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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혼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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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5 ㅣ No.1940

[진리를 찾아서] 혼인성사 (1)

 

 

삶에서

 

혼인성사를 앞두고 면담을 청한 예비부부들을 만날 때면 꼭 던지는 질문이 있다. “정말 두 분은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니까 결혼하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질문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듯하다. 그런데 어쩌랴? 사제가 질문했으니 싫든 좋든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둘은 사랑의 이유를 급조하기 시작한다. “듬직해서”, “나만 바라보고 살 것 같아서”, “행복하게 살 것 같아서”, “너무 좋아서”…. 하지만 그들이 말한 이유는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반증이다. 그들이 답한 사랑의 이유를 풀어보면 ‘내게 듬직한 사람이 필요해서’, ‘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필요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필요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필요는 어느 순간 충족되면 금세 사라질 수 있다. 그러면 그때도 지금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과 필요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랑은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무엇임에도’여야 한다. 주님의 가르침은 상대방이 사랑받을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1요한 4,19 참조)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가가기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인간이 당신의 모습을 닮아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셨다. “사랑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근본 소명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04항).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이처럼 혼인성사는 혼인의 본디 모습인 사랑으로 부부를 결합시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주님 안에서 인격적으로 합의한 계약이다. 결코 철회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혼인성사를 통해 부부가 서로 사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은총을 베푸신다. 부부는 이 은총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몇 가지 의무를 지는데, 바로 ‘단일성’, ‘불가 해소성’, ‘절대적 신의’, ‘생명의 전달과 자녀 교육’이다.

 

먼저, 부부 사랑에는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이 필요하다. 단일성이란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사랑하는 것이다. 불가 해소성은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불가 해소성에 바탕을 둔 혼인 유대란 가톨릭 신자가 혼인성사를 받으면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맺어진 혼인 유대가 풀리는 네 가지 경우는 배우자의 사망, 바오로 특전에 따른 해소, 미완결 혼인에 대한 교황의 해소, 그리고 교회 법원의 혼인 무효 판결뿐이다.

 

또한 부부 사랑은 ‘절대적인 신의’를 요구한다. 이에 부부는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의를 본받아 부부의 신의를 나타내고 보여 주어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46-1647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의를 부부간에 서로 단순히 거짓말하지 않거나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짐작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기쁨」, 115항 참조). 견고한 사랑의 신뢰가 있어야만 가족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가운데 속임수나 위선, 거짓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곧, 부부간의 신의란 무조건적인 믿음이 목적이 아니라, 서로 충실하고 솔직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부 사랑은 본질적 특성으로 ‘생명의 전달과 신앙 교육’을 지향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52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녀는 과정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부터 존재하는 본질적 특성입니다”( 「사랑의 기쁨」, 80항).

 

또한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은 부모의 가장 중대한 의무이며 일차적인 권리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전달과 신앙 교육은 단지 과업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그 누구도 부부에게서 박탈할 수 없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일부다처제는 혼인의 단일성과 양립할 수 없고, 이혼은 혼인의 불가 해소성을 반대하는 것이다. 출산 거부는 하느님께서 부부 생활에 주시는 자녀라는 가장 뛰어난 선물을 외면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혼인의 의무는 혼인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인 혼인 합의를 통해 주어진다. 혼인 예식을 주례하는 사제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 합의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축복을 베푼다.

 

 

살펴보기

 

혼인성사를 받으려면 적절한 준비가 필요하다. 혼인의 거행은 성사적 행위이므로 그 열매를 잘 맺으려면 단 며칠이라도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내적인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먼저 신랑 신부는 혼인 거행에 앞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견진성사도 받을 수 있다면 같이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이를 통하여 혼인 당사자들은 새로운 자기 신분의 거룩함과 의무에 대비해야 한다.

 

혼인을 위한 외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먼저 본인이나 상대방이 속한 본당의 사무실을 방문해 혼인 신청서를 작성하고, 본당 신부와 면담 일정을 잡은 다음, 소속 교구에서 시행하는 혼인 교리를 수강해야 한다. 혼인 교리는 그리스도교 혼인의 의미와 부부의 의무를 배우는 것이므로 결코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본당 신부는 면담을 통해 이 혼인이 온전히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지, 혼인에 방해되는 요소가 없는지 살펴보고, 이를 문서로 작성해 혼인을 거행할 본당 사무실에 영구적으로 보관하게 한다.

 

가톨릭 신자와 신자가 아닌 사람의 혼인식은 미사가 아닌 ‘말씀 전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쪽이 미사를 이해하고 청하는 경우에는 혼인미사를 집전해 줄 수 있다. 이때에도 영성체는 오직 세례받은 신자만이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13조 3항 참조).

 

 

결심하기

 

얼마 전 우리 평생교육원에서 개설한 중독 전문가 과정의 한 강사가 했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지난날에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아, 알코올 중독자 부모는 ‘경제적 빈곤’과 동일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빈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녀들이 겪는 ‘정신 장애’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곧 심한 우울과 불안, 낮은 자존감, 공격적 행동, 산만함, 이성 관계의 불안과 회피 등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주위에는 위기를 겪는 가정이 점점 늘고 있다. 위기에 놓인 가정은 자기 가족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우리는 파괴된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와해의 심각한 결과를 자주 본다. 이러한 위기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혼인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은 혼인으로 시작해서(창세 2,23-24 참조), 혼인에 관한 예언자의 환시인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로 끝난다. 그 사이사이에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자녀들이 사랑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부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참된 모범을 보여야 한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 교육을 가르쳤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박종주 베드로]

 

 

[진리를 찾아서] 혼인성사 (2)

 

 

삶에서

 

학교에서 일반 학생들과 지내다 보면 혼인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미 혼전 순결은 옛말이 되어버렸고, 한번 맺은 혼인은 풀릴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별 관심도 없다. 그들에게 혼인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 뿐이며, 부부 사랑을 생각하고 자녀를 낳아 훌륭히 키워 보겠다는 결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혼과 동거를 밥 먹듯이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고, 자녀를 낳고도 부모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지 못해 발생하는 사건이나 사고들을 언론에서 자주 접한다. 급기야 혼인하지 않은 일정 연령 이상의 독신 근로자에게는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해야 한다는 싱글세’까지 이번 국회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 혼인과 자녀 출산이 그 숭고한 의미를 잃어버린 가운데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한편으로 혼인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부부가 쉽게 헤어지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별거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불가피한 경우란 부부가 화해를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한 뒤에 최후의 수단으로만 별거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뜻과 조금 다르다고 이혼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자녀들을 심각한 불의나 폭력, 모욕과 착취 같은 육체적 정신적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별거다( 「사랑의 기쁨」, 241항 참조).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혼인 예식에서 그들이 선언한 혼인 합의를 늘 기억하며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가가기

 

다른 성사는 주례자와 집전자가 같으나, 혼인성사는 집전자와 주례자가 구분된다. 혼인성사의 집전자는 신랑과 신부 당사자들이다. 미사 중 주례 사제는 강론을 마친 뒤 두 증인을 신랑과 신부의 양편에 세우고 혼인의 자유 의지, 상호 존경과 신의 등을 확인한다. 여기서 두 증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되고, 남녀 구별 없이 증언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신랑은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합니다.”라고, 신부는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합니다.”라고 각각 선언함으로써 혼인 합의를 성립시킨다. 혼인 합의는 혼인을 성립시키는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 혼인 합의가 없으면 혼인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26항 참조). 이렇게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합의하면 이 합의는 혼인 예식 주례자를 통해 교회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축복을 받게 된다.

 

혼인 합의가 끝나면 혼인 반지를 축복해 신랑과 신부가 서로 끼워 주게 하는데, 이 반지는 혼인 계약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상징이다. 또 영성체 전 주님의 기도를 바친 다음, 주례 사제는 부부가 된 신랑과 신부에게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기원하는 강복을 하느님께 청한다.

 

가톨릭 신자와 아직 세례받지 않거나 종교가 다른 배우자의 혼인을 ‘관면(寬免) 혼인’이라고 한다. 비록 한 사람만 가톨릭 신자일지라도 신랑과 신부 모두 혼인 교리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

 

특별히 비가톨릭 배우자는 혼인 전 당사자의 진술서를 작성할 때 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의 목적과 특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가톨릭 신자 배우자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고 자녀 모두를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받고 교육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112조 참조).

 

관면 혼인은 말씀 전례로 집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만일 신자가 아닌 쪽이 미사를 이해하고 청하는 경우에는 혼인 미사를 집전해 줄 수 있다(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113조 참조).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1코린 7,14).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비록 어느 한쪽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부부의 진실한 사랑과 기도는 서로가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만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36항 참조).

 

 

살펴보기

 

만일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는 혼인 무효가 선언되면 재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혼인 무효란 교회가 혼인이 성립된 일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그러하다.

 

가톨릭교회 혼인의 특징인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사랑하는 것에 위배되는 경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에 위배되는 경우. 강요로 혼인 합의가 이루어지거나, 심리적 육체적 결함이 있어 본질적으로 혼인의 의무를 질 수 없는 경우.

 

또한 교회에서 정한 예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상습적으로 배우자를 폭행했다면 그 혼인도 무효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혼인 무효가 선언되면 당사자는 재혼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인 무효는 부부들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한 합법적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신자들은 가톨릭의 혼인 문제에 관하여 정확한 지식이 없음에도 타인의 혼인 문제에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혼인 무효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즉시 본당 신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결심하기

 

사회적으로 이혼한 경우, 만일 아직 재혼하지 않았다면 고해성사를 본 뒤 성체를 모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혼한 이들이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이 차별을 느끼지 않게 도와주어야 한다.

 

또 필요하다면 그들을 위해 ‘혼인 무효 소송’이 더 편리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혼한 이들을 돌보고 공동체로 이끌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혼하지 않고 행복한 혼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혼인 생활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표현을 설명하셨다. 첫째는 ‘괜찮을까요?’로, “당신 생각은 어때요? 괜찮을까요?” “당신이 괜찮다면, 이 일은 내가 할게요.”처럼, 부부의 삶이 어긋나지 않게 하는 데 필요한 말이다.

 

둘째는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으로, “당신이 나를 위해 해 준 것에 감사해요.” “이번 일, 고마워요.”처럼, 부부가 서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말이다.

 

셋째는, 부부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부부간에도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부부가 마법과도 같은 힘을 지닌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는 습관을 들이면 혼인 생활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부모에게서 부부간의 사랑과 행복을 체험하지 못한 자녀들이 어떻게 행복한 결혼을 떠올릴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혼인 기피, 저출산, 이혼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부부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부부가 사랑과 화해, 기도와 희망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면, 이를 본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혼인에 대한 열망을 키워 갈 것이다. 오늘 아내에게, 남편에게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한번 건네 보자. 교황님이 보증하신 화해의 마법이 실현되지 않을까?

 

* 한 해 동안 ‘진리를 찾아서’를 집필해 주신 박종주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박종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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