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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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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8 ㅣ No.47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1)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 구상 시인은 격동하는 역사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성찰하며 시와 산물을 통해 파란만장한 삶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시인의 다양한 표정을 담은 말년의 사진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2004년 5월 11일 새벽,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한다”던 시인은 86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당시 한 일간지 부고 기사 표현대로 “한평생 마음 가난한 구도자의 삶, 영원을 살고 노래한 성자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 선생이 선종한 지 어느덧 열두 해이다. ‘헌 날, 헌 시간’이 어디 있냐며, 자기가 새로워져야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있다던 시인의 시 ‘오늘’이 새롭게 다가온다.

 

찾아가 세배드리고 덕담을 듣고 싶은 어른이나 스승이 사라져 간다고 아쉬워들 하는 시절이라, 구상 시인 서거 1주기에 간행한 102인의 추모 글로 엮은 「시인 구상 추모문집-홀로와 더불어」에서 여러 필자가 새해 덕담으로 들었다던 시도 반갑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 너의 앉은 그 자리가 / 바로 꽃자리니라.”

 

영원을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면, 선생은 흰 수염을 쓸며 ‘허허허’ 웃고는 이렇게 덧붙이리라.

 

“새해 우리가 신비의 샘인 나날과 / 목숨의 시간들을 흐리고 더럽혀서 / 폐수로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유일한 징표인 / 저마다의 마음속 밑동에서 울려오는 /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살아야 한다.”

 

구상 시인이 떠난 지 12년, 다시 봄이다. “온 천지가 눈부시게 환하다.” 자연의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없이 온다. 시인이 표현한 대로 “한 겨우내 세상 무대 뒤 땅 밑에서 움츠리고 살던 초목들이, 조화옹의 신령한 힘과 섭리로” 꽃과 잎들을 뿜어낸다. 시인이 회심의 일터로 삼아 예배 보듯 나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에 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

 

시인은 “너의 마음의 황폐를 계절에다 돌리지 마라!”고 하였지만, 우리 삶 터에는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말이 떠돈다. 그래서일까. “저 요르단 강변 세례자 요한의 그 예지와 진노를 빌려서” 까마귀처럼 ‘까옥까옥’ 우짖으며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던 시인,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연민 가득한 눈으로 ‘기도’하던 시인이 그리워진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구상은 강물처럼 흐르는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와 삶과 신앙을 성찰한 시인답게 자전 시와 「시와 삶의 노트」 등 여러 산문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소상히, 진솔하게 기술했다.

 

구상은 자신의 삶과 의식을 100편의 연작시로 남겼다. 시인이 떠나고 2010년에 완간된 구상문학총서 열 권 중 제1권, 자전 시문집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책머리에서 시인은, “나는 이 시문집의 제목이 비유하듯 과일 망신시킨다는 모과처럼 부실한 시인이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삶이 심신 더불어 악전고투의 심연 속에 있었다 하겠고, 그 응어리진 사연이 하도 많아서 모과나무의 무성한 옹두리를 방불케 한다”며 파란만장한 삶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태질하던 시대 속에서 오직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헤매고 몸부림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온 나의 실존적 삶의 현실적(역사적) 체험, 내면적(정신적) 편력과 추구”를 시로 엮었다고 밝힌 이 시문집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태어나 8·15광복,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은 수난의 세대로서, 구상의 생활사인 동시에 정신사요, 나아가서는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구상은 언론인으로, 교육자로, 무엇보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시인의 외길을 걸었다.

 

“고삐 꿴 / 거품 뿜고 / 침 흘리는 소. //

네 살 나에게 비로소 있음이 / 예루살렘 여인네가 내민 수건에 / 피땀으로 인(印) 쳐진 사형수의 / 바로 그런 소 얼굴.”

 

네 살 때 서울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덕원으로 이사 가던 때의 기억을 담은, 자전 시문집 첫 시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과 민족의 고난을 상징하는 듯한 이삿짐 달구지를 끄는 소의 얼굴에서, 최초의 이콘이라고 하는 베로니카의 수건에 찍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그러고는 마지막 100번째 시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며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우러른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 /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로 차 있고 /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 매미와 개구리처럼 요란을 떨지만 /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 무엇일까? / 저들에게 새 십계명은 무엇일까? / 아니, 새것이 있을 리가 없고 / 바로 그 십계판을 누가 어떻게 /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정지! /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 맡기고 빌 뿐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1970년대말 한 문학강연회에서 구상 선생님을 처음 만난 추억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처럼 우아해 보이지만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 하는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언론, 교육, 문화계에 큰 발자국을 남기고,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묵상을 담은 시로 우리에게 깊은 사유와 성찰을 하도록 이끄는 선생님의 솔직한 삶의 고백에서, 저는 ‘양심’과 ‘수치’라는 두 낱말을 새로 배웠습니다. 

 

저는 그저 시의 애독자로서 선생님의 글을 짜깁기하듯이 인용해 이 글을 엮어보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강의 / 그 땅 밑으로 / 또 하나의 깊고 넓은 강이 / 흐르고 있다”는 선생님의 시구처럼, 이 기회에 깊고 넓은 강 같은 선생님의 작품들을 찾아 읽는 분들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9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2) “나는 ‘주의자(主義者)’가 되었다”

 

 

-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앞쪽) 전경. 구상은  이곳 신학교에 들어가 살다가 중등과 3학년 때 자퇴했다.

 

 

구상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찬(프란치스코)씨가 쉰에, 어머니 이정자(마리아) 여사가 마흔넷에 얻은 금지옥엽 늦둥이였다. 본이름은 구상준(具常浚)이지만 어려서부터 ‘상아, 상아’ 하고 불러서 외자 이름으로 굳어졌다. 구상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가톨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한집안인 아산 이씨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아버지는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구상은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아 태어나자마자 요한 세례자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할아버지께서 울산 부사, 큰아버지 한 분은 창녕 현감, 또 한 분은 현풍 군수를 지내셨고, 아버지는 요즘 말하면 청와대 곧 궁내부의 주사셨어요. 경술국치 뒤에는 경찰학교에서 한문 교관을 하시다가 연금을 받게 되어 은퇴하셨지요.” 

 

이렇듯 반가 집안 후손인 구상은 서울 백동성당(혜화동성당)에 다니다가, 북녘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네 살 때 원산시 근교로 이사를 하여서 자랐다.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 우거진 수풀 속에 베네딕도 수도원 종탑이 보이고 발치로는 찰싹이는 동해가 보이는 90호 남짓의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부근 읍면에 ‘해성학원’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셋이나 세운 원장으로, 마을 초입에 예순여섯 마지기 문전옥답을 가진 지주로 유유자적하였다. 

 

구상은 1960년대에 연작시 ‘밭 일기’를 쓰게 된 동기가 농촌에서 자란 소년 시절의 체험과 회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밭 일기 첫 편에서부터 자연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는 어린이의 눈길이 느껴진다.

 

“밭에서 싹이 난다 / 밭에서 잎이 돋는다 / 밭에서 꽃이 핀다 / 밭에서 열매가 맺는다 //

밭에서 우리는 심부름만 한다.”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날, 양복에 란도세루(일본 초등학교 학생들이 메는 건빵처럼 생긴 가방)를 맨 ‘서울집 도련님’은 선망과 질시를 한몸에 받는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글짓기를 잘했는데, “돈이라는 것은 없애고 온 세상이 네 것, 내 것 없이 살 수는 없을까?”라거나 “염소의 뱃속엔 어떤 장치가 되었기에 그 똥이 콩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만들어져서 나오는가?”라고 해서 담임선생과 동급생들의 웃음을 샀다.

 

- 대학 시절의 구상.

 

 

구상은 위로 형님이 둘 있었는데, 맏형은 동경에 유학 중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행방불명되었다. 구상은 열다섯 살에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형인 구대준이 다니던 베네딕도 수도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들어간다. 구상과 신학교 입학 동기인 윤공희 대주교(광주대교구 원로 사목자)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구상은 덕원 수도원 밑 어운리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신앙이 두터운 교우 집안이었어요. 당시는 중등과 5년, 고등과 2년 해서 7년이 소신학교 과정이고,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 해서 6년이 대신학교 과정이라 사제가 되려면 13년을 공부해야 했지요. 중등과 1학년에 24명이 입학해서 1년이 지나고 8명이 쫓겨났어요. 구상 신학생은 3학년 때 자퇴했는데 나이보다 성숙했던 거 같아요.” 

 

구상이 신학교를 나온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간호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실존적 욕구가 성직자의 규범 생활을 해낼 자신이 없고, 나는 어려서부터 레지스탕스 기질이 있었다”고 훗날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구상은 일본 왕후의 사진을 오려내 모독하는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한 자퇴 당시의 상황을 시로 묘사한다.

 

“소신학생이 / 정월 초하루 아침 / 백설 차림의 황후폐하 사진을 / 신문서 도려 갖고 / 후들후들 변소로 들어섰다 //

창세기의 배암이 온몸을 조여 / 모독의 정열을 고름 빼듯 한 후 / 3년간 머물던 수도원을 등졌다//

나는 주의자가 되었다.”

 

당시 ‘주의자’(主義者)는 저항적 지식인들을 일컫던 말이었다. 구상은 신학교를 뛰쳐나와 노동판에 뛰어들고 야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다가, 일제가 말하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 곧 불평불만을 일삼는 조선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신학교를 나간 다음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금방 퇴학을 당했다던가? 얼마 안 있어 일본에 가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더라고. 방학 때에는 신학교에 놀러 오곤 해서 만났는데, 문학청년으로 머리도 기르고 말하는 것도 우리하고 달라 굉장히 성숙해 보였어요.”

 

윤 대주교 말대로 구상은 열아홉 살 되던 해 봄에, 교회에선 이단아요, 가문에선 불효자요, 마을에선 주의자가 되어, 밤의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밀항을 한다.

 

“역사의 쇠사슬을 찬 젊은이는 / 망토를 재끼며 일어나 앉아 / 이름 모를 짐승이 되어 / 치를 떤다 / 스승도 없는 갈릴래아! / 암흑의 파도를 타고 ‘사의 찬미’가 들려온다 / 머리 푼 ‘윤심덕’이 / 손짓한다.”

 

“개항 후 바야흐로 일제의 식민지 강탈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에게 현해탄은 어쩔 수 없이 건너가야 하는 비장한 각오와 아픔의 바닷길이었다”(유홍준, 「일본문화유산 답사기」). 현해탄은 1926년 8월,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김익진(평화신문 1291호 2014년 11월 30일자~1300호 2015년 2월 1일자 연재)의 맏형인 극작가 김우진이 몸을 던진 비련의 바다로도 알려져 있다.  

 

동경에서 구상은,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일용 노동자로, 연필공장 직공으로 일하며 망국민의 설움과 방랑자의 고독과 감상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스무 살의 화창한 봄날, 사회주의 학자의 서적을 끼고 종일을 헤매며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던 구상은, 동경만 근처 빈민촌인 기다센쥬의 어느 목로판에서 한국인 노동자들 틈에 끼어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댄다. 

 

그러다가 선배의 권유로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시험을 쳤다. 동시 합격이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이 강했던 구상은 종교학을 택했다. 그때부터 고국의 형님과도 타협해 집에서 학자금을 받아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구상은 청춘의 찬란한 낭만과는 등진 일종의 정신적 우범자의 오뇌와 고독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교수는 거의 승려 출신이요, 학생들도 서른이 넘는 현직 승려나 목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강좌에서는 당시 가톨릭이 들으면 질겁할 학설들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구상의 정신의 근원을 다져 준 다시없는 시간이었다. 사계절을 검은 중절모에 검은 코르덴 양복이나, 무명에 물을 들인 옷을 걸치고 병정 구두를 신은 장발의 그로테스크한 청년 구상은, 반신(反神)적이 되고 니체에 심취하였던 20대 초반의 치열했던 상황을 이렇게 시로 썼다.

 

“그때 / 라 로쉬코우 공과의 해후는 / 나의 안에 태풍을 몰아왔다. / 선한 열망의 꽃망울들은 / 삽시에 무참히도 스러지고 / 어둠으로 덮인 나의 내부엔 / 서로 물어뜯고 으르렁거리는 / 이면수의 탄생을 보았다.// 

자기 증오의 밧줄이 / 각각으로 숨통을 조여오고 / 하늘의 침묵은 공포로 변했으며 / 모든 타자는 지옥이요 / 세상은 더할 바 없는 최악의 수렁…//

하숙방 다다미에 누워 / 나는 신의 장례식을 / 날마다 지냈으며 / 깃쇼지 연못가에 앉아 / 짜라투스트라가 초인의 성에 오르는 / 그 황홀을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청춘의 반역과 방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3개월 빨리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귀향할 이유는 없었으나, 1940년 여름,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은 사제품을 받아 육순의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자 1941년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5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3) “너는 매사에 너무 기승을 하지 말라!”

 

 

1942년 북선매일신문 기자 시절의 구상.

 

 

구상은 스무 살 전후해서 당시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세 가지 의식 혁명을 치르기로 작정했다. 첫째는 반상 관념이요, 둘째는 지방 관념이요, 셋째는 남녀차별 관념이었다. 집안 내력이나 고향을 숨기고서, 자신을 원산 소농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구상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족들은 저마다 당부를 했다. 

 

중풍으로 4년 동안 자리보전을 하다가 194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너는 매사에 너무 기승(氣勝)을 하지 말라! 아무리 의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를 입느니라!”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어머니도 매양 “나는 네가 세상에서 잘났다는 소리를 듣느니보다 그저 수굿이 살아 주는 게 소원이다”라고 애원에 가까운 당부를 하셨다. 

 

당시에는 이런 당부들을 자기 안주의 운명관이라고 여겨 저항감마저 일었지만 신부가 된 형(구대준 가브리엘)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인용해 보낸 글을 훗날 구상은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 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

 

카페 ‘에뜨랑제’의 백러시아계 일본 여인 유미짱을 향한 연모도 있었지만, 대학 생활이라는 젊음의 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1941년 일본에서 귀국한 구상은 집에 틀어박혀 그의 삶의 의의라고 할 시 작업에 미칠 듯이 정진했다. 주변에서는 서울집 아무개가 주의를 하다가 정신이상이 걸렸다며 폐인 취급을 하였다. 

 

1942년 봄,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라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어려웠던 구상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일본인의 소개로 함흥에 있는 북선매일신문사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하려는 일념과 / 펜을 잡는다는 매혹에 / 식민지 어용 신문의 기자가 되어 /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 날마다 성전송과 공출독려문을 써댔다.”

 

구상이 정신적 가사(假死) 상태였다고 표현한 이 기자 생활은 폐결핵으로 눕게 됨으로써 끝이 난다. 1944년 봄 폐결핵의 첫 발병으로 구상은 마식령산맥 고개 너머에 있는 수도원 산장에서 요양하며 ‘소야곡’ 등의 시를 썼다. 형이 주임 신부로 있는 흥남본당에서 경영하던 대건의원의 여의사 서영옥(데레사)씨와 약혼을 한 때였다. 건강을 이유로 결혼 사절의 글을 보냈음에도 수십 리 마식령 고갯길을 걸어서 찾아온 약혼녀와 우여곡절 끝에,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하고 / 그레고리안 합창이 울려퍼지는 / 십자가 제단 앞에서” 혼인성사로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1945년 8월 15일, “망국의 쓰라림과 그 설움을 맛보지 않고서 / 이날의 우리의 환희를 어찌 알리야? // …나는 역사의 신 앞에 / 비로소 한 번 감사의 합장을 한다”고 감격했던 광복은, 구상의 인생에 선물과 수난을 동시에 가져왔다. 

 

‘주의자 구상, 폐인 구상’은 선견자요 혁명가로 여겨져, 인민투표에 향리에서 최고 득점자가 되어 신생 조국의 역군으로 추천을 받았다. 원산여자사범학교 국어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강토는 두 동강이 나고 구상은 ‘반동 인텔리겐치아’라는 명패가 붙은 채 다시 두문불출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46년 원산의 문학 동인들과 발간한 시집 「응향」으로 말미암아 필화를 입게 된다. 공산당 치하에서 구상은 원산문학가동맹으로부터 광복 1주년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표지 장정을 화가 이중섭이 맡은 이 시집 「응향」이 출간되자, 그해 10월 북조선 문화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에서 시집을 규탄하는 결정서를 발표하고 검열 사업을 벌이기로 공고하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시집 「응향」은 북조선 현실에 대한 반동적 경향을 가졌다”며 작품과 작가들의 사상 검토와 자아비판을 하라는 것이었다. 작품 가운데에서도 구상의 시 세 편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광복을 맞은 우리 현실 상황을 묘사한 그의 시는, 소련군이 덮치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을 까마귀 나는 불길한 아침에 비유한 것이었다.

 

“동이 트는 하늘에 / 까마귀 날아 //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으로 시작하는 시 ‘여명도’를 두고, 좌익 평론가들을 동원해 퇴폐주의적이요,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라는 등의 일곱 가지 수식어를 죄목에 얹은 것이다. 그들 눈에는 구상의 시 자체가 예술지상주의적이요 출신 성분이나 행동거지가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상은 당시 북한 문단의 거물들로 구성된 검열원들이 와서 단죄를 하고 자아비판을 하게 되는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남하를 결의하고 칠순 노모와 신혼인 아내, 형님 신부를 남겨 둔 채 고향을 떠났다. 38선 부근 연천에서 보안서원에 붙들려 불기 없는 싸늘한 유치장에 갇혔다가 탈출을 감행하여 1947년 2월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구상은 문학 행위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다시 학구의 길을 결의하고, 교회를 통해 북경 보인대학연구원에 소개를 받아 ‘동서 종교사상의 비교 연구’를 과제로 삼고 장도에 오르기로 선편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일주일 전에 중공에게 청도가 함락을 당하여 북경행에 실패, 자금성으로 달리던 풋 꿈은 깨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시집 「응향」 사건이 남로당 문학가동맹의 기관지에 대서특필되자, 김동리를 비롯한 남한의 민족진영 문단에서 반박하고 나서고, 구상이 소설가 최태웅이 운영하던 「해동공론」에 사건 경위를 공포하고, 우익 진영의 문학지인 「백민」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서울 문단에 입참을 하게 되었다. 이 필화 사건으로 구상은 문학적 이념이나 자세에서 엄청난 시련을 일찌감치 치름으로써 문학 본령에 일관하려는 지향을 견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 구상이 스승으로 모신 공초 오상순의 묘에서. 앞줄 왼쪽이 구상이다.

 

 

“역사의 격랑 위에 시대의 폭우를 맞으며 한켠으로 기울어진 배” 같던 조국, 이 땅의 사공들이 모조리 나서 군중들에게 에워싸여 아우성이었지만, 구상은 피안을 향한 뱃전에 까까중머리를 하고 홀로 앉아 줄담배를 피우던 노시인을 찾는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며 손 내밀던 그는, 구상이 ‘시를 체현한 구도 시인’으로 칭송한 공초 오상순이었다. 구상은 공초를 스승으로 모시고 명동의 술집 무궁원에 모여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대화의 향연을 벌였다. 

 

서울에서 구상의 첫 직장은 이승만 정치노선의 부인단체인 대한독립촉성부인회의 기관지 「부인신보」였다. 20대의 구상은 문화부장을 맡아 모윤숙, 임옥인 등 여류 문인들과 일을 하며 이승만을 가까이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일 년도 채 못 가 또다시 결핵이 재발해 눕게 된다. 병과 지독한 가난에 몰려 있던 구상은 뒤쫓아 남하한 아내의 주선으로 마산 교통요양소에서, 부인은 의사로 자신은 환자로 10개월을 정양한다. 이즈음 그에게 소생의 약수가 된 것은 첫 아들 홍의 탄생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남쪽 반동강에다 UN이 탄생시킨 대한민국, 태극의 깃발이 게양되자 구상은 빌면서 다짐했다. “이 나라 아픔이 나의 아픔이기를!” 

 

이런 와중에 이 땅의 풍류도의 재건을 선언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요양소 시절 “해당화 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하자”며 모금을 해 준 선배인 진주의 시인 파성 설창수였다. 1949년 음력 10월 3일, 나라 안의 예술가들이 진주에 모여 개천예술제를 열었다. 촉석루 뒷산에서 고천제를 지낸 뒤 예술 경연을 벌이고, 홍등가에서 주연으로 밤을 지새웠다. 구상의 무수한 실태 가운데, 명기 순애의 머리 댕기를 풀어 중절모에다 띠 대신 두르고 다닌 일과 술에 취해 의곡사 불상 앞에 사추리를 까고 오줌을 갈긴 일이 훗날까지 회자되었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12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4) “최상급의 기자란 시인일 줄 믿는다”

 

 

1951년 대구 피란 시절 한솔 이효상 출판 기념회 때. 앞줄 왼쪽 안경 쓴 이가 시인 김동사, 그 오른쪽으로 구상, 화가 서동진, 이효상, 공초 오상순, 조지훈, 홍영희.

 

 

병에서 회복된 구상은 1948년 연합신문 창간 구성원으로 문화부장을 맡아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49년 말 육군 정보국에서 대북 선전을 위한 지하신문 ‘봉화’를 제작하는 일을 요청해 왔다. “브래지어를 차고 여장을 한 것보다 / 정보수가 된 나의 꼴이 더 우습다”고 훗날 자평한 극단적 반공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구상은 국군과 함께 후퇴 남하하여 피란지 대구에서 거기 모인 문인들과 군의 매개 역할을 하며, 국방부 기관지였던 「승리일보」의 시초가 되는 인쇄물의 주간으로서 편집 제작을 맡았다. 그러고는 1952년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민간지의 반대로 시판용이 아닌 군내 배포용으로 제작하던 승리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무등병’으로서 한국전쟁에 종군했다. 

 

“6·25, 그날의 경악과 절망을 맛본 사람은 / 지구의 종언을 맞더라도 덜 당황해 하리라”며 구상은 자전 시 100편 가운데 열여섯 편(27-43)을 할애하여 한국전쟁 발발과 1953년 휴전 협정까지의 상황과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전에서 정보부대 정치반원으로 배속되어 / 공산당들 총살장에 입회를 하고 돌아오다 / 어느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마시는데 / 집행리였던 김 하사의 술회 // ‘망할 놈의 주의(主義)… 그 허깨비 같은 / 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 그놈의 주의가 원숩니다…’ // 보다 더 또렷한 6·25관을 모른다”고 구상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동족 상쟁의 비극을 아파했다. 

 

막사 안 철의자에 앉아 가위눌리는 꿈을 꾸다 호주머니의 묵주를 쥐고 “성모 어머니 나를, 나를!” 하고 소리 안 나는 절규를 발하던 구상은, 대구 사수부대의 일원으로 남아 밤이 새면 좌도의 천하가 될지 모를 판국에서, “‘원귀가 되어야지, 피 묻은 입에 / 칼을 문 귀신이 되어서 / 빨갱이들을 내 손으로 소탕해야지.’ // 내가 복수심을 체험한 것은 / 평생중, 저때다”라고 고백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을 핑계로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넣고 싶었을 고해성사 같은 개인적인 일화도 숨김없이 내보인다.

 

전령으로 부산에 다녀와서 대구의 단골 술집에 들렀다가, “나라야 망하든지 말든지 구 선생님이 얼른 대구로 되돌아오시면 좋겠다.”고 한 옥이라는 기생의 순정에, “동정으로 결혼하여 아내밖에 모르던 나는 그날 밤, 앞가슴에 찼던 성심패마저 몰래 벗어 자리 밑에 넣어 놓고 천치 같은 소리를 지껄인 바로 그 기생을 품었다. 스스로도 놀랄 색정이었다”고 고백한다. 

 

상이용사인 친구를 데리고 호기 있게 들어선 사창가에서, 모두 꺼려하니 선생님만 좋으시면 내가 모시겠다고 하는 낯익은 창녀를 보며, “칠흑 어둠이 덮인 창굴 속에서도 비록 광채는 없으나 별과 시가 깃들어 있음을 따스하게 여긴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피난살이, 질식할 듯한 시간 속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고 반기던 공초 오상순 시인을 비롯한 기인들을 만나며 구상은 숨통을 튼다. 적군이 섞인 피난민에게 포를 쏘라는 명을 거역하고 군을 나온 포대령 이기련. 모범적 평신도 재속회인 제3회가 아니라 영혼의 문둥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일명 ‘제4회’라며, “내 주여! 당신은 우리 형제인 술에게서, 이 막걸리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내 주 천주여! 당신은 특별히 우리의 모주꾼 형제에게서 가장 큰 찬미를 받으소서” 하고 술을 마시던 야인 김익진. 구상은 벗들과 어울려 당시 피난 문화인들이 드나들던 대구 향교 건너편의 ‘말대가리집’과 영남일보 앞 골목 안의 ‘감나무집’ 등 대구의 술집들을 밤낮없이 떠돌아다니며 말술을 푸고 온갖 기행을 연출하였다.

 

1951년 펴낸 시집 「구상」에 이어 1956년에 낸 두 번째 시집 「초토의 시」에서 구상은, 훗날 자전 연작시에서도 다룬 한국전쟁의 비극을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인간애 가득한 열여섯 편의 연작시로 증언하고 있다. 

 

자정이 넘은 밤차에서 칭얼대는 검둥이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낙을 보며, 이 땅의 어느 산비탈에서 숨졌을지도 모를 아이의 아버지와 살아남은 흑백의 모자를 안쓰러워하다가, 아이를 받아 안고 어르며 흑백의 부자상을 연출한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53년 휴전 직후 친구가 지휘하는 어느 포병부대를 찾아갔다가 목격한 사실의 감동을 시화한 제11편 ‘적군(북한 공산군)묘지 앞에서’는, 한 핏줄인 무고한 생명의 희생 앞에 선 시인의 절절한 비애가 느껴진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 어제까지 너의 목숨을 겨눠 /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 가로막히고 / 무주공산의 적막만이 /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 미움으로 맺혔건만 /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 북으로 흘러가고 /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 목놓아 버린다.”

 

대구에서 승리일보의 피란 보따리를 폈던 곳이 영남일보사였다. 구상은 한 가족처럼 지내던 영남일보 사원들의 요청으로 1953년부터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어 1957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이승만 정부가 그 독재성을 노골화하던 때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영남일보는, 1952년 봄, 부산 제1차 정치파동으로 계엄령이 펴 있는 피란 수도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압수를 당하고 수난을 겪었다. 

 

당시 ‘민주고발’이란 사회비평을 연재하여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구상은, 대구 달성공원 판자촌 아래 사창가에 피신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실연을 했군요? 부인이 도망을 갔나 봐? 그것도 별루 안 좋아하면서, 벌써 열이틀짼데!” 하는 창녀의 물음에 대답도 못 하고 멀거니 누워 “‘자유 조국’이 환상이라면 전쟁은 무엇을 위하여 치렀단 말인가? 고향은 무엇 때문에 버렸단 말인가?” 하고 자문하며 지냈다. 거리에는 땃벌떼와 백골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이 날뛰고, 구상의 피란 집에는 기관원이란 자가 권총을 쏘며 난입하곤 했다.

 

1953년 구상은 사회비평집 「민주고발」을 출간하며 이렇게 밝혔다. “나는 기자로서 행세한다. 때로 신문기자를 직분으로 하여 온 연유도 있지만 나는 최상급의 기자란 시인일 줄 믿는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구제원리에 회의가 없는 나를 고민시키는 것은 생활양식의 문제다. 즉 역사적 양심을 어찌 충족시켜 가느냐 하는 것이 나뿐이 아니라 현대 지성의 과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혁정감(現實革正感)에 나의 눈은 항시 충혈하여 있다.”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령이 내린 「민주고발」에는 기자 시인 구상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따뜻한 시선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다. 평소 술을 즐겼던 구상은 ‘판문점 협상에 보내는 시인의 취담 기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유의 꼽추’란 글에서 취중 진담을 쏟아낸다. 

 

죽든 말든 꼽추 등만 펴 주면 그만 아니냐며 떡메로 내려치려 한 봉이 김선달처럼, 한국이야 두 동강 나든 말든 전쟁만 끝내면 된다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향해, “그런 수작 누구에게 배우셨소? 우리 봉이 김선달에게 배우셨소? 대답 좀 해 보이소! 트루먼 선달님! 한잔 들고 우리 어디 사나이 대 사나이로 통정하며 이 한밤을 기분 좋게 놀아봅시다고녀” 하고 거침없이 필봉을 휘두르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19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5) “관수세심”(觀水洗心)

 

 

- 왜관에서 살던 시절 낙동강변에서.

 

 

구상은 1942~1945년 「북선 매일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1948~1950년 「연합신문」 문화부장, 1950~1953년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 1953~1957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1961~1965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겸 동경지국장으로 재직한 것까지 해서 근 20년을 시인으로서 언론계에 머물렀다.

 

구상은 언론인으로서 “붓에 순사(殉死)할 수 있는 한국의 언론인만이 대한족의 정기와 공론을 수호해 가는 것”이라며, 이 땅의 언론인들에게 직필을 생명으로 삼으라고 일갈한다. 구상은 신문사 자체가 적극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꺼릴 때에는 ‘고현잡화’(考現雜話)라는 개인의 서명 칼럼란을 설치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곤 하였다. 이런 구상을 보고 해공 신익희 선생 등 재야 세력에서 정계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거절한다.   

 

1954년에 쓴 ‘나의 반생기’란 글에서 구상은,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41년부터 승리일보 주간으로 종군한 1953년 8월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며, “오직 하나인 신부 형이 공산당에 납치되어 간 것과 홀어머니의 생사불명이 나의 용력을 유지시켰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군대 생활을 털어 버린다는 것은 정신적인 허기와 피로로부터 벗어나고 기진맥진해진 자기를 구출키 위함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고는 “이제 나는 이 칠죄(七罪)의 연못 속에서 죽지를 상하고 있다. 고향도 갈 길도 하나같이 안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운명도 보이지 않는 손에 매달려 있음을 믿고 또 의탁하고 있다”고 가톨릭 신자답게 주님의 섭리를 고백하며 자작시 ‘나그네’의 한 구절을 덧붙인다. “뜻한 곳 저절로 이를 양이면 / 그제사 숨 한 번 크게 쉬고 끝없는 쉼의 그늘로 들라.”

 

1953년, 대구의 영남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폐결핵이 재발하여 건강상으로 도시 생활이 적합하지 않았던 구상은, 대구와 인접한 칠곡군 왜관읍 낙동강변에 삶 터를 마련하게 된다. 북한에서 남하한 월남민으로서 그의 본적지가 된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8번지이다. 

 

왜관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함경도 원산 교외 덕원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한국전쟁 중에 감금되어 있다가 국제적십자사의 노력으로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중 몇몇이 한국으로 와서 대구교구 소속지인 왜관에다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구상과 그의 아내는 친정 같은 수도원 이웃에다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초가 한 채가 있는 500평의 땅을 샀다. 그리고 수도원 건축 책임자인 명용인 수사의 지휘 감독으로 아내가 일할 ‘순심의원’을 짓고 사랑채를 지었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이 사랑채에, 선배인 설창수 시인이 ‘관수재’(觀水齋)라는 당호를 지어 주고, 은초 정명수 서예가가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는다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이란 제의를 써 보내 주었다. 구상은 이곳에 정착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며 시를 썼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된 효성여자대학교에서 문리과 대학 부교수로 강의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다들 서울로 올라가던 1955년에, 구상도 서울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실종된 형인 구대준 신부의 친구 임화길 신부가 「대구매일신문」 사장을 맡으면서 부탁을 해왔다. 당시 대구매일은 교회가 이승만과 반목 상태에 있었고 재정난과 인사 분규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교회의 위촉을 받은 구상은 기자가 아닌 상임 고문으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는데, 주필인 최석채씨가 쓴, 장관 지방 순시에 과도한 환영 비판 사설이 문제가 되어 한국 신문사에 남을 대구매일 대낮 피습 사건을 겪게 된다. 구상은 이 사건을 겪고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민주 사회의 본령인 여론 정치의 확립이 얼마나 창망한가를 깨달았다.

 

구상은 한국에서 연작시를 의도적으로 시도한 효시의 사람일 것이라고 스스로 평한다. 구상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2003년 늦가을, 연작시전집의 출간 ‘자서’에서, “시인으로서 존재의 무한한 다면성이나 복합성을 조명해 내려고, 한 제재를 가지고 응시를 거듭함으로써 실재에 도달하려 하였다”고 의도적으로 연작시를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구상이 1967년에 「주간한국」에 연재한 ‘밭 일기’ 100편과 1970년대에 시작한 ‘그리스도 폴의 강’ 60여 편은 어릴 적 함경도 시골에서 산 체험도 있지만, 왜관의 수도원 농장들과 당시 집 앞에 하포라고 부르던 나루터가 있던 낙동강에서의 삶이 시의 소재나 제재가 되었다.

 

“아침 강에 / 안개가 / 자욱 끼어 있다. // 피안을 저어가듯 / 태백의 허공 속을 / 나룻배가 간다. // 기슭, 백양목 가지에 / 까치가 한 마리 / 요란을 떨며 날아다닌다. // 물밑의 모래가 / 여인네의 속살처럼 / 맑아온다. // 잔 고기떼들이 / 생래의 즐거움으로 / 노닌다. //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 나도 이 속에선 /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이 시기 구상과 이중섭의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구상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나 인연을 맺었고 1946년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시집 「응향」의 표지화를 그린 화가 이중섭과 만나 1954년부터 1년 반을 함께 지낸다.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과 떨어져 부산에서 외로이 지내던 이중섭을 대구로 데려와 대구역 앞 경복여관에 머물게 하며 관수재가 있는 왜관 살림집에서도 함께 지낸다. 

 

이중섭은 비운의 천재 화가라 불리듯이, 1955년 8월에 서울로 올라가 화가로 사는 게 부끄럽다며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며 정신과 증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난다. 병상에 있던 구상에게 천도복숭아를 그려 우정을 표시하기도 하고, ‘시인 구상의 가족’을 그려 선물하기도 한 대향 이중섭, 구상은 그의 유골이 든 상자를 이듬해 ‘펜 클럽’ 동경 대회에 갈 때 고이 안고 가서 일본인 부인에게 전한다. 

 

그러나 왜관에서 구상의 삶이 목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구상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봄, 마침내 옥고를 치르게 된다.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문화부장을 맡아 염상섭 등과 정치 집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던 구상은, 남대문시장에서 미제 진공관을 사서 일본을 통해 북한에 보내려 했다는 ‘이적 병기 북괴 밀송’이란 조작된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레이더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파리 가톨릭 대학원에 가려고 여권 수속까지 끝냈던 구상은, 재판에서 15년을 구형받았다. 조국을 모반한 치욕을 쓰고 단 하루라도 목숨을 구차히 이어가느니보다 죽음이 차라리 편안하다며 사형을 선고하라고 최후 진술을 했다. 같은 해 11월 구상은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옥중 생활 속에서 구상은 주로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비롯한 전후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나 문예사상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의식적으로 읽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수치’라는 명제였다. 

 

면회를 왔던 승려 시인 고은에게 보낸 글에서도, “예서 지내온 삶을 돌이켜 보면 천지분간도 못 했다는 게 실토일까. 용케도 넘겨온 고비, 고비, 새삼 아슬한 생각도 들고 수치로 붉어도 지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수치심이야말로 인간 최초의 것이요, 본연의 것이요, 인간 구제의 가능성이요, 모든 규범의 시원”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출옥하여 빨치산 여자 대원 이야기를 소재로 희곡 ‘수치’를 완성한다. 

 

옥고를 치르면서 구상은 독방에서 면벽 좌선 하듯 하며, 한 지성인이 양심과 양식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살아오기엔 얼마나 불필요한 곡경이 많았던가를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현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오직 문학만을 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26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6)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어머니로부터 길러진 것”

 

 

- 구상은 가족이 월남하면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이 있는 곳에 정착했다. 사진은 왜관과 맞닿아 있는 낙동강의 거룻배에 앉은 구상.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어머니로부터 길러진 것 같다”고 말한 대로 구상은 글과 붓이 능했던 어머니를 통해 일찍부터 고시조와 조선의 평민소설, 중국소설 등을 접했다. 글짓기를 잘해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애독하던 「가톨릭소년」에 ‘아침’이란 동요가 실리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학우구락부」라는 잡지에 ‘하루살이’라는 시가 실려 학우들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 담임선생이나 동급생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하면서, 구상은 자기 생각이나 느낌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그 감동에는 독자적 진실이 따로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까지 키우게 된다.

 

1960년, 구상은 ‘에토스적 시와 삶’이란 글에서, “어려서부터 너무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때문인지 문학은 항시 부차적인 것이요, 제일의적인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1982년에 쓴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라는 글에서는, “사물에 대한 자기 진실에의 욕구”가 시를 쓰는 이유라고 하였다. 

 

“내가 즐겨 써 온 주제와 제재들을 개괄하면 자연에 대한 서정이나 서경보다 인간이나 현실에 대한 실존이나 실재의 추구와 그 감개 같은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 나의 시는 자연히 그 존재론적 인식 때문에 관념적인 동시에 또 한편 그 강렬한 역사 의식으로 말미암아 현실 비평적이기도 합니다.” 

 

구상은 숙명처럼 시를 쓰는 각오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나의 존재론적 의식이 어떤 신앙적 도그마에 빠지거나 또는 나의 역사 의식이 어떤 현실적 당위성에 영합과 추종을 일삼지는 않았고 최소한 그런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 왔음만은 확연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물에 빠진 자에게는 그가 헤엄을 잘 치든 못 치든 문제가 아니라 어찌해서라도 헤어서 살아나가야 하는 저 꼴, 저 느낌으로 시를 쓰고 있고 또 저 각오라는 것을 덧붙여 둡니다.”

 

병으로 도시 생활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구상이 월남하여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왜관에 본적지를 둔 또 다른 이유는, 북에 있던 가족이 내려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구상은 이곳에서 잃어버린 고향,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아내와 함께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우면서 글을 쓰고 대학에 강의하러 서울을 오가며 20년을 살았다. 

 

해당화가 붉게 피고 고운 모래가 10여 리나 깔린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던 원산을 잊지 못한 구상은,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나라 본향(本鄕)에 비하고 있다. “우리 본향 실존의 마을엔/ 솔숲! 내 실향, 원산 송도원과 같은/ 솔숲을 두어야만 쓰느니/ 그리고 가끔 차일과 같은/ 서늘한 그늘 아래 쉬어야만 하느니.” 

 

하나뿐인 형 구대준 신부가 공산당에 의해 평양교도소에 수감된 뒤, 어느 독신녀의 집에 의탁해 있다가 1950년인가 돌아가셨다는 풍문을 듣고 산소에 무덤이나 지었는지 헤아릴 길 없어 가슴에 한이 되어 명절마다 떠오르는 어머니. 대구 근교를 오갈 때 쓴 듯한 시 ‘고모역’에서 구상은, 이북에 남아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가 “이제는 아내보다 별로 안 늙으신/ 그제 그 모습으로/ 38선을 넘던 그 날 바래주시듯/ 행길까지 나오셔서 기다리신다”며, 원산 시절 통학하던 자신을 기다리던 부모를 그리고 있다. 

 

조지훈이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고 묘사한 대로, 왜관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이다. 다부동 전투에서 피아 2만7500여 명의 군인들이 전사해 산과 강을 피로 물들였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근처에 한티마을이라고 부르는 천주교 교우촌이 있어 박해 때 순교자들의 피가 흐른 곳이기도 하다.

 

구상은 어린 시절 원산의 추억과 왜관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1967년 1월에서 4월 말까지 「주간한국」에 연작시 ‘밭 일기’ 100편을 연재한다. 그리고 회심하여 사람들을 등에 업어 건네주며 그리스도를 기다린 깡패 출신의 성인 그리스도 폴처럼 강에서 불멸의 시를 바라다가, 1970년대에는 드디어 강을 소재로 한 연작시를 내놓는다.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 육신의 허물을 벗어 / 흙 한 줌으로 남겨 놓고 / 사자들이 여기 흐른다. //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 갈원과 오열을 안으로 안고 / 흐른다. //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 지금 내 옆에 앉아 /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막내 애의 /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 놈의 /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 / 또다시 내가 찬미만의 모습으로 / 앉아 있겠지.”

 

왜관은 구상이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과 역사와 문학을 이야기한 제2의 고향, 시심의 고향이자 시의 수련장이였다. 칠곡군에서는 1953년부터 1973년까지 구상이 살았던 살림집을 사들여 헐어내고, 그 자리에 구상문학관을 지어 2002년 가을에 문을 열었다. 

 

문학관 서가에는 “현세적 성취의 부실보다는 영혼의 창고가 텅 비어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겨울처럼 닥쳐올 내세가 두렵고 당황스럽다”던 구상 시인이 기증한 2만 7000여 권의 장서로 가득하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구상은 개관식은 물론 한 번도 문학관에 가보지 못하고, 그가 취기만 있으면 불러서 지정곡처럼 되었다던 동요 가사처럼, 2004년 봄 하늘나라로 떠났다. “가랑잎 떼굴떼굴 어디로 굴러가오. 발가벗은 이 몸이 춥고 추워서 따뜻한 아궁 속을 찾아갑니다.”

 

- 왜관의 구상 살림집(위)과 칠곡군이 이를 사들여 2002년 문을 연 구상문학관(아래).

 

 

1960~1961년 구상은 서강대학교 문리과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1960년 봄이었다.

 

“어디를 혼자 가요?”

 

새끼줄을 쳐 놓은 입구에 젊은이 하나가 험상스런 인상을 쓰면서 가로막는다.

 

“투표하러!”

 

“삼인조를 짜 가지고 오시오!”

 

“나는 혼자 할라요!”

 

“이 양반이? 혼자는 안 된다니까! 저기 조장님하고 상의하시오!” 

 

라고 가리키는 사람의 팔에는 ‘자유당’이라는 완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무소속이라서….”

 

“여러 말 말고 가서 조를 짜 가지고 오시오!”

 

마구 떼미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나오면서 비분의 울음이 아니라 실성한 사람처럼 홍소를 터트렸다.

 

이날 밤, 마산에서 4·19의 첫 횃불이 올랐다.

 

구상의 자전 시편 100편 가운데 51편의 전문이다. 소리가 없어도 해마다 4월이면 들리는 4·19 혁명의 함성, “그 함성이 / 늙어서 귀가 먹은 폭군의 / 고막을 뚫어 / 10년 전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구상은 이승만 독재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희생된 마산의 젊은이들을 위한 진혼가를 당시 「새벽」지에 발표한다.

 

“손에 잡힐 듯한 봄 하늘에 /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말고 /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 광풍이 휘몰아치는 쑥대밭 위에 / 가슴마다 일렁이는 역정의 파도 / 형제들이 틔워놓은 외가닥길에 / 오늘도 자유의 상렬(喪列)이 꼬리를 물었소. //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 운명보다 짙은 그 소망마저 버리고 / 어서 영원한 안식의 나래를 펴오.” [평화신문, 2016년 7월 3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7)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1960년 4·19 혁명 직후 정국이 요동쳤다. “내가 꿈꾸던 새 삶의 공화국은 / 공중의 풍선처럼 자취 없이 꺼지고 / 내가 현장 속에서 목도한 것은 새 송장에 몰려든 갈가마귀 떼들의 / 우짖음과 그 소란이었다”고 구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책상 앞에 앉아 붓을 잡았지만 / 동면 속에서 갓 나온 개구리처럼 / 향방을 몰라 심장만 불룩였다.”

 

1950년대 해공 신익희 선생이 구상에게 민국당 선전부장으로 일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민주당의 장면<평화신문 1333호 2015년 9월 27일자~1342호 12월 6일자 연재> 총리였다. 구상은 경북 칠곡군의 민의원 후보 공천을 거절하고 강원도로 피신해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숨어 지냈다. 다시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하자 이를 피하려고, 당시 승려였다가 후에 환속한 일초 스님 고은과 작반해서 제주도로 간다.

 

왜관 수도원 출판사의 위촉으로 「예수의 생애」 번역 원고의 윤필 수정을 맡아 하던 때였다. 제주도로 간 구상이 “일과로 삼은 것은 2000년 전 이스라엘 속의 ‘나자렛  예수’의 추적으로, 태중에서부터 하느님을 섬겨온 그에게서 비로소 시공의 제약 속에 있던 한 인간을 발견해 갔다.” 그러면서도 술을 즐겼던 구상은 고은과 함께 저녁이면 비바리 술집을 드나들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유배객 같은 수심에 젖기도  했다.

 

1949년 육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시절 구상은 정보국장이던 이용문 장군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나 의기투합해 자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서울로 향하는 “귀로, 대구서 만난 장군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박정희는 구상이 피정의 여운으로 화제를 쇄락(灑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어 연발하며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라는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한 구절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북새판이었다. 1960년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에 친아우 같았던 삼십 대 초반의 조각가 차근호가 음독자살하고, 1952년 신문사로 찾아와 구상의 시를 활활 외던,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친했던 포병 대령 이기련이 행려 사망자 묘지에서 거적에 싸인 시체로 발견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승만 독재 시절 그와 감옥 생활을 함께한 아나키스트 우한룡의 죽음도 이어졌다.

 

구상은 불안도, 권태도, 구토도, 소외도 아닌, 온몸에 옴이 오른 것 같은 정신의 미칠 듯한 가려움을 느꼈다. “나는 이 소양증을 / 잠시라도 잊으려고 / 음란에 빠져들었다. // 범접하고 난 후의 그 허망감! / 바로 그것만이 약이었다”. 구상은 1961년 “5·16의 아침을 어느 무희 집에서 맞았다 / 그녀는 아침 화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 선생님 신상에 행여나 해가 없을까요?’ / 하고 연거푸 물었다.”

 

구상이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와 마주 앉은 것은 5월 19일 저녁, 지금 칼(KAL) 빌딩이 서 있는 자리에 있던 국제호텔에서였다. 마당에는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있었다. 서로 잠자코 술잔만 비우다가 마침내 박정희가 말을 꺼냈고 구상이 답을 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양식당의 매너도 모르는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구상은 남은 생애 시에 몰두해 살 것을 다짐하고 연작시 ‘밭 일기’ 100편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체험을 시에 담되 현실적 정치적 역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의 차원,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려 했다”고 평가한 성찬경 시인의 말대로 구상은 문학과 인간, 시와 삶이 하나로 융합된 시를 쓴다.

 

구상은 1962년 봄, 궁리 끝에 당시 가톨릭에서 경영하던 ‘경향신문’의 동경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나 1965년까지 일한다. 대수술을 감행하지 않고는 치유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고질병 폐결핵을 치료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구상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았던 박정희와 작별하며 나눈 대화를 구상은 자전시에다 이렇게 남겼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일본으로 간 구상은 동경의 한 서점가에서 “현대 최고의 철학자”란 표제에 끌려서 사 든 책을 밤새워 읽으며 가톨릭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과 만난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역사에 대한 거듭된 절망으로 허무의 수렁에 빠져 있던 구상에게 “삶의 새로운 긍정의 문을 열어 주었으며, 인간은 홀로서이지만 또한 더불어서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겸손에 이어져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또한 내세를 오늘로부터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구상 스스로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은혜의 책”이었다.

 

1963년 6월 3일, 구상이 “현대 한국이 낳은 기인이요, 대덕이요, 동방의 현자”라 일컬었던 공초 오상순 시인의 장례식이 문단장으로 거행되었다. 구상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인 공초는 “자유가 나를 구속했었다”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공초의 임종에 맞춘 듯 일시적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구상은 공초의 성대한 범시민장에  참여하고 돌아간다. 

 

“5·16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평소 자신과 친분이 돈독하고 천주교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시인 구상을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토록 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1962년 당시 성우산업 대표 이준구씨가 경찰국장 출신 인척인 홍병희씨를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하게 됐고, 이 과정에 이준구씨는 천주교 재단이사회로부터 손에 넣은 ‘백지 위임장을 편법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2016년 올 1월 구상의 딸 자명씨가, “또 다른 천주교 인물 양한모씨<평화신문 1346호 2016년 1월 1일자~1355호 3월 13일자 연재>를 통해 경향신문 인수를 시도한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자금력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구상 시인을 통해 하려 했던 사실이 왠지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며 경향신문에 쓴 5·16 직후의 비화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구상이 자전시에서 그 전말을 생략한다고 말한 대로, 자신이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영혼에 치명상을 입고 사제들과 교회에 실망한 구상은 “죄인들로 이어 내려온 교회가 / 붕괴되지 않고 그 신성성을 유지하는 것은 /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 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계실 거예요?”라는 박정희의 말에 구상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내 대라는 성경 말씀으로 답한다.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에도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움이지요!” 하고 만다. 이 일로 박정희는 구상을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라고 구상은 밝히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10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8) "나의 사색의 실마리와 끝이란 언제나 신의 문제다"

 

 

- 구상은 걸레 스님 중광 등 시대의 아옷사이더 기인들과 친분이 깊었다. 사진 왼쪽부터 중광,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김종규, 구상, 혜련 스님.

 

 

“자명이 보라. 마침내 명 6일, 제1차 수술을 한다.”

 

고질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구상은 1966년 초 친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교외 결핵 요양소가 14개나 있는 기요세의 오리모토 병원에서 7월 6일 등을 가르고 갈비뼈를 잘라 폐를 꺼내는 수술을 받고, 3주 만에 다시 갈비뼈를 자르는 2차 수술을 받았다. 

 

1967년 가을에 귀국하기까지 구상은 온 가족에 대한 총체 대명사인 “자명이 보라”라고 막내딸을 부르는 편지로 병상의 소식을 전하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다. 2차 수술을 하루 앞두고 보낸 편지에서도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자명아, 성아, 홍아, 온 집안 식구들 이름을 죽음에서 깨어난 듯 하나씩 불러본다. 이 글을 누워서 그리듯 한다마는 침대에 맨 끈을 붙들고 일어나 앉기도 한다.” 

 

“구상이란 그 사람, 세상에 소문난 불온한 주의자인데 어쩌려고 그러니?” 하는 친한 친구의 충고에도 구상과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에게는 일어로 쓴 편지를 동봉한다. 

 

“홍아에게는 질책의 글발을 보냈소. 그러나 애들이란 일찍 철드는 것도 있고 늦둥이도 있으니 그렇듯 너무 상심 마오. 우리는 실상 현재도 그 애들로 하여금 근심이 떠나지 않지만, 한편 무한한 위로와 기쁨을 맛보고도 있으니 말이오. 성급한 실망을 말고 인내로써 보살피며 그들의 숙성을 기다립시다.” 

 

아들을 질책하면서도 자명은 “고명딸이요 막내니 그 특권(?)을 누리도록 둬두라. 현대 여성은 좀 기승한 면도 있어야 하니 저의 성질을 되도록 살려 주라. 이것은 결코 내가 딸만을 편들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으니 요샛말로 ‘딸바보’라고 해야 할까. 

 

“너희들의 편지는 둘 다 잘 썼고 재미있는데 ‘으’와 ‘어’의 구별이 잘 안 되는구나. 너희도 경상도내기라 그런 사투리 발음을 쓰는 모양인데 이것은 고쳐야 한다”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아버지다운 ‘깨알같이’ 자상한 지적도 있다.

 

구상은 한양공대에 입학한 아들 홍이 아르바이트를 의논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공부는 기초가 부실해서는 결국 전문 지식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니 처음부터 착실히 해라” 하고 당부하면서, “나도 사실 일본 학창 시절 중 1년은 도쿄만 부두에서 석탄 푸는 노동을 한 적이 있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내가 생활이라는 것을 소중히 아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능력과 시간이 남으면 자립 자존의 힘을 기르기 위해 일을 해보라고 답한다.

 

- 아내가 운영하는 왜관 순심의원에서 아내와 막내 자명과 함께한 구상.

 

 

“나의 사색의 실마리와 끝이란 언제나 신의 문제다”라고 고백한 구상은 병상에서도 독서와 사색을 멈추지 않았다. “가톨릭적인 속박이 없이 한번 존재와 당위의 모든 문제를 자유와 양심으로 회의하고 스스로의 해답을 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기회에 나의 신앙이나 사상의 철저한 재검토를 해볼 참이고, 또 앞으로는 막연한 신앙에 의지하거나 체면(?)에 구애되어 그럭저럭 교우로 행세하는 것은 안 해야겠다”며 1966년 연말 편지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나의 폐활량은 1600으로 내려가 있다. 이제 차차 회복되어 한 2000대가 되어도 대학 강좌를 맡는다든지 신문사엘 다닌다든지 하는 일은 다 한 것 같다. 이제는 그야말로 시인밖에 될 게 없이 되었구나. 사람은 모든 가능성이 떨어져 나가면 한 가지 가능성에 쏠리게 되는 것이니, 어쩌면 다행한 일이다만 한편 허전한 것도 숨기지 못할 사실이다. 이제 이렇듯 문학은 내 삶의 유일의 목적과 수단이 되고 말았다.” 

 

건강을 해칠까 우려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앞으로 모든 가능성 속에서 단절되어 여생을 사색과 공부와 창작에 집중하여 어쩌면 내가 세상에 나온 보람을 찾게 될 것이다. 또 이것이 곧 영옥, 당신께 대한 보응이기도 하리다”라고 밝히고는, “시인이란 허명에 해당하는 작업을 해놓겠다는 자각과 책임으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러고는 수술 때만 빼고는 매일 아침 회생의 기쁨을 안고 밭에 나가 치성을 드리듯 하며 연작시인 ‘밭 일기’ 100편의 초고를 끝낸다. 

 

요양 동안 “생뚱같이 들릴지 모르나 영화 시나리오 공부를 한번 해볼까 한다”며, “시나리오는 아직 개척의 여지도 있고 앞으로 텔레비전도 전망이 있다고 보여지고, 또 영상은 현대시에서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훈련이 있으니 좀 공부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뒤늦게 ‘영감 학생’이 된다. 걷잡지 못할 고독이 밀어닥칠 때도 있었고 장학회 경영자인 교포 재벌을 비판했다가 장학금이 끊겨 고생도 했지만, 동급생 젊은이들과 어울려 맹렬히 공부하여 기어이 시나리오 공부도 마친다.

 

1965년 12월에 폐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을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 결의하였다는 보도를 들은 구상은 “사실 가톨릭이 남의 신앙을 인정하고 안 하고가 우스운 얘기인데, 이 속의 우리의 유일 종교로서의 전통과 중압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로마의 양심과 양식이 장하다”라며 기뻐한다. 그러고는 “나 역시 나의 신앙에 대해서 태중으로부터 얽매였던 관념과 타성으로서의 교우를 탈피하고 재출발하여야겠다. 여기엔 나의 확고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며 현실적인 이불리나 어떤 종류의 정신적 박해도 감수해야 되리라고 여긴다. 그리고 정직한 사상인이 되고 성실한 자유인이 되련다”라고 고백한다.

 

“타종교(특히 불교)와의 화해는 이미 나에겐 생활 속에 이루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 대로 구상은, 환속한 일초 고은 시인을 비롯해 여러 승려와 교분을 나누고 있었으니, 그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 로마보다도(?) 선달(先達)이라 하겠다.” 

 

조계종 종정이던 효봉 스님이 입적하고 가톨릭의 수녀들이 스님들 틈에 끼여 연도를 바쳤다는 소식에 “이제사 열었구나, 유무상통의 문을! / 오직 하나인 진리를, 사람들이여 / 가르지 말라 / 나는 진공 묘유의 이 소식 앞에 / 기뻐서, 너무나 기뻐서 흐느꼈다”며 구상은 감읍했다. 

 

1967년 새해, 구상은 일본의 한 성당에 가서 그리스도 폴의 메달을 사다 목에 걸고 그를 일생의 수호성인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요샛말로 깡패의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만년을 어느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는 것을 일과로 삼았는데, 마침내 그의 염원이던 예수를 만났다던 분이다. 강을 수덕장으로 삼고 남을 업는 것을 수덕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퍽이나 동양적인 면모가 엿보인다”며, 수도원에 가서 이 성인에 관한 자세한 전기를 구해 보내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한다. 그러면서 이 기회에 자신의 인간관을 자녀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다며 구상은 덧붙인다. 

 

“지난번 엄마 편지에 나의 건강의 파탄이 마치 내 주위에 있던 격렬한 인간들 때문이었다고 지적된 것은 일면적인 진실이 없지는 않으나, 공초 선생, 이중섭, 포대령, 차근호 등 그들은 나에게 예술과 인간의 스승이요, 벗이었다. 그들은 과연 각박한 현실 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으리만큼 강렬한 개성과 천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다. 나는 재분도 저들과는 비할 바 못 되고 내면적 자기 정직이나 성실에 저들을 뒤따를 바 없으나, 일종의 신앙처럼 저들의 위대함을 일반보다는 깊이 알고 또 맛보고 있었다.”

 

구상의 둘째 아들 성이 폐결핵을 앓을 때 작품 전시회를 열어 입원비를 마련해 준 걸레스님 중광 등 시대의 아웃사이더 기인들과 친분이 깊었던 구상은, 그들이 죽고 나자 “심심하지. 이 사회에는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어. 이 기인 일사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청량감을 주곤 했지. 이들이 나서서 다니곤 해야 살수차가 서는데”라고 아쉬워했다,

 

“14 IL GUIGUK.” 

 

손글씨로 편지 쓰는 일도 사라져 가고, 전보도 사라진 시대라 그런지, 편지는 물론 1967년 11월 10일 도쿄에서 보낸 “14일 귀국”한다는 짧은 영자 국제 전보조차 정겹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17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9)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구상은 1970년 봄학기부터 1973년 여름학기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어과 조교수로 초빙돼 한국전승문화를 강의했다. 사진은 하와이 체류 시절 공원에서 비둘기와 노니는 구상.

 

 

자유월남 정부군에게 전세가 유리하고 파월국군이 승승장구하던 때인 1967년 11월 문인들과 베트남을 시찰하고 돌아온 구상은, 6·25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과 현장을 누빈 기자이자 시인으로서, 무엇보다 신앙인으로서 시대와 인간을 꿰뚫어보며 다시 묻는다. 

 

“나는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 / 메시지 한 장을 풀려고 / 무진 애를 쓰다 돌아왔다 / 그것은 인류와 세계를 향한 강렬한 암시 같기도 하였다 /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 오직 느낀 것이 있다면 / 나란 인간이 / 아니 인류가 / 아직도 깜깜하다는 것뿐이다 / 백지 위에 / 선혈로 그려진 / 의문부 / ‘?’ / 그게 무엇이겠느냐?” 

 

박정희를 ‘박 첨지’라 부를 정도로 인간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먼발치에 있던 구상은, 그가 찌든 가난과 역사의 멍에를 벗고 5000만 겨레가 서로 눈물로 반길 미래를 열어 주기를 기원하며 다시 조국을 떠난다. 구상은 1970년 봄학기부터 1973년 여름학기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어과 조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전승문화 강의를 한다. 고명딸 자명을 이 학교로 불러 유학 생활도 시킨다. 1982년 1월부터 1983년 1월까지는 이 대학교 부교수로, 1985~1986년에는 이 대학교 부설 동서문화연구소 예우작가로 인연을 이어간다. 

 

1985년 펴낸 「딸 자명에게 보낸 글발」이란 서간집은 ‘일본 오리모토 병원 병상에서’에 이어 ‘미국 하와이대학교 강단에서’ 지낸 이 시기를 보여준다. “아이들까지 함께 보는 편지라 나의 어두운 생각이나 흩어진 감정들은 모쪼록 피했지만, 비교적 모든 사물이나 사상이나 사리에 대한 나의 상념이나 심정을 정직하게 토로하였다”고 한 대로 이 서간집은 시에 버금가는 감동을 주지만 시인은 시로 갈무리한다. 

 

“와이키키 바다야! / 너는 어쩌면 이 시간에 / 숨결마저 고우냐?”고 탄복한 대로 구상은, “선머슴의 크레용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 대낮에 꿈꾸는 짐승”처럼 노래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그 버짐 먹은 산 / 여윈 시내 / 뒤틀린 소나무 / 우릿간 같은 집과 / 우중충한 얼굴들이 / 어이 이처럼 애절하다지?” 하고 조국을 그리워한다. 그러고는 이제야 매연 없는 정염의 회상을 하게 된다면서 “농익은 수밀도의 가슴 / … 양팔을 포승으로 조이는 / 나부(裸婦)”처럼 아름다운 이국의 자연을 노래하며, “그 시간과 공간은 / 영원으로 이어졌다”고 이때를 회상한다.

 

- 구상 시인.

 

 

구상이 1973년 8월 3년 반에 걸친 미국 생활을 끝마치고 돌아와 맞이한 고국의 상황은 우울했다. 친구 박정희, “그는 샤먼이 되어 있었다/ 그 장하던 의기가 돈키호테의 광기로 변하고/ 그 질박하던 성정이/ 방자로 바뀌어 있었다”며 “권좌의 역기능으로 굳어진/ 그 친구를 바라보며” 구상은 가슴 아파했다. 구상은 1973~1975년에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대학원 강사로, 1976~1998년까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및 대학원 대우교수로 강단에 선다. 전임교수가 되지 않는 것은 2차에 걸친 폐수술로 정규 강의를 못하고 1주에 4시간만 강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1974년 1월 7일 소설가 이호철 등 문인들이 개헌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하자,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고 문인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은 일본의 문학 행사에 참가하여 「한양」 잡지 발행인인 재일동포와 식사를 하며 정부 전복을 위한 공작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간첩으로 몰린다. 2월 25일 발표한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다. 이때 법정에 증인으로 구상이 나타나 이들의 무죄를 증언하여 10월 31일 문인들이 풀려난다. 박정희의 친구인데 감히 나타나겠냐고 생각하던 문인들의 경탄과 존경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구상은 1976년 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일보에 ‘밭 일기’ 100편을 연재하고, 자전 연작시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를 현대시학에 연재한다. 시 ‘까마귀’ 연작으로 요한 세례자처럼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197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경고한다. 그러고는 「구상문학선」(1975년), 「영원 속의 오늘」(1976년), 「우주인과 하모니카」(1977년)와, 장충동 베네딕토 수도원 골방을 얻어 집필에 몰두하여 완성한 신앙 묵상집 「그리스도 폴의 강」(1978년)과 「나자렛 예수」(1979년)를 잇달아 펴낸다. 

 

유신정권 막바지인 1977년, 구상은 미국 뉴저지 시튼홀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는다. 고국을 떠날까 말까 망설이던 구상은, 이 세상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라는 생각으로 이를 사절하고, ‘죽음의 섬’을 탈출하는 빠삐용을 돕고 자신은 그대로 남은 도형수 쟝의 심경으로 고백한다.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빠삐용! 그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왜관에서부터 줄곧 바라보던 강을 본격적인 회심의 일터로 삼은 것도 이 무렵이다.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고커녕 / 숫제 두렵다”고 고백한 구상은 강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등에 업어 건네주며 예수를 기다리던 그리스도 폴, “오직 그의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을 흉내라도 내면 / 내 시도 어느 날 구원의 빛을 / 보리라는 심산이었다.” 그러고는 “두이레 강아지만큼 / 신령에 눈뜬다.” “이제는 신비의 샘인 / 목숨의 시간들을 헛된 욕망으로 흐리고 더럽혀서 / 연탄빛 폐수로 흘려보내진 않으련다”라고 노래한다.

 

구상은 “홀로서 가야만 한다 /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 그분이 홀로서 가듯 /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의 세례명인 요한 세례자처럼 “스스로 다짐한 종신고행의 수도복장”을 한 검은 옷차림의 “한 마리 까마귀가 되어 / 눈 뒤집힌 거리 한복판에 나앉아 / 우짖어 댔다.” “너희들은 나만 보면 침부터 뱉지 말고 / 스스로의 삶에 눈을 돌리도록 하라.”

 

1979년 초 천식의 발작으로 숨이 차 죽음에 임한 구상은 “‘아버지 저의 영혼을 /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시늉만 했지 옳게 섬기지는 못한 / 그분의 최후 말씀을 부지중 외우면서” 시의 제목처럼 ‘임종예습’을 한다. 그러고는 박정희를 찾아가 “임자,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친구로서 마지막 충언을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한 달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에 총에 세상을 떠난다. 구상은 이날 친구를 위해 진혼축을 쓰고 그를 위해 5년 동안 위령미사를 봉헌한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쿠데타를 감행하고, 1980년대 이후 잇따른 정치적·사회적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본 구상은 강단을 지키며, “그렇다! / 세상은 어느 시대건 /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라며 국민과 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형태의 시를 쓴다. “넘치는 자신과 폭발하는 에너지를 / 그대들이 이룩해야 할 유토피아를 위해 / 오늘은 묵묵히 슬기를 닦아야 한다 / 오늘은 묵묵히 솜씨를 갈아야 한다.” 민정당 창당 10인발기위원회 참여를 강권하는 이들에게는 무성해진 수염을 내보이며, “나는 폐인이요, 수염 기르는 야인”이라며 끝끝내 거절한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24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한 구도 시인 구상 요한 세례자(1919-2004)

 

(10 · 끝)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 8~9세 무렵의 어린 구상.

 

 

칠순의 나이를 살며 구상은, “모과나무가 모과나무가 된 / 까닭을 모르듯이 / 나는 왜 시인이 되었는지를 / 스스로도 모른다”며, 이제까지의 생애를 돌아보니 모과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고 “예서 앞길이 보이지 않기론 / 지나온 길이나 매양이지만 /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 나는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노년은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라고 노래하며, “죽음을 넘어 피안에다 피울 /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구상은 장성한 둘째 아들 성(1952~1987)을 폐결핵으로, 큰아들 홍(1948~1997)을 폐렴으로 차례로 앞세우고 가슴에 묻는다. 교도소 수감자 대상 문학 종교 강사로 나서기도 했던 구상은,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수로 감형된 40대 수인과 부자의 연을 맺고는, “그 애에게서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과 그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깨우치고 있다”며 의(義)아들의 옥중편지를 읽고 되 읽었다. 나란히 선 아름다운 은행나무, 해묵은 된장 맛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살아온 아내도 1993년 구상보다 10여 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힐끗 영정을 쳐다보니 / 한복도 양장도 아닌 진료의 차림이라 / ‘평생 옷 한 벌 해줘 본 적이 없구나’ / 하는 생각이 들어” 며느리에게 최상품 수의로 하라고 역정난 사람처럼 내뱉는다. 학교 강의가 비는 날 조교한테 “나, 데이트 좀 하고 올게” 하고는 꽃을 사 들고 안성 천주교 묘지에 있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떳떳한 지아비로 살다가 머지않아 반갑게 만나 함께 영생할 것을 다짐하며 아내의 천상복락을 기원한다. 학교로 돌아와 데이트 어땠냐는 조교의 물음에 “좀 씁쓸했어!” 하고는 말문을 닫고 만다.

 

구상은 미국에 살던 딸의 집을 방문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다 실족하여 뒹굴어진 데다가 차에까지 스쳐 병원 신세를 지고, 휠체어에 실려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구상은 병상에서 잿빛 하늘을 내다보며, “내가 그렇듯 그리고 보고지고 하던 / 어머니, 아버지, 형, 먼저 간 두 아들과 아내 / 또한 다정했던 벗과 이웃들을 만나서 / 반기고 기쁨을 나눌 것을 떠올리니 / 이승을 하직한다는 게 / 그닥 섭섭하지만은 않구나” 하며,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 오늘서부터 내세를 / 아니 영원을 /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노래한다.

 

- 칠순의 나이를 살며 구상은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며, 구상은 시를 쓸 때 비단같이 번드레하나 진실이 수반되지 않는 말,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시와 삶이 등가량(等價量)으로 일치했던 시인 구상의 이런 직언 같은 시들은 생전에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에서 세계 200대 문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구상이 1979년 4월 7일 성찬경, 박희진 시인과 더불어 시작한 공간시낭독회는 지난 2013년 11월 7일 400회 기념 행사를 하며 세계 최장수 시낭송회 기록을 경신했다.

 

그런데 구상은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 속이며 살아왔다 / (…) /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 기어(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 하느님, 맙소사” 하고 ‘임종고백’을 한다. 

 

형님 신부가 그리워서였을까? 1970년대 말 구상은 이중섭의 ‘K씨네 가족’ 그림을 삼성 호암재단에 넘기고 그림값 1억 원을 바로 왜관 수도원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1990년 장애인문인협회 창립 때부터 장애인 봉사단체 ‘한벗회’ 후원자였던 구상은, 검소하게 살며 모은 돈 2억 원을 2003년 10월 생애 마지막 가을의 병석에서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후원했다.

 

한가위 명절이면 “저는 아침에 연미사만을 드리곤 /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 어머니 / 어머니” 하고 눈물짓던 시인, 아편쟁이로 런던 빈민굴을 헤매다 죽은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를 애송하며, “주님! 제 영혼은 이 밤도 / 마치 달을 쳐다보고 / 짖어대는 강아지처럼 / 대답도 없는 당신을 향해 / 컹컹대고 끙끙댑니다” 하고 머리 숙여 기도하던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하늘로 떠났다. 장례 미사는 수많은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13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1960년대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한 소신학교 동창들과 만난 자리에서, 신앙인이고 신념을 가지고 사니 좋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지랄 같은 소리 마라. 내가 신앙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는데!” 하며 파안대소했다는 선생은, 주교단의 기관지인「경향잡지」 2003년 1월호에다 이런 구술을 한 적이 있다.

 

“불교나 도교 등에서는 해탈과 도통을 요구하는데, 나자렛 예수께서는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만 합니다. 기독교는 자력본원이 아니라 타력본원입니다. 자기의 십자가(인간고)를 지고 자기의 길을 가라고만 하셨죠. 그리스도교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인간적인 종교예요. 이것이 내가 아직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속은 심신이 다 망가졌지만 겉모습만 멀쩡한 ‘외면보살’이라며 선생은 산소호흡기를 목에 걸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술을 끝낸 뒤, 자전시집과 신앙시집에다 떨리는 손으로 지인들이 ‘수전체(手顫)’라 부르던 떨리는 글씨로 ‘구상’이라는 이름 두 자를 힘들게 써서 건네주었다.

 

구상 사후 1주기에 발행한 추모문집에서 정양모 신부는, “가톨릭적이라서 조화와 평정을 누리기보다 남달리 모순과 갈등을 겪은 나머지 ‘지랄 같다.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 회의하였다는 시인. 끝끝내 영원자와 나자렛 예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흠숭지례를 드린 노시인.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무한성을 찾아 나선 도인 같은 초월 시인”이라며 선생을 추모했다. 

 

선생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조광호 신부는, “신부가 된 지 불과 1년 대구에서 문인들과 만난 뒤 만취하여 어느 호텔에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투숙한 일이 있었다. 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그대로 쓰러져 잠을 청했는데 선생님은 기도서를 꺼내 놓고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하고 일화를 소개하며, “조 신부, 나는 기도하지 않으면 잠이 안 와. 그래서 기도한 거야” 하며 웃던 선생을 그리워한다. 

 

이해인 수녀는 “수녀, 잘 있나?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작가 노릇보다 수녀 노릇 잘하라는 그 말 말이다” 하면서 나타날 듯한 선생의 어진 모습을 그리워하며, “인간관계에서의 나의 방식은 말이야. 장점보다는 단점부터 먼저 트고 사는 거야” 하고 나직이 고백하며 껄껄 웃던 선생을 추모한다. 그러고는 “우리의 문학사에서 깊이와 넓이로 강이 되고, 보물을 캐어내도 다시 나오는 소중한 생명의 밭이 된” 선생을 닮아 이제서부터 영원을 살자고 다짐한다.

 

평형과 조화, 고요히 ‘홀로’ 앉아 시를 쓰고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기를 좋아했던 선생은, 기관지절개로 병상에서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간병인이 마지막으로 지금 가장 하시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선생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펜은 하나 젓가락은 두 개’, 먹고살기 바쁘다지만 이제 펜을 놓고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술 한 잔 올려야겠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1일,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집부 전 경향잡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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