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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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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18 ㅣ No.312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하느님이 비가 내리게 하신다면 하필 바다로 쏟아지게 하실 게 뭐람? 거긴 물이 무진장이잖아! 게툴리아는 목이 타서 죽는데 기껏 비를 내리신다는 것이 바다로 쏟아지게 하신다? 하느님도 섭리도 엉터리라고!”(「시편 강해」 148,10)

 

로마제국의 곡창으로 간주되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였지만 아우구스티노의 고향 타가스테(알제리의 수크아라스)는 사막에 가까워 그다지 비옥하지 못했고, 하느님의 섭리를 운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곧잘 조롱이 터져나오던 사회 분위기였다.

 

자치도시 타가스테의 공무원이던 부친 파트리치오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되레 아내한테 큰소리치던 속물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를 보이는 큰아들 아우구스티노를 대도시로 유학 보내려 가산을 털 만큼 깨인 사람이어서 주위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독실한 신자 아내의 열성으로 죽을 임시에 세례를 받는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오자마자 십자성호로 그음을 받았고, 그분의 소금으로 절여져 있던” 아우구스티노도 어려서 위장 폐색으로 신열이 높아 죽을 지경이 되어 세례를 받을 뻔했지만 금세 낫자 세례가 미뤄졌다. 어머니 모니카로서는 아들이 “아직 더 산다면 때가 더 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나 보다라는 게 아들의 회고다(「고백록」 제1권 11.17).

 

그래도 모니카는 서른 살 먹은 아들한테서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게 어머니 덕이지요.”(「참된 행복」 1.6)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치맛바람이 대단했다. 처자식만 데리고 출셋길을 찾아 몰래 로마로 떠나려는 아들을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매달렸다가 카르타고 선창에서 따돌림받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훗날 기어이 밀라노까지 쫓아가서 아들이 16년이나 데리고 살던 여자를 내쫓고 열두 살짜리 양갓집 규수와 약혼시키는 극성도 보였다.

 

 

“저의 갓난이 시절은 죽은 지 오래지만 저는 살아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당신께 고백합니다. 제가 기억도 못 하는 저의 시초와 갓난아기 시절을 들어 당신을 찬미하렵니다. 주님, 당신에게서 아니면 어디서 이런 생물이 나오겠습니까? 어느 누가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장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6.10)

 

세계와 인간을 ‘피조물’로 규정하여 ‘창조설’을 확립한 서구 사상가가 아우구스티노다. 애초에는 이렇게 자백한다. “주님, 제가 막상 드리려 하는 말이란 제가 어디로부터 이곳으로 왔는지 모른다는 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면 어디로부터 이 죽을 생명, 아니면 산 죽음으로 왔는지 모릅니다”(6.7).

 

인간이 자기 출생을 두고 “파도치는 망망대해 같은 이 세상으로 우리를 제멋대로 내던진 것이 신이냐 자연이냐 필연이냐 우리 의지냐?”(「참된 행복」 1.1)는 의문을 곱씹다 얻어낸 답은 이렇다. “당신 자비가 저를 거두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빚으셨습니다. 부친에게서 또 모친 안에서 시간으로 저를 빚으셨습니다”(6.7). 운명이나 신들의 장난으로 ‘내던져진’ 인생보다 창조주의 손길로 역사의 한 시점에 ‘고이 놓인’ 인생이 훨씬 살 만하다.

 

존재의 첫 순간부터 하느님 손길로 보살핌 받았다는 안도감이 ‘찬미의 고백’을 빚어낸다. “사람 젖에서 오는 위안이 저를 거두어주기는 했으나 저의 어머니도 스스로 자기 젖가슴을 채운 것은 아니었고, 당신께서 그들을 통해서 갓난이 시절의 음식을 제게 베풀어오신 것입니다. 그때 제가 하던 짓이라곤 고작해야 젖을 빨고 기분 좋아서 순해지거나, 저의 몸뚱이가 언짢으면 우는 것밖에 더 없었습니다”(6.7).

 

“당신은 존재하시고, 하느님으로서 존재하시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주님으로서 존재하십니다”(6.9). ‘존재’가 하느님께 받은 가장 위대한 은총이고, 생명도 인식도 사랑도 존재의 그릇에 담기는 선물(그리스도교 ‘존재론’)이었다! “당신께서 설령 제가 어린애인 채였으면 하고 바라셨다 하더라도 저는 존재하고 있었고, 살아있었고, 지각하고 있었습니다”(20.31).

 

기우는 가세에 유학비를 챙겨 카르타고로 가자마자 여자와 동거하고 열여섯에 아들을 낳아 ‘아데오다투스’(하느님이 점지해 주신 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기른 경험은 ‘이노센스(innocens)’라는 화장품 이름을 재음미하게 한다. 

 

“어린애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터에 제 젖을 먹는 아기를 보고서는 새파래지면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젖가슴에서 풍부하게 솟아나 젖이 넉넉한데 그 아이와 운명을 못 나누겠다는 심보가 과연 무죄함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죄하다는 것은 지체들의 가냘픔이지 어린이들의 맘씨가 아닙니다.”

 

소년기에도 “놀기 좋아해서, 연극에서 본 것을 흉내 내려고 안달하면서 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짓말로 선생들과 부모님까지 속이곤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곳간과 식탁에서 훔쳐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놀이에서도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심에 속임수를 써 승리를 얻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다른 애의 속임수를 밝혀낼 경우에는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해댔는지, 제가 들켜서 욕을 들을 때는 얼마나 사납게 덤벼들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디 어린아이의 무죄함입니까? 주님,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적에 겸손의 표로 인정하신 것은 어린 시절의 키뿐이었습니다”(19.30). 이 체험은 교부가 그리스도교에 ‘원죄론’을 심어놓는 계기가 된다.

 

 

“단검으로 최후를 결행한 디도를 두고 울던 시절”

 

소년기(제1권 8.13─20.31)가 오고 “글을 배우라고 학교에 들여보내졌는데 가엾게도 저는 글을 배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우기에 조금이라도 굼뜨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교사들의 체벌은 “아담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수고와 고통”이라지만 마치 주리를 틀고 인두로 지지는, 순교자의 수난 같았는데 그렇게 해서 주입되는 게 고작 “출세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에 종노릇하게 말솜씨 부리는 기술에 뛰어나야 한다는 것”(9.14)이었다! 산수나 암기과목에는 정떨어졌고, 그리스어에도 영 취미를 못 붙여 그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유일한 교부로 남는다.

 

이 씁쓸한 경험은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타고난 기억력과 상상력을 살리자는 아우구스티노의 탁월한 교육철학을 낳는다. 훗날에 그가 집필한 자유학예(산술, 기하, 문법, 음악, 철학, 미학, 수사학) 교재들은 중세 내내 교과서로 쓰였고, 교리교육에서도 천 년 넘게 통용되던 교본들이 집필되며, 「그리스도교 교양」(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8년)은 지금도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으로 연구되고 있다.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기해서 인용하는 명석한 두뇌, 활달한 기질, 인간과 자연의 삶에 적극적으로 말려드는 성격은 그를 라틴어에서는 은성기(殷盛期) 로마문학을 대표할 문장가로, 북아프리카 출신임에도 밀라노 황실 교수로 초빙되는 수사학자이자, ‘그리스도교 철학’의 창시자요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전대미문의 논쟁가로 성장시킨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심취하여 속세 문학에 몰두하던 소년시절은 훗날 많은 것을 회상케 한다. “자신을 가엾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네아스를 사랑하다 죽어간 디도의 죽음을 통곡하면서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지 않다가 죽어가는 자기의 죽음은 통곡할 줄 모르는 인간보다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13.21)

 

‘인간 속습의 강물’이라 부르는 속세 문학과 예술이 유피테르를 비롯한 제신들의 외설적인 야담을 미화시키노라면 “얼마나 훌륭한 신인가! 하늘 신전들을 지고한 천둥으로 뒤흔드는 분이야. 그러니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그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래 난 했지. 그것도 기꺼이!”(16.26)라는 탕아들의 핑계로 실행된다.

 

청년 시절의 방탕으로 미루어 “욕정에 찬 상태에 있음으로써 당신 얼굴에서 멀어지는 것”(18.28)이고 “하느님은 비록 숨어계시고 드높이 침묵 중에 계시지만 불법한 욕정 위에다 맹목을 징벌로 뿌리시므로”(18.29) “도덕적 질서를 어긴 모든 영혼은 본인에게 자기 벌이 된다.”(12.19)는 조숙한 실존적 고백을 낳는다.

 

이렇게 ‘악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파괴한다.’는 명제는 「고백록」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 성염 요한 보스코 -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대학교에서 라틴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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