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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해두의 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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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2 ㅣ No.904

《자책》

 

 

1.

 

며칠 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조한건 신부님으로부터 최해두의 《자책》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며, 김영수 박사가 번역하여 흐름 출판사에서 최근 간행한 《자책》을 한 권 보내왔다. 《자책》은 내가 일찍이 《순교자 윤유일 · 정은 평전》을 쓸 때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을 복사하여 눈여겨보아 왔던 책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 책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고 한다.

 

《자책》은 한글체 필사본으로, 표지까지 합하여 총 32장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다. 그러므로 새로 출판한 책도 작고 아담하였다. 목차를 보니, 해제, 번역문, 원문 해석문, 영인본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번역문은 고문을 현대문으로 바꾸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풀어서 번역하였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김영수는 유려한 문체로, 깔끔하게 번역하였다.

 

그러면 《자책》은 과연 어떤 책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배교자가 쓴 참 신앙의 참회록이다. 한국의 유일무이한 참회 문학 기록이다.

 

참회록 내용을 보다 진실하게, 뜨겁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지은이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지은이 최해두(崔海斗)

 

《자책》에는 지은이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나 첫머리에 “나같이 무공무덕하고 유죄유실한 인생은 썩고 썩어서, 신유년(1801) 우리나라 천주교인들에게 상으로 주신, 그렇게 흔한 치명대은에 참여치 못하니, 절박하고 원통하도다. 나 혼자만 치명하지 못하고 이 흥해(興海) 옥중에서 잔명이 붙어살고 있으니,” 하는 구절이 있어서 지은이가 신유박해 때 흥해로 유배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사학징의》에 보면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하고 흥해로 유배된 사람으로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전주 유항검의 비부 박판남이고, 또 한 사람은 여주 출생 양반 최해두이다. 김영수는 지은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 시간을 두고 연구해 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오늘날의 《준주성범》(遵主聖範)으로 번역된 《경세금서》(經世金書)를 읽을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자책》의 작자는 최해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필자도 이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본문 중 자신을 성찰하는 가운데 “동생, 자식, 노복을 의논하건대” 하는 구절이 있다.(번역문 44쪽) 이 구절로 보면, 지은이의 신분이 동생, 자식, 노복을 거느린 양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자책》의 지은이는 비부인 박판남이 아니라, 동생, 자식, 노복을 거느린 양반 최해두가 분명하다고 단언하고 싶다.

 

최해두는 여주 출생이다. 4촌 처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1)의 전교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16년 전에 입교하여 아버지 최창은(崔昌殷), 숙부 최창주(崔昌周, 1749~1801) 마르첼리노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숙부 마르첼리노는 1801년 참수형으로 여주에서 순교하고, 마르첼리노의 딸 최조이 바르바라(1790~1840)는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로 1840년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숙부 최창주 마르첼리노와 4촌 누이 최조이 바르바라는 2014년 각각 복자 · 복녀로 시복되었다.

 

최해두는 입교한 후 여주에서 장인 윤현(尹鉉 : 윤유일의 숙부)과 이웃에 사는 4촌 동서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2), 조섭(趙燮)3) 등과 함께 교리를 강론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와 전동(典洞)에서 살며,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4), 이현(李鉉) 안토니오5), 이희영(李喜英) 루가6), 서소문 안에 사는 이재화(李在華), 심낙훈(沈樂薰)7), 홍시호(洪時浩),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8), 최창현(崔昌賢) 요한9), 홍문갑(洪文甲)10) 등 당시 교회의 중심인물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 홍문갑의 집에 숨어 있던 주문모 신부를 정광수의 집에서 세 차례나 만났다. 아마 그는 그때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보았을 것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도피하였다. 그 사이에 숙부 마르첼리노는 경기 감영에, 장인 윤현은 포청에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 최창은은 그가 도피하였기 때문에, 대신 포청에 잡혀 갇혀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포청에 자수, 혹독한 신문을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고 음 5월 10일 흥해로 유배되었다.

 

복녀 윤점혜(尹點惠) 아가타와 정광수의 아내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최해두의 아내와 4촌 자매간이었다.

 

최해두는 흥해로 유배될 때 “칠십 노친과 청춘의 약한 아내와 다박머리의 어린 자식”(45쪽) 이 있었다. 흥해 ‘천희원 토담집’(32쪽)에 들어 유배생활을 하면서, “부모를 떠나 오륙 년을 지내다가 부친의 망극한 부고를 듣게 되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사후에 연옥에 있을까 하여 극진히 기도를 통해 보속하여, 하느님의 인자하심으로 아버님이 빨리 천당에 오르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정성껏 올리면 돌아가신 아버님께 대한 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하였다. 그는 “살아 계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당신이 혹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마귀의 유혹 그리고 육신 사정으로 천주를 받들지 못하시지나 않은지,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청하면 이는 효경 중에도 으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비록 배교를 하고 유배를 와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삶의 중심, 삶의 모든 가치는 하느님을 최고로 섬기는 데 있었다. 이런 분을 우리가 어찌 배교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최해두에게는 최영수 필립보와 최병문 야고보, 두 아들이 있었다. 필립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10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의 시체를 메고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묻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필립보는 동생과 같이 삼촌 댁으로 가서 살다가 동생이 결혼한 후 서울로 올라와 살았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온 후에는 강당을 준비하고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준비하는 데 비상한 열성을 보였다.11) 그리고 포도를 구입하여 미사주를 담갔다.12)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형제들은 모두 체포되어 야고보는 배교하고, 필립보는 1841년 순교하였다.

 

 

3. 《자책》 속에 담긴 최해두의 참 신앙

 

《자책》은 편의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흥해로 유배 와서 기도를 통해 참된 신앙, 참된 복을 찾으려는 노력과 통회를 읽을 수 있고, 후반부는 십계명에 의한 자신의 통회다.

 

《자책》은 비록 배교자가 쓴 글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그 어느 돈독한 신앙인의 참회록에서보다 깊은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흥해로 유배돼 옥중에서, 천희원 토담집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참된 복, 진복 얻기를 간절히 바랐다.

 

“만일 이 모양으로 죽게 되면 주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끝이 없고 영원한 천당과 그 천당에서 누릴 비할 데 없는 진복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심하고 가련하지 않겠는가!”

 

 

“내 행위를 생각건대 무슨 교우의 도리가 있었던가?”

 

이렇게 반문하며, “육신에 의복을 입었다고 하여, 이 옥중에 와 앉았는가? 육신의 안일을 위해 이 옥중에 와 앉았는가? 만일 영혼을 돌아보지 않고 이 모양, 방탕함에서 빨리 회심하지 않는다면, 받는 것이 모두 헛된 고난이요 짓는 것이 참 죄악이며, 잃어버리는 것은 진복이요, 얻는 것은 모두 재앙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통회의 기도〉를 바치며 인내하였다.

 

“업신여김과 깔봄, 꾸짖음과 욕함을 당하거든 평화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달게 받으라. 해롭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처신하면 어찌 몹시 힘들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이 나지 않겠는가? 세상의 수많은 재산이나 재물은 도둑에게 빼앗길까 두려우나, 예수의 표양과 성모의 덕행을 본받아 고난과 모욕을 인내하면 그 굳은 덕을 빼앗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특히 “이렇게 처신하면 어찌 몹시 힘들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이 나지 않겠는가?” 하는 데 이르러서는 인생을 달관한 그의 덕행이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살기 위해 배교자가 되어 유배를 갔지만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기도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아침저녁 기도를 빼먹으면 “마땅히 드려야 할 아침저녁 기도를 하지 않고서, 때를 놓치지 않은 체” 한 자신의 어설픈 행위를 뉘우치며, 기도를 드려도 “맛있게, 아기자기하게 주모의 인자하심으로 감동하시도록 해 보지 못하였으니 이러하고도 주님께 기도하였다고 하겠는가?”고 자책하였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의 기도 생활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아주 죄가 없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육신의 때는 물로 씻고 영혼의 죄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뉘우침으로 씻어야 하는 것이니, 죄를 짓고 뉘우침의 눈물이 없으면 무엇으로 씻겠는가?” 하였다.

 

이 뉘우침의 눈물이 통회다. 이 통회에는 하등통회와 상등통회가 있다. 하등통회는 자신이 죄를 지어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고 뼛속까지 아파하는 뉘우침이며, 상등통회는 대부모의 성심을 상하게 한 죄를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는 것이다. 통회는 믿음의 행위다. 통회를 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정개(定改)라고 한다. 최해두는 “그 뉘우침이 진심으로 간절하지 않으면 어찌 단단한 정개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짓고 산다. 그러므로 최해두는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성찰하여 이 말이 죄가 될 말인가 아닌가를 생각하여, 만일 죄가 되는 말이거든 통회하고 이후는 다시 이런 말을 말아야 할 것” 이라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 한마디 하는 때에도 성찰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백성사를 받으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죄의 성찰이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받는 것은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육신, 마귀, 세속의 삼구(三仇)가 있다. 그는 “마귀는 나의 선행을 마구 끊어내고, 악행을 부추기는 지독한 원수”라 하며 멀리하였는데, 마귀보다 “피하지 못할 원수가 바로 육신”이라 하였다. “육신은 내 영혼에 붙어 떼어내기 어려운 것”이므로, “옛 성인들은 항상 십자가의 고난과 고행으로 몸이 원하는 것을 신앙으로 눌러 이기기 위해 혹 채찍으로 몸을 때려 스스로 경계하고 또 엄한 재(齋)를 지켜 육체가 원하는 욕정을 누르며, 하기 힘든 괴로운 일을 해서 육체의 기운을 꺾었는데”, “이제 나는 내 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명으로 여러 가지 죄를 범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려고 천희원 토담집에 들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유배와 살고 있는 천희원 토담집을 그는 마치 수도원처럼 여기며 그 고통으로 육체의 유혹을 이겨 내었다.

 

그가 천희원 토담집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천주학 죄인. 천주학 죄인” 하며 멸시하였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나는) 천주교인이라는 헛이름만 있고, 실제로 얻는 것이 없어 성교만 욕되게 하니, 정말로 내가 천주학의 죄인이로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그는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치명 칭호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곧 그는 충청도 홍주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돼 1793년 옥중에서 죽은 원시장 베드로를 묵상하며 “그렇게 죽은 것이 비록 참수 당한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보다는 못하나 이 또한 순교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 이라 하며, “나도 이 옥중에 있다가 마침내 능히 위주치사하면 또한 치명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처럼 치명 칭호 얻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의 신앙생활의 주요 지침은 십계명과 칠극이었다. 당시 교리서에서는 교오(업신여김), 간린(인색함), 미색(여색에 홀림), 분노, 탐도(음식을 탐냄), 질투, 나태(게으름) 등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일곱 가지를 칠죄종이라 하고, 이것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을 칠극이라 하며 신앙의 큰 덕목으로 삼았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였다.

 

후반부는 십계명에 의해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제1계는 ‘한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라’ 이다.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려면 천주가 누구이신가를 정확히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아니, 보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 없고서는 진실한 흠숭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때도 나를 낳아주신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더욱 지극한 효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주는 모든 사물을 다 아시며, 어떠한 일이라도 다 행할 수 있으시며, 또 오로지 선하시며, 더할 나위 없이 높고 귀하시고, 더없이 올바르시고 엄하시니, 큰 천지와 밝고 맑은 해와 달과 산천초목과 오곡백과의 여러 가지 태어난 것과 만물 중 지극히 영리한 사람이라도 한 번 명령하여 생겨나게 하시는 분이시라. 이제 또 이러한 것들을 없애려고 하셔도 한번 명하여 순식간에 하실 수 있을 것이라.” 고 인식하였다. 그는 천주의 전지, 전능, 전선하심을 인식하고, “세상 사람으로도 아랫사람이 되면 마땅히 윗사람을 흠숭하거늘 하물며 천주는 위가 없는 위(位)이시니 어찌 흠숭치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천주 인식과 흠숭이 여기에 녹아 있다.

 

제2계는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라’이다.

 

헛맹세를 하지 않으려면 좋은 맹세가 무엇이고 헛맹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분해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천주교를 욕하고 나무라거든 그렇지 아니함을 내가 분명히 밝히되, 남이 그대로 믿지 않으면 맹세를 할 수 있다.” 하고, ‘죽어도 배교는 못하리라’ 하면 이는 다 좋은 맹세라 하였다. 이에 비해 ‘헛맹세’란 육신 혈기에 원통하다고 해서 사소한 것을 밝히려고 ‘만일 그렇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다.’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이라 하였다.

 

제3계는 ‘첨례날을 지켜라’이다.

 

첨례날은 주일과 금육, 금식일, 여러 성인의 치명일, 탄생일 등 기념일을 말한다. 그는 이런 첨례날이 다가오면 열심을 발하여 성서를 읽고 묵상과 기도를 드리고 자기 마음을 살펴 반성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 뉘우침을 더욱 진실하게 하여 하루 종일 조심함이 평일과 다르게 하며, 귀, 눈, 입, 코, 수족 등을 조심하며, 마음의 재를 지켰다.

 

제4계는 ‘부모를 효경하라’이다.

 

그가 부모를 떠나 5 · 6년을 지내다가 부친의 망극한 부고를 받고 회한한다. 살아 계신 어머니께서는 혹시 마귀의 유혹, 육신 사정으로 천주를 받들지 못하시지나 않은지 걱정한다. 만약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청하면 효경 중에 으뜸이 될 곳이라고 한다.

 

제5계는 ‘살인을 말라’이다. 그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살인한 죄를 가지가지로 묵상 성찰한다. 손으로 사람을 밀쳐 해를 끼치면 손으로 살인한 죄, 남의 잘못을 은밀하게 말하여 해를 끼치거나 하면 입으로 살인한 죄, 그놈 죽으면 시원하겠다 하면 마음으로 살인한 죄, 남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못하게 막으면 사람의 영혼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라 하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성찰하며, 이제 나의 행위를 생각하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선행을 배우기는 지극히 어렵고 나의 나쁜 습관을 닮기는 쉬웠을 것으로 생각하니, 이 모두 다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 가?” 하였다.

 

제6계는 ‘사음을 말라’이다. 그는 “음탕함에 빠져 몰입하는 것은 육신에도 해롭고 정신도 흐려지고, 고운 얼굴을 마르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추잡해지고 남들도 업신여기게 되어 유익한 곳은 조금도 없는 모두 더러운 생각이라”고 하며, 부부라도 지나치면 ‘사음’이라 하였다.

 

《칠극》에 보면 정덕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하급은 부부간의 정덕이며, 중급은 홀아비 · 과부의 정덕이며 상급은 결혼하지 않은 동정남 · 동정녀의 정덕이라 하였다. 그도 이에 따라 “옛 성인을 살펴보면 힘들게 정덕을 닦으실 때 환부, 과부의 정결도 있었고, 부부가 잠자리를 가졌으되 서로 언약하여 남매같이 하자고 동정을 지킨 이도 있고13), 아예 결혼하지 않은 동정남, 동정녀14)의 정결함도 있어 어렵게 수행하여 공부를 이루었는데, 나는 무엇이건대 마음을 방종하게 하여, 하고 싶은 노릇을 다하고 공부를 이루자는 말인가?” 하였다.

 

그의 ‘십계명’에 의한 성찰은 ‘제6계명’도 다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치고 만다. 본디 ‘제10계명’까지 다 있는 것을 여기까지 필사하고 나머지를 필사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여기까지밖에 없는 것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본문 가운데 “십계명과 칠죄종을 범하고도 마음이 쇠나 돌처럼 단단하니” 하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십계명’에 대한 성찰이 끝난 다음에는 ‘칠극’에 대한 성찰이 더 있었을는지 모른다고 추론한다. 완전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쉬울 뿐이다.

 

그의 이 간절한 성찰을 볼 때 누가 감히 최해두를 배교자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한국천주교회사 중 통회를 통한 가장 훌륭한 참 신앙인이었다. 끝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준엄하게 성찰하는 의미에서라도 《자책》을 일독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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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유일 : 본명 바오로, 경기도 여주 점돌 출생, 권철신의 제자로 그 아우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 1789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밀사로 선발돼 북경에 들어가 조선에 신부 파견을 요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속에 조상제사 금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구베아 주교는 처음에 레메디오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려고 보냈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음에 주문모 신부를 파견, 입국시켰다. 주문모 신부 입국 사실이 알려져 그를 입국시키는 데 앞장섰던 지황, 집주인 최인길과 함께 체포돼 1795년 포도청에서 장살, 시신은 한강에 띄워버렸다. 2014년 시복되었다.

 

2) 정광수 : 여주 부곡리 출생,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아내 윤운혜 루치아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집을 교회 집회소로 제공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돼 여주에서 참수되었다. 2014년 시복되었다.

 

3) 조섭 : 본명 예로니모, 양반, 본디 연천 사람, 서울로 이사와 살며 1790년경 홍낙민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 정광수 이웃에 살며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신유박해 때 배교하고 나주로 유배되었다.

 

4) 정약종 :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2014년 시복되었다. 저서로 《주교요지》가 있다.

 

5) 여주 출생, 서울로 올라와 홍필주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깊이 배우고 주문모 신부로부터 영세,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 2014년 시복되었다.

 

6) 이희영 : 예수 성화를 그린 화가. 이현의 3촌.

 

7) 심낙훈 : 광주 출생, 1795년경 입교, 서울로 올라와 정광수 이웃에 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 배교하고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8) 황사영 : 〈백서〉의 지은이. 1801년 참수형으로 순교.

9) 최창현 : 평신도 회장, 2014년 시복되었다.

10) 홍문갑 : 홍필주 필립보의 다른 이름, 강완숙의 아들,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 2014년 시복되었다.

11) 달레(Dallet),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20쪽.

12) 《좌포도청등록》, 辛丑 4. 25. 崔榮受, 年51.

13)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이 결혼을 하였으나 동정을 지켰다.

 

14)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동정녀로는 최해두의 처4촌 윤점혜 아가타,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 바르바라, 심낙훈의 누이 심아기 바르바라 등이 있었는데, 2014년 모두 시복되었다.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하성래(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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