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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마태오복음 5,1-12 참된 행복 (2017. 1. 29. 연중 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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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1-27 ㅣ No.2160

그때에 예수는 군중을 보고 산으로 올라가 앉았다. 제자들이 주위에 모이자 그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군중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다. ‘(hill)’은 세상에 대한 하늘나라의 우월성 또는 육에 대한 영의 우월성을 상징한다. 예수는 군중의 요구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예수 자신이 속한 하늘나라로 격상시킨다. ‘앉음은 하느님 안의 안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손에 잡히는 즐거움을 쫓느라 늘 분주하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평화에 머물러 있다.

 

군중은 예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예수와 군중 사이에는 너무나 큰 불일치가 가로놓여 있다. 세상과 하늘나라, 영과 육, 욕망과 성령, 죄와 은총, 생명과 죽음, 거짓과 참 사이에는 공통점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통하여 군중에게 전해져야만 한다. 제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예수를 따라나선 이후에 끊임없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있다.

 

제자들은 성령에 힘입어 예수의 말을 알아듣고, 이를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예수가 진리임을 세상에 증언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군중은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알아듣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만족할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모욕하고, 박해하고, 여러분에 대하여 온갖 종류의 악한 거짓말을 지어낸다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큰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 앞서 예언자들도 이런 박해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수의 말을 윤리규범 또는 도덕률로 이해하는 즉시 오류에 빠진다. 성령의 지혜가 아니면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은 각각 두 개의 병행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문장은 외적인 활동이며, 뒤의 문장은 내적인 활동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영적 인간이 행복한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그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실제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의 지혜에 힘입어 앞과 뒤의 문장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다. 여덟 가지의 행복은 영적인 지혜가 점점 성숙하는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마음은 욕망이 활동하는 장소이며 가난은 욕망에 초연한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예수가 말하는 가난은 영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으로 가난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여 영이 빈곤한 것을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일은 없어야만 하겠다. 영이 빈곤한 영적 인간은 있을 수 없다. 루가복음(6:21)에는 그냥 가난한사람으로 되어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영적인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과 상관관계는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재물에 초연하므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지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영적으로 가난하지는 않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물질적으로는 부자일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왕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여 즉시 왕위를 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왕위를 버린다면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큰 혼란을 겪을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결국 세상과 하늘나라를 둘 다 취할 수는 없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속해 있으므로 행복하다. 그러나 세상의 영화를 쫓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으니 하늘나라의 행복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슬픔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잃었을 때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없다면 나의 소유물도 나의 친구도 나의 신념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의 영화를 포기하는 것은 곧 욕망을 추구하는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영적 인간은 거짓 자아 또는 육적인 자아를 부정(否定)함으로써 참된 자아 또는 영적인 자아를 얻는다. 이때 거짓 자아로서는 자신을 잃는 큰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위로는 상실에 대한 보상이다. 하느님께서는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사람에게 참된 자아(생명)의 깨달음을 주신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거짓 행복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위로는 그럴듯한 말로 잠시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슬픔의 원인을 없애지 못한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온유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다. 영적 인간은 하느님께서 누리는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욕망이 활동하고 있다. 영적 인간이 다시 욕망에 굴복하면 즉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욕망을 다스리는 한편 더욱 깊어지는 마음의 고요함을 누린다.

 

은 영적 인간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이에 비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가난한 마음을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는 하늘(하느님)에 뿌리를 내리면서 땅(세상)을 다스린다. 영적 인간은 세상에 초연함으로써 성령에서 오는 고요한 부드러움을 얻으며, 성령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린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의 땅(하늘나라)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만족할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세상의 왕국이 추구하는 옳은 일 또는 의 가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을 원한다. ‘옳은 일이란 성령의 지혜로 이루어지는 신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선이다. ‘주림은 결핍에 대한 자각과 완전한 에 대한 갈망이며 목마름은 하느님께서 완전한 선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다. 각각 회개와 망덕에 해당한다. 세상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懷疑)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의지를 낳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의지는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영적 인간은 하느님의 신적인 사랑을 누림으로써 비로소 완전하게 만족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비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영적 인간은 세상 사람들의 모든 허물이 영적인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들을 미워하는 대신에 그들이 겪고 있는 죽음의 고통을 동정한다.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여 완전히 열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능력을 더욱 풍성하게 내려주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함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며, ‘마음이 깨끗함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그분과 완전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영적 인간은 하느님과의 지극한 일치를 통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을 뵙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늘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누리는 만족이다. 세상의 평화는 욕망의 충족, 경쟁자에 대한 승리, 경쟁자들 사이의 일시적인 타협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영적인 평화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절대적이고도 영속적인 것이다. 영적 인간은 세상의 다툼에서 벗어나 자신이 누리는 평화를 세상 사람들에 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참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그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앞서 옳은 일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일이며, 여기에서의 옳은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의 지배자인 부자, 지혜로운 자, 권력자의 비웃음과 질시와 박해를 받을 것이지만 그에 흔들리지 않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하늘나라를 위해 힘쓰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다.

 

처음에 언급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면, 여기에서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완성하고 있다. 영적 인간이 세상의 박해를 받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완성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령(생명의 진리)은 사탄(욕망이 빚어낸 허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때문에박해를 받는 것은 영과 육, 성령과 사탄의 싸움을 반영한다. 이 싸움에서는 성령을 따르는 영적 인간이 반드시 승리한다. 성령은 이 세상을 창조하는 권능이며 사탄은 욕망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박해받는 일을 기뻐하고 앞으로 거두게 될 큰 승리를 미리 반기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 준비된 큰 보상은 사후의 복락을 뜻하지 않는다. ‘하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일치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아들은 아버지와 일치함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참된 생명, 지혜, 자유를 누린다. 성서의 예언자들도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자의 박해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무조건 찬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렸던 참된 행복을 알아야만 한다.

 

예수 때문에가 아닌 이익, 권력, 이념 등 때문에서로 싸우다가 패배자가 승리자에게 박해를 받는 것은 육과 육, 욕망과 욕망, 죽음과 죽음의 싸움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는 아무런 행복도 희망도 없다. 예수는 영적 자아인 와 일치하여 일하는 왕이므로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며 또한 세상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다.

    

 

<첨언 1>

루가복음 6:20-26에도 참된 행복의 가르침이 있는데 여덟 항목이 네 항목으로 줄어들었다. 그 대신에 불행 선언이 첨가되었다. 필자는 마태오복음이 예수의 원래 가르침이라고 본다.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루가복음이 마태오복음보다는 후대에 집필된 것으로 본다. 루가는 마태오복음과의 중복을 피하고 간단하게 소개하면서도 참된 행복이 세상 왕국과의 영적 싸움에서 얻어지는 영적 사건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불행 선언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교회 초창기부터 행복 선언에 대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오해가 지금까지도 굳세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탄이라는 허깨비가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첨언 2>

박해라고 하면 흔히 권력자에 의한 폭력적인 탄압과 순교를 상상하는데 이것은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영적 인간이 세상의 박해를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늘나라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싸우는 경우에 한 쪽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서로간의 욕심이 충돌하면 경쟁에서 승리한 강자는 패배한 약자를 박해한다. 이때 박해받는 약자는 세인의 동정을 받기 쉽지만 그를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영적 인간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웃음과 박해를 받는다. 영적 인간이 박해를 받는 것은 그가 진리 편에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사이비교주 또는 위선적 종교지도자가 가르치는 평화가 거짓임을 폭로하여 그들이 누리는 돈, 권력, 명예의 특권을 뒤흔든다. 사실 정치적인 권력자는 영적 인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그를 비웃을지언정 그를 박해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예수를 사형에 처한 사람은 정치지도자(로마총독 빌라도)였지만 그의 사형을 실제로 추진한 사람은 종교지도자(대사제 가야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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