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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행복과 정의, 그리고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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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1343

[신앙과 정치] 행복과 정의, 그리고 구원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말 일본에서 온 수녀님을 만났다. 수녀님의 배낭에는 세월호 리본과 사드 반대를 상징하는 파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수녀님은 도시샤대학에서 동아시아 현대사를 연구하며,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석사 논문을 준비한다고 했다. 자료를 수집하러 왔고 이미 광주에 들렀다고 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평화를 많이 생각했고, 수녀가 된 뒤 일본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말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와 세월호 미사도 참석했다는 말에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일본을 쥐락펴락하며 50년 넘게 지배하는 아베의 자민당 세력에 관해 물었다. 일본엔 그 보수세력을 견제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없는가? 어떻게 그런 장기집권을 용납할 수 있는가?

 

수녀님의 대답은 지체 없었다. “안타깝다. 일본 지식인은 사회문제에 어떤 참여도 활동도 없다. 오직 연구실에만 있다. 지식인은 세상으로부터 멀리, 너무 멀리 서있다. 일본 지식인에게 세상은 없다.” 아직도 그 수녀님의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있다.

 

 

지식인과 예언자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뛰어드는 사람’이라 했다.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인류적 보편적 가치가 유린당하면 남의 일이라도 자기 일로 간주하며 간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이 정의를 들을 때마다 ‘지식인’ 대신 ‘예언자’란 단어를 넣어본다. 예언자들도 자기 일과 무관한 일에 참견했다.

 

북이스라엘-남유다라는 이른바 남북조시대를 산 아모스는 자신의 터전 남유다를 떠나 북이스라엘의 정치 · 종교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그는 예언과는 전혀 관계없는 목양업자였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그 풍요를 자신의 것으로만 취했다. 그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슬픔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정의와 사랑으로 백성을 해방했던 하느님을 잊는다면, 다가올 것은 재앙이었다. 아모스는 흥청거리는 부자들과 수치심이 없는 교만한 지도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했다.

 

부자들과 배부른 자들, 지금 웃는 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이런 예언자의 전통에 서있었다(루카 6,24 참조).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방법은 모세의 전통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달려있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면 참예언자요, 하느님을 잊은 탐관오리와 부유한 자 편에 서면 거짓 예언자였다.

 

어느 시대에나 부의 집중과 불평등은 심각한 죄악을 양산한다. 구조적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인간은 더는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이 신이 된 사회에서 상품이 되고 만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정상적인 일상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아모스의 사회비판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불평등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는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슬픈 예언, 현실이 되다

 

2013년 겨울,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일 년이 채 안 된 때였다. 한 학생이 쓴 대자보가 고려대학교에 나붙었다. 대자보는 철도파업과 철도 민영화로 시작된 논란, 한국사회의 사건과 사고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뒤, 마지막으로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대자보는 인터넷과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번지며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너무도 ‘슬픈 예언’이었다(김민아, ‘충청 대망론’과 ‘구의역’ 사이, 「경향신문」 2016년 6월 7일 자 참조). 저출산과 고령화, 저성장의 덫에 갇힌 ‘수상한 시절’ 모두 안녕하지 못했고, 절벽에 갇힌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2014년 봄, 세월호가 침몰해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5년 초여름, 메르스가 창궐해 38명이 죽고 1만 명 이상이 격리되었다. 그해 초겨울,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이 직사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 얼마 전에 선종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미국 ‘LA타임스’는 “박정희 시대에 핍박받던 사람이 그 딸이 대통령인 시기에 숨졌다.”고 보도했다.

 

올해, 아이들의 허망한 죽음이 계속되었고 서울 강남역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여성이 살해되었다. 서울 구의역에선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가 숨졌다. 그리고 그 더운 8월 말 김복동 할머니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섰다. 일본의 사죄 없이 10억 엔에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정부를 두고, “이때까지 우리를 이렇게 괴롭힌 대통령은 없었다.”며 한탄하였다.

 

마치 무슨 주술에 사로잡힌 듯 공포와 불안이 일상을 엄습했다. ‘안녕’은커녕 생존이 문제가 되었다. 활성 단층 위에 밀집한 원전 부근 지역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사회 전체를 떨게 하고 있다. 대지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북핵문제는 또 어떠한가? 성장을 담보로 개인의 행복이 유보된 시대, 이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을 멀리서 찾으면 현재가 늘 불만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멀리 계시지 않는다. 지금 여기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다면 구원은 미궁에 빠지고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기 쉽다.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은 구원의 다른 말이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하늘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정말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루카 6,20 참조),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마태 5,9 참조)이 행복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박해와 핍박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백남기 농민은 손자와 함께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 시월 둘째 딸 민주화 씨가 사는 네덜란드 집을 처음 방문하기로 했다고 한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 칠순 여행은 갈 수 없게 되었다.

 

날마다 오후 4시 서울대병원 앞 천막에서 진행되던 쾌유 기원미사는 이제 영안실 한쪽에서 추모미사로 진행되고 있다. 백남기 임마누엘, 예수님의 말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늘나라가 그의 것일까?

 

 

행복은 정의의 바탕 위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 일성은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행복이란 무엇일까?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지며 정의와 평화의 일꾼들은 더 핍박을 받고, 행복은 오직 1% 상류 특권층에만 존재한 채 국민은 안녕하지 않은데 말이다. 국민 행복시대, 너무 공허한 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 플라톤은 행복을 정의와 연결했다. 구약성경이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을 정의라 가르치듯이, 그에게도 정의의 원천은 신이었다. 플라톤의 행복은 이데아의 세계, 불행은 유한한 현실 세계에 존재했다. 행복은 영원의 세계에서 누리는 커다란 기쁨이다. 그렇지만 피안을 향해 고개만 돌리고 살 수는 없다.

 

이 땅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신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삶을 위한 노력이 정의로운 삶이다. 그러자 현자들은 윤리와 도덕을 말하게 되었다. 행복의 길을 꿈꾸었던 헬레니즘 시대 지식인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철학은 ‘이성이 정직하게 머무르도록 돕는 일종의 훈련’이었다. 지식인의 길은 진실에 있다.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두고 벌어지는 의료계와 법조계의 행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식인의 길에서 한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외인사’를 왜 ‘병사’로 적는지, 죽음의 원인이 명백한데 왜 부검 영장을, 그것도 조건부로 발부하는지 윤리와 도덕은 물론 상식의 틀에서도 이해하기 힘들다.

 

시민들은 전문 지식인들인 그들이 진실을 회피하고 선이 아닌 악의 편에 서있다고 본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라는 중세의 지식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는 하느님의 길로 들어서라는 권고이다.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이 돌아가시고 며칠 뒤 일본에서 메일이 왔다. 여름에 만났던 수녀님이었다. “백남기 씨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병원에 가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중에 살펴보니 수녀님은 2012년 제주 해군기지 반대 세계시민 선언에도 서명했다.

 

참된 지식인은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공감하고 연대할 줄 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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