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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51: 12세기 (5) 의전 사제단과 의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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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8 ㅣ No.106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1) 12세기 ⑤ 의전 사제단과 의전 수도회


의전 사제단, 성직자 쇄신 위한 깃발을 들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왼쪽)에게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 규칙서」를 받는 노르베르(오른쪽)를 묘사한 12세기 ‘노르베르의 생애’ 필사본 삽화.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 중 하나는 성직자의 생활 개선이었습니다. 개혁 교황들은 성직자들이 독신 생활을 실천하며,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청빈하게 생활하며, 정한 규칙을 지키면서 겸손한 순명 정신을 지닐 것을 강조했습니다. 당시에 이미 주교좌성당에서 수도 생활과 비슷하게 공동 생활을 하면서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 전례를 돕던 ‘의전 사제단(Chapter of Canons)’이 성직자 쇄신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새로운 수도회가 출현했습니다.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이 결합된 수도회의 출현

 

의전 사제단은 수도 생활을 동경했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396년 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에서 교구 사제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실천했던 전통에서 유래했습니다. 816년 아헨(Aachen) 교회 회의에서는 수도자들과 구별되는 의전 사제단이 따라야 할 규칙을 언급했습니다. 즉, 의전 사제단에 속한 성직자는 함께 숙식하는 공동 생활을 실천해야 했지만, 사유재산은 인정받았습니다. 의전 사제단은 점점 확산되면서 주교좌성당에서 생활하는 주교좌 의전 사제단과 별도의 집과 성당에서 생활하는 동료단 의전 사제단으로 구분되었습니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교구 사제가 의전 사제단에 속해 수도 생활을 본받기를 널리 장려했습니다. 특히 의전 사제단은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Regula Sancti Augustini)」의 규정을 따르면서 복음삼덕을 실천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마음 한뜻으로 공동 생활을 실천하던 초기 공동체 모범을 따르는 수도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로 모여 있는 첫째 목적은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한마음과 한뜻이 되는 것이다.”(사도 4,32)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 I, 2)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는 고대의 다른 수도 규칙서들보다 단순한 형태를 지녔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가 수도 생활의 본질적인 요소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했던 개혁 교황들은 성직자 쇄신에 의전 사제단이 앞장서기를 바랐습니다.

 

개혁 교황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의전 사제단 소속 교구 사제들은 성당에서만 봉사하지 않고, 수도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의전 수도회(Canons Regular)’라 불렸으며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를 따랐습니다. 의전 수도회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결합한 형태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즉, 그들은 수도자로서 청빈한 삶과 함께 엄격한 공동 생활과 수덕 생활을 실천했으며, 사목자로서 사도직의 연장선에서 사목적인 직무도 함께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11세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의전 수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설립되는 의전 수도회

 

1039년 아비뇽(Avignon) 주교좌성당 의전 사제단 소속 폰티우스(Pontius), 아르노(Arnaud), 오딜롱(Odilon), 뒤랑(Durand) 등은 프랑스 남부 아비뇽 성 밖 듀랜스(Durance) 강 인근에 폐허가 된 경당을 재건해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이 경당이 70년에 아비뇽 초대 교구장 주교 루푸스(Rufus)가 설립했다고 전해져서, 이 의전 수도회는 ‘아비뇽의 생 루프 수도회(Abbaye Saint-Ruf d’Avignon)’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090년에 은수자 헬더마(Heldemar)와 루게리우스(Ruggerius)는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Artois) 지역 아뤠즈(Arrouaise) 숲에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의전 수도회는 1097년에 지역 교구장에게 승인을 받았으며, 1121년에 제르베즈(Gervaise)를 원장으로 선출하면서 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고 ‘아뤠즈 수도회(Abbaye d’Arrouaise)’로 불렸습니다.

 

잉글랜드 중부 링컨셔(Lincolnshire), 셈프링햄(Sempringham)에서 본당 사제였던 셈프링햄의 길버트(Gilbert of Sempringham, 1083~1190)는 1131년 7명의 여성을 참여시키면서 서원을 하는 봉쇄 관상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길버트는 평신도 여성 공동체와 평신도 남성 공동체를 추가로 설립했습니다. 1148년 길버트는 자신이 설립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의전 수도회를 마지막으로 설립하면서 ‘길버트 수도회(Gilbertine Order)’를 완성했습니다.

 

포르투갈 비제우(Viseu) 주교좌성당 의전 사제단 소속 테오토니우스(Theotonius, 1082~1162)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후에 의전 수도회를 설립할 결심을 했습니다. 테오토니우스는 지역 왕족과 주교의 도움을 받아 1132년 수도원 건물을 완공하고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의전 수도회(Cannigos regulares de la Santa Cruz)’를 창립했습니다.

 

 

은수 생활 중심의 프레몽트레회와 지적 활동 중심의 생 빅토르회

 

하지만 의전 수도회 중에 대표적인 수도회는 12세기 초 설립된 ‘프레몽트레회’와 ‘생 빅토르회’일 것입니다. 프레몽트레회(Chanoines Rguliers de Prmontr)는 산텐의 노르베르(Norbert de Xanten, 1080~1134)가 1120년 프랑스 라온(Laon) 인근에 설립한 의전 수도회였습니다. 산텐의 의전 사제단을 쇄신하려다가 실패한 노르베르는 교황 겔라시우스 2세(Gelasius PP. II, 재임 1118~1119)에게 허락을 받고 유럽에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1119년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PP. II, 재임 1119~1124)가 노르베르에게 수도회를 설립할 것을 권고했고, 노르베르는 라온 교구장이 하사한 프레몽트레 계곡에 수도원을 설립해 수도자 13명과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PP. II, 1124~1130)는 1125년 프레몽트레회의 회헌을 승인했습니다.

 

노르베르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병행하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그는 엄격한 가난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한 세기 후에 출현하게 될 탁발 수도회와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노르베르는 수도원을 떠나 자유롭게 순회 설교를 했던 탁발 수도회보다 수도원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노르베르는 1126년 교황 호노리우스 2세에 의해 마그데부르그(Magdeburg)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의전 사제단 쇄신에도 기여했습니다.

 

생 빅토르회(Chanoines de Saint-Victor)는 샴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이 1108년 파리 근교에 설립한 의전 수도회였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학교 교장이었던 기욤은 제자였던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와의 논쟁을 불쾌하게 여겨, 1108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몇몇 제자들과 함께 파리 근교에 생 빅토르 성전에서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기욤은 1113년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공동체를 의전 수도회로 발전시켰습니다. 다만 기욤도 1113년 샬롱 쉬르 마르느(Chlons-sur-Marne)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생 빅토르회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를 따르면서도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하는 지성 활동에 치중하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특히 생 빅토르회는 수도원에 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자연스럽게 신학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스콜라신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수도 사제에 비해 양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던 교구 사제들은 의전 사제단을 통해 자신들을 쇄신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수도회는 의전 수도회의 출현을 통해 수도 생활뿐 아니라 사목 활동의 기능을 첨가하면서 또 다른 형태와 기능의 수도회 출현을 예고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2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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