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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아름답게 져 주기 연습 - 아빠는 딸, 나는 네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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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0 ㅣ No.1010

[영화 속 신앙 찾기] 아름답게 져 주기 연습 - ‘아빠는 딸’, 나는 네가 아니므로

 

 

감히 이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기까지 무척이나 고심했다.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지, 부모의 책임이란 어디까지인지 아주 괴롭게 자문해 봤다. 실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너의 성장통, 나의 흉통

 

사실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는 여전히 ‘부모’ 쪽이라기보다는 ‘자식’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읽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 또한 얼결에 부모가 되어 살고 있지만, 솔직히 정신적으로도 ‘부모’가 되어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벽에 부딪혔을 때, 이 나이를 먹고도 부끄럽게도 여전히 부모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고, 나도 이젠 부모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곤 한다.

 

그런데 최근 내내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헤집게 했던 이가 딸이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중2병’ 증상을 보이는 그 애의 복잡한 심경과 뜻밖의 행동들을 최대한 헤아려야 했다. 이게 어떻게 지난 14년간 보아 온 내 딸이란 말인가!

 

낯설다 못해 두려웠다. 다 내 탓이라는 자책감과 내 탓이 아니라는 변명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자식이라는 ‘너’의 성장통은, 나의 일상과 사고 체계까지 압도해 버릴 것 같았다. 자식은 어쨌든 가슴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가지만을 바라게 되었다. 너의 방황이 나의 흉통으로 직결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다만, 서로를 갉아먹기 전에 잠잠해지기를 빌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회의에 빠졌다. 이 또한 나의 욕심일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대체 뭘까?

 

그래도 이 문제를 피해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이 질문들 말고 다른 주제에 대해 집중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쩌면 이 또한 현재의 나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일단 쓰고 나중에 생각이 깊어지면 고치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코미디 영화를 보는 일은 기분 전환에 꽤 도움이 되었다. 실컷 웃고 적어도 두어 시간은 만사를 잊게 되니 말이다. 봄에 개봉한 우리 영화 ‘아빠는 딸’은 일단 재미있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실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에도 적당한 영화였다.

 

 

‘아빠는 딸’, 최악의 바뀜이 불러온 기회

 

영화는 주인공 원상태(윤제문 분)와 딸 원도연(정소민 분)의 행복한 한때로 시작한다. 아빠 어깨에 목말을 탄 채로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거는 예닐곱 살 무렵의 딸. 약속 내용은, 커서 반드시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맹세다. 이거야말로 어린 딸에 대한 아빠들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인가 보다.

 

딸의 야무진 목소리 “약속!”이 어째 환청처럼 지나치게 청아하다 싶을 즈음, 화면은 흔들린다. 혼자 청승맞게 ‘옛’ 녹화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아빠의 독백이 현재 시점이다. 아빠의 처량함은, 옛사랑을 휑한 가슴으로 추억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보는 순간 바로 웃음이 터진다. 다들 속아 봐서 잘 아는 농담이 아닌가.

 

딸은 이제 열일곱 살 여고생이다. 원도연은 사춘기 아니 반항기의 한복판이다. 부모와는 말도 거의 섞지 않는다. 엄마도 아빠도 도연이 눈치만 본다. 어느 날, 아빠와 딸은 시골 외가의 천년 묵은 은행나무 앞에 서게 된다. 엄마도 없이 둘이 입씨름을 벌이다 서로 화를 내며 내뱉는 말이 똑같다. “내 인생 딱 하루만 살아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걸?”

 

영화 ‘아빠는 딸’은 일본 작가 이가라시 다키하사의 소설 「아빠와 딸의 7일간」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2007년에 7부작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각색의 한 좋은 예라고 해도 될 만큼, 한국적 상황과 코드로 현실감 있게 재탄생했다. 이 작품은 흔하다면 흔한, 이른바 ‘보디 체인지’ 이야기다.

 

어쩌면 몸이 바뀌는 극단의 상상력 없이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벼락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갑자기 몸과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전개를, 관객들도 이제는 ‘공감’을 끌어내는 장치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영화는 오해와 이해 사이를 오가며 웃음과 함께 관객을 설득한다. ‘아빠와 딸’은 몸이 바뀌는 것 중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택했다. 47세 만년 과장 아빠와 열일곱 살 딸이라니,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조합이 아닌가? 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처럼 “극혐”이 따로 없다.

 

아빠와 도연은 은행나무의 영험함 탓인지, 난데없이 교통사고 뒤 몸이 바뀐다. 당연히,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말씀이, 둘이 안 싸우고 7일간 잘 지내면 원상 복구가 된다는 게 은행나무의 전설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도리 없이 둘은 엄마에게 비밀로 하고 바꿔서 산다. 아빠는 등교하고, 딸은 출근한다. 서로의 핸드폰 속 정보가 이 난관을 헤쳐 나가게 해 줄 유일한 열쇠다. 일상은 순간순간이 예측 불허의 악전고투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꾸 엇나가는 사고만 생긴다. 그런데 이 모습이 볼 수록 재미있어진다.

 

배우 윤제문에게서는 여고생의 발랄함과 귀여움이, 배우 정소민에게서는 아저씨의 결단력과 중후함이 물씬 배어 나오기까지 한다. 관객도 어느 순간 이 둘의 영혼이 정말로 바뀌었다고 믿게 된다.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하지만 웃다 보면 어느덧 코끝이 찡해진다. ‘딸바보’지만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와 단절된 딸의 속사정을 들추면서 관객들에게 황당한 현실감마저 느끼게 한다. 영화 속 설정이나 대사들이 그럴듯할수록 웃다 찔리고 뭉클해진다.

 

분명 고교 시절을 우등생으로 살아 봤음에도 딸의 학교생활은 외계인의 나라처럼 기이하다.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고 큰소리쳤는데, 꼴찌를 맴도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딸 앞에 민망할 뿐이다. 원상태는 자신이 그간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아저씨였던 듯 팍팍하게 살았음을 깨닫는다.

 

원도연은 아빠에게도 꿈이 있고 여린 감수성이 있음을 배우게 된다. 어른은 그저 나이만 늘어난 사람들이 아니며, 저마다의 책임을 용케 짊어진 이들임도 절실히 경험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본디의 몸으로 돌려진다.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지라도, 둘은 이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관객은 사춘기 여고생이나 중년의 부모나 ‘세상 귀찮은 나이’라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미소 짓게 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속이 꽉 찼다. 다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줘야 어른이든 아이든 “인생 종착역은 어차피 치킨집”이라는 허무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관계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힘이 날 것이다. 그런 게 소통이 아닐까?

 

 

배려, 서로의 가치를 지켜 주기

 

딸 도연이의 관심은 온통 밴드부 선배 ‘지원 오빠’에게 가 있다. 아빠에게는 팀원들과 준비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할 임무가 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두 사람은 ‘대역’을 해내느라 진땀 흘리며 ‘진짜’의 맛은 빼앗겨 속상해한다.

 

딸이 귀히 여기는 게 있고, 아빠가 온몸을 바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다만, 그것은 어쩌면 본인에게만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지점이다. 몸이 바뀌어 처지까지 바꿔 살아야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평행선일 것이다.

 

딸이나 아버지나 서로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은, 제발 나의 소중한 부분에는 손대지 말라는 점이다. 부디 내가 제자리로 돌아가 스스로 챙기게 될 때까지, 내 자리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간절한 바람이다. 실제로 자기가 옳다고 이기려고만 들면, 상대방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지켜 주는 쪽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려웠다. 최대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했다. 상대방이 사수하려는 가치들을 지켜 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내 고집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고민하는 것. 그런 노력이 아마도 ‘져 주는’ 연습일 것이다.

 

누군가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사실상 인간이 해내기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예수님의 말씀이 요즘다라 퍽 가혹하게 들린다.

 

판타지가 아니어도, 영화 속 장면이 아니어도 ‘역지사지’가 아주 잠깐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 참 어렵다. 하지만 포기는 않으련다.

 

* 김혜원 로사 - 문화 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6월호, 김혜원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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