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43: 사회사목과 수도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2 ㅣ No.443

[추기경 정진석] (43) 사회사목과 수도회

 

수도회와 손잡고 교구 사회사목의 반석을 마련하다

 

 

- 1988년 10월 꽃동네 알코올 중독자 요양원 준공식 및 심신장애자 요양원 기공식에 참석한 정진석(가운데) 주교.

 

 

1962년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하고 1965년 바오로 6세 교황 때 폐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현대화 과정에서 가톨릭교회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 레오 13세 교황의 「노동헌장(Rerum Novarum)」(1891) 반포 이후 많은 교황의 회칙을 통해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계속 강조해 왔다. 정진석 주교는 1960년대 말 로마에서 유학하면서 이러한 교회의 변화를 매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주교로 임명된 후 청주교구에 오면서 정 주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사목을 어떻게 활성화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본당 사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사회복지의 개념도 익숙지 않던 때라 ‘우리도 힘들게 살고 있는데 무슨 사회사목이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 주교에게는 체험이 있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더 세심하게 알아보고 정말 필요한 것을 찾아 더욱 잘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주교는 사회사목을 활성화하려면 수도회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려면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며 헌신할 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제가 부족한 청주교구에서 수도회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특히 수도자들은 선교에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수도회 성소 모임을 통해 교구 성소 계발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었다. 한국 교회의 1980년대는 수도회 진출이 더욱 활발해지고 수도회의 활동 폭도 넓어진 시기였다. 정 주교는 청주교구도 사정이 어렵지만 더욱 가난한 이를 위해 수도회가 진출하도록 많은 힘을 기울였다.

 

- 정진석 주교는 일찍부터 사회사목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75년 청주 성심 양로원을 방문해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는 정 주교.

 

 

정 주교의 요청에 따라 청주교구에 진출한 첫 수도회는 ‘마리아의 종 수녀회’였다. 이 수녀회는 1982년 9월 한국에 진출한 뒤 한국어를 배우면서 수녀원 개원을 준비했다. 1985년 9월에는 청주 봉명동에서 수녀원 축복식을 하고 성소 모임을 시작했다. 정 주교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본당에 분원을 설치함으로써 청주교구에 처음 진출한 수도회도 있었다. 청주교구 사목 관할 구역 안에 한국 분원을 설립한 외국 수도회는 ‘마리아의 종 수녀회’가 처음이다.

 

교구 설정 이후 처음으로 관상 수도회가 진출하기도 했다. 정 주교는 관상 수도회의 역할이 크다고 믿어 관상 수도회 유치에 큰 힘을 쏟았다. 교회를 위해 기도로 봉사하는 관상 수도회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관상 수도회는 영성 생활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는 관상을 목적으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하느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수도회로, 바깥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한다고 해서 봉쇄 수도회이라고도 부른다. 

 

대전 가르멜 수녀원에서 분가한 ‘충주 가르멜 수녀원’이 교황청으로부터 창립 인가를 받은 뒤 충주에 정착한 것이 1987년 10월 10일이다. 이전에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예수 고난 관상 수녀회’가 2명의 수녀를 청주로 파견해 수도회 설립을 준비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첫 지원자 3명을 포함한 6명의 공동체 식구가 정진석 주교 집전 아래 봉쇄 구역 설정과 수도원 봉헌식을 했다.

 

봉쇄수도원은 온전히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므로 청주에 정착한 관상 수도회는 당연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 주교는 가난한 교구로 초청한 수도자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힘닿는 대로 관상 수도회를 도왔다. 개인재산을 털어 티 나지 않게 돈을 보내기도 했지만, 식량이나 물품 등 생필품이 생기기만 하면 수도원으로 보냈다. 가난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아버지가 꼭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정 주교는 안쓰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함께 들어 보이지 않게 수도자들을 도왔다. 그런 교구장의 마음을 알고 있던 수도자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수도자들의 기도가 자양분이 되어 청주교구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정진석 주교가 1993년 5월 예수 고난 관상 수녀회 서원식 후 서약자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청주교구를 떠난 후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축하 미사를 위해 청주교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여러 곳을 방문하는 아주 바쁜 일정에도 그는 봉쇄수도원 방문 일정을 챙겼다. 그를 동행한 신부가 말했다.

 

“수도자들이 꼭 오랜만에 친정아버지를 만나는 것 같네요. 추기경님도 다른 곳에 비해 수도원에서는 무척 편안해 보이십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수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난다는 것이 그로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랜 시간 서로를 연민으로 챙겨온 만큼 그들과의 영적인 연대가 더욱 단단하게 느껴졌다.

 

청주교구장 재임 시절, 그의 손길이 직접 닿지 못한 곳곳에 수도자들이 있었다. 사제 수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런 손길이 필요한 사회사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를 한마음으로 도와준 수도회 덕분이었다. 공군사관학교 상무대성당, 어린이집, 장애아 특수학교, 불우 청소년과 결손 가정 청소년을 위한 직업학교, 농아학교와 맹아학교에 그들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임시 수녀원을 만들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먹고 자며 함께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정 주교는 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은총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2,56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