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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4: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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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04 ㅣ No.1588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4) 귀국


다섯 차례 실패, 7년 노력 끝에 그리운 고국땅 밟아

 

 

최양업 신부는 혹한으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의주성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사진은 1891년에 촬영한 의주성 전경.

 

 

1849년 12월.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드디어 조선 땅을 밟았다. 1842년부터 7년에 걸쳐 여섯 차례 귀국 시도 끝에, 그리고 1836년 사제가 되기 위해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에 성공했다.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게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 안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관문 한복판을 지나왔는데도 아무도 우리를 눈치채거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을 모면하고 나서는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홍산 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 요동 땅 만주교구 차구에서 1849년 5월부터 베르뇌 신부를 도와 보좌로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그해 12월 변문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다. 상해에 머물던 메스트르 신부도 함께 입국을 원해 합류했다. 둘이 변문에 도착했을 때 페레올 주교가 파견한 조선 교회 밀사들이 벌써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압록강. 최양업 신부는 여섯 차례 귀국 시도 끝에 1849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통해 귀국했다. 사진은 중국 단동 지역에서 본 압록강 전경으로 멀리 신의주 지역이 보인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메스트르 신부를 본 신자들은 당혹해 했다. 서양인 선교사와 함께 월경하기엔 너무나 위험했고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밀사들과 더불어 백방으로 궁리했으나 마침내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만이 길 안내자로 파견된 신자들과 함께 압록강 국경을 넘었다.

 

“부득이 쓸쓸히 떨어져 슬퍼하시는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저만 혼자 (밀사들과 함께) 길을 계속해서 조선의 철통같이 굳게 닫힌 (의주) 관문을 뚫고 통과하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 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 갈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신 전능에 의탁할 뿐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정확한 귀국 일자는?

 

안타깝게도 최양업 신부의 정확한 귀국 일자를 확인할 수 없다. 배론 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묘비에는 귀국한 날짜가 ‘1849년 12월 3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친필 서한에서 단지 “12월에 변문으로 해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고 만 밝히고 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1850년 11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해 초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무사히 입국했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교회사학자들은 연행사 일행이 귀국할 때를 틈타 최양업 신부의 귀국이 이뤄졌을 것이라 가정해 전반적으로 ‘1849년 12월 하순경’에 입국했으리라 추정한다. 1849년은 철종이 즉위한 해로, 조정에서 같은 해 시호를 주청할 주청사를 7월에 파견했는데 이들이 시호를 받아 귀국하면서 의주를 통과한 때가 그해 12월 하순경이었다. 철종이 귀국한 사신 일행을 만난 것이 1850년 1월 13일이었으니 최양업 신부의 귀국 일자는 1849년 12월 말에서 페레올 주교가 밝혔듯이 1850년 1월 초일 가능성이 높다.

 

 

귀국할 때 동행한 이는 누구일까

 

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최양업 신부를 귀국시킨 이가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귀국 길을 안내한 밀사가 누구였는지 알려주고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다. 최 신부의 친필 서한에도 단지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신 밀사들”이라고만 나온다(같은 편지).

 

과연 누구일까? 가능성이 높은 3명을 추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인물은 1843년 3월 김대건 신부(당시 신학생)와 메스트르 신부가 변문에서 만났던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다.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활동했던 그는 여러 차례 북경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변문 일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1836년 1월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이광렬(요한)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입국시켰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관악산 밑 삼성산으로 이장할 때 참여한 인물이었다. 

 

두 번째 인물은 최양업 신부의 유학 동기인 최방제의 형 최형(베드로)이다. 그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키는데 참여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해 성인품에 올랐다.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은 최양업 신부가 고군산도에 표류했을 때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배를 끌고 신치도에 갔던 최양업 신부의 이종사촌 형이다. 

 

자기 사람만을 기용했던 페레올 주교의 성품을 고려하면, 이들 셋 중 아마도 최형이 최양업 신부의 귀국을 도운 밀사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김 프란치스코는 1843년 이후 교회 내에 뚜렷한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앵베르 주교의 사람으로 분류돼 페레올 주교가 기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은 변문 지리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배제됐을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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