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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0: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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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25 ㅣ No.422

[추기경 정진석] (30) 순명


부족함 많지만 하느님 뜻 따라… 39세 젊은 주교 탄생

 

 

- 1970년 9월 16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는 정진석 주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신부들 사이에 ‘달러(dollar) 미사’라고 부르는 미사가 있었다. 당시 미국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한국 사제들을 위해 미사 예물을 보내 줬다. 한국 사제들은 이 예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 예물이 미국에서 왔다고 ‘달러(dollar) 미사’라고 불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제들은 미국 교회로부터 미사 예물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어떤 신부는 미국의 본당을 순회하며 강론을 통해 한국 교회 사정을 알리고, 성당 건축 헌금 등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 외국 선교사의 도움이 항상 함께했지만, 근ㆍ현대에 들어서도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6ㆍ25 전쟁의 영향이 컸다. 1953년 휴전으로 남북한 교회의 분단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휴전으로 사회가 점차 안정되자 남한 교회는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선교 활동을 재개해 나갔다. 전쟁으로 발생한 인적 손실은 외국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으로 보완해 갔다. 외국 교회의 인적ㆍ물적 지원은 교회가 입은 손실을 복구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와 독일의 미제레올, 그리고 오스트리아 부인회 등에서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큰 도움을 줬다.      

 

1950년대 한국 교회 발전에 외국 수도회는 많은 기여를 했다. 1958년에 설정된 청주교구는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운영해 나갔다. 극심한 전란의 피해를 본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1952년 경상북도 왜관에 재정착했으며,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예수회는 1960년 서울에 서강대학교를 개교했다. 그 밖의 몇몇 남자 수도회들이 새롭게 창설되거나 한국에 진출했다. 이 시기에 여자 수도회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다. 

 

정진석 신부는 1970년 방학이 되자 미국으로 향했다. 다른 신부들처럼 미국 교회를 방문해 미사 예물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주교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급작스런 부름에 정진석 신부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주교로서 부족함이 많은데, 내가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내 교회의 부르심에 순명했다. 자신의 삶은 이미 6ㆍ25 전쟁 때 덤으로 얻은 삶이었기에 ‘주님 뜻대로 하시라’고 여겼다. 1970년 6월 25일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 발표가 났다. 20년 전 같은 날 전장의 한복판에서 북한군 전차를 마주했던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묘한 인생이었다.

 

청주교구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이었다. 대부분의 신앙인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을 지켜오다 1882년 이후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곧 여러 곳에 공소가 생겨났다. 서울교구 관할이었던 충청북도 지역의 전교 사업은 1953년 9월 초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전격적으로 위임됐다. 마산 포로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근무하던 파디 야고보 신부가 감목으로 임명됐다. 

 

1958년 6월 23일 청주대목구로 독립하면서 파디 야고보 신부가 7월 4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됐다. 그 해 9월 16일 미국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진 파디 주교의 초대 청주교구장 착좌식이 11월 26일 거행됐다. 청주는 사면이 모두 육지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주교구 교세는 당시 본당 15개, 신자 1만 8600명, 주교 1명과 메리놀회 신부 29명이었다. 한국인 사제는 없었다. 

 

파디 주교는 재임 11년 동안 미국 메리놀회로부터 물심양면 지원을 받아 전교 사업과 한국인 사제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다 1969년 6월 28일 파디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했다. 약 1년 뒤 1970년 6월 25일 정진석 신부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됨으로써 청주교구도 드디어 한국인 주교가 다스리는 자치 교구가 됐다.

 

- 2년여 유학 생활 끝에 석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 정진석 신부는 얼마 안 돼 청주교구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1970년 9월 26일 청주교구 신자들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입국하는 새 교구장을 맞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온 모습.

 

 

정진석 주교는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70년 9월 2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68년 한국을 떠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갔다.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생각했다. 이제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서서히 비행기가 하강하면서 김포공항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다. 

 

‘아! 우리나라 대한민국, 어머니의 나라.’ 

 

아무리 못살고 힘들어도 고향이 최고라는 말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청주교구에서 현수막을 든 신자들이 입국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정진석 주교님! 환영합니다!” 

 

낯익은 한국어와 환영 인파를 만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우리나라에 왔구나.” 

 

정진석 주교는 주교 서품식을 청주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자 정 주교의 전임이었던 파디 주교는 주교 서품식을 미국의 자신이 자라났던 본당에서 했기 때문에 청주교구민들은 주교 서품식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교구장이 어떻게 주교품을 받고 착좌하는지를 청주 신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진석 주교도 첫 영성체부터 사제 서품까지 추억이 어린 명동대성당이나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청주교구 주교가 되니 이곳에서 죽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당시 청주교구의 메리놀회 신부들은 모두 정진석 주교의 선배들이었다. 교구의 한국인 신부는 6명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수품 연차가 3년도 안 된 이들이었다. 당시 교회 일부에서는 청주교구는 당연히 메리놀 회원이 교구장이 돼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 정진석 주교가, 더구나 39세의 젊은 주교가 임명됐다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결코 쉽지 않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어떻게 서양에서 온 신부들을 지휘하느냐’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정진석 주교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늘 그러했듯이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2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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