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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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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1 ㅣ No.969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상)


모든 작품에 ‘우리 것’에 대한 연민과 애정 담아

 

 

- 최민순 신부.

 

 

“최민순 신부가 한국교회에 남긴 의미는 그 깊이와 폭에 있어서 측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특히 영성과 문학에 있어서 그의 위상은 참으로 선구자적이고 우뚝해, 차라리 고독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에게 연구를 통해 다가가 조금이나마 배우겠다는 마음, 기리겠다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박일 신부(영성신학자·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는 최민순 신부의 생애를 조망한 논문 「최민순 신부의 생애와 하느님 이해」 서론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신부는 지난 2005년 설립 150주년을 맞이한 서울 대신학교 학술 축제에서 최민순 신부에 관한 연구와 나눔을 신학교 역사에 비춰 조명하기에 앞서, 이 논문을 내놓았다.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이번 호 주인공은 고(故) 최민순 신부(1912∼1975)다. 그의 문학적 면면을 들여다보는 글은 영성신학자로서 그의 삶과 작품들에 관해 연구한 박일 신부의 논문에서 발췌, 정리해 싣는다. 현재까지도 한국교회 내에서 최 신부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이 논문은 최 신부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 자료로 꼽힌다.

 

최민순 신부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그가 체험한 삶의 부조리에 대한 해답으로써의 하느님과 그분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들을 그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특히 시(詩)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야말로 시인의 삶과 내면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민순 신부는 1912년 10월 3일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면 군하리에서 신앙심 깊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부모 슬하에서 출생했다. 그는 열두 살 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족들과 주변의 반대와 걱정은 물론 비웃음 또한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은 동양 도덕을 무시하는 나쁜 학교에 간다면서 꾸짖고, 학생들에게 그와 관계를 끊으라는 파문 선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신심 깊은 아버지의 후원과 당시 진안 어은동본당 이상화 본당신부의 허락에 힘입어, 1923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라틴어과에 입학했다. 이어 철학과와 신학과를 졸업하고, 1935년 6월 15일 사제품을 받았다.

 

- 최민순 신부 시집 ‘님’. 1955년 경향신문사 초판.

 

 

최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미 문재(文才)에 뛰어났으며, 사색을 즐겨했고,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는 서품 바로 다음날부터 수류본당 주임으로 성무를 수행했다. 이어 전주본당 보좌를 거쳐 1938년 전주 해성심상소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특히 이 시기는 해성학교 운영을 통해 신앙과 민족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 젊음의 활력이 불붙던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던 때, 당시 제도권 교회는 친일 노선을 걷고 있었다. 박해의 구실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참혹한 가난 등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이 불가능할 만큼 정신적 겨를이 없게 했다.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분명한 거부 입장을 보이던 교회도 1935년에는 주일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참가한 가운데 평양교구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 교구장 연례 회의’에서 신사 참배 허용을 결정하고야 만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 속에서도, 한국인 성직자들은 일제 강도로부터 육신은 죽임을 당하고 있을지언정 정신만은 죽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1925년 79위 시복 이후 순교성지를 조성하는 등 순교 정신 현양에 힘써왔다. 또 순교 정신을 강화하고 현양 사업을 조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를 창립했다. 전주교구 김양홍 교구장의 권고에 따라 최민순 신부도 이 현양회에 입회해 적극 활동했다.

 

이 활동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 고취라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 활동 가운데에는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의 하나로 어린이 대상 한글 교육 등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고, 성체 거동과 대축일 행렬 등을 통해 민족의 정기를 살리면서 저항 의지를 격려하는 기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집회의 자유가 없던 시절, 최민순 신부도 이러한 대열에 적극 동참했다. 이렇게 신부와 신자들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강론 등을 통해 혹은 행정 명령 등을 거부함으로써 저항하고, 이로 인해 투옥당하고 각종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민순 신부도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1945년 3월 30일 최 신부는 모교인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에 의한 폐교 조치로 같은 해 4월 17일 사퇴하게 된다. 이어 경성천주공교신학교 교수와 부학장, 도서과장 등을 역임했다. 

 

최 신부는 글재주가 뛰어나고 사색을 즐기는 터라 아마 많은 작품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6·25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리거나 다른 이유로 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가톨릭 청년」에 발표돼 그의 유고집 「영원에의 길」에 실린 작품들 중 저술 연대가 표기된 것들만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표적인 작품은 프랑소와 모리악을 소개하는 문학론인 ‘프랑소아 모리악의 소설론’(1936. 5)이 있다. 또 최 신부가 수류본당 주임 시절 공소를 방문하면서 쓴 수기(手記)인 「양 떼를 찾아」(1936. 6)를 비롯해 단편 소설로「효종」(11936. 6)과 「헌 양말」(1936. 11)이 있다. 「효종」은 극도의 가난에 몰려 죽음의 유혹을 받았던 두 모녀가 삼종 소리에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새 삶을 찾는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또 「헌 양말」은 우리나라 공소의 가난한 교우들의 삶과 신심 깊은 삶을 그린 작품이다. 각 작품들에서는 최 신부 특유의 서정성과 감수성, 이른바 ‘우리 것’에 대한 연민과 끊임없는 애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모든 작품 속에서 묻어난다.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 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군 군종, 서울 봉천1동본당 주임을 역임했다. 이후 이탈리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영성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8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겸 영성지도 신부로 재직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0일,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중)

 

민족과 교회의 혼란과 아픔 포용하며 성모님께 의탁

 

 

8·15 해방은 믿기지 않을 만큼 갑작스레 이뤄졌다. 게다가 6·25 전쟁은 절대적인 궁핍과 도덕의식의 붕괴, 인간 가치의 전락, 사회·정치·경제의 불안과 혼란을 낳았다. 교회는 교회대로 자신의 문제점을 안고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고 애썼다. 빈민 구호 및 자선 활동, 의료 및 사회복지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한 덕분에 ‘밀가루 신자’들도 많았지만, 교세 또한 급성장했다. 최민순 신부는 이러한 모든 면을 마음 깊이 담았고, 고뇌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으로 참여하고 경계하고 일깨웠다.

 

최 신부는 6·25 전쟁 중 1951년 대구대교구 출판부장, ‘대구매일’(현 매일신문) 주간,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사장으로 임명됐다. 그 후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 신문에 수필을 싣고, 신설된 문화란에 글을 쓰고, 구상 시인과 함께 논설도 맡아서 써왔다. 특히 ‘천주교회보’의 명칭을 ‘가톨릭시보’로 변경하고, 출판기관 운영이 어렵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를 위해 사설은 물론 호교론과 신심에 관한 글, 시 등의 원고를 ‘오랑캐꽃’, ‘우당’, ‘약망’, ‘요왕’, ‘돌샘’, ‘산문혈’ 등의 필명으로 써냈다. 하지만 경영에 관한 업무는 모두 실무자에게 일임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 성신교정)로 복귀해 원고만 보냈다. 1953년부터는 부사장인 김수환 신부(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원고만 보내다가, 1956년에 사장직에서 사퇴했다. 이어 최 신부는 신비신학 연구를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1945~1960년 저작활동

 

8·15 해방과 6·25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분단 상황 속에서 벌어진 독재 정권의 전횡과 그에 저항한 4·19 혁명 등은 우리 민족과 교회, 최 신부에게 참혹한 역정이었다. 이러한 역정은 과거 일제 치하에서의 체험과 함께 최 신부의 삶과 정신 모든 면에 큰 자국을 남겼고, 사제요 교수로서의 자의식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 신부는 이러한 민족과 교회의 혼란과 아픔을 자기 자신의 혼란과 아픔으로 포용하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겸손되이 성모님께 의탁했다. 특히 이 상처들의 회복을 위한 한탄과 몸부림, 치유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는 모색의 열매들을 홀로 소유하지 않고 갖가지 작품 활동으로 표출해 모두에게 선사했다.

 

최 신부의 다양한 작품들 중 유고집 「영원에의 길」에 실린 작품들 중, 연대가 알려진 것들 위주로 분류해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시 부문에서는 「때는 왔나 봅니다」(1949), 「만도」(1956), 「매괴꽃」(1956) 등을 비롯해, 4·19혁명 당시 많은 청년들이 흘린 피를 서러움과 기쁨의 눈물로 받아들일 고마움으로 표현한 「피의 승리」(1960) 등이 있다. 또한 시집 「님」(1955, 성바오로출판사)과 수기(手記) 「밤의 일기」(1951), 논설 「신문화의 태동과 국민적 자각」(1951) 외 6편 등도 냈다. 호교론으로서는 현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겸손되이 무릎 꿇고 이성의 머리를 숙여 성모께 겸손된 기도를 드릴 뿐이라고 외치며, 당면한 전란 중에 구원을 전구해 주시기를 당부한 「루르드 성모 발현의 의의」(1951), 「선열과 문학운동」(1912), 「가톨릭 신앙의 서곡」(1951)」  외 10편을 꼽을 수 있다.

 

수필은 「부활전야」(1951), 「낙동강」(1954), 「겨자씨」(1956) 외 25편이, 문학론으로는 「J씨에게」(1952)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영원에의 길」에 실리지 않은 강론과 강의록도 다수가 있다. 번역서로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1957)을 냈다. 이 밖에도 최 신부는 많은 강의와 강론, 수필, 단상, 시조, 성가, 축가, 교가, 수도회가 등을 쓰면서 열정적으로 저작 활동을 했다.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내 낙산마루 산책로에 세워진 최민순 신부 시비. 그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고 있는 시 ‘두메꽃’이 새겨져 있다. 시비 뒤편으로는 신학대와 맞닿아 자리하고 있는 서울 성곽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60~1975년 저작활동

 

이 시기, 최 신부의 글은 가르멜 영성에 기초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함께 걸으면서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을 추구하고 찬미 드리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진정한 길을 걸으며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인생살이의 서러움을 뼛속까지 체험한 형제로서의 간절한 부름이요, 성인들에 대한 연구와 기도 및 수덕생활로 보낸 지혜 가득한 학자요 선생으로서의 손짓이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징표를 발견한 예언자로서의 실존이며, 봉헌과 희생의 제사를 지내는 사제로서의 자기희생이요, 자신의 피로 맡겨진 양 떼를 키우는 사목이었다. 이러한 그의 내면은 수필과 시, 그리스도교 및 일반 고전 번역, 강론, 피정 지도, 강의, 성가 및 수도회가 작사 등 모든 면을 통해 드러난다.

 

시집으로는 「밤」(1963), 번역서 「신곡」(1960), 「고백록」(1965), 「완덕의 길」(1967), 「성경의 시편」(1968), 「영혼의 성」(1970), 「돈키호테」(1969), 「깔멜의 산길」(1971)을 펴냈다. 이 외에도 기행문 「구름과 같이」(1964), 명상 「믿는 사람들」(1974), 수필 「천국으로 띄우는 글월?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 영성신학 국제 심포지엄 발표논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풍성하게 내놓았다. 또한 가톨릭대학이 펴낸 최 신부의 「강의록」을 보면, 그의 영성신학적 이해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게 잘 정돈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강의록은 독창적인 구성을 통해, 최 신부의 고유한 관점도 잘 드러낸다.

 

아울러 수필 「무릇 자기에게 돌아가」, 「성 금요일」을 비롯해 「사순절 강론」(1974, 명동성당) 등은 그의 깊은 영성적, 신학적 면모를 드러낸다. 특히 최 신부 최후의 시 「받으시옵소서」는 한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자신의 전 생애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가르멜 영성의 본질에 조명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기울여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구한 그의 영성과 하느님 이해의 절정을 드러낸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27일,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하)

 

온 삶으로 ‘하느님과의 일치’ 보여준 스승

 

 

- 1956년 최민순 신부 강의 모습. 출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

 

 

구원을 향한 여정

 

최민순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선조들이 쌓아둔 신앙적,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했다. 신학교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교육적 영향을 받았고, 특히 스페인에서 신비신학을 연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인생 여정을 보다 풍성하게 이어나갔다.

 

그의 영성적 삶에 보다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친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었다.

 

최 신부에게 있어서 성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관심은 「고백록」을 중심으로 한다. 최 신부는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간 및 하느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풀어 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을 중심으로 성녀의 영성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한 예로, 최 신부가 쓴 「천국으로 띄우는 글월?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은 성녀에 대한 이해와 애정, 존경을 잘 드러낸다.

 

최 신부는 이미 1953년에,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의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해석해 강의함으로써 가르멜 영성을 접하고 심취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 관해 “다른 어느 사람의 영성보다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 현대를 건질 수 있는 구원의 원리를 지닌 영성”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최 신부의 영성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복자찬가’ 악보.출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

 

 

하느님 이해

 

최 신부의 인생 역정과 그가 깊이 영향을 받은 요소들 및 인물들의 영성을 살펴보면, 그의 신앙 여정은 스페인에서의 신비신학 연구 기간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로는 주로 트렌토공의회 및 제1차 바티칸공의회, 얀세니즘 등이 혼합되어 있던 당시 프랑스교회의 신학과 영성, 그리고 프랑스 문화를 배경으로 지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여정, 아울러 조선 및 한국교회의 다사다난했던 신앙 여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후반부는 주로 스페인의 신비영성, 특히 가르멜 영성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한국교회의 당면 상황과 현실 등의 영향을 받은 신앙 여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최 신부의 작품들 및 강론, 사목활동 등의 경향성을 보면, 대략 전반부에서는 그 방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많은 장르의 작품을 쓰는 가운데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서정성과 인간애, 동서양 고전의 인용, 민족애, 당시 조선 및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 보편교회 정신과 신학(신앙), 사제적 신원 의식 등의 요소들이 드러난다. 관심의 눈길은 섬세하고 깊으면서도 그 향방이 다양하다. 사목(강론, 강의, 방송, 수필), 문학(소설, 시, 시조, 번역, 작사, 수필, 수기, 서간), 호교론, 사회 참여(논설 등으로) 등의 분야를 망라한다. 사목 활동 측면에서도, 본인의 의견을 상신(上申)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교구 이동과 교구, 본당, 학교, 신문사, 수도회 지도 등의 다양한 직무를 거쳤다. 그러한 중에도 한편으로는 「가르멜의 산길」 등을 번역해 강의했고, 시집 「님」에 포함된 ‘밤’, ‘두메꽃’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이미 가르멜 영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하느님 만남을 향한 실존적 희구가 실타래 풀리듯, 그의 존재 저변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반부에는 최 신부의 관심사와 활동이 어떤 하나로 모아져 가며, 횡적인 방향에서 종적인 방향으로 집중되고 통합되고 단순해져 가는 것이 완연히 드러난다.

 

사목 활동으로는 수도회 지도와 학교, 특히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신학교 교수로서 사제 양성에 헌신했다. 작품 활동은 보다 더 영성적(특히 가르멜 영성에 집중된 시, 수필, 번역), 신학적(강의, 학술세미나), 사목적(피정, 강론, 수필) 색채와 동기를 지닌다. 후반부에도 그의 서정적 경향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함, 교회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사제로서의 신원의식의 융합과 심화가 더욱 분명해졌다.

 

최 신부 삶의 전반과 후반 두 기간의 분기점은 바로 가르멜 영성, 무엇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 따라, 전혀 새로운 듯이 보일 정도로 심화됐다. 따라서 그 분기점은 최 신부 삶의 후반부를 수놓은 ‘하느님 체험’이라는 주제로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평생을 임만 바라본 구도자, 임을 노래한 시인

 

최 신부는 평생을 ‘임’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추구 하나만으로 살아간 구도자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점차적으로 완전히 자신을 비워나갔고, 더욱더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제헌했다.

 

그는 평생을 “하로 하로 살얼음 밟으며 / 祭物(제물)로” 살았으며, “가시 아래 피 번지신/ 당신의 ‘거룩한 얼굴’을 / 밝으신 태양 삼아” 우러렀고, “燔祭(번제)의 흰 재로 남을수록 / 님 사랑 안에 삶이라 함을” 배웠고, “聖三位(성삼위)의 품 속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최 신부는 이름 모를 ‘두메꽃’처럼, 한 송이 ‘채송화’처럼, 혹은 ‘엉겅퀴’가 되어 평생을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숨어 살고, ‘두 눈알을 쟁반에 받쳐 들고’ 깊고 캄캄한 ‘어둔 밤’을 “밀씨 한 톨 / 부활의 씨앗을 심으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의 문인 ‘여명’(黎明)을 향하다가, 주님 당신 등에 곱다시 업혀 / 구름 속 헤치며 창공을 간” 구도자이다. 그는 ‘수동적 정화의 어두운 밤’을 맛보았고,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숨지 않으시는’ 성삼위 하느님, 자신의 임을 관조하리라. 그는 자신의 온 삶으로써 동 시대와 후대에 진정한 신앙인, 사제, 구도자, 영성가, 그리고 자신의 사랑인 ‘임’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참된 하느님 만남의 길을 가르쳐 준 사표(師表)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많은 배울 점들을 찾아 계속 최민순 신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극한 겸손과 인내로, 오직 ‘숨어 계신’ 임과의 일치를 향해 어두운 밤을 걷고 있는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에게서 최민순 신부의 자취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4일,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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