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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과 성격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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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849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과 성격에 대한 연구

 

 

국문 초록

 

이 글은 주로 1850년대 조선에 설립된 신학교의 설립 과정과 성격을 다룬 연구이다. 특히 2005년부터 제기된 정식 신학교의 출현 시점과 관련하여, 기존의 주장과 자료들을 재검토했고, 이를 통해 1850년대 설립된 신학교들의 성격을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1850년에 정식 신학교가 등장했다는 연구에 대해,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세운 배론 신학교가 정식 신학교였다는 2005년 이전의 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1850년 이전 조선 대목구에서의 신학생 양성은 한 곳에 정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사목 순방 중에 하거나, 여름 휴식처에서 몇 달간 교육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동형 혹은 임시 형태’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정식 신학교는 ‘신학생 교육을 목적으로 교구장의 지시와 정주 형태의 신학교 운영’이 요구됨으로, 1850년 이전의 앵베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 때에는 아직 정식 신학교가 조선에 설립되지 않았다. 이것은 앵베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도 자신들의 서한에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다가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병이 나서 신학생들만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정주 형태의 신학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다블뤼 신부의 병이 계기가 되었고, 다블뤼 신부의 병이 나으면 다시 이전과 같은 이동형 혹은 임시 형태로 바뀔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이 신학교는 정주형이지만 ‘임시성’이 강하여 ‘임시 정주형 신학교’라고 할 수 있고, 1851년 5월 이전에 설립된 배티 신학교가 이러한 성격의 학교라고 하겠다.

 

신학생들이 유학을 떠난 1854년 3월 이후, 배티 신학교의 교육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1855년에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와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신학생 교육을 위해 일정한 장소를 선정한 것으로, 정식 신학교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대목구의 신학생 교육은, ‘이동 · 임시 형태의 교육’에서 ‘임시 정주형 신학교’ 그리고 ‘정식 정주형 신학교’로 발전되어 갔으며, ‘정식 정주형 신학교’는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1. 머리말

 

한국 교회의 신학생 양성 사업은 조선 대목구가 설정(1831)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선교지를 맡게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1836년에 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가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고, 국내에서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정하상 등이 교육되었다. 그리고 1844년 이후에는 김대건 부제와 다블뤼 신부에 의한 신학생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855년에는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배론 신학교의 설립은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사목 순방 중에 개인적으로 해오던 신학생 교육이, 정식 신학교의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에 배론 신학교는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로 평가되어 왔다.1)

 

그러나 2005년 이후 이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나와 기존의 통설을 부정하고 있다. 즉 배론 신학교는 한국 교회에 있어 최초의 신학교가 아니며, 그에 앞서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세운 신학교가 그러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다.2)

 

이러한 연구들은 지금까지 이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을 토대로 문제를 제기했고, 이를 통해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1850년에 설립되었다는 신학교의 성격을 오해한 측면이 있다. 그 결과 배론 신학교가 갖는 의미는 물론, 조선 교회에 정식 신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이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필자는 박해 시대 신학교 문제를 재검토하여, 1850년대에 설립되는 신학교들의 성격과 그 설립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다블뤼 신학교의 성격

 

지금까지 신학교와 관련해서 이용되었던 자료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이며, 이 책에 수록된 신학교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페레올 주교의 1850년 11월 5일자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 신학생이라고는 이 포교지의 비용으로 양성하는 소신학생 5명뿐인데, 이들은 서양인 신부가 여행할 때 따라다니며 그의 지도로 라틴어와 한문의 초보를 배우고 있다.3)

 

㉯ 그(장주기)가 배론에 정착한 지 12년 되는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러 왔고, 그는 1856년 말 푸르티에 신부가 도착할 때까지 3명의 첫 번째 학생들을 혼자서 책임 맡고 있었다.4)

 

㉰ (메스트르 신부의 1855년 2월 4일자 서한) 우리의 신학교는 여느 때처럼 잘 되어 나갑니다. 학생들을 숨겨두기가 어려워서 6명밖에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블뤼 신부가 다른 곳에 학교를 하나 세워 제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그 학교에도 같은 수효의 학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5)

 

위의 자료 중 ㉮는 박해 시대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신학 교육을 실시한 상황을, ㉯는 메스트르 신부가 1855년에 배론 신학교를 설립한 사실을, ㉰는 1855년 2월 현재 신학교가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2005년 장동하의 연구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교회 신학교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근거였다. 즉, 위의 내용을 토대로 1855년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신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교육하다가,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최초의 교구 신학교가 생겼다는 것이다.6)

 

그러나 장동하는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았던 다블뤼 신부의 서한들을 이용하여 기존의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설을 내놓았다. 즉 조선 대목구 최초의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가 아니며, 1850년에 설립이 결정되고, 1851년 5월7)부터 교육이 시작된 정식 신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1 주교님께서는 성무 활동으로 제 몸이 상한 게 아닐까 걱정하시어, 휴식을 가지라는 뜻에서 제게 몇몇 어린 소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소임을 맡기셨는데, 이 학생들은 배우는 속도가 더딥니다….

 

㉱-2 어쨌거나 저는 지금 이들 학생들 중 몇몇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조만간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곳에 저는 겨울 동안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매우 큰 집으로 방이 두 칸 있는데, ….

 

㉱-3 이처럼 부모님께서는 제가 조선 최초의 가톨릭 학교이자 문과 학교의 책임자에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직책입니까! 자랑스럽지 않으신지요? 특히 경쟁 상대가 없는 가운데, 저는 이 학교의 학장이자, 라틴어 선생으로, 게다가 제가 알고 있는 것이든 모르고 있는 것이든 모든 학문을 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 그런데 가장 안 좋은 점은 조선인들은 인내라는 덕목에 있어 그리 높은 점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에 걸쳐 몇 달 정도 기초를 가르쳤던 학생들은 출세가 더 좋은지 하나둘 떠나갔습니다. 올봄에 한 명이 나갔는데, 이로 인해 저의 심적 고충이 무척 컸습니다.8)

 

㉲ 저는 여전히 한동안은 주교님과 함께 지내겠지만, 조만간 저의 담당지로 떠날 것이고, 올해 역시 예년처럼 똑같은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작년 10월에 ‘신학교(college)로 쓸 집’ 한 채를 구입하러 갔었고, 올 5월 이전에 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곳을 떠나 약 200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으며, 이런 일들을 매년 되풀이해야 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9)

 

자료 ㉱와 ㉲는 장동하가 자신의 입론 근거로 삼고 있는 다블뤼 신부의 서한들이다. 그는 이를 토대로,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1850년에 신학생 양성 책임자로 정식 임명된 후 신학교용 집을 구입하였고, 1851년 5월 이전에 (집을 구입한) 그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신학생 교육을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 있어 정식 신학교는 1851년 5월에 이미 교구장의 의지와 계획으로 설립되었다고 하였다.10)

 

차기진도 ㉱와 ㉲를 인용하여 1850년에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같은 해 9월 이전에 신학교용 집을 매입함으로써,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고 하였다.11) 다만 장동하가 1850년에 집을 구입하고 몇 개월이 지난 1851년 5월 이전에 그곳으로 이사하여 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반면, 차기진은 집을 구입한 1850년부터 교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고, 1851년 5월 이전의 이주 기록은 집을 구입한 곳에서 겨울을 나고 다음 해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해석하였다.12) 결국 이상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대목구의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에 앞서 1850~1851년에 이미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에 대해서는 기존의 설에서도 언급했었다. 즉 달레의 “너무 병약하여 신자들을 찾아다닐 수 없는 다블뤼 신부는 포교지의 신학교를 형성하는 어린 학생들을 맡아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피정을 한 다음 다블뤼 신부는 11월에 서울을 떠나 신학생들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병이 나을 때까지 그들을 맡아보게 되었다”13)는 기록에 대해, 최석우는 ‘이 신학교는 어떤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다기보다는 다블뤼 신부 개인에 매여 있었던 것으로,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들을 한곳에 모아 지도하고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병으로 인해 신자 방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을 맡아보는 것은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이며, 이 신학교는 그의 건강 회복과 더불어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4)

 

최석우의 견해에 대해, ‘병이 나을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이고 시작하는 학교는 없다’,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회복되더라도 신학교는 그대로 있고, 다블뤼 신부의 전담 사제 역할만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등의 반론이 있었다.15)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다블뤼 신부의 발병이 신학생 교육에 전념하라는 1850년 지시의 계기가 되었고, 또 같은 지시가 1851년에도 내려진다는 점에서, 다블뤼 신부와 1850년의 신학교는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최석우의 견해처럼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이전처럼 성사 활동 중에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형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비록 신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 신학교는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와 ㉲에 나오는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를 조선 대목구 최초의 정식 신학교라고 보는 근거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신학교가 이동식이든, 임시적이든 교구장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신학교는 모두 정식 신학교인데, 1850년 이전에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육시킨 것은 주교의 지시가 있기 전이므로 다블뤼 신부 개인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임시 신학교 또는 개인 신학교였고, 1850년에야 다블뤼 신부가 정식 신학교 책임자로 임명된다’16)는 견해이다.

 

그런데 과연 이 주장처럼 1850년 이전에는 교구장의 지시 없이 신학생 교육이 이루어졌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다블뤼 신부는 1850년 이전에도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페레올 주교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자료 ㉮에서 “라틴어와 한문의 초보를 배우고 있는 신학생들의 존재”를 언급했고, 또 1850년 11월 17일자 서한에서는 “오래전부터 2~3명의 학생을 홍콩에 보낼 생각을 했는데, 조선을 떠나기가 어려워 현재까지 미루고 있다”17)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포교성성에 보낸 보고서(1849년 12월 4일)에는, ‘최근에 양성되고 있는 신학생들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사제직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문의하고 있다.18)

 

이처럼 페레올 주교는 1850년 이전부터 교육되던 신학생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오래전부터 유학을 보내려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생 교육은 주교의 허락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주교의 허락이 있었다면, 사제 양성의 최고 책임이 교구장에게 있다19)는 점에서, 여기에는 ‘지시’의 의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구장의 지시’가 정식 신학교의 핵심 요건이라면, 1850년의 신학교만이 그러한 요건을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럴 경우 신학교의 설립 시기는 상당히 소급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836년 모방 신부가 김대건 등 3명의 신학생을 교육했던 것과 1838년 앵베르 주교가 정하상 등을 가르친 것도 신학교의 설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건 등의 교육은 이들의 유학이 결정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시적인 것이므로, 이것을 신학교의 설립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의 신학생 교육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즉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가 3명을 마카오로 보냈듯이, 다른 3명을 유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울러 국내에서 사제직에 적합한 4명을 선발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그 중 2명(정하상, 이재의)에게는 신학을 가르치면서 3년 안에 신품을 줄 희망을 품고 있었다.20) 따라서 ‘교구장의 의지 · 계획 · 지시’라는 기준에 의하면 정식 신학교의 설립은, 비록 속성 교육의 성격이 강하지만, 앵베르 주교의 신학생 교육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즉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을 보면, “이 조선 땅에는 정황으로 보아 우리 신학교를 가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21)라고 하여, 1838년 말까지도 조선에는 정식 신학교가 없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앵베르 주교는 다른 사목 활동과 병행하는 신학생 교육을 정식 신학교 교육과는 구별하고 있는 듯하다.22) 이러한 상황은 페레올 주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페레올 주교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7년 11월 25일자 서한에서 만주에 신학교를 세우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23)

 

한편 앵베르 주교의 신학생 교육 이후, 다블뤼 신부도 신학생 교육을 하고 있었다. 즉 다블뤼 신부는 1850년 9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서, “제가 지난 몇 년간에 걸쳐 몇 달 정도 기초를 가르쳤던 학생들은 출세가 더 좋은지 하나둘 떠나갔습니다”24)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다블뤼 신부는 1850년 이전 몇 년 전부터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신학생 교육은 한곳에 정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목 순방 중에 데리고 다니면서 하거나, 아니면 여름 휴식처에서 몇 달간 교육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동식 혹은 임시 신학교’였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신학교는 정식 신학교라고 할 수 없다. 즉 정식 신학교라고 하면 대체로 이동식 · 임시적인 성격의 신학교보다는, 정주 형태의 신학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25)

 

결국 1850년 이전에 실시된 앵베르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신학생 교육은 정식 신학교의 설립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조선 대목구에 ‘정식 신학교’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언제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기존에는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1850년에 설립된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를, ‘교구장의 지시에 의한 정주 형태의 신학교’로 간주하여, 최초의 신학교로 보고 있다.

 

그러나 1850년의 신학교는 비록 정주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다블뤼 신부의 병이 설립과 존립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성격이 강하다. 즉 자료 ㉱-1의 내용은,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교의 설립을 목적으로 공식적으로 신학생 교육을 위임한 것26)이 아니라, 병이 들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성사 집행과 병행하던 신학생 교육에 일시적으로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치를 ‘정식 신학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다블뤼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1853. 9. 6)를 보면, “1851년 말경에 주교가 신학교에 자신을 있게 하고, 혼자서 성사 집행을 맡았다”27)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페레올 주교는 1850년에 이어 1851년 말에도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교를 맡기고 있다. 그런데 1850년의 조치는 ㉱-1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이 난 다블뤼 신부에게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가 강했다. 따라서 병이 나으면 다시 사목 순방을 재개하는 것이 전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블뤼 신부의 몸은 1851년 11월까지도 대부분의 시간을 병석에 누워 있을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다.28) 그 결과 페레올 주교는 1851년 말에도 다블뤼 신부의 사목 순방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이 다블뤼 신부의 몫까지 일을 하면서, 그에게 계속 쉬며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29) 즉 1851년 말의 조치 역시 다블뤼 신부의 병이 낫지 않은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주 형태’가 되기는 했지만, 정주 형태가 되는 계기가 다블뤼 신부의 병이었다는 점에서, 이 신학교는 ‘임시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다음으로 ‘1850년에 정식 신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설’의 중요한 근거는 1850년 9월 말 다블뤼 신부가 부모에게 보낸 서한 내용이다. 즉 자료 ㉱-3을 보면, 다블뤼 신부는 자신을 ‘조선 최초의 가톨릭 학교 책임자’라고 하면서 “이 얼마나 멋진 직책입니까! 자랑스럽지 않으신지요? 특히 경쟁 상대가 없는 가운데, 저는 이 학교의 학장이자, 라틴어 선생으로, 게다가 제가 알고 있는 것이든 모르고 있는 것이든 모든 학문을 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임명되었습니다”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한 내용이 실제의 사실을 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즉 병이 들어 사목 순방을 쉬고 신학생 교육만 맡게 된 시점에서, 비록 한시적이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이러한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부모에게 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주재용도 “유머를 섞어가며 농담 비슷하게 진술하고 있다”라고 평가30)했듯이, 매우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위의 서한과 비슷한 시기인 1850년 11월 17일에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이 주목된다. 이 서한에는 “그(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약해, 그에게 성사 집행 일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몇몇 학생들을 보살핀다”31)라고 하여, 다블뤼 신부가 병 때문에 사목 순방을 할 수 없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만 쓰고 있다. 즉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이전과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블뤼 신부가 병이 난 상황에서, 최양업 신부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부담이 크게 늘어났을 것이라고 했고, 이러한 표현은 1851년 말에도 같았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는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맡은 신학교를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만약 1850~1851년에 정식 신학교를 설립하고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전담토록 했다면, 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과 1851년 12월의 서한에서, ‘다블뤼 신부가 병이 나서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목 순방을 허락하지 않았고 학생들을 돌보게 했다’32)라는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썼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최양업 신부를 언급하면서 최 신부가 없었더라면 모든 부담이 자신의 어깨에 떨어졌을 것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다블뤼 신부가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목 순방을 하지 못해서 생긴 어려움과 그가 빨리 회복되어 다시 사목 순방에 나서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 결코 다블뤼 신부를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다블뤼 신부가 부모에게 쓴 편지의 표현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올바른 이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세 번째로 다블뤼 신부가 1851년 11월에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되어 정주형 신학교를 운영했다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즉 만약 다블뤼 신부가 1851년 11월에 전담 사제로 임명되었다면, 1850년 초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를 ‘신학생 교육 책임자로 정식 임명’했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즉 이미 신학교를 맡겨놓고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1851년 11월에 신학교에 전념(전담)하게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연구자들은 다블뤼 신부가 1850년에 신학생 교육을 담당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여건상 신학교 운영에만 전념하기 어려워 신자(교우촌) 방문을 병행했고, 1851년 말에 와서야 비로소 신학교 운영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33)

 

하지만 다블뤼 신부의 행적을 보면, 1850년부터 1851년 말까지 사목 순방을 했다는 흔적이 없다. 즉 다블뤼 신부는 1850년 1월에 중병에 걸려 이때부터 2달 동안 미사를 드릴 수 없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가끔씩만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34) 이러한 상황에서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의 건강을 염려해서 사목 순방을 중지하고 신학생 교육만을 담당하도록 했고, 이러한 상태는 1850~185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다블뤼 신부의 병은 여전히 사목 순방을 할 만큼 호전되지 않았고, 이에 페레올 주교는 1851년 말에도 다블뤼 신부를 신학생 교육만을 책임지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따라서 1851년 말에야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에 전념할 수 있었다거나 전담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오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오해는 다블뤼 신부가 맡은 ‘신학교의 임시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겠다.35)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는 성격상 정식 신학교가 아니라 임시 신학교였다. 그렇지만 이 신학교는 신학생 교육을 위해 조선 교회 최초로 일정한 지역에 학사(學舍)를 마련하고 학생들을 교육했다는 점과 이후 배론 신학교와 같은 정식 신학교가 설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다블뤼 신부는 어느 곳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을까? 이와 관련하여 1854년 3월 페낭으로 유학을 떠난 ‘이 바울리노가 오랫동안 배티에서 다블뤼 신부와 함께 머물렀다’는 페롱 신부의 서한(1858년 9월 25일자)을 보면 배티에 신학교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36) 다만 자료상 다블뤼 신부가 구입한 집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851년 5월 이전에 이사한 사실과 페롱 신부의 서한 내용을 고려하면, 1851년 5월 이전에 옮겨간 곳이 배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바울리노 등은 이때부터 배티에서 몇 년간 교육을 받고 유학길에 올랐다고 생각한다.37)

 

 

3. 배론 신학교의 성격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조선 교회의 신학생 교육은 앵베르 주교 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임시 신학교이기는 하지만 형식상 최초의 신학교는 1850년 다블뤼 신부가 맡은 신학교였다. 다블뤼 신부는 1851년 5월 이전에 배티로 신학교를 옮겼으며, 여기서 배운 3명의 학생들이 1854년 3월에 페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후 조선 교회의 신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 그(장주기)가 배론에 정착한 지 12년 되는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러 왔고, 그는 1856년 말 푸르티에 신부가 도착할 때까지 3명의 첫 번째 학생들을 혼자서 책임 맡고 있었다.38)

 

㉰ (메스트르 신부의 1855년 2월 4일자 서한) 우리의 신학교는 통상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신학생들을 감추기가 어려워 6명의 학생들만을 맡았다. 다블뤼 신부는 같은 수의 학생들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곳에 학교를 세워 나를 도와주었다.

 

위의 자료는 1854년 3월 이후 조선 교회의 신학교에 대해 말해주는 자료들이다. 기존에는 이를 토대로 1855년 초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학교가 조선 교회 최초의 ‘정식 신학교’라고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이 배론 신학교는 1851년에 설립된 배티 신학교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배론 신학교가 1851년의 신학교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39) 그러나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설명된 적은 없다.40)

 

배티 신학교는 페레올 주교가 병이 나고, 이어 사목 구역이 새로 배정된 1852년 중반 이후에는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41) 왜냐하면 이 시기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 교육 이외의 다른 사목 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티의 신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손42)에 맡겨지는 등 조금은 방치된 상태43)에 있다가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페레올 주교의 사망(1853. 2) 이후 조선 대목구를 임시로 맡게 된 메스트르 신부는, 1854년 3월에 신학생들을 페낭으로 보내는 한편, 국내에서도 다시 신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재개하고자 하였다. 비록 박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을 교육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신학생들을 계속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44) 그러나 이후 배티에서는 더 이상 신학생 교육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 (1855년 11월 3일자 메스트르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모든 일이 공중누각을 세우는 것일지라도, 나는 페낭에 보낸 3명의 학생을 대신하여 우리의 신학교에 6명의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돈으로 예비 학교를 세웠는데, 2~3명의 학생과 함께 올해 시작하게 됩니다.45)

 

위의 자료에서 언급되는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이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메스트르 신부는 페낭에 보낸 3명의 학생을 대신하여 6명의 ‘새로운’ 학생들을 신학교에 받아들였다고 했다. 여기서 새로 학생들을 받아들인 시점은 알 수 없지만, 표현상 이 6명은 유학 간 3명을 대체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은 1854년 3월 이 바울리노 등이 페낭으로 떠난 후, 다시 신학생들을 모집해서 교육을 재개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즉 조선 교회에 있어 신학생 교육의 연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학생 교육이 재개된 시점은 언제일까? 앞서 언급했던 자료 ㉰는 1855년 2월 4일자 서한인데, 이것으로 보아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세운 것은 1855년 1월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월에 와서 곧바로 6명의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개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메스트르 신부는 다른 곳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배론으로 이주했다고 생각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는 조선 땅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문제 되었을 때, 선교사들은 가장 적당하고 또 외교인들과의 접촉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장소를 선정하려고, 선교지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매우 애를 썼다. 그들은 배론을 주목했는데, (이곳은) 아주 작은 험준한 골짜기로, 거대하고 오르기 힘든 산들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으며, 방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몇 번의 여름을 보낸 곳이다. 학교를 세울 장소가 정해지자, 선교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의 이름으로(책임하에) 학교를 맡아야 할 사람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에 앞서 학교의 집 주인으로 장 요셉이 선정되었다. 1855년경,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와서 장 요셉의 집 부속 건물(별채)에 학교를 세웠다. 그는(메스트르) 여기에서 1856년 푸르티에 신부가 도착하여 그에게 직책을 넘겨줄 때까지, 3명의 학생과 함께 있었다.46)

 

위의 기록은 칼레(1861~1866 : 조선 사목) 신부가 쓴 <장주기 요셉의 순교 보고서>이며, 배론 신학교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안전하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가운데 배론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에 따라 1855년에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가서 신학교를 세우고 1856년 8월 푸르티에 신부가 올 때까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 교회에서는 1855년 이전에 이미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을 책임지고 실행한 사람이 바로 메스트르 신부였다.47) 다시 말해 선교사들은 1854년 후반경48)에 이미 배론을 신학교 후보지로 결정하고 장주기를 집주인으로 선정했으며, 이러한 준비 끝에 1855년 1월경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으로 와서 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49)

 

다만 선교사들이 배티에서 계속 신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배론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의문이다. 물론 이와 관련된 자료가 없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료 ㉴에서 ‘선교사들이 가장 적당하고 또 외교인들과의 접촉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장소를 선정하려고, 선교지 전체를 돌아다니며 매우 애를 썼다’고 하였듯이, 배론이 신학교 후보지로 선정된 데에는 입지 조건이 가장 먼저 고려되었다. 따라서 이런 점으로 볼 때, 배티는 이미 외교인들에게 많이 노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와 함께 1854년 3월, 3명의 신학생들이 유학을 떠난 후에 곧바로 새로운 학생들이 모이지 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원인들이 작용하여 수개월 동안 신학생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854년 후반경 선교사들은 다시 신학교의 설립을 계획하고 신학생들을 모아 1855년 1월경에 배론 신학교를 설립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배론 신학교는 이전의 신학교와는 달리 처음부터 ‘정주형 신학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즉 신학교의 책임을 맡은 메스트르 신부는 신학생들을 사목 순방 때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배론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두고, 신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정주 형태의 신학교는 아마도 배티 신학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배티 신학교가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성격의 신학교’였다면, 배론 신학교는 처음부터 배론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의 신학생 교육’, 즉 ‘정주형 신학교’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교회의 신학교는 “이동 · 임시 형태의 신학생 교육”에서 “임시 정주형 신학교”(다블뤼 신학교)라는 과도기를 거쳐 “정식 정주형 신학교”(배론 신학교)의 형태로 점차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배론 신학교와 관련하여, 1855년 당시 조선 대목구에 2개 이상의 신학교가 존재해 있었다는 견해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50)

 

㉰ (메스트르 신부의 1855년 2월 4일자 서한) 우리의 신학교는 통상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신학생들을 감추기가 어려워 6명의 학생들만을 맡았다. 다블뤼 신부는 같은 수의 학생들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곳에 학교를 세워 나를 도와주었다.

 

㉳ (1855년 11월 3일자 메스트르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모든 일이 공중누각을 세우는 것일지라도, 나는 페낭에 보낸 3명의 학생을 대신하여 우리의 신학교에 6명의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돈으로 예비 학교를 세웠는데, 2~3명의 학생과 함께 올해 시작하게 됩니다.

 

㉵ (1855년 2월 18일자 다블뤼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우리에게는 아직 몇몇의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늘었고, 여럿은 작년에 신부님께서 잘 받아 주셨던 이들보다 훨씬 훌륭한 듯합니다.51)

 

자료 ㉰와 ㉳를 보면 메스트르 신부는 다블뤼 신부가 따로 학교를 세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는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다블뤼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가 각각 별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자료 ㉵는 다블뤼 신부가 세운 학교를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와 ㉵의 신학교를 다른 학교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의 내용을 보면 ㉳와 마찬가지로 ‘여럿은 작년에 신부님께서 잘 받아 주셨던 이들보다 훨씬 훌륭한 듯합니다’라며 페낭 유학생들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다블뤼 신부가 ㉵에서 언급하고 있는 신학생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아니라, 메스트르 신부가 관리하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조선 대목구 신학생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서 메스트르 신부는 다블뤼 신부의 예비 학교가 올해(1855)에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1855년 11월 3일 현재까지 학교는 마련되었지만, 아직 교육 자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이제부터 다블뤼 신부가 메스트르 신부를 도와 신학생 중 일부를 맡아 교육할 예정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상의 사실은, 1855년 당시 조선 대목구에는 2개의 신학교가 있었지만, 양자는 자료 ㉰의 “메스트르 신부가 신학생을 감추기 어려워 6명의 학생만을 맡았다”, “다블뤼 신부가 학교를 세워 나를 도와주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학교가 아니라 같은 체계 안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학교들임을 말해준다. 즉 다블뤼 신부가 세운 학교는 박해 때문에 신학생들을 나누어 교육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조치이며, 배론 신학교의 분교와 같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료 ㉳에서 메스트르 신부가 다블뤼 신부의 학교를 ‘예비 학교’(ecole preparatoire)라고 규정했듯이, 다블뤼 신부는 교구 신학교에서 예비 신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기로 했고, 그 예비 학교는 박해 때문에 배론이 아닌 다른 곳(다블뤼 신부의 사목지)에 위치했던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과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식 신학교의 설립 시기와 관련해서, 조선 대목구의 신학생 교육은 1850년 이전의 ‘이동 · 임시 형태의 교육’에서, 1850년의 ‘임시 정주형 신학교’를 거쳐 1855년의 ‘정식 정주형 신학교’ 형태로 발전했다. 이 중 1850년의 신학교가 ‘임시 정주형’인 것은, 다블뤼 신부의 신병이 이 신학교의 설립과 존립의 계기가 되었고, 다블뤼 신부의 병이 나으면 다시 이동 형태로 바뀔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는 처음부터 신학교를 세울 목적에서 일정한 장소를 마련했으므로 정식 정주형 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둘째, 1850년의 신학교는 비록 임시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조선에 등장한 최초의 정주형 신학교였으며, 특히 1851년 5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티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셋째, 배티 신학교는 1854년 3월 이후에 폐쇄되었지만, 얼마 뒤 조선 교회에서는 신학생 교육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선교사들은 이전처럼 ‘이동형 또는 임시적인 성격’이 아니라, 정주 형태의 정식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1854년 후반경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배론을 신학교 장소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1855년 1월에 메스트르 신부가 이곳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신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넷째, 배론 신학교가 설립될 당시, 교구 신학교는 신학교와 예비 학교로 구성되었고, 이 중 신학교는 메스트르 신부가, 예비 학교는 박해 때문에 배론이 아닌 다른 곳(다블뤼 신부의 사목지)에 세워 다블뤼 신부가 맡기로 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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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규량, <군난 시대를 감상케 하는 제천 배론>, 《경향잡지》 659(1929. 4), 163쪽 ; 주재용, 《배론(舟論) 聖地》, 가톨릭출판사, 1975, 70, 72쪽 ; 최석우, <한국 교회와 한국인 성직자 양성 - 예수성심신학교를 중심으로>, 《가톨릭대학 논문집》 11, 가톨릭대학교, 1985(《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71쪽) ; 배은하 엮음,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 102~103쪽 ; 노용필, <예수성심신학교의 사제양성 교육>,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상)》, 가톨릭출판사, 2003(《한국 근 · 현대 사회와 가톨릭》, 한국사학, 2008, 21~30쪽) ; 우용제, <한국 교육사에서의 성요셉신학교의 위상>, 《신학과 사상》 51,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5 ; 이원순,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33쪽.

 

2) 장동하, <1850년, 조선교구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 《신학과 사상》 51,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5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 요동 차쿠와 진천 동골 · 배티를 중심으로>, 《최양업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윈회, 2007.

 

3)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76쪽. 그런데 달레의 기록과는 달리, 페레올 주교의 원 보고문에는 ‘서양인 신부가 여행할 때 따라다니며’라는 구절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라고 되어 있다(장동하, 앞의 논문, 271쪽).

 

4) 《한국천주교회사》 하, 432~433쪽.

5) 《한국천주교회사》 하, 212쪽.

6) 각주 1) 참조.

 

7) 《다블뤼 서한》 I(한국교회사연구소, 1994)에는 편집할 때 착오로 ㉱와 ㉲가 모두 1850년 9월말의 서한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는 1850년 9월 말, ㉲는 1851년 10월 서한이다. 따라서 ㉱의 올해와 ㉲의 작년은 1850년을, ㉲의 올해는 1851년을 가리킨다. 한편 선행 연구 중에는 《다블뤼 서한》 I의 오류 때문에 잘못된 연도를 쓰기도 했는데, 본고에서는 이를 인용할 때 수정하여 표기하였다.

 

8) 다블뤼 신부의 1850년 9월 말 서한, 《다블뤼 문서》 I, 394~395쪽 ; 장동하, 앞의 논문, 266쪽.

9) 다블뤼 신부의 1851년 10월 서한(필사본 - 서정화 번역) ; 장동하, 앞의 논문, 267쪽.

10) 장동하, 앞의 논문, 268~269쪽.

11) 차기진, 앞의 논문, 29~31쪽.

 

12) 1850년 9월 말의 서한(㉱-2)을 보면, ‘다블뤼 신부 자신이 (서울에서) 신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곳에 이미 집을 한 채 사놓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내용에 의하면 다블뤼 신부는 1850년에 신학생들과 머물 집을 구입했으며, 교육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51년 5월 이전의 이주 내용은 1850년에 구입한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13) 《한국천주교회사》 하, 177, 179쪽.

14) 최석우, 앞의 논문(1991), 370쪽.

 

15) 장동하, 앞의 논문, 263쪽. 아울러 ‘병이 나을 때까지’라는 달레의 기록은, 원전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달레가 자의적으로 덧붙인 내용으로 평가하고 있다(같은 논문, 272쪽) ; 차기진, 앞의 논문, 33쪽의 각주 77).

 

16) 장동하, 앞의 논문, 269쪽의 각주 22) 및 268, 270쪽.

 

17) Depuis longtemps j’ai la pensee d’envoyer a H-K deux ou trois eleves. La difficulte de les faire sortir du royaume m’a retenu jusqu’a present(《페레올 문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153쪽).

 

18) 《페레올 문서》, 143쪽.

19) 장동하, 앞의 논문, 269쪽의 각주 22).

20) 《한국천주교회사》 중, 383~384쪽 ;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341, 343쪽.

21) 《앵베르 주교 서한》, 447쪽.

 

22) 당시 앵베르 주교가 신학생들을 교육하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39년 사순 시기 서울 : 새벽 2시 기상 → 3시 반 세례 · 견진성사 → 미사 거행 → 낮 시간 고해성사 → 점심 식사 → 2명의 학생에게 신학 강의 → 고해성사(1839년 3월 30일자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앵베르 주교 서한》, 481~482쪽).

 

23) 장동하, 앞의 논문, 265쪽.

24) 장동하, 앞의 논문, 266쪽.

 

25) 장동하는 이 시기 정식 신학교의 요건으로, ‘교구장의 지시 · 정주 형태의 신학교 운영’을 들고 있다(장동하, 앞의 논문, 268~270쪽). 그리고 이것은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나, 1917년의 비오 · 베네딕도 법전의 규정과도 부합한다(주세페 알베리고 외 엮음, 김영국 · 손희송 · 이경상 옮김, 《보편공의회 문헌집 제3권 : 트렌토 공의회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출판사, 2006, 750쪽 ; Dr. Edward N. Peters, The 1917 or Pio-Benedictine Code of Canon Law : in English Translation with Extensive Scholarly Apparatus, Ignatius Press San Francisco, 2001, p. 455.

 

26) 장동하, 앞의 논문, 268쪽.

 

27) …Ver la fin de 1851, Mgr me placa au college et se chargea seul de l’administration? (《다블뤼 문서》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28쪽 ; 장동하, 앞의 논문, 275쪽).

 

28) 《다블뤼 문서》 II, 99쪽.

 

29)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1년 12월 20일자 서한에도, “다블뤼 신부는 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의 허약한 건강은 그가 눈과 얼음, 산들을 가로 질러다니는 힘든 사목 여행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학생들을 맡았다”(Mr Daveluy n’est pas entierement remis de sa maladie, sa faible sante ne lui permet pas de soutenir les fatigues des courses pastorales a travers les neiges, les glaces et les montagnes. Il s’occupe de nos eleves, 《페레올 문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154~155쪽)는 내용이 있다.

 

30) 주재용, 앞의 책, 129쪽.

 

31) mais sa sante est fragile et ne lui permet pas de soutenir les travaux de l’administration. Il soigne qques eleves. Sans le Pere Thomas, tout le poids tomberait sur mes epaules(《페레올 문서》, 152쪽).

 

32) 각주 29), 31) 참조.

33) 장동하, 앞의 논문, 274~275쪽 ; 차기진, 앞의 논문, 31~32쪽.

34) 샤를 살몽 지음, 정현명 옮김, 《성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288쪽.

 

35) 연구자들이 이렇게 오해한 데에는, 다블뤼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53년 9월 6일자 서한의 영향이 큰 듯하다. 즉 이 서한에는, “Vers la fin de 1851, Mgr me placa au college…”(《다블뤼 문서》 II, 128쪽)라는 표현이 있는데, 원본에는 college 다음에 fixement이라는 단어가 지워진 채 표기되어 있다. 이에 연구자들은 지워진 이 단어를 토대로, 이 시기에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를 전담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원본에 지워져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또 이 단어를 포함하더라도 이 문장이 반드시 ‘이 시기에 (비로소) 신학교를 전담했다’고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36) 차기진, 앞의 논문, 33~34쪽. 배티설에 대해서는 최근에 신대원에 의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배티에 신학교가 세워졌다는 근거는 없으며,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관할구역인 서울-경기 지방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전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구입한 집은 손골(최초 신학교)에 있었고, 1851년에 새로 마련한 신학교는 부엉골(정주형 신학교)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신대원,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교회사적 몇 가지 쟁점 고찰>, 《교회사학》 8,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159~167쪽). 그러나 당시 다블뤼 신부의 관할구역이 서울-경기 지방이었다는 것은 잘못이며, 신학교가 손골과 부엉골에 세워졌다는 것도 근거가 불확실하다.

 

37) 배티에 신학생들이 3년 가까이 머물렀던 것은, 다블뤼 신부의 병이 1차적인 원인이었지만, 1851년 11월 이후 신학생들을 유학 보내기로 결정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다블뤼 신부가 1851년 11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그는 ‘여행하기가 어렵다는 점과 이 나라 안에서 더욱 유용하게 양성하겠다는 희망 때문에 신학생들의 해외 파견을 막아 왔다.’ 그러나 박해의 위협 속에서 해외 유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다블뤼 신부는 이 시점이 되면 주교가 유학을 결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결과 1852년 3월부터 신학생들의 유학이 시도되었고, 1854년 3월에 마침내 성공하였다. 아마도 다블뤼 신부가 맡았던 신학교는, 배티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준비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배티 신학교가 유학준비기관의 성격을 지녔다면, 얼마 뒤에 유학 갈 신학생들의 위치를 수시로 변경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이에 신학생들은 오랫동안 배티에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배티 신학교의 임시성을 볼 수 있다. 배티 신학교가 유학준비기관이었다는 것은 차기진이 이미 지적한 바이다(《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79쪽).

 

38) 장동하는, 달레의 이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이 기록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배론 신학교의 설립 연도와 설립자에 대해 재검토해야 한다고 하였다(장동하, 앞의 논문, 285~293쪽).

 

39) 장동하는 ‘1851년에 설립된 신학교가 배론 신학교의 모태이며, 이 신학교의 정통성이 배론 신학교로 이어진다’고 했으며, 차기진도 ‘조선교구 신학교의 명맥은 다블뤼 신부의 예비 신학교로 이어졌고, 훗날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이 배론 신학교에 편입됨으로써 인맥상으로는 배론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장동하, 앞의 논문, 278쪽 ; 차기진, 앞의 논문, 40쪽). 한편 차기진은 2013년에 간행 예정인 《청주교구사》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가해, ‘배론 신학교는 1854년 3월 배티 신학생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장상인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배티에서 배론으로 이전된 조선 대목구 신학교’라고 하였다.

 

40) 장동하는 기존의 신학교를 놔두고 왜 다른 곳에 새로운 신학교를 세웠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페낭 유학생이 떠난 후 신학교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자, 배론에 새로 신학교를 설립했다’든가, ‘기존의 신학교는 그대로 있고, 다른 형태의 신학교를 배론에 세웠다’든가, ‘조선교구 신학교가 원래 배론에 있었다’는 등의 가설을 제기하였다(장동하, 앞의 논문, 290~291쪽).

 

41)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 교육만을 전담하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1852년 사순 이후 페레올 주교가 병이 나면서부터이다. 페레올 주교의 병세는 이후 답보 상태를 유지했는데, 그러면서 페레올 주교는 1852년 9월 이후에 신부들에게 사목 구역을 정해 주게 되었고, 이때 다블뤼 신부는 주교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을 맡게 되었다(《다블뤼 문서》 II, 128쪽 ; 《다블뤼 문서》 I, 433쪽).

 

42) 이 다른 사람 중에 최양업 신부가 포함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차기진, 앞의 논문, 38쪽).

43) 1853년 9월 18일자 서한, 《다블뤼 문서》 I, 433쪽.

 

44) In quodam tugurio tres educantur alumni qui, Deo protegents, anno proximo ad nostrum seminarium generale in Pinang mittentur. Istis novi succedent, non possunt plures educari propter persecutionem. Vacant studio linguae latinae, Sinicae & Coreanae(Administratio Missionis Coreae anno 1853, 《A-MEP Vol. 577 Core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550쪽).

 

45) …Tout en batissant des chateaux en Espagne, J’ai admis six nouveaux eleves a notre college en remplacement des trois envoyes a Pinang? M. Daveluy a en outre etabli de ses deniers une ecole preparatoire qui commence a fonctionner cette annee avec deux ou trois eleves?(《A-MEP Vol. 577 Core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576쪽 ; 장동하, 앞의 논문, 293쪽).

 

46) …Quand il fut question de fonder un college ou Seminaire en Coree pays continuellement persecute, on eut bien de la peine en parcourant toute la mission, de fixer un choix sur l’endroit qui serait le plus convenable, et le plus a l’abri du contact des payens ; on jeta les yeux sur Pairon, toute petite vallee encaissee par une cercle complet d’enormes et difficiles montagnes, le pere Tjoi Thomas pretre indigene y avait passe quelques etes. Fixe sur l’endroit a batir le college on ne balanca sur le choix de l’homme qu’il fallait pour prendre le college sous son nom, au contraire le choix de Tjiang Joseph pour mai?tre de maison du college fut fait avant celui de l’endroit. Vers l’an 1855 Mr. Maistre vint a Pairon et y ba?tit le college comme une dependance de la maison de Tijang Joseph il s’y tint avec trois eleves jusqu’a l’arrivee de Mr. Pourthie en 1856 auquel il laissa le poste?(《A-MEP Vol. 579(B) Core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252쪽).

 

47) 비록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메스트르 신부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조선 교회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메스트르 신부는 단지 신학교에 대한 책임을 맡은 것이었다.

 

48) 신학교의 재개 시점은 알 수 없다. 다만 메스트르 신부가 1855년 1월경에 배론에 왔다면, 1854년 후반경부터 신학교의 설립이 준비되지 않았을까 추정한 것이다.

 

49) 배론 신학교의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1854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푸르티에 신부가 1859년 10월 2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이곳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지도 어느새 5년이 된다”(장동하, 앞의 논문, 289쪽)를 근거로 한다. 즉 1859년으로부터 5년 전이니, 1854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료 ㉴의 내용을 볼 때, 1854년 설은 1854년에 배론을 신학교 후보지로 결정한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50) 최석우, 앞의 논문, 370쪽 ; 장동하, 앞의 논문, 292~293쪽 ; 차기진, 앞의 논문, 39쪽.

51) 《다블뤼 문서》 II, 162쪽 ; 장동하, 앞의 논문, 290쪽.

 

[교회사 연구 제41집, 2013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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