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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제9권 아우구스티노의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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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16 ㅣ No.343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9권] 아우구스티노의 사모곡

 

 

“그대처럼 훌륭한 자식을 낳으신 정숙한 모친이 / 이곳에 재를 남기셨으니, 아우구스티노여, / 그대 공덕이 남긴 또 하나 빛살이어라. / 사제로서 평화의 막중한 천상 율법을 수호하며 / 그대는 맡겨진 중생을 도덕으로 제도하느니 / 그대가 이루는 위업이 두 분에게 영광의 화관을 둘러 드릴수록 / 온갖 덕성을 갖추신 어머니, 아드님을 두고 더욱 행복해하시리니.”

 

지금 오스티아 안티카의 ‘아우레아 성녀 성당’ 오른쪽 경당의 벽에는 1945년에 발굴된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미 크게 명망을 떨치는 히포의 사제 아우구스티노의 모친 무덤에 바수스라는 정치가(408년에 로마 집정관을 지냈다.)가 새긴 비문이다. 아우구스티노가 사제품을 받은 해가 391년(주교품을 받은 해는 395년)이니까, 모니카가 세상을 떠난 해(387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워진 것이다.

 

열댓 번 넘게 비문을 읽을 적마다 필자는 교회사의 현장 하나를 목격하는 감동을 느끼곤 했다. 오스티아에 매장되어 있던 모니카의 유해는 1430년 로마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으로 옮겨졌다. 아들 명의의 성당에 안치된 모니카의 석관 옆에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어머니들의 자식 걱정과 불효를 하소연하는 편지가 무수히 쌓인다.

 

“아, 주님, 저는 당신의 종, 당신의 종이자 당신 여종의 아들입니다.”(9.1.1)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고백록」 제9권 후반부(8.17-13.37)는 고대 서양 문학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사모곡이다. 하느님의 가없는 자비를 고스란히 체현하기에, ‘엄마’라는 이름은 모든 잘못을 용서받는 꿈이 아니던가?

 

“저 여종은 몸으로 저를 이 현세의 빛 속으로 빚어 주고 마음으로는 제가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얘기하려는 것은 제게 베푼 그이의 은혜가 아니라 그이에게 베푸신 당신의 은혜입니다”(9.8.17).

 

그렇게나 속을 썩이던 아들이 “집어라, 읽어라!”라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저 밀라노 정원에서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제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습니다.”(8.12.29)라는 신비 체험을 한다. 그 뒤 모니카와 아우구스티노 모자는 이미 “당신께서는 저희 심장에 당신 사랑으로 화살을 쏘아 맞히셨고, 당신 말씀이 오장육부에 박힌 채로 고스란히 지고 가는 중”(9.2.3)이었다. 그렇게 밀라노에서, 알프스의 산자락 카시키아쿰에서, 그리고 오스티아에서 바싹 아들 곁에 보낸 세월은 모니카에게 꿈같기만 했다.

 

이 행복은 이러한 회고로 남겨졌다. “주님, 마지막에는 그이가 당신 안에서 영면하기 전에 저희 모두가 당신 세례의 은총을 받고서 한데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저희 모두를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거두었고, 또 마치 자기가 저희 모두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저희 모두를 섬겼습니다”(9.9.22).

 

고향 타가스테로 함께 귀향하던 길에 하필 내전이 일어나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뱃길이 끊겨 일행은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반년 넘게 머물게 된다. 거기서 모친 모니카는 죽음을 맞는다. 하느님께 오롯이 헌신하려는 아우구스티노에게서 ‘마지막 사슬’이 풀려나는 장면이다.

 

교부의 단 하나 혈육, 아데오다투스의 죽음도 실려 있다. 교부의 철학 교본 가운데 가장 난해한 언어 철학서 「교사론」의 대담 상대가 될 만큼 “아이의 대단한 재능이 두렵기까지 한” 까닭은 자기가 걸었던 파란만장을 따라 걷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생명을 당신께서는 일찍 지상에서 거두어 가셨으니 차라리 저는 마음 놓고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 그의 소년기도 청년기도 어른으로서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9.6.14)라고 실토한다.

 

 

평범한 성녀

 

아들을 그리스도교에 입문시키려는 집념과 눈물과 기도를 제외하면, 「고백록」에 묘사되는 모니카의 언행은 평범하기까지 하다. 그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그렇다.

 

처녀 시절 술 곳간 심부름을 하다 한 모금 두 모금이 잔술로 늘어 계집종한테서 ‘모주망태’라는 욕설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9.8.18). 남편 파트리키우스의 횡포와 손찌검을 집 밖에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9.9.19-21). 어린 아우구스티노가 중병에 들자 서둘러 세례를 준비시키더니만 병이 금세 낫자 세례를 미뤄 버리는데 그 핑계가 “아직 더 산다면 때가 더 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었다(1.11.17). 유학하다 일시 귀향한 아들이 온갖 염문을 뿌리는데도 모친의 유일한 걱정은 동네 유부녀를 건드려 사달이 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2.3.7). 서둘러 장가를 들이자니 “아내라는 족쇄 때문에” 아들의 출셋길이 묶일지 망설였다(2.3.8).

 

서른아홉에 과부가 되어서인지 큰아들에 대한 애착이 유달랐던 모니카는 카르타고에서 훈장질하던 아들이 로마로 떠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따라가겠다고 한사코 덤빈다. “엄마, 저 안 떠나요. 저기 키프리아누스 경당에서 기도하고 계셔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올게요.” 이렇게 말하고선 밤새 훌쩍 떠나 버린 아들의 “속임수와 매정함을 실컷 원망했으면서도”(5.8.15) ‘아양에 가까운 말투’(아들이 남긴 표현)를 접을 줄을 몰랐다. “마지막 병상에서 드리는 시중을 두고 효자라고 불렀고, 아들이 자기한테 쏘아붙이거나 무례한 소리를 그 입에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9.12.30).

 

아들이 밀라노로 가서 황실 교수로 출세하자 16년이나 아들을 수발하면서 손주까지 낳아 준 여자를 기어이 쫓아내고, 서른세 살 아들을 열 살짜리 양갓집 규수한테 약혼시키는 극성은 비록 아들 후광으로 성녀로 추앙을 받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도 든다.

 

단 신심만은 대단했다. 성깔 사나운 “남편의 이승살이 마지막에 그를 교회에 인도하여 세례받게 하였다”(9.9.22). 똑똑하다던 아들이 마니교에 빠지자 한 번만 아들을 만나 타일러 달라고 어느 주교에게 하도 조르는 바람에 “그렇게나 많은 눈물 바람을 받은 자식이 망할 리 없소.”라는 짜증도 들어야 했다(3.12.21). 아들 사정이면 “하느님의 자비를 마치 하느님이 발부하신 채무 증서나 되듯이 하느님께 마구 꺼내 보이는” 몰염치로 보면 전형적인 ‘엄마’였다.

 

여하튼 “극진한 충정을 다해서 날마다 흘리는 내 어머니의 눈물에 내가 멸망하지 않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아들도 인정한 이상, 모친에 대한 아들의 다음과 같은 총평은 로마인 묘비명에 흔히 쓰는 어투였다. “그이는 한 남편의 충실한 아내였고, 어버이에게 은덕의 보답을 하였고, 자기 집안을 경건하게 건사하였고, 선행으로 평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간다고 느낄 때마다 산고를 다시 겪다시피 하며 그들을 길렀습니다”(9.9.22).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아들한테 걸던 소원이 다 이루어지자 모니카는 휘적휘적 이승을 서둘러 떠난다. “당신 눈에 저를 살아 있게 하려고 저를 두고 여러 해를 울었던 어머니”(9.12.33)와의 대화는 퍽 소탈하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마당에 여기서 아직도 뭘 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9.10.26).

 

여관집 창가에서 모자가 겪은 신비 체험은 부럽기까지 하다(9.10.23-26). 신비 체험이 있은 지 겨우 닷새쯤 지나 모니카는 열병으로 몸져눕는다. 모니카는 묏자리에 유난히 마음을 썼고, 남편 옆에 묻힐 터도 장만해 둔 터였다.

 

“너희 어미를 여기다 묻는구나. … 이 몸이야 아무 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9.11.27-28).

 

구구절절 모친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깃든 사모곡은 “그렇게 병석에 누운 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9.11.28)라는 말마디로 끝난다.

 

모친을 오스티아에 묻은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는 간절하다. “그이가 구원의 물로 세례받은 뒤에 그 많은 햇수 동안 혹시라도 진 빚이 있거든 당신께서도 그이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 주님, 탕감해 주십시오. 비오니 탕감해 주십시오. 저의 어머니를 데리고 법정에 들지 마십시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9.13.35). 그리고 당부한다. “글로써 제가 섬기는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때면 당신 제단에서 당신 여종 모니카를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9.13.37).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10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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