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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3: 첫 사목지 요동 차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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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22 ㅣ No.1587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3) 첫 사목지 요동 차구본당


수품 후 첫 소임, 중국 신자들에게 강론 · 성사 베풀어

 

 

-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성당은 조선교구 선교사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사진은 차구 성당의 옛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 제공.

 

 

1849년 5월 백령도 귀국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다시 함선을 타고 중국 요동 차구(溝)로 갔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 ‘눈의 성모 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만주교구장 직무대행인 베르뇌 신부(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배하는 성무를 수행했다. 사실상 보좌 신부로서 사목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 사제가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을 사목한 첫 번째 사례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6월 21일 베르뇌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에 관한 클레멘스 11세 교황 헌장 「그날부터」(「Ex illa die」, 1715년 3월 19일 반포)와 베네딕토 14세 교황 칙서 「그 특별한」(「Ex quo singulari」, 1742년 7월 11일 반포)의 내용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문을 작성하고 선서한 후 사목을 시작했다.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행동은 당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공자 숭배나 조상 제사와 같은 중국 의례에 관한 교황청의 금지령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조선 귀국 때까지 정식 보좌로 활동

 

최양업 신부는 차구에서 1849년 5월부터 7개월간 사목했다고 밝히고 있다(1850년 10월 1일,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이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1849년 6월 21일 자 최양업 신부의 자필 선서문을 근거로 5월부터 6월 20일까지 약 한 달여간 사목 실습 형태로 활동한 후 선서한 날로부터 같은 해 12월 말 조선 귀국 때까지 정식 보좌 신부로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차 박사는 아울러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가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첫 사목을 시작한 장소는 요동의 ‘양관’ 혹은 ‘차구’라고 설명됐는데 최양업 신부의 이 자필 선서문으로 그의 첫 사목 중심지가 정확히 ‘차구 본당’임이 확인된다”고 명확히 했다.

 

- 베르뇌 주교.

 

 

베르뇌 신부는 1844년 3월부터 1848년까지 요동 개주시(蓋州市) 라가점(羅家店) 양관(陽關)과 사령(沙嶺)에서 사목했다. 베르뇌 신부는 1841년 1월 16일 마카오를 거쳐 지금의 북베트남인 통킹에 부임했으나 곧 체포돼 옥살이하다가 1843년 3월 석방된 후 만주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1845년 7월 15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선교구 부주교로 지명됐다. 페레올 주교는 마카오에서 이날 작성한 자신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에 따라, 저는 요동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인 베르뇌 신부를 조선의 부주교로 지명합니다. 임명은 제가 다른 사람을 지명하기 전에 죽는 경우에만 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뇌 신부가 1849년 양관에서 차구로 선교 사목지를 옮긴 이유는 1848년 3월 4일 자신과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가 양관본당 사제관에서 주민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죽은 이들과 어린아이들의 눈을 뽑아가고, 죽기 직전인 아이를 소금에 절여뒀다가 아편을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베롤 주교와 베르뇌 신부는 상해까지 피신했다. 베롤 주교는 1849년 4월 상해 주재 몽티니 프랑스 총영사에게 양관 주민들이 1844년 황포조약을 위반하고 성당을 공격한 데 대해 중국 당국에 항의하면서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조처해 달라고 요청하고, 베르뇌 신부를 양관이 아닌 차구에서 사목하도록 했다.

 

- 오늘날 차구 성당이 있는 마을 모습. 멀리 보이는 산은 계관산이다. 차기진 박사 제공.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 시절뿐 아니라 첫 보좌 시절 때부터 선종할 때까지 지켜보고 함께한 분이다. 신학교 교수로, 동료 사목자로 평생을 함께했던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소중한 일로는 훌륭한 자질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라고 칭송했다(베르뇌 주교가 1861년 9월 4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날 요녕성 장하시(莊河市) 용화산진(蓉花山鎭)에 자리한 차구의 눈의 성모 성당은 북쪽으로는 영광의 산, 남쪽으로는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었다(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가 1880년 6월 7일 자로 형수 레오니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구, 조선 선교의 교두보 역할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성당의 오늘날 모습. 차기진 박사 제공.

 

 

차구 성당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웠기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블랑(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이 됨)ㆍ리샤르ㆍ마르티노 신부가 차구본당에 머물면서 박해가 잦아지길 기다렸다. 칼래ㆍ리델 신부도 박해를 피해 조선에서 차구로 피신해 조선 재입국을 모색했다.

 

또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회의(시노드)가 1868년 12월 차구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조선교구 장상이었던 리델 신부는 1869년 1월 말(또는 2월 초) 베롤 주교와 협의해 차구본당의 사목 관할권(재치권)을 만주교구에서 조선교구로 이관했다. 차구본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조선 선교사들이 차구본당을 사목했고, 리델 주교는 차구에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를 설립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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