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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교회는 분열했으나 가톨릭 쇄신에 전환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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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3 ㅣ No.468

종교개혁 500주년 - 교회는 분열했으나 가톨릭 쇄신에 전환점 마련

 

 

2017년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를 초래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마르틴 루터<사진>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 명제를 붙임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다. 500년 전 사건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그 사건이 지닌 의미를 되살려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위함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의미를 짚어본다.

 

 

배경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큰 사건일수록 복잡한 배경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종교개혁 또한 수많은 역사적ㆍ사회적ㆍ신학적ㆍ교회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한 폭풍 같은 사건이다. 

 

정치적으로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 체제의 군주제로 발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국 전체가 아닌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고 교회를 예속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반대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은 지방 분권화가 이뤄짐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적으로는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해졌다. 일부 귀족과 몰락한 기사, 농민들은 가난과 불만 속에서 어떤 혁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 개혁을 촉구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대사, 구원, 미사성제, 성사, 교회, 교황 수위권 등 핵심적인 신학 주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했고, 이는 루터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 

 

게다가 교회 내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교황들은 출신 가문의 세력 확장과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데 열중했다. 전 국토의 3분의 1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독일 교회는 부와 세속적인 권력을 누리기에 바빴다.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면서 독신을 지키지 않는 사제가 허다했다. 비복음적인 부조리가 팽배했고, 사제에 대한 불신은 고조됐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 쇄신을 위해 순교적 희생을 아끼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도 적지 않았다.

 

- 교황과 전례 등 그 어떤 것보다도 성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그림.

 

 

전개

 

교황청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이른바 대사부(大赦符)를 발행했다. 대사부는 죄를 용서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고해성사 때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줄여주는 증서였다. 그러나 이 보속 경감을 면죄(免罪)로 과장하고 상품화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사부를 둘러싼 소란과 곡해에 충격을 받은 루터는 1517년 이에 항의하는 95개 조 명제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보냈다. 95개 조 명제는 출판업자들에 의해 간행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신학자들의 반박과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21년 교회에서 파문됐다. 이후 루터는 교회 개혁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루터 문제는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1526년 황제는 독일의 종교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고자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1529년 그리스도교는 양분되기 시작했고, 종교 분쟁은 숱한 회담과 충돌, 30년 전쟁을 거쳐 ‘베스트팔리아 평화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일단락됐다. 그 결과 1570년쯤 독일 북부 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은 루터에서 끝나지 않고 이웃 스위스로 번졌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3년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는 신ㆍ구교의 종교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츠빙글리는 1531년 전사했다. 

 

제네바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인 「기독교 강요」(1536년)를 저술한 칼뱅이 시 의회의 지지를 받고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과격한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샀으나 칼뱅은 가혹한 대응으로 1555년 모든 저항을 제거했다. 이후 제네바는 개혁 교회의 중심이 됐고, ‘낭트 칙령’으로 칼뱅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섬나라 영국도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 왕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일곱 성사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혀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다. 그랬던 헨리 8세가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했는데, 교황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면서 영국 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영국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분리됐다. 영국 성공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의미

 

종교개혁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던 유럽의 정치적 일치를 무너뜨렸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은 교황청이라는 종교 권력이 아닌 국가라는 세속 권력에 예속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나라에 따라 종교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종교개혁은 또 근대 자본주의를 촉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개혁은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활성화하고 하느님 말씀을 자주 읽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있었던 가톨릭 쇄신 운동에 힘을 싣는 결과도 낳았다. 

 

종교개혁 결과 수많은 개신교파가 등장했다. 개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황의 수위권과 성전(聖傳)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근거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지만 성경 해석은 각기 다르다 보니, 새로운 개신교파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개신교는 성경과 전통, 말씀과 성사, 신앙과 선행, 가정생활과 수도생활 중에서 주로 전자(前者)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조적으로 가톨릭은 양쪽을 포괄하려는 성격이 짙다.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잘 아는 반면 독선적ㆍ배타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 개신교, 신앙과 인생의 가치를 최대한 수용하는 반면 신앙의 핵심을 놓치기 쉬운 것이 가톨릭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교회 개혁을 가톨릭이 수용했다면 교회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이해와 실천을 다양하게 한 것은 종교개혁의 순기능이다. 더불어 종교개혁은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것을 가장 큰 교훈으로 남겼다. 참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개신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12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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