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평협ㅣ사목회

한국평협 심포지엄: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30 ㅣ No.51

[한국평협 심포지엄]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 (1)

 

 

이 글은 지난 9월 9일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에서 열린 한국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하반기 연수중에 발표한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나머지는 겨울호에 연재하려 한다.

 

 

들어가는 말

한국 가톨릭교회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외형적 신자 수와 한국 사회 안에서의 영향력 관점에서 보면,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재와 미래는 그리 비관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아픔과 문제점들에 대한 예언자적 발언들과 사회참여를 통해 대외적으로 교회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종교지도자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정치권력의 인정과 우대의 경향, 점점 증가하는 신자 고위 공직자들과 사회적 유력인사들의 숫자들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가고 있다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상일 뿐, 한국 가톨릭교회의 실제 현실의 모습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 깊이 내려 있는 성직주의와 물질주의는 교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다.

한국 교회 안에는 성직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더 유난히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성직주의와 그에 따른 수직적 위계주의와 권위주의의 교회 안의 만연함은 교회 안 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공동체 사목의 걸림돌로 작동되고 있다. 물론 교회 안의 토론 자리에서 성직주의에 대한 숱한 비판적 담론들이 양산되고, 성직자들 스스로도 성직주의의 폐해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직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력들은 거의 없다. 한국 교회 안에서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그저 수사학적 장식에 불과한 느낌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삶과 문화는 물질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교회의 일들과 어떤 결정들을 할 때 신앙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세속의 논리 즉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 모습이다. 성당을 건축할 때 외형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방향, 교회 기금 마련을 위한 지나친 상업행위들, 교회 자산 운용에 있어서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기의 방식들 등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행위들이 물질주의의 자본의 논리로 작동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본당들 역시 전반적으로 생동감을 잃어가고 있다.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본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다.”(〈복음의 기쁨〉, 28항)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안에서, 교회의 기초 단위 조직으로서의 본당,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생활 공동체로서의 본당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본당의 신학적, 사목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 속의 한국 본당들은 점점 그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본당은 그저 주일 미사만 참여하는 공간으로 그 기능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가톨릭교회(Catholicism)2)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교회의 변화가 올바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교회 스스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가. 교회 자신이 복음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세상의 변화들이 교회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는 일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교회사 안에서 교회의 변화들은 결국 세상 밖에서 밀려 온 추세와 압력을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변화 특히 서구 문화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3) 하지만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교회가 가져온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자신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4)

교회는 세상 속에 있다. 세상과 교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 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는 분명 중요한 질문이다.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면, 그 올바른 세상의 변화에 교회가 적응(aggiornamento)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를 교회가 수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타락, 부정적 의미에서의 교회의 세속화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교회 변화는 타락이며, 올바른 방향의 교회 변화는 쇄신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쇄신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교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세상의 부정적인 힘들, 세속의 부정적인 조류를 따르는 변화가 아니라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인 쇄신을 교회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 교회 변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교회의 변화, 교회 쇄신의 진정한 주체는 물론 성령이다. 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교회 구성원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변화의 노력이 쇄신을 낳는다. 교회 구성원들은 과연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을 따를 것인지. 과연 어떻게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쇄신에 참여할 것인가.

교회의 올바른 방향의 변화, 즉 교회 쇄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패러프레이즈하면, 교회 쇄신은 결국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구조를 개혁하고 교회 구성원들이 복음화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다. 교황은 교회 쇄신을 위해 모든 구성원들이 복음화의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성직자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 요청된다고 강조한다. 교회 쇄신을 위한 구조 개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의 하나가 성직주의(clericalism)라는 사실과, 교회 쇄신을 위한 교회 모든 구성원들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참 묘한 아이러니다. 물론 교회 쇄신을 위해 교회 구성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화의 소명을 수행해야 한다.5) 그렇다면 교회 쇄신을 위한 평신도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변화와 쇄신을 말할 때, 우리는 당위성의 논리에 빠질 위험이 많다. 교회는 자비로워야 한다.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 교회는 열린 구조여야 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이야기할 때 숱하게 언급되는 말들이다. 너무 자주 쉽게 언급되어서 이제는 그저 말들로만 소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사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다 안다. 문제는 언제나 현실의 모습과 실천이다. 변화와 쇄신을 말할 때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한 언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현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더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는 ‘무익한 비관주의’와 ‘패배주의’(84, 85항)와는 다른 맥락이다. 음울한 비관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냉정하게 현실 교회의 모습을 분석하고 파악한 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모색하자는 의미다. 물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통계학적 분석이 그리 많지는 않다.6) 또한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종교 사회학적, 신학적 해석들 역시 많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한국 교회의 현실 들은 주로 인상비평적 시각에서 접근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가. 지역 교회인 한국 가톨릭교회는 세계 교회 가 변해 가는 모습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한국 교회 역시 세계 교회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가. 교회는 이 시대에 안팎으로 어떤 도전들을 받고 있는가. 교회에 대한 도전들과 변화 속에서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일까. 세상 속에서의 평신도 역할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교회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교회 쇄신의 방향과 그 길을 모색함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시도다. 비록 이 글이 엄밀한 학술 논문의 형식이 라기보다는 인상비평적 에세이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1. 미래 교회의 모습과 변화의 흐름

근대사회로의 이행 이후,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의 가톨릭교회가 유럽 중심의 교회였다면 근대 이후의 교회는 점점 세계 교회(world church)의 형태를 드러낸다. 물론 21세기에 들어 와서도 교회 권력의 중심은 아직도 서구교회에 있다. 하지만 신자수의 분포도에서 비서구지역의 신자수가 훨씬 많아지고, 지역 교회들의 활성화 현상들은 점점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 남미 출신의 교황의 등장은 그 변화의 단초를 상징한다. 또한 교회 안의 위계적 질서를 강조했던 근대 이전의 교회론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교회론으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은 교회 구성원들 모두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 평신도 역할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직자의 감소 현상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역할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 이후 교회가 겪은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다. 물론 세속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교회는 자신이 세상 속에 있는 존재임을 또 세상과 깊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데 21세기 교회가 받고 있는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 영향이다. 사실, 종교의 자본주의화와 자본주의의 종교화 현상은 현대 세계의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다. 이런 세계 교회의 추세 속에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1.1. 전지구적 가톨릭교회 (Global Catholicism)

영어권의 저명한 종교 역사가인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는 현대 그리스도교는 유럽 중심의 그리스도교에서 전 세계적 그리스도교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 교회에서 세계 교회로의 이행이 현대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라고 말 한다.7)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또 다른 큰 특징의 하나는 교회의 무게 중심이 남반부(global South),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의 교회에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남반부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교가 점점 성령주의(Pentecostalism)와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경향으로 기울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젠킨스는 주장한다. 남반부 교회의 성령주의와 근본주의의 경향에 대한 젠킨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쟁이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 종교 역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세계 교회의 방향으로 변화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오랫동안 바티칸 담당기자를 했던 미국 저널리스트인 존 앨런(John L. Allen, Jr.) 역시 자신의 책 《미래 교회 The Future Church》에서 향후 가톨릭교회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10개의 트렌드를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세계 교회로의 변화를 강조한다. 알렌은 ‘세계 교회’라는 장을 기자다운 상상력으로 2050년 로마 바티칸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 교황 빅토르 6세 교황의 일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8) 또한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안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들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개별 교회들 간의 친교를 강조하는 교회론의 등장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다.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유럽 교회에서 세계 교회로 확장됨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10)

가톨릭교회의 세계 교회화 현상은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가톨릭교회의 인구수의 증가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통계학적 사실이다. 이처럼 신자수 분포도의 확산과 남반부 신자들의 증가는 전통적 유럽 중심의 교회에서의 탈피를 촉진시켰다. 또한 지역 교회들의 활성화와 토착화는 더더욱 가톨릭교회의 세계 교회화를 확장시켰다.11)

이러한 남반부 가톨릭교회(Southern Catholicism)의 확산은 몇 가지 외형적 특성을 드러낸다. 첫째,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택하고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아프리카와 남미 신자수의 증가는 종교 영역에서 점점 기적과 치유와 초자연적 현상들에 초점에 맞춰지는 경향을 드러낸다. 셋째, 유럽에서 발생하는 세속주의(secularism)의 문제보다 다원주의(pluralism)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넷째, 교회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요청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12)

이러한 남반부 가톨릭교회의 확산은 교회 안에 변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교회의 리더십이 남반부 교회로 조금씩 이동하는 경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 안의 이슈들이 유럽 중심의 이슈들에서 남반부 지역의 이슈들로 대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의 일부다처제와 주술사를 둘러싼 이슈들이 교회 안의 첨예한 문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 내부의 문제보다는 교회 밖의 문제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가족과 성 문제에 있어서는 더 완고하게 전통적 견해를 고수하는 입장을 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경제 정의와 전쟁에 대해서는 좌파적 견해가 더 강화되는 추세가 보인다.13)

1.2. 성직자의 감소와 평신도 역할의 확장

남반부 교회의 성직자의 증가 추세로 인해 전세계적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수 자체는 조금씩 증가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물질문화가 발전된 국가들에서는 성직자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사제부족 현상 때문에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사제 독신제에 대한 재검토가 언급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교회는 사제들의 재분배를 통해 사제 부족 현상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신부들의 유럽 교회에서의 활동하는 현상과 한국 교회에서 프랑스 교회로 사제를 파견하는 일종의 역 선교 현상은 그러한 추세를 반영한다.

현대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실적으로 사제의 부족 현상은 필연적으로 평신도의 역할 증대를 초래했다. 또한 사제들의 성 스캔들과 그에 따른 교구 재정의 파산 현상 역시 교회 안의 평신도 역할의 강화를 낳았다. 그리고 근대 이후 각 거대 종교들의 경쟁관계 특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종교와의 경쟁관계는 교회의 많은 역량을 끌어내야 하는 필요성을 낳았다. 종교적 경쟁의 시장에서 이기기 위해 당연히 평신도의 참여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은 교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교회 안의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는 평신도 신학의 가능성을 낳았다. 한편으로 가톨릭교회에 조금씩 성령주의가 강화되는 현상 역시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이러한 추세는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카리스마적 평신도의 역할이 인정되는 경향을 낳았다.14)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역할의 확장은 때때로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본당의 관리를 둘러싼 갈등과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열린 대화와 교회 운영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 교회의 여성화(feminization) 경향을 낳기도 한다. 교회 안의 평신도의 영향력의 확장은 역설적으로 사제직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15)

오늘날 평신도 역할의 확장이 단순히 본당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구 차원과 바티칸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 역시 신학적인 측면에서 사제의 고유 권한으로 여겨지는 성사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들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 권력의 행사에 평신도의 참여를 요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신도 추기경의 임명과 바티칸 고위직에 평신도의 참여를 요청한다. 바티칸의 고위 관리들이 꼭 성직자여야만 한다는 신학적 이유는 없다. 교황대사 등 교황청의 외교 사절들은 평신도 전문가들이 맡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16)

1.3. 자본주의 논리가 내재화된 교회17)

오늘날 자본주의는 일종의 형이상학이 되고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삶의 모든 영역들이 최종적으로 경제적 목적을 지향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은 경제의 논리와 규범에 종속되고 규율되고 있다. 오늘날 경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경제는 단순히 경제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삶은 경제중심주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 체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삶의 방식을 뜻한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논리가 내재화되어 있는 사회다. 자본의 논리, 경제의 논리가 우리 삶을 지배한다. 자본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삶의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논리를 확장시켜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인간 주체의 재구성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영구화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논리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는 성경의 가르침을 선포하면서도 실제 현실에서 교회 안의 어떤 일들을 할 때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발견한다. 신자수 증가를 목표로 하는 교세 확장을 위한 행위들 안에서 자본주의의 성장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있음을 목격한다. 당위적 관점에서는 신앙적 가치의 소중함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의 장에서는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려 하는 교회의 모습을 여전히 본다.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앙의 논리와 상업논리는 분명히 서로 다른데도 교회와 신앙인들이 실제 삶에서 신앙의 논리보다는 상업논리에 더 익숙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우리 자신들이, 자본주의 안의 상업주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기업화되는 교회, 상업화되는 교회의 모습과 물질적 이익에만 민감하며 욕망을 사고파는 데에 익숙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시장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괴력을 가졌다. 종교 역시 소비주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비사회에서는 종교적 신앙들마저도 판매되고 구매되는 상품처럼 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앙들을 상품을 선택하고 사용하듯이 소비한다. 영성의 상품화된다. 많은 신자들이 영성을 살아내기보다는 영성을 소비한다.

1.4. 한국 교회의 모습

한국 교회 역시 세계 교회의 추세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한국 교회 안에는 남반부의 교회와 서구 교회의 모습들이 혼재해 있다. 도덕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남반부 교회들과 비슷하게 보수적 입장과 태도를 드러낸다.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보였던 진보적 입장에서 벗어나 점점 보수적 입장과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신자 분포도에 있어서는 서구 교회와 비슷하게 신자들의 고령화 현상과 젊은층의 이탈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현상 때문에 교회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요청도 남반부 교회와는 달리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서 점점 성직 지원자의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물론 서구 교회에 비하면 여전히 성직자수의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남반부 교회가 보여주는 성직 지원자의 폭발적 증가 현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1990년대를 정점으로 성직 지원자 수는 하락 현상을 보이고 있다. 교회 안의 평신도 역할은 아주 미약한 현실이다. 유교적 서열 문화를 중시하고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 탓인지 성직주의의 폐해는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풍토 속에서 당연히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고 교회 운영에 있어서 평신도의 참여가 잘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문화가 깊이 뿌리 내려져 있다. 성당 건축, 성지 개발, 교회 재산의 증식,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체, 등의 문제들에 있어서 신앙의 논리가 작동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더 깊이 작동되고 있다. 또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있어서 과거에는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더 첨예해졌다고 볼 수 있다.


2.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평신도

정직하게 말하면, 가톨릭교회는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성직자의 종교였다. 많은 신자 순교자들을 발생시켰던 초기 박해시절과, 교회 안의 직제와 직무들의 엄격한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초기 교회 시절과, 교계제도가 교회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교회 안에 뿌리내리기 전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교회 안의 대부분의 영역들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작동되어 왔다. 물론 긴 교회의 역사 안에서 토마스 모어 같은 세상 속에서 신앙을 증거한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었다. 또한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수행한 숱한 신자들 때문에 교회가 성장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 교회의 통치와 운영에 있어서, 신앙의 사유를 재현하는 교회 신학에 있어서, 교회 사명의 핵심인 복음화와 선교의 영역에 있어서,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이 오랫동안 미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결정적인 비전을 제시한 공의회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공헌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을 제공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의 하나다.19) 교회 안의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상상력의 가능성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갑작스럽게 발생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역사 안에 그 나름의 배경과 많은 신학자들의 노력들을 통해 계승된 것이다. 특히 교회의 직무들(ministries)과 사도 전래성(apostolicity)에 대한 이브 콩가르의 신학적 통찰은 평신도에 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20)

2.1. 보편 사제직, 신앙 감각, 대중 신심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근거는 무엇보다 보편 사제직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은 세례성사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함을 강조한다. 물론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편 사제직(the common priesthood)과 직무 사제직(the ministerial or hierarchical priesthood)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다. 〈교회헌장〉 10항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differ essentially and not only in degree),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또한 〈교회헌장〉 34항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명에 밀접히 결합시키신 평신도들에게 당신 사제직의 일부도 맡기시어(gives a share in his priestly office)”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분명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차이가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정도와 본질의 차이는 존재적 차이(위계, 서열)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기능적(역할의) 차이에 불과한 것인가. 〈복음의 기쁨〉 104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좀 더 정직하게 진술한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시고자 쓰시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직무 사제직의 역할이 ‘위계적’으로 여겨진다 하여도 ‘이 구조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거룩함에 예속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핵심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 집전 권한입니다.”

〈교회헌장〉 9항에서 언급된 신앙 감각(Sensus fidei)은 평신도 신학의 또 다른 배경과 근거가 된다.21)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이든 믿는 이들의 신앙 감각이든 초자연적 본능으로서의 신앙 감각은 “믿음에 관한 일을 명확히 식별하며, 참된 지혜를 촉진하고,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해 준다.”22)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 신앙 본능으로서의 신앙 감각은 “복음에 합당한 것을 인식하고,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23) 일종의 자율적 힘을 모든 신자들에게 부여한다. 신앙 감각이란 신학적 개념을 통해 평신도들 역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단순히 수동적으로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신앙 감각은 교도권의 식별과 판단을 받아야 하지만, 이러한 신앙 감각의 존재는 평신도들에게 현실적으로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된다.

대중 신심(popular piety)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역시 평신도 신학의 확장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종교 사회학과 문화 인류학에 있어서 종교적 왜곡과 미신적 경향을 드러내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었던 대중 신심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접근은 평신도의 신앙적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 신심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다. 물론 교회적이고 올바로 이끌어진 진정한 대중 신심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대중 신심은 “대중문화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육화되어 생겨나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90항). 다시 말해, “받아들인 신앙이 어떻게 한 문화 안에 구현되고 지속적으로 전달되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123항). 대중 신심은 무엇보다 신앙 토착화의 전위적 형태다. 또한 대중 신심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인 선교 활동의 참다운 표현이다”(『복음의 기쁨』, 122항). 대중 신심은 복음화하는 힘을 가졌다.

보편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강조, 신앙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이해, 대중 신심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의 경향은 신학적 측면에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2.2. 교회 운동들(ecclesial movements)24)

일반적으로 가톨릭 신앙생활은 교구와 본당 공동체를 중심으로 수행된다. 교회의 교계적이며 제도적인 차원(hierarchical-institutional dimension)의 핵심 조직인 교구와 본당 공동체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를 포함하는 구조다. 하지만 신학적 · 교회법적 측면에서 보면, 교구와 본당 공동체는 성직자(교구장과 본당신부)가 리더십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교구와 본당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이 리더십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 안에는 교구와 본당의 틀과 범위를 넘어 있는 다양한 교회 운동들(ecclesial movements)이 존재해왔다. 수도 공동체와 더불어 이 교회 운동들은 교회의 또 하나의 본질적 요소인 카리스마적 차원(charismatic dimension)을 드러낸다. 물론 교회 운동들은 수도 공동체 운동과는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분명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교회 운동들은 몇 가지 본질적 · 내용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고유한 카리스마를 지닌 창시자가 복음에 기초한 고유한 영성과 카리스마로 신자들을 세례의 갱신으로 이끈다. 둘째, 그 공동체의 카리스마에 동의하는 모든 신자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즉, 성직자, 수도자, 기혼자, 미혼자,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공동체의 형태를 지닌다. 셋째, 운동들의 제도적 구조는 매우 탄력적이고 유연해서 신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다. 넷째, 운동들은 교회의 사목적, 사도적, 복음화 사 명의 쇄신을 목적으로 한다. 교회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실현하려 한다. 다섯째, 운동들은 신앙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교회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과의 통교를 지향한다.25)

교회 운동들의 구성적 · 형태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카리스마적 창시자, 고유한 카리스마, 공동체적 형태의 삶 또는 빈번하고 정기적인 모임, 평신도 중심의 회원, 복음에 대한 급진적인 헌신, 카리스마와 긴밀히 연결된 교육과 양성의 과정, 고유한 카리스마를 교회 생활 안으로 도입하려는 특별한 노력들 이다. 이러한 교회 운동들은 회원의 형태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평신도 교회 운동들, 성직자 교회 운동들, 또는 평신도와 성직자가 혼합된 교회 운동들. 또한 생활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독신공동체, 가족공동체, 친교공동체, 수도공동체, 선교공동체 형태로 구성되기도 한다.26)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회 운동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많은 교회역사가들은 지적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교회 안에는 다양한 방식의 운동들이 있었다. 가톨릭 운동(Catholic movement)과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이라 불리는 평신도 중심의 운동들이 존재했었다. 이 운동들은 분명 평신도 중심의 운동이었지만, 운동의 주도권은 교계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갖고 있는 형태를 지녔다. 운동의 구성원은 평신도들이었지만 교계지도자들이 주도권을 갖는 탓에 운동의 자율성이 많이 담보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27) 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평신도 신학이 활발해지고 평신도 사도직(the apostolate of the la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교회 운동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새로운 교회 운동이 발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공의회 이후의 교회 운동들은 교계와의 일치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운동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자율성과 역할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주로 작동되었다.28)

교회 운동들은 그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성격(보수적, 진보적, 교계친화적, 엘리트주의적)을 지닌다. 하지만 이 교회 운동들은 평신도들에게 영적 은사(spritual gifts)와 직무적 역할(ministerial roles)을 활성화하는 공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29) 또한 이 교회 운동들은 교회가 하나의 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교회 운동들은 결과적으로 교회 쇄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이 진보적 방식이든 보수적 방식이든.30)

-------------------------------------------
1) 정직하게 말하면, 이 주제는 개별 학술 논문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하나의 논문에서 학문적으로 다루기에는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 이 글은 주제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일종의 대중적인 방식으로 피력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술논문이라기보다는 논문의 형식을 차용한 일종의 에세이다. 넓은 맥락에서 일종의 대중 강연의 원고쯤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는 평신도의 역할이라는 주제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역할, 특히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로 좁혀서 사용한다. 세상 속에서의 평신도 역할이라는 주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2) 가톨릭교회 연구가인 이안 린덴(Ian Linden)은 현대 세계 안에는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는 4개의 관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라고 말하면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다양한 국가와 문화 속에서 서 있는 세계 가톨릭교회의 모습이다. 즉, 세계인구의 17.4%이며 그리스도교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톨릭교회의 모습이다. 둘째,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라는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신학적 관점의 교회다. 하느님 구원 계획에 의해 세워지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 교회, 구원 신비의 성사들과 카리스마와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교회다. 셋째, 가톨릭교회의 또 하나의 모습은 철저하게 세속의 종교적 기능을 드러내는 교회다. 교황과 로마 꾸리아로 대표되는 종교적 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지상교회의 모습이다. 넷째,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교회다. 즉, 가톨릭교회 고유의 종교적 입장과 가치를 소유하는 그래서 세상의 이데올로기들과 세속의 가치들과 때로 충돌하기도 하는 교회다. Ian Linden, Global Catholicism: Diversity and Change since Vatican II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9), 1-2.

3)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역사가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또 역사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변화, 특히 서구의 변화를 이루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이다. Rodney Stark, The Victory of Reason: How Christianity Led to Freedom, Capitalism, and Western Success (New York: Random House, 2005); The Triumph of Christianity: How the Jesus Movement Became the World’s Largest Religion (New York: HaperOne, 2011) 참조하라.

4) 여기서 교회의 변화란 교회의 신학적 본질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system)과 제도(institution)로서의 교회의 변화를 뜻한다. 또한 당연히 이 글에서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해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조금 단순하게 말해서, 교회 구조의 변화와 세상 속에서 비쳐지는 교회의 외적 모습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해석의 차이가 교회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현실 교회의 모습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5) 평신도의 역할은 성직자의 역할보다 낮은 것일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직무는 평등할 것이다. 교회법과 전통적 교회신학이 말하는 위계(hierarchy)는 말 그대로 법과 신학의 관점일 뿐이다. 직무의 위계일 뿐 존재의 위계는 아니다. 교황은 교황직을 수행하고, 주교는 주교직을 수행하고, 사제는 사제직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평신도의 직무는 무엇인가. 평신도는 자신의 방식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사도직에 참여하는가. 물론 이 논문에서 직무(ministry)와 사도직(apostolate)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상식선에서 몇 가지 정직한 질문들을 던질 뿐이다.

6) 한국 교회 현실에 대한 전망과 분석은 가톨릭 신문에서 주관하는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에 대한 분석보고서와 강인철 교수의 사회학적 연구서들이 거의 전부다. 강인철,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을 위한 사회학적 성찰》 (우리신학연구소, 2007);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참조.

7)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The New Faces of Christianity: Believing the Bible in the Global Sout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참조.

8) John L. Allen, Jr., The Future Church: How Ten Trends Are Revolutionizing the Catholic Church (New York: Doubleday, 2009), 13.

9) J.-M. R. Tillard, Church of Churches: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trans. R. C. De Peaux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2); Christopher Ruddy, The Local Church: Tillard and the Future Catholic Ecclesiology (New York: Crossroad, 2006); Francisco F. Claver, The Making of a Local Church (Maryknoll: Orbis, 2008) 참조.

10) Massimo Faggioli, A Council for the Global Church: Receiving Vatican II in History (Minneapolis: Fortress, 2015), 291-305 참조.
11) John L. Allen, Jr., 20-23.
12) Ibid., 23-32.
13) Ibid., 32-42.
14) Ibid., 178-186.
15) Ibid., 199-213.
16) Ibid., 214-216.
17) 이 부분은 필자의 논문, “복음화와 경제: 신앙의 방식 vs. 자본의 논리,” 《한국그리스도사상》 22집 (2014), 42-49의 발췌 요약이다.
18)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인철, 《종교정치의 새로운 쟁점들》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참조하라.

19)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들 가운데서 〈교회헌장〉 10항과 11항의 보편 사제직에 관한 진술과, 〈교회헌장〉12 항의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에 대한 설명과, 〈교회헌장〉 4장에 나타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에 대한 정의들과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전반적 정의를 포함하는 〈평신도 사도직 교령〉은 평신도의 위치와 역 할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을 가져오게 핵심 근거들이다.

20) Paul Lakeland, The Liberation of the Laity: In Search of an Accountable Church(New York: Continuum, 2003), 49-77.

21) 신앙 감각에 대한 상세한 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6); Ormond Rush, The Eyes of Faith: The Sense of the Faithful and the Church’s Reception of Revelation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9) 참조하라.

22)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1.
23) Ibid., 103.

24) 대표적인 교회 운동들은 Communion and Liberation, Cursillo, Focolare, L’Arche, Legion of Mary, the Neocatechumenal Way, Legionaries of Christ, The Community of Sant’Egidio, Catholic Scout, Opus Dei다.

25) Brendan Leahy, Ecclesial Movements and Communities: Origins, Significance, and Issues (New York: New City Press, 2011), 19-20.

26) Massimo Faggioli, The Rising Laity: Ecclesial Movements since Vatican II (New York: Paulist Press, 2016), 3.

27) Brendan Leahy, 25-33. Massimo Faggioli, Sorting Out Catholicism: A Brief History of the New Ecclesial Movements, trans. Demetrio S. Yocum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4), 30-44.

28) 새로운 교회 운동의 양상에 대해서는 Brendan Leahy, Ecclesial Movements and Communities; Massimo Faggioli, Sorting Out Catholicism; Massimo Faggioli, The Rising Laity 참조하라.

29) Massimo Faggioli, Sorting Out Catholicism, 211-213.
30) Massimo Faggioli, The Rising Laity, 149-150.

 

[평신도, 2016년 가을호(VOL.53),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평협 심포지엄]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 (2)

 

 

이 글은 지난 9월 9일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 단체협의회 하반기 연수중에 발표한 내용의 후반부로 지난 호에 이어서 연재한다.

2.3. 평신도 교회 직무(lay ecclesial ministry)

평신도들 역시 예수의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 역시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교회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평신도교령」, 2항)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처럼, 평신도 역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수행하는 사도직과 성직자가 수행하는 사도직은 차이가 있는가.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인가. 성직자는 주로 성사를 집전하는 방식으로 복음화와 성화 사도직을 수행한다면, 평신도는 생활의 증거와 선행의 방식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가(「평신도교령」, 6항). 수행하는 장소의 차이인가. 성직자는 주로 교회 공간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평신도는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가. 그래서 평신도는 주로 가정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하는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직무”(ministry)라는 단어는 성직자와 관련된 단어였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직무자(또는 교역자 minister)가 될 수 없는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는 없는가. 사제 직무, 부제 직무는 있지만 평신도 직무란 없다는 뜻인가. 사실,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의 구분에서 볼 수 있듯이, “직무”라는 용어는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차등의 뉘앙스를 풍긴다. 사제와 부제는 교회 안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평신도는 교회 안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한편으로 성직자라는 단어 역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언어유희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성직자는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성직자 존재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인가. 직무가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인가. 직무는 항상 존재와 인격과 일치되어 수행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무로 불림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 그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직무는 교회에 의해 불림을 받고 교회에 의해 파견되어 공식적으로 복음화와 선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1)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파견했다 해서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 명명하는데 반해, 교회가 부르고 파견했다 해서 바오로는 교회의 사도라 불리었다는 것은 어떤 시사점을 준다.

통상적으로 교회 안의 평신도 역할을 지칭할 때, “평신도 사도직”(lay apostolate) 또는 “평신도의 소명”(lay vo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평신도의 역할과 일을 교회의 직무와 연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005년 미국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주님의 포도밭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Co-Workers in the Vineyard of the Lord: A Resource for Guiding the Development of Lay Ecclesial Ministry)이라는 문헌에서 “평신도 교회 직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lay ecclesial minister)란 어떤 특별한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란 평신도들 사이에서 더 높은 교회 지위를 갖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를 어떤 특별한 지위의 개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결국 평신도의 준성직자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부름과 파견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복음화와 선교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상호협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미국주교회의는 평신도 교회 직무를 공식적인 인준의 절차를 거쳐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는 공식적인 인준의 과정을 거쳐서 선발되고 파견된다. 인준의 과정은 대체적으로 개별적인 부르심, 교회의 식별,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양성의 과정을 수료, 교구장 주교의 인준, 직무를 수임하는 전례예식의 형태로 구성된다.2) 이러한 형태의 과정을 밟아서 교회가 인준하는 공식적인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이유는 평신도 교회 직무가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방식들과는 구별하기 위해서다. 결국, 특정한 직무를 위한 준비와 양성의 과정을 거치고, 주교와 사제와 부제의 사목적 직무에 긴밀히 협조하는 방식으로, 교회 안의 지도자로서 교계의 인준을 받아, 특별한 영역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직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3)

2.4. 한국 교회의 현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여전히 평신도의 역할이 미미하다. 평신도의 역량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성직주의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적 현실은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장과 이해의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신앙 감각에 대해서는 송용민 신부만이 천착해서 연구하고 있다. 대중 신심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대중 신심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고 교도권의 구체적인 방향 제시가 부족한 탓인지, 한국 교회의 대중 신심은 기복적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 신학자들의 역할도 아직 두드러진 편이 아니다. 물론 앞선 세대의 평신도 신학자인 양한모, 지금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 신학자들인 황종렬, 한상봉, 김근수, 주원준, 박문수, 황경훈, 최현순 등은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조민아 역시 발군의 신학적 통찰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들의 역량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는 장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슬픈 일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교회 운동들 역시 저조한 편이다. 꾸르실료는 고유한 공동체적 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신자 재교육 프로그램 정도로 소화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그래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교회 운동은 포콜라레 정도다. 오푸스데이는 한국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평신도 교회 직무에 대한 이해도 낮은 편이다. 물론 사목회의 임원이나 평협 임원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인준 형태의 임명장을 수여하는 예식을 행하기도 하지만, 교회 안의 공식적인 평신도 직무로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골 공소 등지에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 선교사 정도만 교구의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파견되는 형
태를 취한다.


3. 교회 쇄신의 방향과 평신도의 역할4)

미래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습관화하고 타성화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교회 역시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교회로 변해간다.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정화와 쇄신의 과정을 갖지 않으면 교회 역시 이기적인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다는 것은 정화하고 쇄신하는 성령의 힘에 의탁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복음의 기쁨』, 49항) 경계해야 한다.

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의 변화, 즉 교회 쇄신을 위해 평신도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5) 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 평신도들 역시 새로운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상상은 변화와 실천의 단초다. 신앙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 신앙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때, 올바른 신앙을 수행할 수 있다.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인,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올바른 가톨릭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교회의 변화를 낳는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자신의 문화를 갖고 있다. 교회의 문화를 어떻게 쇄신시킬 것인가. 제도로서의 교회는 구조적 측면을 포함한다. 교회의 구조를 어떻게 복음화와 선교라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만들 것인가.

교회의 구성원인 평신도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신앙과 교회에 대해 새롭게 상상할 것인가. 교회의 문화와 교회의 구조의 변화와 쇄신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여전한 숙제다.

3.1.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

동어반복 같은 어리석은 진술이지만,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의 사람이다. 가톨릭 신자란 세례를 통해 가톨릭교회에 소속되고,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치관을 따르고,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며, 가톨릭교회의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방식이 가톨릭교회의 방식이라는 의미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같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만, 그 믿고 따르는 방식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방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방식이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에게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에 소속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소속된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교리를 믿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자신들이 속한 교파의 교리를 믿는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입장을 택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그들 교파의 윤리적 지침을 수용한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의 통공과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수용한다. 가톨릭 신자는 미사에 참여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예배에 참여한다. 결국, 소속과 교리와 윤리와 전통과 전례의 차원에서의 차이인가.

가톨릭의 정체성은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관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6)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가톨릭 종교 생활 안에서 표현된다. 세상 속에서의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은 가톨릭적 윤리 원칙들을 따르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 윤리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가톨릭의 정체성은 주로 신앙과 윤리의 재현(representation) 방식에서 드러난다.

정체성은 단순히 정태적(static)이 아니라 역동적(dynamic)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한다. 가톨릭의 정체성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기획(project)이다. 또한 가톨릭의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를 구성되었다기보다는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정체성의 특성에 대한 규정 역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 간다. 예를 들어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는 사람이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과 전통을 수용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7) 어떤 가톨릭 그룹들은 개혁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해석하고 수용하며 또 어떤 가톨릭 그룹들은 보수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해석하고 수용한다. 그 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서 어느 한 그룹이 가톨릭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다. 또 한편으로, 통념적으로 알려진 가톨릭 정체성의 특성들을 거슬러서 행동하는 신자들이라고 해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많은 자유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은 피임에 대한 가톨릭의 윤리적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때때로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톨릭의 정체성을 완전히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8) 사실, 가톨릭의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특성을 지닌다. 더 나아가 가톨릭의 정체성과 제도적 교회에 대한 헌신은 가끔 충돌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9)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우리의 무엇을 보고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가 성당을 다니고 있어서? 우리가 믿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오직 성당 다니는 것으로만 표현되는가.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종교적 이념으로 여기는 교리에 대한 충성으로만 표현되는가. 성당 다니는 일과 교리로만 우리가 우리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드러낸다면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신앙은 단순히 종교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성적 동의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어떤 종교적 관습에 익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faith)은 신념(belief)과 태도(attitude)와 행동(action)과 소속되기(belonging)를 포함하는 총제적인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가톨릭적 종교 생활을 하는 것과 가톨릭 교리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가톨릭적 태도를 취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행동을 낳는다. 믿음에서 행동으로 도달하는 과정이 지속되면, 그 속에서 올바른 태도가 형성된다. 가톨릭적 믿음은 가톨릭적 행동을 낳고, 가톨릭적 믿음과 가톨릭적 행동의 지속 과정은 가톨릭적 태도를 낳는다. 태도가 믿음과 행동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태도는 일종의 덕(virtue)이다. 결국 신앙은 덕으로, 즉 태도로 표현된다. 가톨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톨릭적 태도는 어떤 것일까. 가톨릭적 태도의 핵심은 사목적인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이다.10)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은 자비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자신만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교만과,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옹졸함과, 진리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심판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은 가톨릭적 태도가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남자로서의 정체성, 여자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백인으로서의 정체성,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그렇다면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11) 가톨릭 신자 간의 연대성이 민족적 연대성과 국가적 연대성에 우선하는가. 가톨릭 신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가. 물론 한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들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성들이 있다. 그럴 때 가톨릭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즉, 가톨릭 신앙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항상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만 작동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또한 가톨릭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가톨릭 신자들 서로 간의 교회적인 연대(ecclesial solidarity)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신앙의 연대는 이해관계와 이기심과 그릇된 이념에 기초한 집단적 연대와는 구별된다. 가톨릭 신앙에 기초한 교회적인 연대는 가톨릭 신자의 삶의 중요한 요소여야 한다. 물론 이 교회적인 연대가 다른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적 연대와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또한 이 교회적인 연대가 그저 신앙의 이름으로 맹목적인 동질성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교회적인 연대가 그저 막연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뜻하지는 않는다.12) 이 교회적인 연대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신앙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의 연대를 뜻한다. 사실 뭐 그리 복잡한 논리가 아닌, 이 교회적인 연대는 신앙 안에서 신앙의 형제자매들의 사정을 살피고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어떤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열린 모습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과 수련의 정체성이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그저 가톨릭적 관습과 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무엇보다 삶 안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삶의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신앙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신앙의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상상력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끊임없이 깨어 성찰할 때, 신자들은 교회 쇄신의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3.2. 교회 공동체의 문화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공동체 문화 형성

교회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는 교회의 공동체성이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people of God)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친교(communion)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오늘의 현실 교회는 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반성 역시 신자가 해야 할 교회 쇄신의 출발점이다.

무엇이 공동체인가.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구성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 공통의 목표와 지향과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이념 공동체다. 가톨릭 공동체는 당연히 가톨릭 신앙과 윤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종교 공동체 다. 둘째, 구성원들의 시간과 공간이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공유되어야 한다. 일상과 삶을 나누는 일종의 생활 공동체다. 가톨릭 공동체 역시 대부분 본당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부분적으로 시간과 삶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다. 셋째, 구성원들이 호혜성(reciprocity)을 바탕으로 공감과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다.13)

가톨릭교회의 기초 핵심 조직인 본당과 교구 공동체는 과연 종교적 이념 공동체로서, 생활 공동체로서, 정서적 공동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본당은 그저 주일 전례만 참여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당 안의 소수의 적극적 활동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본당 신자들에게 본당은 그저 미사 참여하는 공간, 단순한 전례 공동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과연 신자들이 본당 안에서 복음화와 성화라는 목표를 지향하며 신앙과 윤리의 가치를 진정으로 공유하고 있는가. 또한 오늘날 본당은 생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신자들은 점점 본당을 매개로 일상과 삶을 나누지 않는 것 같다. 한국 교회에서도 일상과 삶의 중심 매개로서의 본당의 역할은 1990년대까지인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 한국의 본당들 역시 생활 공동체의 기능을 점점 상실해 간다. 생활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점점 약화되는 현상은 당연히 정서적 결속의 힘도 약화되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본당에서 어떤 소속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본당 공동체보다는 가톨릭 액션 단체와 새로운 교회 운동들에 더 많이 이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본당 밖의 교회 운동들에서 오히려 소속감과 정서적 연대를 느끼며, 개성화(individuation)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14)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갖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은 어떤 정서적 충족, 즉 인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물질적 만족뿐만 아니라 자기 존엄 을 추구하는 존재다. 인간의 자아의 형성과 자아실현은 타인의 인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는 투쟁하는 ‘인정투쟁’의 과정이다.”15) 이러한 인정은 사랑과 권리와 연대로 표현된다.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음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자기 권리의 인정을 통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한 개인은 자아를 완성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16)

모든 공동체는 그 나름의 인정 체계를 갖고 있다. 교회 공동체 역시 그 나름의 인정 체계를 갖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급격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인정 체계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인정 체계는 당대의 사회 인정 체계와 달랐다. 계급과 성별과 인종의 차이 따라 인정의 방식이 차이가 나는 사회 인정 체계와는 달리 그리스도교 인정 체계는 평등 체계였다. 모든 구성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인정받는 인정 체계였다. 물론 실제 현실의 교회 공동체에서 인정 체계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측면에서 평등 인정 체계를 표방하고 추구하는 공동체였다. 교회의 이러한 평등 인정 체계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보여졌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과연 그러한 평등 인정 체계가 작동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한 상호 인정 체계 안에서 소속감과 정서적 유대를 느끼고 있는가. 자본주의 인정 체계는 자본을 통해 인정의 차이가 드러나는 사회다. 물론 여기서 자본이란 물적 자본뿐만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통한 상징 자본도 포함된다. 자본주의는 가진 것을 토대로 인정의 차등이 이루어지는 체제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 문화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이들은 형제이며 자매라는 평등 인정 체계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 교회 안에서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적 인정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 세속의 자본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더 많이 인정받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교회 인정 체계에 있어서 인정의 권력을 가장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 오히려 더 세속의 인정 체계를 따르고 있다. 물론 세속의 인정 체계와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 또한 그래도 아직은 교회 공동체 안에는 평등 인정 체계를 지향하려는 노력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 공동체는 점점 세속 자본주의 논리와 인정 체계에 물들어 가고 있다. 이것 역시 슬픈 현실이다. 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의 교회가 다시 한 번 원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인정 체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교회 쇄신을 위해 이 시대의 평신도들이 해야 할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구성원들이 소속감과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복귀하기 위해, 고유한 평등 인정 체계를 지닌 그 원래의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 신자들의 많은 노력들이 요청된다. 또한 교회 안에 침투한 자본주의 논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화적 왜곡 현상들, 즉 교회 안의 물신 숭배 풍조,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교회 문화들, 여전한 교회 안에서의 성차별의 문화들, 살아있는 신앙의 말들이 아닌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종교적 관성의 언어들만 난무하는 현상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자들은 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어떻게 형성하고 구축할 것인가. 이 또한 여전한 숙제다.

3.3. 교회 구조의 변화 촉진과 교회 운영에 참여

제도로서의 교회는 현실 속에서 복음화와 선교를 지향하기보다는 제도의 유지와 관리에 치중할 위험이 있다. 제도와 조직은 그 본성상 변화를 지향하기보다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의 모든 제도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다. 따라서 제도로서의 교회 역시 끊임없는 쇄신의 과정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 개혁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7항)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술은 교회 구조의 지속적인 변화와 쇄신에 대한 분명한 요청이다.

교회 안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은 단순히 제도와 구조의 민주화라는 맥락에서 접근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제도와 구조는 민주화(democratization)라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명제다. 하지만 교회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17)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차원도 있지만 신비로서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차원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은 단순히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구조의 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제도와 구조는 끊임없이 변해 가야 하지만, 새로운 제도와 구조 역시 시간 속에서 생동감을 또 다시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구조라 하더라도 그 구조에 생기를 주고 지탱하고 평가하는 생명이 있을 때에만”(『복음의 기쁨』, 26항) 복음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드러난 교회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의 방향은 단체성(collegiality)과 공동합의성(synodality)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 개념들은 교회 통치에 있어서 주교들의 태도와 입장에 관한 개념들이다.18) 하지만 단체성과 공동합의성의 정신은 교회 구조 전반에서 실현될 필요가 있다. 단체성과 공동합의성에 대한 공의회의 강조는 교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가 대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교회의 제도와 구조는 대부분 성직자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더 나아가 교회의 통치와 운영 역시 성직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회를 통치(rule)하고 다스리는 (govern)는 일은 주교의 임무다(「교회헌장」, 8항). 그렇다면 교회의 통치권(governance)에 평신도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인가. 성직자의 통치와 다스림에 협력하는 방식으로밖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통치와 다스림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세속의 개념이 교회로 유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교회의 모든 행위는 섬김(service)을 지향해야 한다. 통치와 다스림의 개념이 교회에 들어온 것은 운동(movement)으로서의 교회에서 제도와 구조로서의 교회로 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의 통치와 운영은 직무 사제직과 리더십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오해해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직자로서의 서품이 보편 사제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직무 사제직이 보편 사제직보다 위계적 우위에 있는 것 은 아니다. 단지 구별될 뿐이다. 비록 본질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교회법과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은 분명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성직자가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위로부터(from above)가 아니라 공동체 안으로부터(from within)이다. 또한 성직자의 리더십은 세속 권력의 관점에 말하는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복음화를 향한 봉사의 리더십이다. 성직자로의 서품은 위계적 승진이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로서 신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에 대한 교회의 인정(recognition)이다.19)

제도로서의 교회의 통치와 운영에 평신도들의 협력과 참여가 요청된다. 물론 영적 지도와 성사의 집전에서 성직자의 우선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법적 통치의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권한과 역할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역할이 요청된다. 교회의 통치와 운영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권력관계를 통한 지배구조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한다. 잠정적 대안으로는 “성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평신도들과 공유함으로써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교회를 운영할 수 있다. 일종의 협력적 성직자 중심주의다.”20)

사실 교회 구조의 변화와 쇄신에 대한 목소리는 언제나 있어 왔다. 문제는 과연 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이다. 성직자들의 반성과 성찰이 먼저 요청된다. 하지만 또한 평신도들의 지속적인 예언자적 목소리 역시 당연히 요청된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예언자적 요청들이 교회 제도와 구조의 변화 쇄신의 실천과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나가는 말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오직 성령만이 아신다.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신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당신이 이끄시는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길에 우리들이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신다(call).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의미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지상의 교회는 세상 안에 있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과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겨냥한다. 하지만 세상 역시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aggiornamento)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토착화(inculturation)라 부른다. 세상은 교회에 건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세상은 자주 교회를 세속에 물들게 한다. 부정적인 맥락에서의 세속화(secularization)다. 오늘날의 현실 교회는 과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 변해 가고 있는가. 교회 안의 일들에 평신도들의 다양한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 점점 자본주의의 논리가 내재화되는 현상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많은 부분 세계 교회의 흐름과는 달리 평신도의 교회 안의 일들에 대한 참여가 저조한 편이다. 그 반면에 자본주의 물질주의 경향은 세계의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더 강한 편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 교회의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안에 평신도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보편사제직의 중요성과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전망의 제시는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 감각과 대중들의 신심 속에 숨어 있는 복음화의 힘들을 재발견했다. 또한 본당과 교구의 경계를 뛰어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 운동들은 복음화를 위한 평신도의 역량을 새롭게 형성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공의회 이후 교회는 교회 안의 직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직무(ministry)는 복음화와 선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 직무자(minister)는 “지배나 영예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고 사목 임무를 다 하도록 온전히 봉헌”(「사제 양성 교령」, 9항)된 사람이라는 것을 교회는 깨달았다. 직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 안의 평신도 직무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21) 직무는 권력과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있는 것이며, 교회 안의 순서(order)는 서열이 아니라 친교를 위해 있는 것이다.22) 교회의 직무가 갖는 본질적 방향성과 그 특성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교회의 직무를 맡은 사람과 맡지 못한 사람 사이에 존재적 위계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지배와 서열의 관계가 아니라 봉사와 친교의 관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성직과 평신도의 관계를 우리는 오랫동안 오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복음화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주도적인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복음의 기쁨』, 120항)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언하고 있다. 이 시대의 평신도의 모습에 대해 교황 청 국제신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교회의 많은 지체들은 그들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를 바라고, 자신들에 적합한 방식으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본당과 여러 단체와 운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며, [인터넷의] 사회 매체를 통하여 다른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의 접촉을 추구하게 되었다.23)

많은 선구자적 평신도들이 위의 진술처럼 행동해 왔고, 교회 안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왔다. 이 시대의 모든 평신도들 역시 교회 안에서 그저 수동적인 수용자로만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서의 평신도의 고유의 역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의 역할과 권한이 있음을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올바른 방향의 변화와 쇄신의 노력들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노력이 성직자들의 몫만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교회의 올바른 방향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평신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해,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에 대해 그저 목소리만 소리 높여 외치면 되는가. 현실 속에서의 실현과 실천 가능성을 생각하면, 많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이 헛된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의 시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에서 출발한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교회의 직무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교회 안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이 향후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시작이 될 것이다. 변화와 쇄신의 시작은 교회 주체의 각성을 요청한다. 변화의 기미를 내포하는 기존 현상의 균열은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란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이 현실화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여럿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더 강력한 현실화와 지속성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현실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매우 어려우면서도 분명한 해답조차 없는 형극의 길이며, 흔히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24)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많은 운동들이 처음과는 달리 변질되기도 하고 소멸의 길에 이르기도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 좌절하지 않는 더 많은 노력과, 성령께 더 많은 기도가 요청되는 이유다.

당대를 읽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복음적 가치를 지키며 복음적 방식으로 살아가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그저 소비의 행위로 전락하게 되는 자본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세상의 체제들은 억압적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유혹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더 이상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교묘하고 복잡한 시대에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공부해야 한다. 참 공부란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방식의 공부다. 끊임없이 교회의 모습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성찰하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공부를 통해 신학적 성찰의 힘과 신앙의 감각을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세월이 쌓여갈수록 교리 지식과 전례에는 점점 익숙해져 간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 데는 진전이 없거나 더딘 것이 아닌지 늘 경계하고 성찰하면서 신앙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성찰과 공부,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 것이 참 영성이 아닐까.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신자들의 각성과 성찰과 공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가 참 어처구니없고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변화와 쇄신을 위한 뚜렷하게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성찰적 신앙과 깨어 있는 신앙인들만이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조금씩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
1) Richard R. Gaillardetz, “The Theological Reception of Co-Workers in the Vineyard of the Lord,” in Lay Ecclesial Ministry: Pathways Toward the Future, ed. Zeni Fox (New York: A Sheed & Ward Book, 2010), 23. 게일라데츠는 직무자에 대한 흥미로운 예를 든다. 어떤 신자가 자신의 본당에 가서 토요일 아침 노숙자들을 위한 식탁 봉사를 했다고 해서 그가 직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본당 공동체가 그 신자를 공식적으로 무료급식소의 어떤 담당자로 임명해서 그 일을 수행하게 할 때, 그는 직무자가 된다. 왜냐하면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림을 받고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2) Susan K. Wood, “A Theology of Authorization of Lay Ecclesial Ministers,” in In the Name of the Church: Vocation and Authorization of Lay Ecclesial Ministry, ed. William J. Cahoy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2), 99.

3) H. Richard McCord, “Lay Ecclesial Ministry: Pastoral Leadership in a New Era,” in In the Name of the Church, 4.

4)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교회헌장」, 38항)는 선언처럼, 평신도는 역할과 임무는 오직 세상 안에만 있는 것인가. 성직자의 역할은 교회 안에, 평신도의 역할은 세상 안에 있다는 이분법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생각이다. 교회와 세상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진다. 교회 역시 세상 속에 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교회와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단지 그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장(chapter)은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5) 미국의 보수적인 평신도 신학자들 역시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주장한다. 그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의 방향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다. 그들의 개혁과 쇄신의 방식 안에서는 평신도들의 역할은 주로 세상 속에서의 역할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교회 개혁에 있어서 중심은 성직자들이다. 평신도들의 역할은 제한적으로 여긴다. George Weigel, Evangelical Catholicism: Deep Reform in the 21st-Century Church (New York: Basic Books, 2013), 189-203; Scott Hahn, Evangelizing Catholics: A Mission Manual for the New Evangelization (Huntington: Our Sunday Visitor, 2014), 99-116 참조.

6) Gerald A. Arbuckle, Catholic Identity or Identities?: Refounding Ministiries in Chaotic Times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3), xviii.

7) 전통의 수용과 해석의 방식과, 가톨릭 정체성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Colleen Mary Mallon, Traditioning Disciples: The Contributions of Cultural Anthropology to Ecclesial Identity (Eugene: Pickwick, 2010) 참조하라.

8)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Michele Dillon, Catholic Identity: Balancing Reason, Faith, and Power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참조하라.

9) Paul Lakeland, Church: Engaging Theology ? Catholic Perspective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09), 62-68.

10) Richard R. Gaillardetz, An Unfinished Council: Vatican II, Pope Francis, and the Renewal of Catholicism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15), 138-148.

11) 이 문제에 대해서는 Michael L. Budde, The Borders of Baptism: Identities, Allegiance, and the Church (Eugene: Cascade, 2011) 참조하라.

12) Michael L. Budde, 3-4.

13) 차정식, 『기독교 공동체의 성서적 기원과 실천적 대안』 (짓다, 2015), 73-75; 김경동, 『기독교 공동체 운동의 사회학』 (한들출판사, 2010), 78-92 참조.

14) Bradford E. Hinze, Prophetic Obedience: Ecclesiology for a Dialogical Church (Maryknoll: Orbis, 2016), 196-197.

15)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3), 206.

16)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 · 이현재 옮김 (사월의 책, 2011); 문성훈, 『인정의 시대』 (사월의 책, 2014) 참조.

17) 물론 넓은 의미에서 교회의 제도와 구조는 민주적인 방향으로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도 옳은 명제다. 이에 대해서는 Luca Badini Confalonieri, Democracy in the Christian Church: An Historical, Theological, and Political Case (New York: Bloomsbury, 2012) 참조하라.

18) Massimo Faggioli, A Council for the Global Church, 229-253 참조.

19) Paul Lakeland, “Set into the Future: The Role of the Laity,” in From Vatican II to Pope Francis: Charting a Catholic Future, ed. Paul Crowley (Maryknoll: Orbis, 2014), 132-134.

20) 김선필, 『한국천주교회 지배구조의 형성과 변형: 교회 쇄신을 위한 사회학적 검토』 (제주대학교 대학원 사회 학과 박사논문, 2016), 45.

21) Richard Lennan, “Ministry as Merciful Accompaniment,” in Go Into the Streets: The Welcoming Church of Pope Francis, eds. Thomas P. Rausch and Richard R. Gailalardetz (New York: Paulist Press, 2016), 142-144.

22) David Noel Power, Mission, Ministry, Order: Reading the Tradition in the Present Context (New York: Continuum, 2008) 참조.

23)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96.

24) 리처드 세넷, 『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김병화 역 (현암사, 2013), 18.

[평신도, 2016년 겨울호(VOL.54),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파일첨부

3,16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