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0: 3세기 (1)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05 ㅣ No.88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 3세기 ①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비판 속에도 조화 이루려는 노력 잊지 않아

 

 

- 에페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에서 만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이들은 서로에 대한 날선 비판을 했지만 상대의 방법을 조금씩 받아 들이며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3세기 전후로 로마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대표적인 지역에서 교리교육 학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교는 2세기에 횡횡했던 이단 사상에 단호하고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그리스도인을 지키는 방법으로 올바른 신앙 교육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리교육 학교는 지역마다 고유한 방법론으로 교육하면서 때로는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교리교육 학교가 강조했던 교육 방법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은 사뭇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설립된 교리교육 학교가 가장 예민하게 대립했습니다.

 

 

우의적, 영적 의미 -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판테누스(Pantaenus, ?~200?)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 그리스도교 철학학교를 설립해 그리스 철학 방법론으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60?~215 이전)였습니다. 스승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된 클레멘스는 202~203년에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의 박해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까지 이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문학과 복음을 조화시켜 가르쳤습니다. 이때 클레멘스가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 Alexandrinus, 185?~254)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교육을 받은 오리게네스는 로마 황제 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집안을 돌보기 위하여 사설 문법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데메트리우스는(Demetrius Alexandrinus, 재임 188/89~231)는 그에게 교리교육 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성경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몇 명에 걸쳐 설립되고 발전했던 교리교육 학교와 학풍을 ‘알렉산드리아 학교’ 혹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초월 세계에 관심을 둔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중기 플라톤 사상을 주장했던 초세기 유다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필론의 성경 해석 방법론을 받아들였습니다. 필론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의미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자적 해석은 잠정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를 살피고, 우의적 해석이야말로 상징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필론식 성경 해석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 해석에서 단순한 사람을 위한 문자적 의미와 배운 사람을 위한 윤리적 의미 및 그리스도와 일치를 바라는 사람을 위한 영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은 추상적이며 초월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출발하여 연역적인 방법으로 ‘위로부터의 하강 그리스도론’을 전개했습니다. 이 특성은 그리스도인에게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장려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영역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면서 신비체험을 갈망하는 영성 생활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문자적, 역사적 의미 - 안티오키아 학파

 

안티오키아에서 활동했던 순교자 루키아누스(Lucianus Antiochenus, 250?~312)는 엄격한 수덕 생활을 실천하면서 성경 연구에 전념했던 사제였습니다. 루키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 해석 방법에 반발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성경 해석 방법을 가르치는 교리교육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루키아누스가 설립한 학교와 학풍을 ‘안티오키아 학교’ 혹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시초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루키아누스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훗날 이단 사상인 아리아주의 창시자가 되었던 아리우스(Arius, 256?~336)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인 루키아누스마저 이단 사상가로 의심받았습니다. 이후 한동안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을 계승한 뛰어난 학자들이 나타나지 못하다가, 4세기 후반에 가서야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Diodorus Tarsensis, 344 이전~394 이전), 콘스탄티노플로스의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 349/50~407) 및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us Mopsuestenus, 350?~428) 등이 나타났습니다.

 

현실 세계에 관심을 두고 실천 철학을 다루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 안에 담긴 문자적, 문법적 및 역사적 의미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안티오키아 학파는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려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예형론적(豫形論的, typological) 의미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은 예수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출발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아래로부터의 상승 그리스도론’을 전개했습니다. 이 특성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는 윤리적 가치를 심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윤리 생활을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영성 생활 및 윤리 생활

 

두 학파의 상반된 견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훼손하고 성경을 신화로 만들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껍데기만 살피는 육적인 해석으로 추락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두 학파는 상대를 비판하면서도 상대의 방법을 조금씩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초월 세계를 추구하는 신비 생활을 실천하며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둔 경험을 바탕으로 사목적인 관점에서 윤리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의적이며 영적 의미를 살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은 오랫동안 지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탐구했고 영성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문자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살핀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은 한동안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근세 들어 역사비판적 성경 연구 방법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5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1,673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