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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5: 농부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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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05 ㅣ No.430

[추기경 정진석] (35) 농부의 마음으로


사제 양성의 씨앗 뿌리고 가꿔 결실, 교황청도 인정

 

 

- 1978년 5월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열린 교황청 선교후원회 및 선교위원장 회의에 참석한 정진석(가운데) 주교.

 

 

정진석 주교가 청주교구장에 임명되던 당시 교구 신자 수는 4만 명 정도였다. 정 주교가 교구장 착좌식을 마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 최우선으로 한 일은 본당 방문이었다. 교구 사정과 사제들, 신자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본당을 직접 방문해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리해서 업무 시작 1주일 만에 교구 22개 본당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봤다.

 

몇 년 뒤인 1973년, 정 주교가 사목표어를 ‘처음부터 다시’로 정한 것도 본당 방문에서 비롯됐다. 당시 청주교구 관할 지역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어서 이동이 힘들었다. 그래서 정 주교는 아침에 한쪽 방향으로 쭉 이동했다가 저녁에는 그 길을 되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같은 방향에 있는 본당을 차례차례 방문하면서 본당 신부를 만나지 못하면 되돌아올 때 다시 본당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충주 방향으로 한번, 영동 방향으로 한번 오가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교회법에 교구장은 5년에 한 번 교구 내 본당을 사목 방문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데 정 주교는 1년에 서너 번씩 본당을 돌며 방문했다. 보통은 통보도 하지 않고 갔다. 수선을 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성당에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가끔 성당 마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정 주교는 그때마다 교우들에게 “안녕하세요? 본명이 뭐예요?” 하고 인사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대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대다수 신자들이 자신의 세례명을 모르고 있었다. ‘본명’이 무엇을 뜻하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1974년 7월 청주교구 사제  서품식 후 정진석(앞줄 가운데) 주교가 사제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명이요? 그게 뭐예요?”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요. 성당에서 형제님을 뭐라고 불러요?”

 

그러자 뾰로통한 얼굴이 풀리며 반색을 하며 답변이 돌아왔다.

 

“아! 밀가루 주는 이름이요?” 

 

당시는 그랬다. 전쟁의 여파로 너무나 가난했던 나머지 기본 교리에는 관심 없이, 밀가루를 준다고 해서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았다. 어떤 본당은 교우 전체가 그랬고, 도시보다 시골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심했다. 신자들이 밀가루 때문에 성당에 오니 당연히 본당 교무금은 0원이었다. 신자들이 본당에 돈을 봉헌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메리놀외방선교회(이하 메리놀회) 사제들은 메리놀회 본부를 통해 큰 금액은 아니지만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었다. 이를 쪼개고 쪼개 쓰며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그들은 적게나마 생활비가 있었기에 신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자들은 성당에 헌금, 교무금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 물자를 공짜로 가져다 쓰기 일쑤였다. 

 

반면 한국인 사제들은 교구장이 주는 생활비가 없어 정말 어렵게 살았다. 정 주교는 안타까웠지만 교구의 한국인 신부들에게 교구 상황을 설명하고 자립하라고 권고했다. 다만 포기할 수 없는 사제 양성은 교구장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들은 먹고사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수입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978년 11월 청주실내체육관에서 거행한 청주교구 설립 20주년 기념 신앙대회.

 

 

정 주교는 사목 방문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본당은 두 번 세 번 방문해도 비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 주교는 혼자 여기저기 둘러보고 돌아왔다. 가끔 성당을 돌아다니다 보면 밖에서 교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성당에서 만난 신자들은 정 주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제는 노란 머리의 서양 외국인이라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난데없이 한국인 사제를 처음 보니 이상한 것은 당연했다. 

 

청주교구는 휴전 직후인 1953년 서울대목구에서 감목대리구로 분리될 때 본당이 5개였다. 5년 뒤인 1958년 대목구로 승격될 때는 본당이 15개였다. 파디 주교가 본당 10개를 증설한 것이다. 본당 증설은 보통 신자 수를 감안해서 이뤄졌지만 파디 주교는 거리를 중심으로 증설했다. 그러니 신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본당도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사목표어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농부의 마음으로 신앙의 터전을 차근차근 다져나가고 정성껏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사제와 신자들을 독려하고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길 기도하며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그렇게 6년, 정 주교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드디어 교구 내 메리놀회 사제와 한국인 사제가 16명씩 같은 수가 된 것이다.

 

그 해에는 사제 서품식이 두 번 있었다. 사제 양성 기간이 7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며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76년 5월 청주교구에서 새 사제가 4명이나 탄생했다. 4명이 한꺼번에 서품을 받은 것은 교구 역사상 처음이었다. 장봉훈 신부(현 청주교구장 주교), 오웅진 신부 등이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그동안은 매년 한 명씩 새 사제가 나왔을 뿐이었다. 정 주교는 무척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서품식 아침, 그는 보따리에 꽁꽁 싸뒀던 귀한 헝겊신을 찾아 신었다. 노란 테두리의 흰 헝겊신은 자신이 주교품을 받을 때 신은 것이었다. 주교 서품 때 한번 사용하고 잘 싸매둔 헝겊신을 꺼내 신은 정 주교는 당당하게 걸었다. 일생에 꼭 두 번 귀한 그 헝겊신을 신었다. 

 

1976년 한국인 사제가 메리놀회와 같은 수가 되면서 비로소 정진석 주교는 인사권을 갖게 됐다. 그 이전까지는 정 주교가 인사발령을 내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메리놀회 지부장이 바꿔버리기가 일쑤였다. 사제회의도 영어로 하던 것을 한국어로 하게 됐다. 정 주교가 “이제부터 사제회의는 한국어로 하겠습니다”고 하자 외국인 사제들은 “어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한국인 사제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아무런 투정 없이 잘 따라와 준 사제들이 고마웠다. 

 

청주교구 사제들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언어는 큰 문제였다. 선교사인 메리놀회 사제들도 한국어를 배울 시간 없이 본당에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본당 신자들과의 소통이 상당히 어려웠다. 메리놀회 사제들은 언어를 배울 마땅한 기관도 없어 신자들과 어울리며 주먹구구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 애쓰며 교구를 일궈왔다.

 

정진석 주교는 자신은 굶어도 신학생은 양성한다는 마음으로 성소 계발에 열심히 매달렸다.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첫 단은 성직자ㆍ수도자 부모들을 기억하며 봉헌했다. 신학생 부모의 협조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비 신학생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을 꼭 주님께 봉헌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1978년에는 신학생이 80명이 됐다. 

 

1978년은 특별히 청주교구 설정 2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였다. 같은 해 5월 교황청 선교후원회 및 선교위원장 회의가 로마에서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정 주교는 5월 15일 교황청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교황은 보고서를 찬찬히 보다가 웃으며 정 주교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 교구가 신자 1000명당 대신학생 1명의 비율을 달성했다니 정말 대견하네. 전 세계에 이런 교구는 없다네.” 

 

정진석 주교는 뛸 듯이 기뻤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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