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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98: 20세기 (2) 수덕신학 및 신비신학의 정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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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06 ㅣ No.126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98) 20세기 ② 수덕신학 및 신비신학의 정착 과정


수덕 · 신비생활 탐구로 영성생활 풍요로움 더해

 

 

17세기 이단 출현 이후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 부침이 심했던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은 18~19세기 대중 신심 운동의 실천과 신비체험가들의 출현으로 차츰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안정적인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체계를 갖춘 학문 발전도 함께 모색돼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19~20세기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갖추려는 신학자들과 교회 당국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신비신학에 관심을 둔 영성신학자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소속이었던 오귀스트 풀랭(Auguste Poulain, 1836~1919)은 한동안 소외됐던 신비신학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풀랭은 저서 「기도의 은총들: 신비 신학 논설(Des Grces D’oraison: trait de thologie mystique)」에서 신비생활에 관심 있는 그리스도인과 영적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학문적이고 신학적인 체계를 제시했습니다. 즉, 풀랭은 그리스도인이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관상생활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관상생활을 구별해 언급하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하는 신비생활을 분석적이며 서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풀랭의 주장이 신학적 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비평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신학자는 풀랭의 신비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심화시키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인 후안 곤살레스 아린테로(Juan Gonzlez Arintero, 1860~1928)는 신비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연구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아린테로는 저서 「신비생활의 발전(Evolucin mstica)」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애덕의 완성을 향하도록 부름받았기에 영성생활 안에서 모두 신비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린테로의 신비신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러 신학자에 의해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황들의 권고에 따른 수덕신학 및 신비신학 강좌 개설

 

개별 신학자들에 의해 신비신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자,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PP. XV, 재임 1914~1922)는 1919년 로마에 있는 교황청 설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서한 「활기찬 만족과 함께(Con viva soddisfazione)」를 보내어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교황에 따르면, 성직자 양성에서 영성생활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질이 부족한 상태로 양성된 성직자들이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에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레고리오대학교는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강좌를 개설했지만, 로마 내 다른 신학대학과 유럽 전역의 신학대학들은 여전히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을 선뜻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신학자가 아직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비오 11세(Pius PP. XI, 재임 1922~1939)도 1931년 사도 헌장 「주님은 지식의 하느님(Deus scientiarum Dominus)」에서 신학 분야 안에서 수덕신학은 보조 학문으로 신비신학은 특별 학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결국 1920년대 이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회 내 영성생활을 사색하여 이론화하는 영성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성신학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신학을 잘 알리고자 영성신학 전문 잡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했으며, 교과서적인 구성을 한 영성신학 서적들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저서들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읽혔습니다.

 

 

수덕신학 및 신비신학 관련 저서 출간하는 영성신학자들

 

프랑스 출신 쉴피스회 소속 아돌프 알프레드 탕케레(Adolphe Alfred Tanquerey, 1854~1932)는 쉴피스회 수련장으로서 수련자 교육을 담당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던 중 1923년경 「수덕 및 신비 신학 개요(Prcis de thologie asctique et mystique)」를 편찬했습니다. 탕케레는 이 저서에서 영성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신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저서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국내 신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영성신학 분위기와 내용을 확인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소속 조제프 드 기베르(Joseph de Guibert, 1877~1942)는 실천적이며 사목적인 방법으로, 또한 사색적이며 경험적인 방법으로 수덕신학 및 신비신학을 다뤘습니다. 즉, 기베르는 체험과 교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예수회 회원으로서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 1491~1556)의 영향을 받은 기베르는 심리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신비생활보다 수덕생활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기베르는 1920년에 「수덕 및 신비 신학 잡지(Revue d’asctique et de mystique)」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인 레지날 가리구 라그랑주(Rginald Garrigou-Lagrange, 1877~1964)는 로마 소재 성 토마스 대학교에서 거의 50년 동안 교의신학 및 영성신학을 가르쳤는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따라 영성신학을 정립하는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가리구 라그랑즈는 1919년 「영성생활(La Vie spirituelle)」이라는 잡지 창간에 함께했을 뿐만 아니라, 1923년 저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및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른 그리스도교적 완덕과 관상(Perfection chrtienne et contemplation selon s. Thomas d‘Aquin et s. Jean de la Croix)」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높은 단계의 영성생활에 부름받았다고 주장했으며, 1938년 저서 「수덕 및 신비 신학 논설: 내적 생활의 세 시기, 천국을 향한 서곡(Trait de thologie asctique et mystique: les trois ges de la vie intrieure, prlude de celle du ciel)」에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에 대해서 완벽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이 학문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프랑스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교의신학 및 윤리신학과 구분되는 고유한 학문 대상과 방법론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을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립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학문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1월 4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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