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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마음의 북녘본당: 해주 본당 - 황해도 지역 신자들의 순교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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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09 ㅣ No.947

[내 마음의 북녘본당] 해주(海州) 본당(1912~1949)


황해도 지역 신자들의 순교의 중심지

 

 

해주지역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1846년 교우들과 더불어 비밀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연평도와 백령도로 나아가다 옹진반도 앞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압송되면서 교회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866년 해주지역은 해주감옥에서 17명의 교우들이 순교하면서 황해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중심지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해주지역에 본격적인 복음전파가 시작된 것은 1896년 안악군 용문면 매화동에 정착한 빌렘 신부 때부터이다. 빌렘신부는 해주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후 줄 곳 구석진 시골 교우촌을 벗어나 큰 도심지에 본당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마침내 1899년 열심한 교우 김영석(아우구스티노)의 도움으로 해주읍내에 공소가 설립하게 된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12년 9월 8일 해주공소는 본당으로 정식 승격되고 초대 신부에 빌렘신부가 임명되었으나 빌렘신부가 건강이 악화되어 1914년 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 장연성당의 공소가 되었다.

 

장연본당의 김명제(베드로) 신부는 1920년 3월, 해주 공소에서는 보통학교 전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교리 등을 가르치는 ‘유치학교’란 이름의 유치원이 설립하였다. 해주 신자들은 1920년대 초부터 그들의 대표를 서울로 파견하여 호소하거나 혹은 편지로 해주를 다시 본당으로 승격시켜줄 것을 교구장 주교에게 간청한다. 해주 신자들의 염원은 1926년 5월 이순성(안드레아) 신부의 임명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제2대 주임신부인 이 순성 신부는 재임 2년 만인 1928년 5월 은율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제3대 주임신부인 서기창 신부는 해주 본당의 숙원사업인 본당신축을 시작하였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1년만인 1929년 5월 전임되었다. 해주 본당의 신축을 완성한 신부는 제4대 주임신부인 구천우 신부로 1929년 5월부터 1931년 5월까지 2년간 재임하는 동안 전임 본당 신부가 시작한 성당 신축공사를 완료하였다.

 

해주 본당은 어느덧 안정기에 접어들어 제5대 1931년 신성우 신부, 제6대 1933년 양덕환(안드레아) 신부, 제7대 1936년 방유룡(레오) 신부가 차례로 부임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성가대 발족, 가톨릭 소년단의 결성, 대대적인 성당 보수 공사 진행, 주보 <편신>의 발간, 청년회의 활성화를 통해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일제 말기와 공산 치하의 수난 속에서 제8대 신부로 1942년 안 학만(루카) 신부가 부임하였고, 1944년 제9대 신부로 부임한 김철규(바르나바)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김 신부는 일제가 성당을 강제 징발하려는 것을 단호히 막았으나 곧이어 해방과 함께 해주지역이 공산화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체포하고 살해하려하자 1947년 9월 낚시꾼으로 가장하여 해주를 탈출한다. 본당신부가 공석이 된 지 일 년만인 1948년 9월, 연길교구 소속 사제인 한윤승(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한국전쟁 직전 해인 1949년 해주 시내에 반공 전단을 뿌린 범인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방면으로 끌려갔는데 아마도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한윤승 신부의 체포 이후 해주 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월호,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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