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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교회 안 상징 읽기: 상징의 세계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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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09 ㅣ No.2661

[교회 안 상징 읽기] 상징의 세계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새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오감을 통하여 듣고, 보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 봄으로써 주변의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느끼고, 나아가 인지한다. 당장 길거리에 나가면 우리는 숱한 상징들을 만나게 된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걸을 때는 으레 교통신호등을 보고 그것이 가리키는 신호에 따라 진행하거나 멈추거나 한다. 녹색 등은 진행해도 된다는 뜻을, 빨간색 등은 멈추어야 한다는 뜻을 담은 신호이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네 일상생활에 중요하고 밀접한 무엇이다. 그리고 이 점은 신앙의 세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교의와 교리로 믿는 신앙 진리들을 비롯하여 직접 느끼거나 겪어 보지 않고는 좀처럼 믿어지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가르침들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그리하여 다분히 추상적인 가르침들을 아쉬운 대로 믿고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고, 나아가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상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상징이란 우리의 감각 기능으로 직접 지각할 수 없는 의미나 가치 등을 어떤 유사성에 의해서 구상화하는 사물, 형상, 동식물 등을 말한다. 이를테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보고 듣고 만져 봄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 곧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기 위해 성사들을 베푸는데, 이 경우에도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은총을 지각하게 해주는 상징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세례성사의 물은 생명, 정화, 재생을 상징한다.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는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영적 양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의 쓰임새는 차츰 교회 안의 곳곳으로, 전례를 비롯하여 교회 건물이며 그 안의 기물들과 예술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넓게 그리고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교회가 이제까지 성장 발전해 온 주요 터전들이자 공간들에서 형성된 교회의 역사와 문화에는 이러한 상징들의 흔적들이 풍부하게 넘쳐난다. 이러한 상징의 세계를 부분적으로라도 함께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과 이를 둘러싸고 형성된 문화에 대한 식견의 깊이와 지평을 넓히는 데 작은 보탬이 될 것이다.

 

 

눈[雪]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감수성을 기대하며

 

우리는 어찌 보면 상징성을 지닌 것들에 에워싸여 살아간다. 우리는 이제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길을 걸을 때 교통신호등을 보면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삶에서, 주변에서 신앙적 상징성을 알아보는 데는 그에 걸맞은 감수성이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사는 북반구의 온대 지역에는 겨울이란 계절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새하얀 눈으로 덮인 은세계가 연출된다. 새하얀 눈이 꾸미는 풍경은 우리에게는 친숙하고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서 사는 이들에겐 신기하고 낯설겠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장관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그 눈이 이루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감탄한 후에라도 혹시 눈과 그 눈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눈에는 하느님의 어떠한 면모가 투영되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하늘의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수증기가 높은 하늘에 이르러 아주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로 변해서 한데 모여 구름을 이룬다. 그리고 구름에서는 물방울들이 땅으로 떨어지거나(비) 얼음 알갱이들이 하얗고 가벼운 눈송이로 떨어진다. 이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과 그것들이 내려서 쌓인 것은 우리를 또 다른 경이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대지 위에는 눈송이들과 더불어 적막하고 고요한 침묵의 분위기도 덩달아 내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적막에 빠진 듯이 보인다. 눈이 내릴 때 사람들은 대체로 집 안에 머물고, 동물들은 조용해지며. 자연조차도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적막감과 고요함은 저 높은 세계, 곧 하느님의 일에 대해, 그리고 그분 곁에서 지내게 될 미래의 삶에 대해 성찰해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계기가 됨직도 하다.

 

눈은 한편으로 정결함, 순수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산이며 들에 눈이 쌓여서 더러운 것 한 점 없이 새하얗게 뒤덮은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마음에는 정결함이란 무엇인지가 자연스럽게 와서 닿는 듯하다. 이는 흠결 없이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붕들이며 벤치들이며 울타리들이며 담장들에, 실개천들이며 웅덩이들이며 공원과 숲들에 눈이 내려 쌓이면, 사뭇 고결하고 숭고해 보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도 천국에서 자라는 나무의 수정 가지인 듯이 보인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아주 짧은 순간에 저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마련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우리는 초대되는 것이다.

 

눈은 또한 인간과 세상에 큰 이로움을 가져다준다. 봄이 되어 겨우내 쌓여 있던 눈이 녹으면 초목과 곡식들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물이 되어 지하수층이나 호수들을 가득 채운다. 산악지대에서는 눈이 녹아 하류 지역으로 쏟아져 내리며 더러는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더러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내리기도 하면서 사람들에게, 동물들에게, 식물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데 필요한 신선한 물을 제공한다.

 

그런데 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이 정도에서 그친다.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눈을 좀 더 정밀하게 미시적으로 관찰한 이가 있다. 미국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인 버몬트 주의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윌슨 벤틀리(Wilson Bentley, 1865–1931)는 문득 겨울이면 지천으로 볼 수 있는 눈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초보적인 장비(사진기)를 가지고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하늘의 자연광을 바탕으로 5000점이 넘은 눈송이 사진들을 찍었다. 사진 촬영 기술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는 농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눈송이들을 관찰하고 사진에 담은 사진작가가 되었다.

 

우리는 ‘눈송이 벤틀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어느 사진작가가 이루어 놓은 업적 덕분에 눈송이들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모습들을 보며 감탄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면 하늘에서 수억 개, 수조 개의 눈송이들이 내리는데, 놀랍게도 그것들 중에는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선용한 사람 ‘눈송이 벤틀리’는 자신이 관찰하고 사진으로 남긴 눈송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다양한 피조물들에서 그분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을 우리가 새로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나아가, 아무리 창의적이고 기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눈송이 하나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름다운 비밀들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셨다는 것을 깨닫고 기억할 때, 모든 것은 몹시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눈을 뜨고 하느님 안에서 피조물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분명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가 눈송이들을 보고 그러할 수 있다면….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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