로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할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심지어는 서로의 단점도 받아들이고 여러 조건을 뛰어넘어 서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감각적인 사랑이 아닌 상대방을 향한 내면의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

 

[살레시오 가족, 2017년 5월호(144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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