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11,2-11 세례자 요한의 의문 (2016. 12. 11. 대림 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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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12-11 ㅣ No.2153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듣고 제자 몇 사람을 예수에게 보냈다. 그들은 예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가 대답하였다. “돌아가서 여러분이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말해주시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지요!

 

4:12에서도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을 보도한 바가 있다. 그 이유는 나중에 14:3-4에서야 밝혀진다.

 

복음저자는 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황을 영적인 어두움의 상황으로 연결한다. 앞서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요한은 이미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가 메시아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으면서도 그가 하는 일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메시아는 거듭 새로워지는 영적 깨달음과 함께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들었을 뿐이고 아직 그가 하는 일을 것은 아니다.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본것을 요한에게 말해주라고 한다. 여기에서 들음은 망덕이며 은 애덕이다. 망덕과 애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올바른 신덕(믿음)이 이루어진다. 믿음은 성령의 활동 또는 성령의 지혜이다. 아무런 근거가 없이 자신의 생각으로 빚어낸 것을 굳게 믿는 것은 심리적 강박이요 미신에 불과하다. 세상에 널려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미신을 흔히 볼 수 있다.

 

여섯 가지의 치유기적은 이사야서(35:5-6, 61:1)와 연결된다. 예수는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변형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으키는 영적 운동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소경의 치유 :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는 영적 자아를 발견함.

*  절름발이의 치유 : 신덕.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통일적인 전체성의 세계관을 확보함.

*  나병환자의 치유 : 법과 윤리 등의 가치에 근거한 세상의 평판(명예)으로부터 자유로움.

*  귀머거리의 치유 : 애덕.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감.

*  죽은 사람의 소생 : 망덕. 영원한 생명을 얻고 기르고 완성하는 여정.

*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들음 : 회개. ‘가난은 진리의 결핍에 대한 자각을 가리킨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본다. 그러나 진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도 없다.

 

는 중의법으로 쓰여서 예수를 가리킴과 동시에 예수와 일치한 제자를 가리킨다. ‘의심을 품지 않음은 신덕이다. 신덕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을 믿으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에게서 오는 예수의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그것을 실천할 수도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지혜를 얻으므로 무엇과도 비길 데 없이 행복하다.’

 

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제자들의 증언을 전해 듣고 스스로 영적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예수가 하는 일을 수 있을 것이다. 감옥의 벽은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지 못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는 중에 예수는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보러 갔습니까? 고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궁전에서 삽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러 갔습니까? 예언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로 말하면 나는 너보다 앞서 심부름꾼을 보내 너의 길을 닦게 하리라.’ 라고 성서에 기록된 그 사람입니다. 내가 분명히 말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위대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하는 일을 보고비로소 그들의 스승이 예수의 길을 마련한 예언자임을 이해하였다. 요한은 광야에서 말씀하시는하느님을 증언하고, 예수는 광야에서 일하시는하느님을 증언한다. 그들은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이 모두 영적인 사건임을 알고 비로소 예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물론 그들의 스승인 요한에게 전해질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예언을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해야만 비로소 예수를 알아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요한의 예언에 따라 회개하는 사람만이 예수가 이끄는 하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군중에게 요한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계속되는 질문을 통하여 그들 개개인으로 하여금 애매모호한 태도를 버리고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몰아붙인다. 회개란 현실에 입각한 자기반성에 다름 아니다.

 

갈대는 아무 생각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군중을 가리킨다. 군중은 예언자의 말을 즐겨 들으면서 함께 웃고 울고 감동한다. 그러나 그뿐, 삶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마치 갈대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면서도 제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은 세상의 지혜롭다는 스승들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은 훌륭한 건물에서 권력자, 교양인들과 친구로 어울린다. 그들이 군중에게 접근하는 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어리석은 군중과 소위 지혜로운 스승은 서로 뗄 수 없는 파트너가 되어 하늘나라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그들은 결코 광야로는 나가지 않는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요한은 틀림없는 예언자이다.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광야로 나아가 하느님을 뵙기를 촉구한다. , 요한은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는 군중심리와 세상의 가치를 벗어나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행위이다.

 

모든 예언은 회개라는 최종 목적을 향하고 있으므로 요한은 지금까지 활동한 다른 예언자들보다 위대하다. 이에서 더 나아가, 요한이 선포하는 회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도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큰 인물이다. ‘여자에게서는 육적 인간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욕망을 지닌 육적 인간으로 태어난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육적 인간은 회개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영적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늘나라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와 함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예언자이다. 회개는 사람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은 사람의 회개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요한보다 위대하며 예수의 제자는 요한의 제자보다 위대하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란 재물과 명예에 초연한 예수의 제자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욕망을 억누르고 포기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욕망에 초연한 것이다.

 

성령에서 오는 생명과 지혜는 욕망의 충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신적인 자유를 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곧 육적 인간은 성령을 조금도 알 수 없다. 회개는 하늘나라로 통하는 유일무이한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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