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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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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848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와 앵베르 주교(1796~1839)를 중심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을 새롭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에 대해서는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의 대부분이 페레올 주교의 재임 시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까닭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해서, 그의 뒤를 이은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에 대한 관심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것도 육로보다는 해로의 개척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더 높았다. 페레올 주교의 시대에 와서 김대건 신부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해로 개척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육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한때 해로를 통한 입국을 모색하기도 하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로, 오직 육로인 요동뿐이라고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이 조선에 가까운 중국의 변문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육로로, 모두 겨울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 방법을 비판하였던 앵베르 주교 역시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면서도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개척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페레올 주교에 의하여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1. 머리말

 

1820년대 중반 유진길 등이 올린 서한이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를 경유하여 로마로 전달되면서 한국 천주교회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주문모 신부와 같이 중국에서 중국인 사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아주 먼 나라인 프랑스에서 주교와 사제들이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교황청에서 유럽에 있는 선교회들 가운데 조선 선교를 단독으로 담당할 곳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지원하고, 이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떻게 조선으로 입국하느냐의 문제가 있었다. 교황청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밝혔듯이 선교사들이 어느 길을 이용하여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도움들이 전달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1) 파리 외방전교회가 교황청의 제의를 거절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제안하고 있는 입국 방법을 검토해 보았지만, 안전성이 거의 없을뿐더러 실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5월 19일에 작성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열정을 드러내었다.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 점이야말로 반대하는 이유들 가운데에서 가장 그럴듯하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계획이 어렵다고 하여 그것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또 세속의 자식들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어렵다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이 문제가 되는 데도 주저하고 소극적인 것은 빛의 자식들뿐이란 말입니까?2)

 

그는 많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결국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짐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스스로 조선 입국로를 계획해야 했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만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는 커다란 과제였으며, 3대 조선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재임 시기에 이르기까지 거듭해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만 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교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는 신앙생활이었으며, 선교였던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에 대해서는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3) 이를 살펴보면,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다룬 연구의 대부분이 페레올 주교의 조선 대목구장 재임 시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육로보다는 해로의 개척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더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페레올 주교의 시대에 와서 김대건 신부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해로 개척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1대 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해서,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느낌을 주었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를 통해서 혹은 앵베르 주교가 주장한 조선 국내와 외부 세계의 연락망 구축 방안 등이 간단하게 지적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4) 그리고 세 명이나 되는 조선 대목구장들의 조선 입국로 방안이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와 앵베르 주교(1796~1839)를 중심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을 새롭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브뤼기에르 주교의 육로 개척

 

브뤼기에르 주교는 앞서 언급된 1829년 5월 19일자 서한의 “4.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라는 부분에서 자신의 입국로 구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5)

 

첫째는 역시 육로이다. 그는 북경에서 출발하여 조선에 들어가 순교한 주문모 신부를 예로 들면서 사천이나 산서 지역을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사천이나 산서 지역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서양인 신부들이 이미 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 장의 편지를 로마에까지 보낼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이곳에 있는 신부 한 명쯤은 자기네 나라로 인도해 들여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조선 교우들과의 유일한 연락 장소인 북경에 편지를 보내서 사천이나 산서의 이러저러한 읍내에 그들을 기다리는 선교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그들이 나서서 선교사를 조선으로 인도해 가는 방법을 찾아주기를 바랐다. 한편 그는 중국인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만리장성을 거쳐 나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음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장소와 암호를 정하고, 슬기롭고 약삭빠르게 행동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면 마침내 조선 입국이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해로이다. 육로로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방법인 해로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바다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은 서양인이 조선과 전혀 무역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 조선 연안으로 무역을 하러 가는 중국인들의 성실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이를 실천에 옮길 수가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 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이런 생각 때문에 중국 해적선을 타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최초의 교구장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기네 교우들을 찾아가야 했을 때에 중국인들의 성실성을 믿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물론 그도 해로가 안전한 방법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방도를 발견할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사람의 눈에 육로보다 해로가 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므로 특별한 섭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조선으로 입국할 방법으로 해로까지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겠다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의 입국 방법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이와 같이 설명한 다음 신부 한두 명을 보내서 조선에 들어갈 여러 가지 현명한 방법을 열심히 시험해 보면 될 것이라고 한다. 혹시 이들이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자기들 힘으로나 조선 교우들의 도움으로 선교사들을 맞아들일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서양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로 자신을 선택해 준다면 자신의 구상들을 한번 시험해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그 열흘 뒤인 5월 29일자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견을 라미오 신부에게 모두 열두 항목으로 상세하게 물어보고 있다.6) 파리 외방전교회는 선교사의 조선 파견을 거절한 이유로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조선 교우들이 제공하는 조선 잠입 방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자신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한국 천주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라미오 신부에게 편지를 쓴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조선 교우들과 연락하고 소통하기 위한 장소로 북경이 좋은가, 아니면, 북경 외곽에 교우들이 살고 있는 어떤 읍내나 마을이, 그것도 어렵다면 산서나 사천에서 조선인 교우들을 만날 방법이 있는가를 궁금해 한다. 이때 산서나 사천의 두 곳 가운데 어느 곳이 가장 적당한 곳인가도 함께 알아보고 있다. 이것조차 조선 교우들이 오는 것이 너무 멀거나 어렵다면 만리장성까지 안내할 중국인 안내인을 통해서 만리장성 가까이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수 없을까 하는 방도까지 제시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에 대해서도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바다를 통한 여행이 절대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다만 어렵다는 것인가? 덜 위험하게 항해할 방법이 없을까? 가령, 아무 짐도 없이 승선해서 약속한 장소에 당도한 뒤 운임을 지불하면 어떨까 하고 물어보면서, 그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다에서 버림받지 않을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는 짐과 돈은 상인으로 가장한 중국인 혹은 조선 교우들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짐과 돈을 맡은 사람이 다른 배를 타고 선교사보다 앞질러서 약속 장소로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 장사하러 가는 사람이 중국인들밖에 없는가? 조선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서 어디가 되었든 중국의 항구로 오는 일은 도무지 없는가 하고 계속해서 묻고 있다.

 

이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중국 대륙으로까지 들어가지 않고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조선으로 직접 들어가는 방법도 질문하고 있다. 조선 교회의 심부름꾼들이 북경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을 거쳐 광동이나 마카오까지 오게 하려는 계획은 절대 실현이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때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까지 모색한다. 마카오에서 혹은 광동에서 혹은 복건에서 출발하여 조선에 상륙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까지도 모두 시도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지막으로 또 다른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다면 달단 지역이나 러시아를 거쳐서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라미오 신부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제시한 입국로 모색 방안보다도 쉬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에 대해서 관련되는 자료들을 공부하였으며, 매우 다양한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후 그의 활동은 조선 입국을 위해 그 가운데에서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초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복건 지역으로 그를 싣고 갈 배를 기다리면서, 다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대한 희망을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있다.7) 유럽인들과 조선인들이 교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년 전부터 여러 선박들이 조선 지역으로 출항했다고 하면서, 그중 한두 척의 선박이 벌써 조선으로부터 귀항했다는 것이다. 이때 믿을만한 사람이 그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후일에 조선의 해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면 조선에 들어가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하면 그것은 개신교 측의 움직임이었다. 1832년 11월 10일자 서한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8) 이미 5척의 영국과 미국 군함이 조선에 연이어 간 적이 있었다. 그중 1척 혹은 2척이 조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그들을 매우 환대해주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해 질문을 해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직자로서는 개신교 목사 1명만 동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인들 및 개신교 신자들과 상인들은 천주교를 앞질러 가고 있는데, 천주교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육로와 해로 모두를 놓고 함께 계속해서 고민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1832년 11월 18일자 서한의 끝 부분에 조선으로 갈 수 있는 육로와 해로의 경로를 함께 적고 있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9) 마카오를 떠나기 바로 직전인 1832년 12월 14일자 서한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10) 그는 조선으로 가는 길은 육로와 해로가 있지만 둘 다 위험하다고 말한다. 육로의 경우 구체적인 코스를 언급해 주고 있다. 육로로는 넓은 중국 대륙을 주파하고 몽골, 즉 달단의 일부 지역을 통과한 다음, 발해만 주변 광활한 지역을 지나서 마침내 조선 북부 지역으로 잠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단 지역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조선 교우들이 제안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 자신이 직접 선택한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루트는 굉장히 의심이 많고 귀찮게 구는 백성이 사는 광활한 지역을 여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보았다. 자칫하면 유럽 선교사라는 사실이 탄로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 전국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일으킬 위험성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 대륙의 이러한 사정만이 아니라 조선의 사정도 그러하다고 보았다. 조선 역시 국경을 단단히 지키고 있어 중국인들은 물론 외국인들이 입국할 수도 없고, 몰래 잠입하다가 발각되면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중국과 조선 사이의 국경을 감시하는 감시원 숫자가 줄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황해를 건너는 해로는 육로보다 짧지만 실현할 방도가 없다고 보았다. 조선의 사정을 이전의 서한과 다르게 파악한다. 먼저 조선과 통상을 하는 나라가 없다고 말한다. 조선은 가난하고, 조선인들의 생산품은 형편이 없어서 외국인들이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바다를 몹시 무서워하는 나머지 조선 반도를 벗어나는 일이 좀체 없다고 보았다. 어쩌다 조선으로 항행하는 배를 만나더라도 거기에 승선하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는 것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조선 교우들은 해변이 아니라 내륙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조선 해변에 닿자마자 외교인들의 처분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조난자의 경우에도 모두 포로로 간주되며, 도망치려 한다면 역시 사형을 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해로에 대한 희망을 표시한다. 해로의 어려움은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선교사가 일단 조선에 잠입해 선교에 성공하고 몇 년 동안 발각되지 않고 지낸다면 상륙 지점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교우들 숫자가 불어나면 바닷길도 열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해로를 통해서 조선과 연락하는 것이 좀 더 쉽고 확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육로이냐 해로이냐 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이러한 고민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카오를 떠나 복건 지역으로 가기 전 그는 1832년 11월 23일자 내용에서11) “그렇지만 출발할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산서를 통해서 가야 하나, 아니면 강남을 통해야 하나?”라고 묻고 있다. 산서 이외에 강남 지역이 새롭게 언급된다. 이에 대해서 그는 마카오의 성 요셉 신학교 신부들과 교장 신부의 조언을 소개한다. 이들은 “주교님께서 이미 짜놓은 계획대로 곧장 남경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주교님 뒤에 올 다음의 선교사들을 위해서는 더 빠르고 쉬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영국인들이 조선에 갈 때 택했던 바닷길을 따라서 말이지요”라고 하며, 이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해로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교장 신부는 그에게 영국인들이 들어갔던 강과 항구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 아마도 지도도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브뤼기에르 주교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가운데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인 교우들이 자신을 도와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12)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인 청년 교우 왕 요셉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싱가포르를 떠날 때부터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온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매년 북경에 오는 조선 사절단에 섞여 있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가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밀입국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초대 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우들과 접촉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1833년 3월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의 복건 지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사천 지역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13) 1833년 6월에 들어와서 남경 부근에 도착하여 왕 요셉으로부터 브뤼기에르 주교가 요동 지역에서 머물 임시 거처를 물색한 사실을 듣게 된다. 요동 지역의 반응도 함께 알게 된다.14) 이와 함께 1833년 10월 28일자 서한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직예 지역에 있을 때 해로를 위한 입국보다는 육로로 요동 지역을 통해서 조선에 입국하는 방안이 결정되었던 것 같다.15) 그는 유럽의 선박이라고 하더라도 뱃길로 조선에 들어가는 것도, 조선인 심부름꾼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러한 불가항력적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뱃길이 열리지 않으면 복건이나 사천을 거치되, 광동 지역은 피해서 산서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달단 지역을 통해 조선으로 통하는 입국 방법을 새롭게 모색하였던 것 같다.16) 1829년 5월 29일자 서한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달단 지역은 러시아와 함께 선택된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러나 1832년 12월 14일자 서한에 이르면 그는 달단의 일부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제 달단 지역이 조선 입국을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부각되었다.17) 그가 중국보다는 달단을 여행하는 것이 더 쉽고, 달단에 있는 선교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파악하여 이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사제든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당시 곧바로 달단 지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대책을 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달단 지역으로 가는 방법을 논의해야만 했다. 역시 육로와 해로의 두 가지가 있었다.18) 그의 말을 따른다면 달단 지역으로 들어가는 가장 짧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덜 힘겨우며, 가장 돈이 덜 드는 방법은 바닷길이었다.19) 이 방법이 간단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조선 입국은 해로와 육로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의든 악의든 남경 교우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8월 중순에는 남경에서 요동 지역으로 가는 교우들의 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경 교우들은 지나치게 소심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물론 복건 교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북경만을 항해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로 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중국인 신부가 만일 배가 파선하여 주교가 익사한다면 조선 선교는 끝장날 것이라고 하여 육로로 가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20)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육로로, 산서 지역을 통해서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21) 어쨌든 그는 이를 통해서 요동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 계획한 것보다 적어도 3,000리는 더 가야 하는 바람에 1833년에 조선에 들어가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말한다.22) 브뤼기에르 주교는 직예를 떠난 지 석 달 만인 1833년 10월 10일 산서 대목구장의 주교관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산서 지역에 도착한 뒤 한 달 만에 달단 지역으로 바로 넘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 요셉으로부터 요동 교우들이 생각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출발을 연기하였다.23)

 

1834년이 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에서 조선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였다.24) 처음으로 만주 변문 지역이 언급된다.25) 그는 산서 주교가 추천한 교우로서, 조선 국경에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나선 두 명이 아는 길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26) 그가 가려고 하는 길은 그들에게 낯선 길이었으며, 이 길에 대한 소문이 고약해서 이 길을 답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도적과 야수들이 뒤끓는 산과 사막을 횡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 입국을 위해서는 이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생각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길을 답사하기로 결심했다.

 

그 길은 서만자 지역을 경유하여 요동 지역을 지나 조선 국경에 이르는 경로였다. 서만자 지역은 그가 마카오에 있을 때부터 주목한 지역으로 조선으로 가는 경로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을 받았지만,27) 이번에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따라서 가능하면 조선 국경까지 바짝 다가가서 그 지역을 면밀히 살피고, 집 한 채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 여부를 타진해보는 것이었다. 즉 한 교우가 선교사의 비용으로 장사를 하고 선교사는 그 집에서 그럭저럭 숨어 지낼 수 있는 그런 집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모두 왕복 9,000리의 길이었다. 1834년 5월에 왕 요셉이 이 길을 안내인이나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서 떠나야 했다. 그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육로를 선택할 경우 그가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조선 입국로였던 것 같다.

 

1834년 9월 8일 죽은 것으로만 여겼던 왕 요셉이 요동에서 돌아왔다.28) 그는 120일이나 노상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입국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점검한 그의 보고는 이러하였다. 그는 서부 달단에서 조선까지 가는 길이 하나 있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늘 파수꾼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지나갈 수 있으며, 서부 달단에 주교님께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두 곳의 장소를 찾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부 달단, 요동 지역에서는29) 어떤 교우도 주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서부 달단에서 동부 달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넓은 황야를 거쳐 가야하는데,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으며 도적 떼들이 들끓어서 나그네들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행히 왕 요셉은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조선 국경까지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조선으로 잠입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를 확인해 준 중국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왕 요셉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목표로 삼은 달단의 국경 끝에 있는 중국 관문(만주 봉황성 변문)까지 갔다고 말한다. 또한 이 중국의 관문과 조선의 제1관문 사이에는 120리 정도의 황야가 있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 황야에는 이를 가로지르는 강(압록강)이 있는데, 연중 두 달 동안 얼어 있는 그 시기를 고려해서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전해 주었다.30)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9월 22일 산서를 출발하여 10월 8일에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서만자로 옮겨갔다.

 

이 무렵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는 조선 교우들의 입국로에 대한 의견을 계속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 해로에 대한 내용이다. 8월 29일 그는 조선인 교우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배 한 척에 무기를 갖추고 값진 선물을 대동한 사신을 조선 왕에게 보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31) 유진길 등이 보낸 한문 서한을 보면 오래전 브뤼기에르 주교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급했던 광동과 마카오가 언급되면서, 서울로 직접 배로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32) 그것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835년 1월 26일 왕 요셉을 통해서 받은 남이관 등이 보낸 편지에서도 역시 바닷길이 가장 용이하다는 점을 계속적으로 시사하고 있다.33)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해로를 이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본 것도 사실이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통해서였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의 1834년 8월 29일자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방 신부에게 어느 곳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바다를 통해서 요동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시도해 보라고 했던 것이다.34) 그리고 샤스탕 신부에 의해 시도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 모색을 언급하고 있다.35) 샤스탕 신부가 1833년 말 강남에서 황해로 나가서 조선의 국경 지대까지 가서 집을 한 채 짓든지 아니면 집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직예에서 해로로 달단으로 가서, 다시 육로로 조선으로 들어가려고 한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샤스탕 신부는 달단에 도착했을 때 달단 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놀란 연락원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한 사람만 데리고 한 달을 헤맨 끝에 조선 국경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의 산을 실컷 바라보았지만,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를 안내해 줄 어떤 사람도 찾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이후 다시 조선 입국을 모색하기 위해서 산동에 머물러 있었다. 산동에서 순풍을 만나면 요동까지 24시간 안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36)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샤스탕 신부가 해로로 요동에 다녀온 일이 거의 절망적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한 증거와 함께 알려주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37) 그들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가 해적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1835년 7월 27일자 서한을 통해서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동을 통해 바닷길로 가거나, 유럽의 배를 타고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물리적으로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38) 1835년 7월 28일자 서한에서도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39)

 

이제 남은 길은 그가 선택한 것으로, 요동 지역을 통해서 조선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제 조선 교우들과의 교섭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40) 조선 교우들이 올해 그를 입국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41) 1835년 2월 7일 왕 요셉이 북경에서 조선 사람들을 다시 만났으며, 돈과 몇 가지 물건을 그들에게 전했고, 그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갈아입을 옷 한 벌을 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 변문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는 일만이 남았던 것이다. 조선 교우들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택한 조선 입국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42)

 

여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동 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우선 그에게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은 요동 지역의 상황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학생 양성의 문제가 있었다. 1835년 2월 8일 서한에 의하면 “조선 학생들을 조선에서 나오게 하여 곁에 둘 수 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복건은 덥고, 사천은 너무 멉니다. 남은 곳은 달단입니다. 그래도 요동이 가장 적절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듯이43) 신학교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 역시 자신이 들어가서 조선에 신학교를 두려던 처음의 계획과 다른 것이다. 이는 1835년 8월 7일자 서한을 통해서 “제가 올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렵다면 제가 사제들을 서품하여 저는 만주에 머물더라도 그들이 선교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라고 한 조선 교우들의 의견에 대한 그의 응답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는 샤스탕 신부가 해로로 요동 지역에 진출한 일에 대한 남경 주교의 불만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44) 이른바 재치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을 위해서는 요동 지역을 그들이 관할하는 조선 대목구의 재치권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835년 7월 27일자 서한에서 요동 지역이 조선 대목구에 맡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역은 언제나 닫힐 것이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역시 아마도 실패할 것이라고 하였다.45) 이것은 1834년 9월 20일자 서한에서 “제가 요동 지역의 재치권을 갖도록 교황청에 청하지 마십시오. 두렵습니다”라는 말과는 달라진 태도의 변화이다.46)

 

1835년 8월 7일자 서한에서 그 근거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47) 만주의 극도로 추운 겨울이 위력을 떨치는 동안에는 그믐 시기의 열하루가 아니면 어떤 선교사도 조선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중국에서 만주로 갈 때에는 1년 중 가장 험한 날씨에 가야만 하는데, 그 추위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떠나는 선교사는 중국을 지나서 아주 길고 자주 위험한 길을 여행해야 하며,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게 쉴 피난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길은 척박한 곳을 통해 나 있으며, 게다가 사나운 짐승들이 있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숨어서 여행자들을 노리는 강도들도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선의 국경에 다가갈수록 밀고자들까지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선교사는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는 길 하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요동 지역이 조선 대목구에 합해진다면 이런 어려움은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언제가 되든지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때 조선으로 들어갈 선교사들은 먼저 요동 지역에서 육로로든 해로로든 길이나 피신처 등을 아주 잘 알아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숙달된 안내자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곳에 세워져야 할 신학교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거나 요동에 머물면서 교회 직무를 수행한다면 자신처럼 이토록 무익하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만주에서는 박해가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또한 조선의 국왕이 자기 왕국 안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사정도 고려한다. 이때 그는 선교사들이 중국으로부터 북경을 거쳐서 조선으로 왔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북경을 통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요동 지역이 아니고서는 조선 교우들과 어떤 연락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가 요동 지역을 통해서 육로와 해로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러나 그는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의 어려움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내친김에 현재 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늠하고, 그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산동 지역에서 서로 교역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조선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 육로인 요동뿐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특히 조선 대목구가 이 지역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48) 그는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요동에 머물지 못하거나, 적어도 조력자들이 운 좋게 조선인들과 거래할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요동에 머문다면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이 얻기 어려웠던 다른 수단들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요동 지역에서의 거점 확보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 교우들과 연락을 할 수 있고,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 시설을 조선 국경에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조선 국경에 집을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49)

 

1835년 10월 7일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년 동안 머물렀던 서만자를 떠나 19일 내몽고의 마가자에 도착하였다. 떠나기 전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조선 입국을 허락하신다면 조선으로 들어가는 더욱 짧고도 쉬운 길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하였다.50) 그러나 그는 그다음 날 선종하고 말았다. 이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련한 입국로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때문에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9일자 서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주교님을 택하시어 장차 조선에 신앙을 전파하도록 선택된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마련케 하셨다”라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를 평가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서 이제 변문, 즉 책문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이 육로로, 모두 겨울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3. 앵베르 주교의 해로 모색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은 어떠하였을까. 브뤼기에르 주교의 설명에 의하면 앵베르 주교는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면 달단의 포교성성 소속 지역만 남는데, 조선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은 위험합니다. 그래도 때를 기다리면서 계획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마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서 파리에 있는 분들에게 편지해 주십시오. 제가 입국한 것을 아시게 되면 즉시 앵베르 신부를 부르십시오. 저희에게는 이런 강인한 기질을 가진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은 조선 국경에 집을 한 채 장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하자면 앵베르 신부와 믿을 만한 심부름꾼이 필요합니다.51) 남경에서 온 한 심부름꾼에 따르면 앵베르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뽑힌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정말 확실한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늘 기분이 좋아집니다. 진정 그런 선교사가 저희와 함께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면서 요동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이 저희에게 그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 지역의 교우들을 돌보고 심기일전시킬 것이며, 달단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교지에 마침내 신학교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만이 조선 신학교를 괜찮은 규모로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신학교에서 보냈다고 해도 그 때문에 더 나은 교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생들과 친교하는 재주가 없고 그들을 이끄는 재주는 더욱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조선 선교지를 모든 점에서 사천 선교지 수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앵베르 신부뿐입니다. 조선에서 버텨낼 수 있으면 일본 입국도 가능하다는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선교지는 위에서 말씀드린 요동 지역을 얻지 못하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 버릴 것입니다.52)

 

교황 성하께서 제 요청에 신뢰를 주시는 한 앵베르 신부가 온다는 것은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가 오면 요동에 배치되어 교우들을 보살필 것이고, 달단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할 것이며, 신학교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이 선교 지역의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품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기까지 합니다.53)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에 들어와서 앵베르 신부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조선 대목구를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은 모방 신부나 샤스탕 신부가 아니라, 앵베르 신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앵베르 신부가 보좌 주교 혹은 부주교로 임명되기를 희망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1819년부터 조선 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그가 1825년 3월 사천 대목구에 도착한 뒤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를 지원한 비슷한 시기인 1829년 5월에 들어오면 그는 “만약 이 사천 대목구에서 조선으로 첫 선교사를 파견해야 한다면 그 선교사는 아마도 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중국인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았으며, 게다가 말과 글을 알고 있는 저에게 이 선교 여행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54) 그는 중국 선교와 공통점이 있는 조선 선교에는 자신과 같이 한자를 잘 아는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혹한과 빈곤을 견뎌내는 훈련을 사천에서 계속했음을 강조한다. 이에 그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조선 선교와 같은 모험적인 일을 하기를 바랐다.55)

 

1833년 8월 10일 앵베르 신부는 초대 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자신의 조선 선교 지원을 알린다.56) 그가 이미 3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으며, 선교사가 많은 사천 대목구에서 한 명이 빠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세울 신학교에서도 그가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언급한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의 희망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찍부터 자신의 조선 선교 희망을 잘 알고 있는 르그레주아 신부가 자신의 조선 선교에 대한 소망을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57)

 

이때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앵베르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로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1835년 8월 1일자 서한을 통해서이다.58) 그는 1830년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래전부터 브뤼기에르 주교 및 그의 동료들이 선택하여 지금 다니는 길이 극복할 수 없는 길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견해를 제시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생활 방식에 적응했을 경우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중국에서 여행할 수 있으나,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에 이르게 되면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단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의 국경은 추위가 극심하며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강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 문제만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육로로 중국의 여러 곳을 거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을 함께 고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앵베르 신부는 이러한 육로와 달리 해로는 더 안전하고 더 빠른 길이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한다. 그는 조선 교우들이 주문모 신부가 했다는 예언에 따라 배를 타고 오는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해로를 이용하면 중국의 선교 지역들도 피해를 당할 우려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앵베르 신부가 프랑스의 군함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입국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때 그는 1820년에 시베리아의 캄차카 반도에서 마카오까지 해안을 따라 남하한 라스호라는 작은 군함을 탄 선원들이 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 해안을 따라 남하했을 때 선원들은 망원경으로 여러 외진 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올리며 천주교의 특징적인 다른 몸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조선 교우들이 해변에 살고 있어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당시에는 조선의 해변에 천주교 신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혼란을 일으켰는데, 앵베르 신부는 서해안에 조선 교우들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앵베르 신부는 신앙심이 깊은 프랑스의 샤를르 10세가 바다를 종횡으로 누비는 프리깃 함의 선장들 가운데 한 명에게 명령하여 페낭이나 마카오로 가서 선교사를 돕도록 지시하게끔 간청하자고 한다. 그곳에서 조선으로 갈 선교사와 통역할 수 있는 조선인 신학생을 승선시킨 다음 조선 연안을 따라 항해하고 정찰하다가 조선의 해안에서 천주교 신자 같은 몸짓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작은 배를 바다에 띄워 그 사람들과 대화해 보도록 신학생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선교사도 상륙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1835년에 이르면서 정세가 많이 바뀌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래도 해군 장관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하면 그가 어떤 프리깃 함을 지명하여 자신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으로 보았다. 자신이 보기에 이것만이 선교사들이 조선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앵베르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서도 새로운 요청을 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한 다음부터는 해로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그것이 어렵다면 일단 조선에 입국한 다음에 역시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복건 대목구장처럼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즉 조선에 들어간 다음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고 나서 조선인 어부 여러 명이 연락책 한 명을 데리고 그 배로 마카오까지 다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조선 대목구가 마카오 극동대표부와 값싸고, 안전하게, 그리고 중국의 선교 지역들이 피해를 보는 일없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요동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페낭이나 마카오 극동대표부와 바로 직접 연결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처음에 제시한 여러 가능성의 하나가 앵베르 주교에 의해 다시 언급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의 설명을 따른다면 해로 입국이 앵베르 신부의 기본 생각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앵베르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추진하고 있는 변문 지역에서의 거점 확보 노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선교사들을 위하여 중국과 조선 사이의 국경 지대에 연락소의 역할을 할 가게를 개업하겠다는 중국인들에게 돈을 주려는 계획에 대해서 신중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교활한 중국인들이 부리는 농간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금전 문제에 있어서는 중국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필요하며, 이런 계획이 조선 입국이라는 난관을 타개하기는커녕 더 어렵게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앵베르 신부는 1836년 4월 26일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다음 해인 1837년 5월 14일에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조선으로 올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부주교로 선임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바로 청하고 있다. 자신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처럼 그러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요청했던 요동 지역에 대한 관할권 요청 문제에 대해서는 보류해 달라고 하면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59) 1837년 6월 18일자 서한에서는 그것을 취소해야 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60) 이와 함께 그는 요동 지역에 어떤 작은 연락소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앞서 이를 반대한 것과는 또 다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조선으로 입국하느냐의 과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의 조선 입국로는 본래의 희망과는 달리 육로를 선택하고 있다. 1837년 6월 16일자 서한에서는 자신이 중국과 달단의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여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61) 여름의 삼복더위가 오기 전에 그는 조선을 향해 떠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사천 대목구의 다른 동료의 견해를 따라 2개월 뒤인 8월로 미루어졌다.62) 조선 교우들이 성탄 대축일 전후에 오게 될 중국과 조선의 접경 지역까지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다고 보았던 것이다.63) 이것은 그의 잘못된 결정이었다.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묵덴, 즉 심양 지역에서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던 것이다.64)

 

앵베르 주교는 첫 방향을 달단 지역으로 삼았다.65) 그는 산서 대목구를 거쳐 달단의 서만자에 50여 일 만에 도착하였다.66) 여기에서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달리 새로운 경로를 선택하였다. 무인 지대의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 춥고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앵베르 주교 역시 나름대로 중국의 지리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음을 알려준다. 이에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걸어간 만리장성의 북쪽의 길, 즉 초원을 가로지는 길보다는 차라리 만리장성 남쪽에 있는 중국으로 되돌아가, 북경에서 묵덴으로 나 있는 국도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하였다.67) 이렇게 하면 걸어 다니는 여행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걸어간 길은 겨울철에 눈 때문에 다니기가 힘들지만, 덜 추운 달단만(현재의 요동만) 해변을 따라가는 국도는 그보다 순탄하고, 편한 도로라는 것이다.68) 그는 산해관을 통과해서 12월 4일에는 묵덴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 국경까지는 5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이때 조선의 사절단이 예년보다 약간 이른 12월 12일이나 13일에 국경을 통과하여 변문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찾아올 조선 신자들을 만난 다음, 그들을 따라 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가 조선에 잠입할 예정이라고 말한다.69)

 

이때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70) 이곳에 도달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요동 지역에 대한 선교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맡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요동 지역을 맡는 일은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들에게 요동과 조선과의 국경 지대에서 이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임시 숙소나 연락소의 설치가 거의 필수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조선의 사정은 사천의 사정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보내는 파발꾼들이 중국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보고해야 하는 윗사람도 없고, 마카오에서 우리에게 보내주는 선교 자금을 맡길 곳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느 곳에 보관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보낸 중국인 신학생이 조선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날짜를 서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교우들이 과연 왔다 갔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려던 신학생은 앵베르 주교가 새롭게 개척한 길이 아니라 기존에 사용되었던, 무인 지대인 평원을 지나는 길로 가는 바람에 더욱 엇갈리게 되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올해 조선에 잠입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알 수 없지만, 이곳까지 온 바에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봉황성 근처의 변문으로 곧장 나아갔다.71) 다행히 12월 14일에 변문에 도착한 앵베르 주교는 이틀 뒤인 16일 저녁에 조선 교우들을 만났으며, 18일에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72)

 

조선에 들어온 세 번째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는 가장 먼저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조선 입국로 모색에 대한 여러 논란을 정리하고 있다.73)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말로나 글로 많이 퍼졌기에 그것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북경교구 교구장 서리였던 남경 교구장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을 방해하고 그를 죄수처럼 구금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로 우회하여 북경의 서쪽 지역과 달단 지역으로 통해서 조선으로 향한 길을 찾게 된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보았다. 북경에 온 조선의 교우들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면담이 쉽게 주선되지 않았던 것 역시 남경 주교의 잘못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사절단은 일 년에 한 번밖에 북경을 방문하지 않으며, 그 사절단은 북경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만자와 북경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모색한 입국로의 사정 역시 잘못 이해된 것으로 보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노상강도와 맹수가 득실거리는 달단 황야를 가로질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경솔한 지시를 했다고 말하거나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서만자에서 마가자까지, 마가자에서 6일 걸리는 몽골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상강도도 없고, 이리 몇 마리 외에는 맹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만주 지역에 들어서면 마차와 여행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앵베르 주교는 왕 요셉의 요동 길 탐색을 조선에 들어가는 북쪽(함경도 지역)의 길을 새롭게 탐색하러 간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이 본 중국의 지리책에는 그쪽에 높고 험한 산들이 있는데, 그 산맥을 통해서 무장한 인삼 밀수꾼들이 조선에까지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한다. 만주 지역에 들어간 왕 요셉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남쪽 길로 봉황성과 그 남쪽에 있는 변문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양에서 출발하여 조선을 향해 남쪽으로 걸어가는 길로 3일 동안 걸어가면, 몽골에서 오는 이 길과 북경에서 오는 국도가 교차한다는 것이다. 즉 그가 걸어온 길과도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왕 요셉이 답사한 새로운 길로 가기만 하면 조선인 안내자가 없이도 조선에 밀입국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 역시 전적으로 거짓된 이야기로서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조선과 중국과의 국경에 있는 무인 지대가 몹시 위험스러운 곳이라는 소문 역시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변문에서 압록강까지의 12리 외 정도의 넓은 땅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 지대인 것이 사실이지만, 변문과 의주 사이 그 무인 지대의 꽤 넓은 계곡에 나 있는 길은 잘 닦여져 있다는 것이다. 황제의 뜻에 따라 누구도 경작하지 못하고, 살지 못하게 되었을 뿐 이 길을 통과하다가 시냇가에 앉아서 가져온 도시락도 먹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이는 앵베르 주교가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보다는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있다고 보았다. 앵베르 주교는 지난 3년 동안 해마다 한 명씩의 선교사가 조선에 무사히 들어온 것으로 보아 다른 선교사들이 조선 국경이 애초에 알려진 것만큼 통과가 불가능한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주에 있는 조선 관문은 조선인들에게조차도 지나치게 엄격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이다.74)

 

따라서 앵베르 주교는 조선이라는 자신의 선교지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로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하게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해서 이미 지적된 내용이다. 그가 입국하기 전과 달리, 입국 이후 선교사들이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에 의하면 앵베르 주교는 요동 지역에 연락처를 마련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75) 이미 조선으로 파견을 받은 칼레리 신부에게 설령 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달단 지역에서 조선 선교사들을 위한 연락처를 마련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조선 대목구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 국경 너머에 있으면서 조선 신학생들을 돌보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어도 순조로운 편지 왕래를 주선하며, 조선에 있는 세 명의 선교사가 죽은 다음에라도 계속해서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자신이 요청한 부주교가 요동 지역에 거처를 정하여 조선 대목구장이 추방당하거나 사망하면 언제든지 조선에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으로까지 나아간다.76)

 

이에 앵베르 주교는 페레올 신부에게도 조선의 북쪽으로 가서 변문을 통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덜 위험한 연락망이 있는지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77) 물론 그는 요동 지역에 그러한 연락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교역할 수 있는 기회가 연간 세 번밖에 없으며, 그리고 조선쪽 관문이 몹시 까다롭고 엄격하기 때문에 교역이 가능할 때에도 파발꾼을 보내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78) 더욱이 선교사들이 계속적으로 요동 지역을 통해서 입국하게 된다면 너무 큰 화젯거리가 되어서 요동 지역의 교우들을 불안하게 하고 위태롭게 할 우려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79)

 

다음의 기록은 앵베르 주교가 여전히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저는 세계 일주를 하다가 해변을 구경하듯 가끔 조선 동쪽 연안을 따라 운항하는 프랑스 프리깃 함들이 적어도 음료수를 구입하려고 조선 항구에 입항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전에도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랄 수도 없는 그런 입항에 대한 희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조선의 무능하고 약한 정부는 입항하는 외국 선박을 보게 되면 의심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긴 너무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구리나 생사를 팔 때에 이익이 날지 모르지만 상인들은 큰 이익을 남길만한 장사를 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주로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삽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서쪽에, 곧 서남 지역에서부터 서울을 흐르는 강의 하구가 있는 넓은 만까지의 서해안에 교우촌이 더러 있습니다. 프랑스 선박들이 조선에 기항할 경우에 우리는 더 쉽고 빠르게 마카오나 파리와 연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외국 배편으로 보내온 물건들을 받을 목적으로 그 배와 살짝 접선하려고 신자인 어부들의 작은 배를 밤에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생긴다면 한번 시도해 보기를 르그레주아 마카오 대표부 경리부장 신부님께 부탁드립니다.80)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해안을 따라 운항하는 프랑스 군함과 서해안에 더러 있는 교우촌의 교우들이 서로 만날 수만 있다면 해로를 통한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 군함을 통해서 더 쉽고 빠르게 마카오나, 더 나아가 프랑스의 파리와도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프랑스 군함에 대한 관심은 매우 집요할 정도이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국왕이 프랑스 국왕을 대부로 해서 세례를 받게 된다면 프랑스 국왕이 프리깃 함을 보내어 조선의 일본에 대한 조공 의무에서 해방시켜 줄 수도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81)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3일자 서한에서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82) 그는 배를 가져 해로를 이용하면 더 쉽고, 더 빈번한 연락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연락소의 문제와 연결된다. 요동 지역에 연락소를 가졌다 해도 그 연락소의 성격에 따라 마카오 극동대표부와 조선 대목구 사이의 연락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가 요청한 것처럼 앵베르 주교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곳에 대한 선교를 맡게 되면 그곳 신자들의 신임을 얻고 난 후에 조선 대목구가 그곳 신자들의 도움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그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적인 연락소만83) 가졌을 경우 그곳 신자들의 신임을 얻는 일은 꽤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보았다.

 

앵베르 주교는 해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밖에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먼저 교우인 중국인 어부 한두 집안과 관계를 맺어 그들이 우리와 친해지게 한 다음, 그들을 조선의 해안에서 되도록 멀지 않은 ‘양부’라고84) 하는 큰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소도시라고도 할 수 있는 항구 근처에 정착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머무를 집과 작은 배 한두 척을 구입할만한 자금을 준다는 것이다. 이때 약속 장소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만에 있는 곳으로 정하게 되면, 몇몇 조선 교우들이 어부로서 이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 만에 중국 어부들도 고기를 잡으러오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보낸 조선 어부들과 선교사의 일을 돕는 중국 어부들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신호를 보게 되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서로 연락을 하여 주고받을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이것을 모방 신부가 2년 전에 구상한 것으로, 오드마르 주교가 베트남에서 시도한 것을 참고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오드마르 주교는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을 건조하여 신자 어부의 경제 및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한편, 선교사들의 밀행에도 사용하였던 것이다. 앵베르 주교도 이를 이용해 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앵베르 주교는 이를 이론적으로는 훌륭한 구상으로 보이지만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런 계획을 실현하려면 아주 용감하고 유능한 사람이 꼭 필요한데 어부들, 특히 조선의 교우 어부들 가운데 그만한 용기와 재주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요동 지역에 연락소를 우선 정해 놓은 다음에 그 구상의 실현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좋을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의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 현재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는 것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조선 국내와 외부 사이의 상시적인 연락망 구축으로 이해되고 있다.85) 그것도 먼바다로까지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연근해의 어선을 이용해서 서신을 주고받자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그와 같이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역시 선교사의 입국로의 개척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앵베르 주교의 최종 목표는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해로를 통해서 조선 대목구와 마카오의 극동대표부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꾀하였던 것이다.

 

한편 앵베르 주교가 이러한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페레올 신부에게 지시한 사실이 주목된다. 페레올 신부는 이에 대해서 “이 계획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으며, 중국과 조선 사이에 훨씬 더 손쉽고, 훨씬 더 신속하고, 훨씬 저렴하게 전교지와의 연락망을 구축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행될까요? 하느님은 아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86) 그는 중국과 조선의 연락망 구축으로 한정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앵베르 주교가 그에게 조선의 북쪽으로 가서 변문을 통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덜 위험한 연락망이 있는지를 함께 알아보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이 역시 조선 입국로와 연결된 문제로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이와 같이 요동 지역에서 육로와 해로의 거점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또한 중국에서 조선의 해안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요동 지역을 다시 거치는, 다시 말해서 육로와 해로의 결합이라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아마도 압록강에 인접한 요동 지역의 해안에 도달한 다음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려던 계획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1839년 3월 30일자 서한에서도 앵베르 주교가,

 

제가 작년에 신부님께 말씀드린 계획에 따라 우리가 달단 지역에 작은 연락소를 가져 중국 어부들과 조선 어부들이 각각 배를 타고 바다에서 안전하게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상호 간 연락은 여전히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작년에 말씀드린 그 계획을 실행하려면 우리는 큰 난관에 봉착할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신부님께 보내드린 편지에서 그 신학생들을 달단 지역으로 보내는 일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조선과 가깝고 조선과 교류가 있는 나라로 조선 학생을 보내는 것은 달단(만주) 대목구와 갓 태어난 조선 대목구에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87)

 

라고 하여, 달단 지역에 작은 연락소를 두고, 이를 기반으로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였던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의 북경교구와 산서 대목구에서 일어난 박해의 여파로 당시 달단 지역의 상황 역시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조선의 신학생을 페낭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 자신의 의견을 취소하고 있다. 그만큼 앵베르 주교는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1839년 앵베르 주교가 순교함으로써 그의 입국로에 대한 고민은 다음의 조선 대목구장에게 커다란 과제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에 의해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가 개척되었던 것이다. 페레올 주교의 입국로 구상에 대해서는 현재 육로 입국의 가능성을 계속 타진하면서, 이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판명될 경우 마지막 선택으로서 조선과 중국 사이의 황해를 가로지르는 해로 입국의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88) 그러나 페레올 주교 역시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때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그보다 더욱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앵베르 주교를 거치면서, 마침내 페레올 주교에 의하여 중국의 강남 지역을 통해서 직접 조선에 들어오는 길까지 열리게 되었다고 하겠다. 즉 앵베르 주교의 계획이 그의 영향을 받은 페레올 주교에게 계승되면서 비로소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과 관련된 브뤼기에르 주교와 앵베르 주교의 구상과 활동을 알아보았다. 이는 모두, 조선인 신자들이 준비하여 제안한 입국로가 아니라, 선교사들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모색한 조선 입국로였다. 이 글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한 부분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과 이른바 재치권의 상호 관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새롭게 번역한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8)를 보면 “여행기가 지닌 교회사적 의미”에서,

 

위에서 개괄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일정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있다. 즉 중국을 거쳐서 조선으로 가려면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최단거리를 선택하면 되었을 터인데, 무슨 이유로 여러 번에 걸쳐 우회하는 여행길을 선택하였으며, 또한 여행 자체는 왜 그렇게 험난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9세기 당시 중국 전역에 세워진 교구 및 준교구들 사이에서 재치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을 파악해야 한다.89)

 

라고 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일정을 재치권과 연결시켜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한 요소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중국 내 여행 경로나, 조선 입국로 모색의 전체 모습을 그려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회들 사이의 상호 관계만이 아니라 중국에 머물고 있었던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관계가 미친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면 중국인 신부를 비롯한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 다시 말해서 그들의 협조 여부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과 재치권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만이 아니라 앵베르 주교 및 페레올 주교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지역별로 어떠한 변화 양상을 보여 왔는가 하는 점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김규성, <19세기 전 · 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시도와 서해 해로 -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김정환, <18 · 19세기 조청교역로를 통한 조선천주교회의 대외교류>, 《부산교회사보》 50, 부산교회사연구소, 2006.

서종태,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정양모 ·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정양모 역,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출판사, 2007.

조현범,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 ― ―,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 ― ―, <조선 대목구 설정과 선교사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 ― ―,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체류>,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 ― ―,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 산서를 떠돌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차기진,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교회사연구》 1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여행기가 지닌 교회사적 의미>,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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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범, <조선 대목구 설정과 선교사 입국>,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2, 2010, 210~213쪽.

2) 정양모 ·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07, 130쪽.

 

3)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을 다룬 기존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차기진,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교회사연구》 12, 1997.

김정환, <18 · 19세기 조청교역로를 통한 조선천주교회의 대외교류>, 《부산교회사보》 50, 2006.

서종태,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교회사학》 5, 2008.

조현범,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교회사학》 5, 2008.

- - -,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00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여행기가 지닌 교회사적 의미>,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08.

김규성, <19세기 전 · 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시도와 서해 해로 -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2, 2009.

조현범, <조선 대목구 설정과 선교사 입국>,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2, 2010.

 

4) 최근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서는 조현범의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브뤼기에르의 중국 여행에 대해서는 복건 지역 및 산서 지역을 다룬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체류>,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2011 및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 산서를 떠돌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2011이 크게 참고가 된다. 후자의 글에서는 앵베르 주교가 사천성 성도에서 출발하여 서만자까지 간 경로도 함께 다루고 있다.

 

5)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30~133쪽.

6) 위의 책, 138~139쪽.

7) 1832년 11월 9일자 서한, 위의 책, 157쪽.

8) 위의 책, 175쪽.

 

9) <해제>, 위의 책, 47쪽. 여러 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현범의 교시에 의하면 한문 필사본에는 그러한 구절이 없으며, 라틴어 서한에만 조선으로 가는 여정의 중국 지명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목 서한의 라틴어본은 누가 만들었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 밝혀야 할 점이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라미오 신부가 작성했을 가능성도 알려주었다. 그다음에 언급되는 브뤼기에르 서한과의 차이도 나타나지만, 여기에서는 지적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10) 위의 책, 190~191쪽.

11) 정양모 역,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07, 113~115쪽.

12) 위의 책, 112쪽.

13) 1833년 4월 18자 서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33쪽.

14)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57쪽.

15)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50쪽.

16) 위의 책, 248쪽.

17) 위의 책, 248쪽.

1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59쪽.

19)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8쪽.

2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59쪽.

21) 위의 책, 191쪽.

2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6~247쪽.

23) 1834년 6월 5일자 서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53쪽.

24) 1834년 6월 5일자 서한, 위의 책, 253쪽.

2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9쪽.

26) 위의 책, 215~216쪽.

27) 위의 책, 214쪽.

28) 위의 책, 235~236쪽.

 

29) ‘동달단’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는 요동 혹은 요동의 일부로 브뤼기에르 주교나 앵베르 주교가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일단 요동 지역으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30) 1833년 7월 28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양자강을 건너면서 “그리고 만주와 조선을 가르는 압록강이 있는데, 바로 선교사들이 조선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얼음 위로 건너가야 하는 그곳입니다”라고 하고 있다(위의 책, 163쪽).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이 루트를 통해 조선 입국 가능성을 모색하였음을 보여준다.

 

31) 위의 책, 218쪽.

32) 위의 책, 365쪽.

33) 위의 책, 279쪽.

34) 위의 책, 222쪽.

35) 위의 책, 224~226쪽.

36) 위의 책, 227~228쪽.

37) 위의 책, 279~280쪽.

38)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13쪽.

39) 위의 책, 321쪽.

4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09쪽.

41) 위의 책, 303쪽.

4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13쪽.

43) 위의 책, 308~309쪽.

44) 위의 책, 313쪽

45) 위의 책, 314쪽.

46) 위의 책, 291쪽.

47) 위의 책, 328~336쪽.

48) 1835년 9월 28일자 서한(위의 책, 346쪽)에서도, 10월 6일자 서한(위의 책, 354쪽)에서도 요동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요청하고 있다.

49) 1835년 2월 8일자 서한, 위의 책, 310쪽.

50) 1835년 10월 2일자 서한, 위의 책, 351쪽.

51) 1835년 2월 8일자 서한, 위의 책, 300~310쪽.

52) 1835년 10월 2일자 서한, 위의 책, 352쪽.

53) 1835년 10월 6일자 서한, 위의 책, 355쪽.

54) 1833년 8월 10일자 서한, 《앵베르 주교 서한》, 2011, 43쪽.

55) 1833년 8월 14일자 서한, 위의 책, 55~57쪽 ; 1833년 8월 17일자 서한, 위의 책, 61쪽.

56) 1833년 8월 10일자 서한, 위의 책, 45~47쪽.

57) 1833년 8월 14일자 서한, 위의 책, 53~55쪽.

58) 위의 책, 77~83, 87~89쪽.

59) 1837년 6월 16일자 서한, 위의 책, 99~101쪽.

60) 위의 책, 151, 153쪽.

61) 위의 책, 99쪽.

62) 1837년 6월 18일자 서한, 위의 책, 141쪽.

63) 1837년 8월 14일자 서한, 위의 책, 159~161쪽.

64)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위의 책, 221쪽.

65) 1837년 10월 10일자 서한, 위의 책, 171쪽.

66) 1837년 10월 10일자 서한, 위의 책, 175~177쪽.

67) 1837년 12월 6일자 서한, 위의 책, 199~210쪽.

68)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위의 책, 213~215쪽.

69) 1837년 12월 6일자 서한, 위의 책, 201~209쪽.

70)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위의 책, 215~216쪽.

71) 위의 서한, 219~221쪽.

72) 1837년 12월 17일자 서한, 위의 책, 227쪽.

73)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위의 책, 237~247쪽.

74)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위의 책, 263~265쪽.

75) 위의 책, 319쪽.

76) 1838년 12월 1일자 서한, 위의 책, 381쪽.

 

77) 페레올 주교의 1840년 8월 1일자 편지. 조현범,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94쪽에서 재인용함. 그러나 페레올 주교가 이 편지를 발견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78)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위의 책, 419쪽.

79) 1837년 12월 17일자 서한, 위의 책, 233~235쪽

80)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위의 책, 257~259쪽.

81) 1838년 12월 1일자 서한, 위의 책, 397쪽.

82)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위의 책, 421~423쪽.

 

83) 조현범은 임시 거처로 번역하고 있다(앞의 논문, 93쪽). 두 개의 기능을 동시에 하였던 듯하다.84) 양부는 현재 요동반도의 항구, 즉 태장하로 비정되고 있다(조현범, 위의 논문, 96쪽). 압록강 유역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압록강과 가까운 지역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번역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페레올 주교의 1840년 8월 1일의 편지 내용과는 달리, 두 척이 아니라 배 한 척으로, 압록강이 아니라 조선의 근해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85) 조현범, 앞의 논문, 93쪽.

86) 페레올 주교의 1840년 8월 1일자 편지. 조현범, 앞의 논문, 94쪽에서 재인용함. 

87) 1839년 3월 30일자 서한, 위의 책, 465~467쪽.

88) 조현범, 앞의 논문, 92쪽.

8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08, 19~20쪽.

 

[교회사 연구 제41집, 2013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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