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수도 ㅣ 봉헌생활

봉쇄의 울타리에서: 우리의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바꾸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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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02 ㅣ No.629

[봉쇄의 울타리에서] 우리의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바꾸시는 하느님

 

 

내가 태어난 곳은 오래된 사찰과 조선 시대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서원이 있는 마을로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고, 경사를 앞두고는 큰 바위나 나무 앞에다 상을 차려 제를 드리곤 하던 토속 신앙이 공존하는 곳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죽음’은 곡소리를 내며 깊은 골짜기를 향해 가던 꽃상여의 구슬프고 무서운 이미지를 깊이 새겨 넣었다.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사람의 주검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성대 서원을 하고 얼마 뒤 아버지가 하늘 나라로 떠나셨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 미사 뒤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수도원으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할 때는 충격을 받았다. 누구나 죽으면 한 줌의 재로 남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만일 신앙이 없다면 그 공허한 슬픔을 누가 채워 줄 수 있을까.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에제 37,11)고 말하리라. 그러나 ‘처음이며 마지막이시고 살아 계신 분, 죽으셨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묵시 1,17-18)을 믿는다.

 

지금 있는 스페인 올메도 수도원에서 개인 피정을 하는 날 가끔 묘지에 가곤 한다. 이제는 내가 알던 수녀님들의 무덤이 늘고 있다. 이름과 서원, 선종 날짜가 적힌 십자가 묘비를 하나하나 읽는다. 그분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역사를 꾸려 나갔으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성무일도의 끝기도 강복을 날마다 바치며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있으니 홀연히 가는 일은 없겠지.

 

 

어느 수녀의 봉헌 기도

 

수도원에서 여러 수녀님의 죽음을 보았다. 수련기 때 수련장 수녀님이 “죽음 하나만 봐도 수도원에 살 가치가 있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수도자라고 해서 인간 본성이 지닌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을 떨쳐 낼 수는 없다. 연세 드신 수녀님들이 조금씩 야위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는 것도 힘들지만, 죽는 것은 더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수도 생활은 두려움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의 시선을 가지고 죽음의 현존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건강할 때는 공동체를 위해 외적으로 활동하며 많은 시간을 헌신하고,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마주할 때는 봉헌의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과 만난다.

 

질병으로 무척 아파하며 돌아가셨던 한 수녀님의 기도서에는 교황님과 사제들, 교회와 세상을 위해 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바치겠노라는 기도 지향이 적혀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일치시킬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위로를 주시고자 그토록 불의하고 잔인한 죽음을 선택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그 영혼을 손에 넣으려는 마귀의 온갖 유혹이 따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이에게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수녀님이 파스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장상 수녀님이나 경험이 많은 수녀님이 곁에서 돕는다.

 

죽음을 앞두고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곁에서 영적인 용기를 끊임없이 북돋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귀에 대고 반복해서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성대 서원 때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수녀님, 이제 수녀님이 온 생애 동안 고백하셨던 실재를 만나실 거예요. 주님께서 심판관이 아닌 정배로서 수녀님을 마중 나오실 겁니다. 힘내세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루는 몸이 쇠약해져 병실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한 수녀님의 짐을 옮겨 드린 적이 있다. 우리의 짐이라야 옷이나 책이 대부분이어서 간단한 일이라 여겼는데, 전문적인 소임을 맡았던 수녀님이라 짐이 꽤 되었다. 짐을 챙기며 이참에 좀 정리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수녀님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그 일도 부탁하셨다.

 

그런데 막상 정리하려고 분류를 시작하자 수녀님은, 이것은 공동체에 요긴할 거라 남겨야 하고, 저건 어느 수녀님의 소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정리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수녀님의 말처럼 이것들을 다시 쓸 기회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공동체에 봉사하며 자신의 일부가 된 것을 잘라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나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벽장 깊숙한 곳에서 물건들을 꺼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말끔히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 떠난 뒤 다른 사람이 정리해야 할 수고를 늘리지 않게 최소한의 것만을 지니고 사는 것도 괜찮겠다.

 

글을 마치며 한 수녀님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옮긴다.

 

“내가 어디에서 깨어날지 모르겠습니다. 회복실 아니면 천국, 어디가 될까요?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이 어디든 하느님의 품속이겠지요.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면서 성모님의 품 안에 아기처럼 저를 맡기겠습니다. 안녕.”

 

죽음 저편에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우리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둠을 영원한 빛으로 바꾸시면서.

 

[경향잡지, 2019년 11월호, 김해숙(성삼의 마리아 도미니카,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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