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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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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01 ㅣ No.45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1) 남조선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다



반딧불이 한 마리가 있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어느 밤, 반딧불이는 여느 때처럼 나들이를 서둘렀다. 주위에선 다들 말리고 나섰다. 이렇게 궂은 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 반딧불이는 결연했다. 이런 날일수록, 달도 별도 없어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일수록, 더욱더 자기는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힘이 약하고, 또 내가 낼 수 있는 빛이 비록 작고 흐리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그런 빛 하나가 이런 밤에는 더욱 필요할지도 몰라. 사방이 온통 깜깜한 데다 날씨마저 험하다지만, 그런 와중에도 혹시 길을 가야만 하는 나그네가 있을지 모르잖아. 아니면 그저 외롭거나 상심해서 길을 나섰다가 밤길을 헤매는 사람도 있을 거야. 만약 오늘 같은 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니 우리 같은 반딧불이가 반가운 표지가 될 수 있을 거야. 세상이 어두울수록 내 작은 빛 하나가 더욱 밝게 보일 테니까.”

시작이고 마침이신 하느님께서 그 처음과 끝을 잇는 날줄을 걸어 놓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원경륜의 날줄에다 나름의 씨줄을 먹이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곱고 화려하게,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게 저마다의 삶이라는 무늬를 새겨 넣는다. 그 과정이 순탄할 수도 있고 험난할 수도 있다. 쉽고 편안해 보이는 길도 있고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길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길이다 싶으면, 폭풍우 거센 밤에 용감하게 길을 나선 반딧불이처럼 양심과 소신에 따라 험난한 길을 마다치 않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갈래의 길을 마련해 놓으시고 최선의 것을 섭리하신다.

 


토막 이야기 하나. 한 아이의 탄생

조선이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1919년 3월 벽두에 전국에 걸쳐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그때까지 강압적인 군국주의적 통치 관행으로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다가 기미독립운동, 곧 3·1 운동을 겪은 뒤로 통치 정책을 바꿨다. 일방적인 무단통치 방식을 버리고 외형상으로나마 문화통치를 내세운 것이다. 조직적으로나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유화정책이었다.

이는 우리의 민족운동에도 방향 전환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무력 앞에서 본래 뜻한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감정이나 무력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과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무력항쟁을 앞세운 독립운동도 필요하지만, 문화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방법을 통해 실제로 힘을 배양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일본의 교묘한 유화정책이 우리에게는 문화운동으로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함양하며 실력을 배양한다는 새로운 활력과 돌파구가 된 셈이다.

이렇듯 세상 형편과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져 가던 무렵에 황해도 봉산군의 어느 시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소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일본인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어린 나이에도 식민지 나라의 아이로서 지배자 나라의 아이들에게서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토막 이야기 둘. 고뇌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이 아이는 이러한 정서와 기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고뇌는 더욱 심화해 갔다. 그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되는 이론 또는 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된 지식들을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고, 그는 그것들을 그 나름의 독서를 통해 습득했다. 철학과 사상 서적들을 섭렵해 나가던 그는 어느덧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더욱 깊은 성취를 갈구하던 그는 숨어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을 만났고, 그 자신 또한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을 실행한다는 차원에서 그들의 활동에 동조했다. 일제 말기에 결국 체포되어 옥살이했고, 감옥에서 풀려나서도 감시받는 생활을 했다. 그가 8.15 해방을 맞은 것은 공산당 활동과 관련해서 참고인 조사를 받던 사무실에서였다.


토막 이야기 셋.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의 전향, 그리고 가톨릭 귀의

일제 패망 후 혼란스런 와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한편으로 공산당 활동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게 된 그는 1949년 남조선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서울시당 위원장이 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서울시당 간부들과 함께 집단으로 마르크스주의 활동을 포기하고 전향했다. 이론으로 알던 마르크스주의와 실제 공산당의 실상 사이의 괴리를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향한 그의 꿈은 이후 그를 경찰에 몸담아 남조선노동당 인사들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나서게 했다. 짧은 경찰 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장면 박사의 비서를 했다. 그러나 지난날 마르크스주의 활동을 한 때문이었는지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이 두 번째 옥살이를 전후해서 그는 경제계와 언론계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다시금 장면 박사의 막후 비서로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68년 고뇌 끝에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아우구스티노로 새롭게 태어났다.


토막 이야기 넷. 시대의 표징,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당시까지만 해도 교회는 더러는 세상 위에 군림하며, 또 대개는 세상과 굳게 단절한 채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교회가 문을 열고 세상을 한껏 끌어안았다. 요한 23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개혁의 물결은 한국 교회에도 크고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변화 중 하나가 사제들을 양성하는 신학대학에 평신도가, 그것도 여성도 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71년,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가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대신학교 과정에서 처음 공부한 평신도로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꼽아야 하겠지만, 성인은 사제로 서품될 것을 전제로 신학을 공부한 것이었기에 사정이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부터 인간 중심, 인간 본위의 세상을 꿈꾸며 철학을 탐구하던 양한모는 본격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면서 그 과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크리스찬 사상연구소를 세워 운영했고, ‘신도 신학’ 연구에 매진했다.

굴곡지고 다소 유별난 삶을 살다가 끝내 그리스도 안에서 고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한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 간추려진다. 이 삶의 주인인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그는 전향 후 한동안 정계와 경제계에서 내밀어 오던 적지 않은 손길들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세례를 받은 뒤로는 오로지 가톨릭 안에서 살았다. 다분히 곱지만은 않은 여러 시선을 그리스도인다운 겸손으로 극복했다. 그러면서 연구생활에 몰두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몇 차례 있었던 교회의 큰 행사들에 작지 않은 힘을 보탰다. 그는 평생 알기 위해 노력했고, 알게 된 만큼 실천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당신은 굳이 '평신도'라는 용어에서 '평'자를 빼고 '신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도 신학'을 펼쳐 나가셨습니다. 당신과 감히 말을 섞게 된 40년 전부터 그런 소신과 주장을 존중하고 경의해 왔습니다. 조금은 유별나다 할 당신의 생애에서 굽은 길도 곧게 가시는 우리 님의 안배를 읽어 내는 것은 깊이 감사드릴 일입니다. 문득 특유의 미소와 파이프 담뱃대로 피워 올리시던 연기가 그립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2) 19살에 독방에 갇혀 조국 독립을 그리다


 

경성제2고보 3학년 시절 양한모. 앞줄 왼쪽 두번 째.


어린 소년의 조숙한 민족의식

1921년 7월 9일,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혼인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어 많은 이들을 가슴 졸이게 만들던 아기였다. 정성을 다해 삼신할미에게 치성을 드린 끝에 결혼 10년 만에 아들을 얻은 것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봉산군에서 중류 이상의 가세를 유지하던 집안의 장손인 양한모는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이 아이는 나이가 차서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에 있는 심상소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에게는 학교생활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심상소학교란 것이 당시 조선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기에 조선인 재학생이라곤 양한모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그는 일본인 교사들이나 학생들에게서 필요 이상의 관심과 친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싫었다.

일본인들 사이에 있는 동안에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런 감정에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일단 교문을 벗어나면 다정한 이웃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장난치며 홀가분해졌다. 어느새 그의 어린 마음 안에 일본과 일본인을 향한 알지 못할 증오와 반항심이 싹터 있었다.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양한모는 경성제2고보(오늘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1935년).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시골에서 학교만 벗어나면 마음껏 자유를 누리던 그로서는 엄한 규율과 복종을 강요하는 공동생활이 만만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저 힘세고 활기찬 개구쟁이 학생이던 그가 차츰 기숙사의 규율과 복종 규정을 곧잘 위반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갔다. 일본인 교사들에게 지적당해 교무실로, 사감실로, 교장실로 소환되는 일이 거듭되었고, 그러면서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반발심이 생겼다. 어릴 적에 일본인 아이들과 교사들에게서 느꼈던 치욕과 분노의 발로였다. 나아가, 한 걸음 더 진전한 민족적 반항 의식의 표출이었다.

어렵사리 그는 ‘두고 보자’ 하는 앙심을 ‘무슨 길이 없을까?’ 하는 촉구와 모색으로 바꿨다. 첫 방법으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에게 독서는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대항할 논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었다. 막연하던 민족주의적 증오감과 반항 의식이 차츰 사상적으로 정리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한 사색이 깊어졌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읽던 데서 철학 서적을 탐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 문제를 따져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아는 데에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성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한때 당시 유행하던 신칸트 철학이며 일본 니시다 철학과 같은 사조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식민지 학생은 그것들에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또래 학생들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독서와 사색으로 인간이란 무엇이고 우리 민족은 왜 이래야 하는가를 놓고 치열하게 괴로워했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양한모와 부모, 동생들(1931년).


공산주의에 투신하다

하루는 평소에 자주 찾던 서점에서 엥겔스가 쓴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 입문서였다. 공상이 아니라 과학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그때까지 모색해 오던 물음의 답을, 진리에 이르는 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석연치 않던 인간에 대한 물음이, 식민지 약소민족으로서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성을 찾고자 하던 노력이 마르크스주의로 명쾌하게 해결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공산주의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규정한 레닌의 주장에 비추어 일본을 보게 되었다. 이제 약소민족의 나아갈 길은 민족 해방과 독립에 있고, 민족 해방과 독립은 인간 해방과 인간성 재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 소외는 필연적으로 민족 소외를 가져오며, 따라서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만이 민족 해방이며 인간 해방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된 조국을 위해 공산주의에 투신할 결의를 다진 그는 경성제2고보 2학년이던 1936년 여름에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잡혀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재유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다시 체포될 때까지 5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중국음식점이나 서점 등에서 만나 개인적으로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이제 일본의 착취로부터 조국을 해방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그의 사명감은 더욱 투철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일본에 대한 분노와 혈기를 억누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결국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기숙사 방에서 폭음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교내에서 악질적인 불량학생이라는 낙인을 받았다.

1938년 4월 그는 기숙사를 나와 하숙집에서 생활했는데, 그의 행동과 사색은 이제 훨씬 자유로워졌다. 이때는 그가 이미 공산당에 가입한 뒤였다. 감시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는 공산당 조직과 연결되기 위해 애썼다. 당시 공산당은 개별적으로 지하에서 동아리 활동이나 전개하는 선에서 유지되는 정도였는데, 그는 단독으로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 정면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 반대! 조선 독립 만세!’라는 골자의 벽보를 써서 붙였다(1939년).

서울 독립문. 양한모는 단독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의 벽보를 이곳에 붙였다.


19살에 시작한 옥살이

1940년 3월, 그는 경성제2고보에서 개칭한 경복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암담한 조국의 앞날을 슬퍼하며 중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광활한 중국에서 새롭게 활동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1941년 1월 10일, 마지막으로 제출한 서류가 이튿날이면 통과될 것이고, 그러면 그 다음 날에는 조선을 떠날 수 있으려니 염두에 둔 날이었다. 그 한 달 전쯤에 일본에서 공부하던 민족주의자 친구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해에 도쿄에서 독서 클럽 활동을 하던 조선인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그 여파로 그 친구 또한 학업을 중단하고 도피해야만 하는 궁지에 몰린 터였다. 그런 친구가 귀국을 통보하고 한 달이 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자 체포되었음을 직감했다. 불안했지만 이틀 뒤면 조선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외출했던 양한모는 귀가하다가 잠복 중인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그 길로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그날 밤에 부산으로 끌려갔다.

귀국길에 부산에서 체포된 친구의 진술로 양한모를 비롯한 서울의 친구들이 체포, 압송되었다. 양한모는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경찰이 원하는 답변을 진술하지 않고 버티다가 2년형을 언도받았다. 부산 형무소의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단독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할 일이라곤 등을 잔뜩 웅크린 채로 무릎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거나 제한된 독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게 되어서야 최소한의 의료 조치를 받고, 작업장에도 나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43년에 출옥한 그는 서울 근교 수색에서 지냈다. 과수원을 경영하고 싶다던 아들의 소망을 흘려듣지 않은 부친이 수밀도 묘목을 심어 놓은 그곳에서 때가 오기까지 침묵하며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경찰은 끊임없이 그를 감시했다. 그러던 중 1945년 4월에 경복중학생 몇몇이 조직한 동아리 활동이 들통 나서 그의 동생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도 양한모는 어김없이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8월 15일에도 그는 고등계 형사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해방 소식을 들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3) 공산주의에 ‘물음표’를 던지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발표가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나오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 환호하는 시민들.


해방, 분단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정오, 양한모를 취조하던 일본인 형사가 느닷없이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돌아오더니, 밑도 끝도 없이 당장 나가라며 양한모의 등을 떠밀었다. 고등계 형사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느 방에선가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일왕의 침통한 음성이었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아파하며 일찌감치 조선 공산당에 가입하여 19살 나이에 옥살이까지 한 양한모에게 해방은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어금니로 지그시 깨물어 삼키면서 한달음에 종로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큰 길거리로 내달렸다. 거리는 어느새 해방의 기쁨을 한껏 안은 시민들로 그득했다. 누군가가 만세를 선창했고, 화답하는 만세 소리는 크게 터져 나와 퍼졌다가 이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인파는 인파를 불렀고 행렬은 행렬을 이었다. 그리고 만세 소리는 만세 소리를 낳았다. 그는 염천의 여름날이 더운 줄도, 긴 하루해가 지는 줄도 모르는 채로 사람들 속에 섞여 하염없이 걸었다. 밤늦게야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30리 길을 걸어서 수색의 집으로 돌아갔다. 걷다가도 느닷없이 땅을 박차고 펄쩍 뛰어오르곤 하면서, 그래도 발이 아픈 줄도 피곤한 줄도 모르는 채로 귀가해서는 깊은 잠에 빠졌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국 해방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이 아니었다. 해방된 땅에는 외국 군대가 들어왔다. 소련군이 먼저 들어왔고, 그 한 달쯤 뒤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을 둘로 나누어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오기로 미리 합의되어 있던 터였다. 그런데 두 나라의 군대는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킨 뒤에도 각각 점령 지역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조선은 본의 아니게 둘로 나뉘어 각기 단독 세력권이 되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해방은 그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이상의 별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실망과 경악 속에서 조선의 지배자가 단지 하나에서 둘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생각할수록 전정한 해방이나 독립과는 거리가 먼 분단이었다. 지리적으로 시작된 분단은 사회적 분단으로, 마침내 정치적 분단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일본이 물러가면 자유와 민주와 평등이 보장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유례없는 비극이었다.


감격의 도가니, 혼란스러운 정세

일본이 패망하자 전국의 형무소와 경찰서에 갇혀 있던 이른바 정치사상범들이 석방되었다.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그들은 서울로 모여들었고, 앞장서서 종로 거리를 누비며 해방 만세,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진영 모두 저마다 세력을 모으고 확장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8월 15일에 벌써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민족의 총역량을 일원화하여 자주적으로 과도기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나 애초의 말과는 다르게 좌익진보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에 반발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이내 탈퇴를 선언했다.

다른 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8월 16일에 재경혁명자대회를 열어 조선 공산당을 발족하기로 뜻을 모았다. 세칭 장안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 다음 날에는 전남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 숨어서 지내던 박헌영이 상경했다. 그는 세칭 재건파 또는 콤그룹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입을 모아 조선 공산당 재건을 외쳤으나 속으로는 주도권 장악을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고 암투를 벌였다. 양한모는 옛 동지인 재건파와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도 근원적으로 당의 재건 사업에 적극 참가할 것이냐는 점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웠다.

재건파는 장안파를 배제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조선 공산당을 주도적으로 발족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이 유일하게 ‘8월 테제’라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노선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박헌영의 8월 테제라는 것이 양한모가 보기에는 공산주의를 폭력 혁명으로 유도하기 위한 전술상의 목표와 실천 구상을 애매한 단어들로 얼버무려 국민 앞에 내놓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을 포함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 빈약함을 자각했다. 당 재건에 앞서 학습이 먼저 필요하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철학을 깊이 탐구해야겠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러한 소신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의 재건을 우선시하는 주변의 주장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 공산당은 기하급수로 확장되었다. 해방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미처 갈피를 잡지 못한 대중은 처음으로 출현한 정당인 조선 공산당에 깊은 생각 없이 가입했다. 이렇게 양산된 당원들을 질적으로 향상시켜서 공산주의 의식분자로 키우는 일이 중요해졌다. 또한 당세의 확장에 따라 부족해진 당 간부를 보전하고 양성하는 일이 더욱 시급해졌다.

이에 공산당 중앙 당부는 공산당의 기본 임무와 이론을 보급하고자 스탈린 전집과 레닌 전집 발간에 착수했다. 아울러 외곽 단체를 조직하는 데도 많은 힘을 쏟았다. 조선 공산당 청년동맹, 각종 산별 노조와 그 산하의 노동자 조직들을 결성하여 당의 세력 확충과 정책 실현을 위한 전위대로서 활동하게 했다. 또한, 조선 공산당의 강령을 모방한 남조선 청우당, 조선 인민당, 조선 대중당 등의 외곽 정당을 조직하여 앞잡이 노릇을 시켰다. 나아가 우익 정당들에 공산당원을 침투시켜 분열을 꾀하는 한편으로 공산당 정책을 선전했다.

경성사범학교에 편입학한 양한모는 독서와 사색에 전념할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가 깊어만 갔다.


고뇌 어린 결단,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공산당은 그렇게 하면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손쉽게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비하여 당 조직을 강화하고자 각 도에 조직 지도책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양한모는 전라남도 조직 지도책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양한모는 마르크스-레닌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기본인 유물론적 변증법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싶었다. 당은 한 마디로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양한모는 양한모대로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편입학하였다. 1945년 10월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당 위원장이던 김삼룡의 묵인 아래 당원의 기본 임무인 하부 조직원 생활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 공산주의 이론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학교에 적을 두기는 했지만, 강의를 듣거나 학생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오직 독서와 사색에 전념했다.

그는 철학적 입장에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사색을 했다. 그런데 사색이 깊어질수록 공산주의에 대해 의문이 더욱더 생겨났다. 물질세계가 일차적이냐 아니면 의식과 정신세계가 일차적이냐? 인간은 세계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묻는 과정인데, 이러한 물음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물질만으로 가능하거나 또는 물질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7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4) 무장 투쟁 앞두고 체포, 민족 위한 새로운 길을 택하다


 

미소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시민과(오른쪽) 반대하는 시민들의 의견 충돌로 진통을 겪었다. 결국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리는 순서를 밟게 됐다.


갈팡질팡 바뀌는 당의 노선

해방 후 연합국은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1945년 1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모여서 한국이 자립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미국과 소련이 신탁 통치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모스크바 삼상회의). 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의 대표자 회의기구인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조선 공산당도 처음에는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이내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소련 공산당의 강력한 지시를 받고 나서였다.

공산주의 이론 연구에 몰두해 온 양한모로서는 당의 노선이 제3자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것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자신은 당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노선 변경에 대한 해설을 하면서도, 그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제 조선 공산당은 소련의 지령에 호응하면서 당세를 확장하고, 나아가 공산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갔다. 1946년 2월에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29개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모아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는 첫 회의부터 결렬되었다. 그리고 미 군정 당국은 위조지폐사건 적발, 좌익계 신문들에 대한 정간 조치,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영장 발부 등으로 조선 공산당을 직접 타격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시위, 소동, 파업으로 맞섰다. 정세가 이렇듯 긴박하게 돌아가니, 양한모는 이론 연구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의 권유와 충고를 마다하고 학문의 길을 택했지만, 이제는 학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1946년 여름에 조선 공산당 서울시 용마구당으로 복귀했다.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개인 행동을 한 데 따른 문책을 곁들여서 당은 그에게 하급 당부의 선전부 일을 맡겼다. 그즈음 조선 공산당은 미 군정의 압박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투쟁으로 맞섰다. 미 군정 당국에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구실로 10월 총파업을 계획했다. 그리고 계획을 앞당겨 9월 24일에 총파업을 실행했다. 이 파업 투쟁은 10월 인민항쟁으로 확대되었고, 인민 항쟁은 남조선 노동당 결성으로 이어졌다. 인민 항쟁에 앞서 조선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을 결의한 데 따라 11월에 남조선 노동당이 태동한 것이다. 이후로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반대하는 학생 투쟁이며 몇 차례 파업이 이어졌다.

양한모는 이러한 투쟁들을 뒷받침하는 선전 활동을 맡아 진행했다. 어느 정도 투쟁에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당의 간부들과 당원들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당은 조직을 재정비했고, 양한모는 용마구당에서 분리된 서대문구당부의 선전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국제적으로는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을 봉쇄하는 새로운 정책(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에 제동을 걸었고(1947년 3월), 소련은 이를 자신의 팽창주의에 장애가 되는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런 가운데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다. 한국에 임시 정부를 세우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공동위원회는 각 정당과 단체의 명부와 대표자의 명단을 제출하게 했다. 명단을 제출하여 승인받은 대표들이 6월 중에 열릴 합동회의에서 임시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의견은 계속 엇갈렸고, 남조선 노동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정부 수립 촉진 서울시민대회’를 열어(7월 27일) 미국 측에 회의 결렬의 책임을 떠넘기고 회의를 방해한다며 우익을 공격했다.

제주 4ㆍ3 사건 관련 행불자 묘. 4ㆍ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제주 지부의 집회를 기점으로 1948년 2ㆍ7 구국 투쟁과 4ㆍ3 항쟁을 거쳐 1954년 9월까지 이어지면서 제주 도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거듭되는 체포와 구금, 그리고 높아지는 당내 위상

‘시민대회’ 후 대대적인 공산당원 체포령이 내려졌다. 양한모도 8월 초에 체포되어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0여 일 후 벌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11월 말에 다시 체포되었다. 80여 일을 구금되어 있으면서 재판을 받았다(1948년 2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석방되는 자리에서 다시 붙잡혀 20여 일 취조를 받고 3월 초에 재수감되었다. 이번에는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그런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한반도 문제는 UN으로 넘어갔고, UN은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1947년 11월). 이듬해 1월,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남북한 총선을 감시하기 위해 들어왔다. 남조선 노동당은 결국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상하고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또한, 소련은 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1948년 2월에 UN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단독 선거안을 가결시켰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가 명확해지자, 남조선 노동당은 이를 막기 위해 이른바 ‘2·7 구국 투쟁’을 벌였다. 당의 전술을 폭력 투쟁으로, 그것도 비합법적 유격 투쟁으로 전환한 남조선 노동당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거쳐 남한 전역에서 무장을 갖춘 장기 항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남조선 노동당은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선거장소를 파괴하고, 투표함을 불살랐다.

이 무렵에 양한모는 용산구당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1948년 3월). 그리고 4월 하순에 다시 체포되었다. 거듭된 수감생활로 쇠약해진 그는 5월 말에 풀려나오면서 당 활동을 쉬기로 마음먹었으나, 6월 초에는 서울시당 조직지도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동대문구당 노동부책을, 7월에는 동대문구당 조직부책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무력 봉기 실패, 그리고 집단 전향

결국,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남조선 노동당은 1949년 1월부터 인민해방 투쟁을 본격화했다. 중앙당부에는 군사위원회를, 서울시당부와 각 도당부에는 군사부를 설치하고, 서울시당이 시작하면 각 도당이 호응하여 남한 전 지역에서 폭동과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1949년 4월을 해방의 달로 정하고, 그 실행을 위해 수류탄 등의 무기 제조에도 착수했다. 양한모는 서울시당부의 제3 부책임자, 제2 부책임자로서 조직과 군사 지휘권을 위임받아 무장봉기 과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량 부족과 여건 미숙으로 4월 해방이 지지부진해졌다. 4월 해방은 5월로, 5월에서 6월로, 6월에서 다시 7월 해방으로 미뤄졌다. 중앙당부는 8월 20일에는 기필코 무장 봉기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양한모는 다시금 9월로 연기했다. 남조선 노동당에 혁명을 일으킬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마침 서울시당 위원장이 체포되었다. 당 지도부는 양한모를 서울시당 수습위원장에 임명하고, 9월 20일까지는 무장 폭동을 일으키라고 새롭게 지시했다. 이에 그는 죽음으로 당을 수호할 것과 전 조직을 도시 유격대로 편성하여 언제라도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결행을 며칠 앞둔 9월 16일에 양한모마저 체포되었다. 그는 평소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이론과 현실이 같지 않음에, 한국 공산주의자들과 당의 주체적 역량이 부족한 것에 자주 회의하고 고민해 왔다. 그리고 그 고뇌 끝에 이번 체포를 계기로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남조선 노동당 서울시당 상임위원 전원, 서울시 유격사령관과 함께 수류탄 6000여 개와 그 밖의 무기들을 가지고 감행한 집단 전향이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24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5) 인간 해방과 인간성 회복의 길을 찾아 헤매다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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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으로 혼란한 상황이 잇따를 때 양한모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부의 축적이 목적이 아니라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사진은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추모하는 거창추모공원의 조형물.


누구에게나 전향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그런데 일찍이 10대에 공산주의에 투신하여 남조선 노동당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던 사람이 전향을 선언했다. 그만큼 그는 많이 고민하고 회의했다. 당의 일을 수행하면서 당의 노선이 해방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때와는 영판 달라졌음을 느꼈다. 폭동 투쟁을 준비하고 당원들에게 수류탄을 만들라고 독려하면서 공산당이 인간의 해방과 인간성 회복에 유용한 조직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한모가 보기에, 공산당은 약소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다만 공산주의 이식과 확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저 ‘인간의 비인간화’(노예화, 물질화, 소모품화)를 지향할 뿐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갈망해 온 ‘비인간의 인간화’(인간 해방과 인간성 회복)의 길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었다. 조국과 동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던지겠다는 각오로 싸우던 그는 많은 동족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현실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폭동 혁명을 번번이 연기해야만 하는 실정인데, 북한으로 피신한 남조선 노동당 중앙지도부는 강행 지령만을 내리고 실패의 책임을 양한모에게 전가하려 했다. 참 인간성을 찾아 고뇌하며 실망한 그는 다시금 본래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임을 맡은 이상, 자신의 판단으로써 자기 개인은 희생을 당할망정 당원들이며 다른 사람들이 무모하게 살상되는 일은 벌이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미 경찰에 체포된 뒤였지만, 그는 경찰과 검찰의 간부들에게 전향을 통고했다. 그러고는 1949년 9월 20일 오후에 경찰에 체포되어 있던 남조선 노동당 서울시당 간부들을 불러 긴급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체포된 상태였지만 의사 결정의 자유는 보장받은 회의였다. 그는 모두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지 한 개인(공산당 또는 박헌영) 때문에 개죽음을 당하자고 투쟁하려던 것은 아니니 오도된 공산주의의 죽음의 광란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9월 폭동 혁명의 총책임자로서 그 계획의 잘못된 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의 죄악을 더는 용납하지 말자고 했다. 참석자들은 눈물과 환호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만장일치로 전향을 결의했다.

전향 직후, 그는 자신이 취할 태도와 수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엇보다도 남조선 노동당을 철저히 소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는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특별 경찰로 임용되어 남조선노동당 조직과 북조선 노동당 김일성이 남파한 별도 조직을 수사하고 소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사이에 6ㆍ25 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전황에 따라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정보 수집, 공산주의자 적발, 부역자 처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은 부조리하고 경제는 피폐하며, 그래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기에는 몹시 취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한 논리적 기초도 부실했다. 개인적으로는 전향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싶었으나 그럴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렇지만 진정 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는 고심 끝에 1951년 4월 경찰에 사표를 냈다. 그 후 국무총리이던 장면을 만나 국회와 정보 담당 비서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이내 비서직을 그만두었다.


무역회사를 세우다

한편, 전쟁의 와중에서도 한국의 정치 상황은 여전히 혼란하고 복잡했다. 권력에 눈이 먼 여야 정치인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당파 싸움에 몰두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들과 군 간부 중에는 부패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만연한 부패의 실상은 1951년에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600여 명이 공비와 내통했다 하여 집단학살을 당했고,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군사훈련을 받던 17~40세 사이의 장정 1천 수백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거창 주민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공비로 말미암아 무고하게 학살당했고,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고위 관계자들의 예산 횡령과 양식 착복 때문에 애꿎게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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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판문점에서 봉헌된 통일 기원 미사에 참가한 양한모.


이런저런 사정으로 민심을 돌아서자, 임기 만료를 앞둔 대통령(이승만)은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셈법을 펼쳐 보였다. 야당의 국회 의석이 많아지자 간접선거 대신 직접선거를 치르기로 했고, 야당 세력을 축소하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신당 창당을 유도한 것이다.

이즈음 양한모는 지인의 제의를 받아 무역회사를 차렸다(1951년).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국민이 먹고 입어야 할 생활필수품조차도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그는 쌀 등을 수입하고 생선을 수출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설탕의 원료인 당밀을 수입했는데, 이것이 많은 이익을 안겨 주었다. 그의 회사는 부산에서도 굴지의 무역회사로 성장했다.


신당 창당에 참여하다

하지만 기업을 통한 부의 축적이 양한모가 뜻한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경찰을 그만둔 뒤 세 가지 인생 목표를 세웠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경제 활동으로 인간에 봉사하는 것, 신문사를 세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시키는 것, 반공 이론을 체계화하고 자신의 전향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이 목표들을 실천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문사를 인수해 언론 활동에 종사하고, 반공이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먼저 한 신문사를 인수했다(1951년). 1949년에 창간되고 나중에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이름이 ‘한국일보’로 바뀐 ‘태양신문’이었다. 그러나 반공이론연구소를 설립하려던 계획은 뜻밖의 일로 해서 틀어지고 말았다.

하루는 그가 잘 알고 지내던 이영근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혁신 정당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마침 신당 창당 운동이 일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당시의 정치로는 아무것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양한모로서는 관심을 보일 만한 제안이었다. 그는 재정과 홍보 부문을 맡아서 창당 기금을 보태는 한편으로 ‘태양신문’, ‘부산일보’, ‘국제신보’ 등에 정치 평론을 써서 신당 창당의 필요성이며 신당의 이념과 성격을 홍보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는 도리어 역풍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거의 모든 언론기관이 그를 공산주의 세력이라며 집중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당의 이름도 채 짓기 전에 그는 국군 특무대에 체포되었다(1951년 12월 15일). 영문도 모르는 채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한 그는 법정에서 사실을 밝힐 요량으로 간첩 행위에 가담했다는 날조된 조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각 신문이 ‘경이적 간첩 사건’이라 보도한 이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군사재판에서 민간재판으로 넘어갔고, 그는 투옥된 지 10개월 만인 1952년 9월에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특무대가 대공 투쟁의 상징으로 알려진 오제도 검사까지 잡아들이려 한 것만 보더라도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옥중에서 지내는 동안 다시금 사색하고 판단할 기회를 얻었다. 중상과 사실 날조로 인간을 매장하고 희생시키는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는 휴머니즘을 내세우며 인간성을 찾는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며 좌절했다. 그리고 이 좌절감을 딛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31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6) 시궁창 같은 정치판에 민주주의 꽃피길 기다렸지만…


 

- 1958년 평화신문사 시절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기념 촬영.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양한모.


언론 활동과 경제 활동 포기 그리고 재개

양한모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신문사는 그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무역 회사 운영 또한 신분상의 제약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여의치 않았다. 그의 돈이 혹시 공산당에서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있던 참이라 아예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언론사를 세울 궁리를 했다. 언론에 대한 개인적 신념 외에, 언론인이 되면 전향자로서 오해와 음모를 피하고 신분을 보장받는 데에 유리하리라는 점도 고려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1953년에 외국의 통신사(로이터)와 연계하여 국내외의 기사와 정보를 다루는 ‘세계통신사’를 세웠다. 그러나 이 통신사는 곧잘 이승만 정권과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궁창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로이터 통신 기자의 글을 타전하고는 곧바로 사직서를 썼다.

그 뒤 1958년에 ‘평화신문사’를 인수했다. 친여 성향이던 신문의 체질을 바꾸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문사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제호가 ‘대한신문’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양증권’을 인수하여 증권업에 새로 진출했다.


제2공화국 출범과 5ㆍ16군사쿠데타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은 떠난 민심을 거슬러 3ㆍ15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곳곳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이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궐기는 4ㆍ19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무렵 양한모는 자주 내왕하던 지인의 집에서 장면을 다시 만났다. 장면은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장면에게서 정치가로서 연륜과 풍모를 새롭게 느낀 그는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당시 민주당은 국민이 피의 대가로 쟁취한 정권을 물려받을 유력한 정당이었고, 장면은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서 비중이 막강했다. 양한모는 당적과 지위를 갖지 않은 채 막후에서 장면을 거의 날마다 만났고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자유당에 맞서 만나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 있었다. 각종 선거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대결했다. 의석수가 많아야 자기들이 염두에 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제2공화국 출범에서 가장 큰 쟁점은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무총리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출은 간접선거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양한모는 장면이 총리에 선출되게 하기 위해 구파와 중도파,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을 만나서 설득하거나 종용하며 많은 공을 들였다. 어렵사리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었고, 양한모는 장면이 거국 내각을 구성하는 일도 거들었다. 그러나 장면의 내각 구성안에 각 계파가 거세게 반발했다. 제2공화국은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4차례나 개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켜보던 양한모는 3차 개각 때부터는 아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일단의 군인들이 서울로 진입했다(1961년 5월 16일). 그리고 이내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군사 쿠데타였다. 대통령은 쿠데타를 사실상 인정했고, 국무총리는 피신했다. 장면 정권의 자금원이던 양한모 또한 일시 은신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중앙정보부장(김종필)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김종필은 경성사범학교에서 좌익 학생운동을 했던 터라 양한모도 아는 사람이었다. 불안하고 의아한 채로 찾아갔더니, 장면의 동창생을 간첩 혐의로 붙잡았는데 중앙정보부가 공산당 관련 수사 경험이 없다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양한모는 공정하고 완벽한 수사를 보장받기 위해 수사에 관여하지 말 것, 수사 결론에 이의를 달지 말 것, 박정희 의장에게 그대로 보고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수사해 보니, 간첩 혐의자는 간첩이 아니었고 장면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란 점 말고는 무관한 사이였다. 이로써 자칫하면 ‘북한-간첩-장면’이라는 엄청난 연결망이 그려질 수도 있는 사건은 공정하게 해결되었고, 중앙정보부는 이 결과를 인정했다. 수사가 끝난 뒤 양한모는 증권 사업은 해도 좋으나 정치는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해 겨울, 양한모의 증권회사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평판이 좋지 않아 양한모가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는데, 중요한 일이라며 만나자고 했다. 혁명 정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증권에 투자하려고 하니, 증권을 모르는 그들의 자금을 운용해서 이익을 남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크게 문제가 되거나 나쁠 것은 없겠다 싶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의 조직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꾸민 세칭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인 ‘증권파동’의 단초였다.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하수인을 통해 벌인 일이었다.

당시 양한모는 대한증권거래소 부회장이었고, 증권회사 중 세 번째 안에 드는 큰 회사의 사장이었다. 김종필의 부탁을 받은 하수인은 그래서 양한모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하수인은 양한모에게 거액을 맡겼고, 양한모는 그 돈으로 주식을 거래해서 수익을 남겨 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그런데 하수인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일부 증권회사들이 자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가가 폭락하고 많은 군소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입었다. 군정 당국도 도리 없이 하수인 일당을 구속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양한모와 중앙정보부의 관계는 내내 불편했다. 당시 그는 전자, 토건, 무역, 식품회사 등 5개 기업체를 운영했는데, 그가 민주당의 후원자인 것이 마뜩잖던 중앙정보부는 여러모로 그의 사업을 방해했다. 어쨌거나 양한모가 증권회사를 운영하면서 투자자에게 벌어준 돈은 공화당 창당 기금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 대가로 받은 수수료는 민주당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 간 셈이다.


전향의 철학적 근거 정립이 긴급한 과제

군정은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을 살리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4대 의혹 사건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멀어져 가는 민심에 초조해진 군부 세력은 군정 기간이 끝난 뒤 다시 집권하기 위해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일정 기간 금지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1962년 3월). 처음에 규제 대상이 된 정치인이 4000여 명에 달했고, 숱한 항의와 반발 끝에 이듬해 3월에 최종 확정된 인원은 268명이었다.

장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장면은 양한모에게 민주당 재건을 상의하고 부탁했다. 그는 장면의 요청에 따라 박순천 등의 인사와 힘을 모아 민주당을 재창당했다(1963년 7월). 그러나 정치 활동은 하지 않고 2년가량 재정 후원만 했다. 그러다가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그는 정치판을 떠났다(1965년).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치인들의 행태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정치보다 더 긴급한 과제가 있었다. 20대에 전향하면서 그는 전향의 철학적 근거를 정립하겠노라고 다짐한 바 있다. 그런데 40줄에 들어섰는데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의미를 규명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를 위해 조용히 사색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7) 오랜 방황 끝에 인간에 대한 답을 찾다!


 

김포공항에서 환하게 웃는 양한모(왼쪽에서 두번 째). 그 우측이 정의채 신부(현 몬시뇰)와 최창무 신부(현 대주교)다.


참 인간성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양한모는 중학 시절 이래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를 꿈꾸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떠한 존재인지를 따져서 알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거기에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성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이런 물음들의 답을 알아내는 일이 인생을 건 숙제였다. 이 숙제를 하기 위해 그는 이제껏 치열하게 노력해 왔지만, 아직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 들어서 그는 차츰 정치 활동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정치 활동보다 더 긴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건 숙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일찍이 좌익 활동에 투신했고, 한순간에 그 활동을 포기하고서 전향을 했다. 이때 전향에 대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겠노라고, 또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입장을 철학적으로 정립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과제였다. 또한, 인생 숙제의 연장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공산주의 비판과 철학 연구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웬만한 활동을 접고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업과 정치 활동을 펼치면서도 틈틈이 철학서들을 다시 읽고 사색해 오던 그는 본격적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와 사색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특히 휴머니즘을 체계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그가 지향해 온 삶, 곧 인간을 중심에 두고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며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삶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재검토하는 한편으로 실존주의 철학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당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쓴 책들을 탐독하면서, 그는 도리어 실존주의에 바탕을 두는 휴머니즘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실존주의란, 사물이나 사건에는 그 사물이나 사건을 규정하는 근본이 되는 보편적 성질 곧 본질의 측면과 실제로 존재하는 자체인 실존의 측면이 있는데, 두 측면 중 실존이 주체적 존재로서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이다. 그러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살아 있음을 자각하는 자의식을 강조한다. 그런데 양한모는 인간 존재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에서 이성과 감성 모두에 근거해서 관찰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근본 문제에 접근하는 철학적 관점이 실존주의의 관점과는 달랐다.

양한모는 인간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인간 존재의 본연의 모습은 곧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면모들이 논리적으로 규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인간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측면(이성)과 역사적인 측면(감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그가 이제껏 탐구해 온 인간성을 뜻하고, 이 인간성이 인간 존재의 기본이 된다. 그는 이성과 감성 두 측면을 두루 아우르는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자 한 것이다.

양한모는 실존주의, 특히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의 일부 견해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특히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을 신(하느님)과의 결합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완전하다.”는 마르셀의 말을 깊이 성찰했다.


새로운 결단, 가톨릭 귀의

5ㆍ16 이후 정치 활동을 규제당한 장면은 자택에서 짬짬이 신심 서적을 번역할 뿐 두문불출했다. 양한모는 그렇게 지내는 장면을 자주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장면이 양한모에게 넌지시, 그러나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 있었다. 가톨릭에 귀의하라는 권유였다.

“양 선생,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게 어떻겠소?”

“공산주의자였던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짤막한 대화는 늘 되풀이되었다. 양한모는 사상적으로 아직 무신론적 휴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톨릭 입교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짧지 않은 시일을 두고 권유를 거듭하던 장면은 끝내 양한모가 가톨릭에 입교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하루는 진지하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양한모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아도 좋으나, 자녀들이 세례받는 것만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한모는 심각하면서도 인자한 장면의 표정에 마음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그런 가운데 양한모의 큰딸이 장면의 추천을 받아서 가톨릭계 학교인 성심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세례를 받았다. 그 다음 날 양한모는 장면을 찾아가 큰딸이 세례를 받았노라고 알렸고, 장면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면서 이참에 양한모도 입교시키고 말겠다는 듯이 다시금 채근했다. 양한모와 같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 영국에도 있다면서 그의 입교 수기를 구해다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당시 양한모는 선뜻 가톨릭 입교를 결심하기가 어려운 처지였지만, 장면을 비롯하여 친근하게 몇몇 사제들을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은연중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그의 내면에 무엇인가가 차츰 스며들어 오는 것을 알게 모르게 느꼈다. 때마침, 1968년 봄에 제2공화국 정부에서 잠시 국방부 장관을 지낸 현석호가 양한모에게 정의채 신부(현 몬시뇰)를 소개했다. 현석호는 5ㆍ16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후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오던 중이었다.

양한모는 사상적으로 약간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물론과 무신론에 깊이 박혀 있는 채로 정의채 신부를 만났다. 정의채 신부는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양한모는 정 신부를 만나 마르크스주의며 실존주의, 휴머니즘이며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에 대해 두루 토론하고 나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스콜라 신학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교의(신앙 진리)를 면밀하게 해석하는,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신학 연구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양한모는 이내 가톨릭에서 새로운 휴머니즘 철학을 깨우쳤다. 나아가 참 인간성을 찾을 가능성도 발견했다. 정 신부를 세 번째로 만나던 날, 양한모는 다짜고짜 물었다.

“나도 영세할 수 있습니까?”

정 신부는 그 자리에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양한모는 가까이 있는 혜화동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세례를 받게 되었다. 대부인 현석호를 비롯하여 박순천 등 민주당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 줬다. 1968년 6월 3일이었다. 그동안 지극정성으로 그에게 가톨릭 귀의를 권유해 마지않던 장면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에서 하루가 모자라는 날이었다. 이로써 양한모는 남조선 노동당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때 쓰던 홍민표라는 가명 대신에 ‘아우구스티노’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했다. 참으로 오랜 역정을 거쳐 온 끝에, 마침내 인생을 건 철학적 모색의 과정에서 최후 정착처를 찾은 것이다.

이미 정치 활동을 멀리해 오던 그는 이때부터 그야말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증권회사를 비롯해서 무역회사, 식품회사, 토건회사 등을 경영했는데, 이 사업체들도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거나 아예 정리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21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8) “김수환 추기경과 공모하여 정부를 뒤엎으려는 것 아니냐”

 

 

신학교 첫 평신도 학생이 되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지 3년 되는 해인 1971년, 양한모는 신앙인으로서 의미 있는 일들 몇 가지를 새로 시작했다.

먼저, 가톨릭대학 신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성직을 지망하는 신학생 신분이 아니라 평신도 신분으로서 신학교에 청강생으로 등록했다. 쉰을 넘긴 나이에 시작한 신학 공부였지만, 1975년까지 만 5년에 걸쳐서 신학교의 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에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이 일반 신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기에, 평신도가 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양한모가 비록 청강생으로나마 신학교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신학교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1962년에 열려서 1965년에 폐막한 이 공의회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이, 그때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평신도의 신학교 수강 허용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신학교도 평신도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했고, 그 이듬해인 1972년부터는 평신도를 정규 학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남학생들뿐 아니라 여학생들도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출판사 부사장이 되고 월간 「창조」 창간하다

양한모는 또한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가톨릭출판사의 부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출판사 경영진으로서 그는 월간 잡지를 창간하는 데 주력했다. 이 출판사에서는 1933년부터 지식인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 「가톨릭 청년」을 발행해 왔다. 한편, 시중에는 일제 치하에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내용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으나 해방 이후 명맥만 간신히 유지되던 「창조(創造)」라는 잡지가 있었다.

그는 「가톨릭 청년」의 맥을 이어 나가면서 「창조」도 다시 살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출판사와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은 반신반의했으나, 그는 1년 안에 흑자를 내겠다고 장담했다. 이를 위해 「창조」의 성격을 전면 개조하기로 했다. 편집 체제를 고치고 편집 방향을 ‘일반 지식인 대중과의 개방적 소통’으로 잡았다. 기사는 가톨릭보다는 사회와 관련된 것들로 채우기로 했다. 지식인 교양지를 표방하겠노라는 그의 계획안에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고, 양한모는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구체적으로, 우수한 편집진을 확보하기 위해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구중서를 5개월에 걸친 교섭과 설득 끝에 주간으로 영입했다. 구중서는 기자진용 구성을 주간에게 일임할 것, 기자의 급여와 필자의 원고료를 일반 신문사나 잡지사 수준으로 보장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양한모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구중서는 「중앙일보」에서 기자 두 명을 데려왔다.

1971년 9월, 드디어 「창조」 창간호가 나왔다. 처음에는 3000부를 찍었으나,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는 8000부까지 인쇄했다. 이른바 손익 분기점이 7500부였으니, 「창조」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장담대로 흑자 운영이 가능해진 셈이다.

그런데 「창조」가 점차 지식인 대중의 주목을 받아 가던 무렵에 양한모는 갑자기 부사장직을 그만두었다. 「창조」는 당시 노골화해 가는 독재 정권을 신랄한 논조로 비판했고, 이 때문에 「창조」와 양한모는 정권과 기관으로부터 미움과 압력을 받았다. 거기에다 그와 사장 신부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사장과 부사장이라는 동료 또는 동업자 관계가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상하 관계에서 자신을 대하는 시각에 반발했고, 끝내 사직서를 제출했다.

1972년 3월, 출판사를 그만둔 얼마 뒤에 그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창조」 1972년 4월호에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비어’(蜚語)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1970년 5월에 「사상계」라는 잡지에 풍자시 ‘오적’을 발표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당국에 연행된 적이 있고, 당시 기소 중이던 김지하가 ‘비어’를 발표함으로써 권력층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창조」 4월호는 즉시 판매 금지 처분을 받고 압류 또는 압수되었으며, 관계자들은 검거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양한모는 「창조」를 만든 이유가 김수환 추기경과 공모하여 정부를 뒤엎으려는 것 아니냐며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억지에 온몸으로 버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민주 인사들과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김지하 말고도 사제가, 교계 신문사의 기자가, 가톨릭 학생회의 간부가 속속 연행되었다. 「창조」 편집 주간인 구중서도 사퇴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의원 사임했고, 사장 신부도 사임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창조」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5월호가 발간되자 시판 15일 만에 매진될 정도였다. 특히 일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당국의 계속되는 압력에 어쩌지 못하고 창간 15개월 만에 1972년 11월호를 마지막으로 휴간 형식을 빌려서 자진 폐간하고 말았다.

사상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양한모.


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를 설립하다

양한모는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에 맞설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을 늘 염려했다. 국가보안법과 공산주의를 무작정 반대하고 보는 메카시즘 논리 외에 달리 반공의 수단이 없었는데, 이는 도리어 진정한 반공산주의 이론이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라고 양한모는 통탄했다.

가톨릭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전래된 지 200년 가까이 되었어도 아직 토착화하지 못했고,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는 사상 전쟁의 선봉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 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로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논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김수환 추기경이 그를 불렀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북한 현실을 연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에게 책임지고 연구소를 세워 보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가톨릭출판사 부사장으로서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연구소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1971년 9월 서울 당산동에서 현석호, 유홍렬, 이숭녕, 문창준, 박갑성, 송찬규 등과 함께 ‘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 창립총회를 열었다. 명칭을 ‘가톨릭’이 아니라 ‘크리스찬’이라고 한 것은 개신교의 참여도 염두에 두려는 뜻에서였다. 연구소는 명목상으로는 서울대교구 산하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이듬해 6월에는 재정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또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에 전념하려는 뜻에서 사무실을 서울 장충동 그의 자택으로 옮겼다.

설립 후 5~6년 동안 연구소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사무실 인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 공동으로 가톨릭문화 강좌, 성경 강좌, 성인 교리(예비신자 교리) 강좌를 개설했고, 매년 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 세미나도 열었다. 1976년에는 연구소 기관지인 「가톨릭 문화」를 창간하고, 제3호부터는 제호를 「교회와 문화」로 바꾸어 발행했다. 그러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신학원을 운영하게 되고 서울대교구에서 성경 강좌를 주관하게 되면서 차츰 연구소의 기능은 위축되었다. 나중에는 그의 ‘신도신학론’ 탐구와 공산주의 비판, 그리고 통일 사목 운동의 이론적 산실로서 기능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28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9) 실종된 평신도 지위와 역할을 찾는 여정에 오르다

 

 

오태순신부(오른쪽)와 조광 교수(왼쪽)과 함께한 교회사연구소 후원회장 시절.


교회 활동 참여는 배운 바를 실행하는 일

양한모는 세례를 받아 가톨릭에 입문한 뒤로는 아예 정치 활동과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렇다고 일체의 공적인 활동을 접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배우고 익힌 바를 실천하려는 의욕과 관심이 꽤 크고 많았다. 그래서 교회의 요청과 부름이 있으면 마다치 않으며 어렵고 중요한 역할을 힘껏 수행했다.

먼저, 1972년에 「창조」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나온 뒤 평신도사도직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1975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후원회가 창립되자, 그는 초대 회장을 맡아 3년 동안 연구소의 활동과 발전을 위해 애썼다. 또한,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해서, 광주대교구 김성용 신부와 서울대교구 오태순 신부와 함께 광주에서 있었던 참상을 담은 영상 기록물(비디오테이프 ‘찢어진 기폭’)을 제작하여 해외로 보냈다. 이는 광주민중항쟁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그는 한국 천주교 일치위원회(1974년),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1976년),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협의회(1978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1981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북한선교위원회(1981년), 가톨릭통일사목연구소(1986년), 신당동본당 사목협의회(1988년), 제44차 성체대회 평화의 날 특별위원회(1988년) 등의 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한편, 양한모는 자신의 전향에 대한 사상적 입지와 근거를 밝히려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가톨릭 입문을 결심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그때까지의 사상적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앙생활 안에서 자신이 알게 되고 얻게 된 구원의 삶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 고뇌는 평신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한,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을 교회의 전체적 임무로 알고 이를 위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도 연결되었다. 그의 손에서 앞의 노력은 교회의 일부로서 자리매김하는 평신도의 새로운 모습을 정립하려는 ‘평신도 신학’으로, 뒤의 노력은 민족이 일체가 되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 전향의 사상적 입지를 마련하려는 ‘통일 신학’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양한모의 신학 첫째권 신도론 표지


평신도 신학 정립을 위한 탐구

양한모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로 관심을 보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느님의 백성인 신도의 신학적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여기서 ‘신도’란 흔히 말하는 일반 신도, 곧 ‘평신도’를 가리킨다. 양한모는 평신도에 관해 탐구하는 신학을 연구하면서 ‘평신도’라는 말 대신에 ‘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평신도’로 표기하기로 한다).

그는 평신도의 신학적 신분, 교회에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신자 생활의 양식에 대해 고민했다. 다시 말하자면, 평신도가 오늘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합당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신학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만 해도 가톨릭 교회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고, 주일을 지키고, 전례에 참석하며 성사생활을 하는 존재, 성직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서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마치 교회에는 교회를 사목 운영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강론하는 성직자와 지위도 책임도 없이 교회의 부차적인 질서를 구성하는 데 불과한 일반 신도라는 두 계층이 있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맞물려서 그랬는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 권위주의적 요소가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에게 복종하고, 성직자들이 명하는 대로 잘 실행하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것이 평신도의 특징’이라는 레오 13세 교황의 말 그대로였다.

평신도의 신분과 위치에 대한 자각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1953년에 이브 콩가르란 신학자는 새롭게 확립한 학문 체계를 ‘평신도 신학’이란 이름으로 불렀고, 그 뒤부터 한국에서는 낯설던 평신도라는 말이 차츰 교회 안에서 중요한 주제어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마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새로운 의제로 받아들여졌고, 1965년 11월에 바오로 6세 교황은 제4차 전체 공개회의 석상에서 「사도직 활동」이란 제목으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평신도의 지위가 교회의 일부로서 비로소 인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평신도, 평신도 신학에 대한 관심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 여파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1968년 7월에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가 설립되었다. 평신도들이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고민하는 조직적 계기가 마련된 셈인데, 아쉽게도 당사자 겸 주인공인 평신도들은 미처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내심 신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평신도 운동에 참여하려고 작정했던 양한모는 다소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 계획을 앞당겼다.

그런데 당시 평신도 운동, 특히 평신도 조직에 대한 성직자들의 인식은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양한모를 입교시킨 정의채 신부조차도 양한모의 참여를 반대하며 야단을 쳤다. 또한 이 단체를 지도하던 담당 사제가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 모두에게 오늘의 교회로서 총동원하라고 가르쳤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잘 몰라서 혼란스러운 실정이며, 그 와중에서 평신도들에게 내려진 동원령은 성직자와의 대결로 나타나는 일이 허다하다고 일갈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양한모는 먼저 평신도들이 스스로 신앙인으로서 자각하고 교회의 일부로서 평신도의 사명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평신도 스스로 연구하여 새로운 평신도상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는 현대 교회의 사명과 평신도들의 위치에 대한 진보적이고 풍부한 관점이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뜻있는 평신도들과 함께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는 강좌를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공의회 문헌을 탐독하면서 어려운 부분들은 사제들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 식으로 풀어나갔다. 이 강좌가 어느 면에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 운동을 새롭게 맡아 나갈 주역들을 배출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양한모는 자신이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하면서 겪은 신앙 체험들과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소견들을 글이나 강연으로 꾸준히 발표했다. 차츰 평신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많아졌다. 1982년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1984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1회 평신도 심포지엄’이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최로 열렸고, 양한모는 사회자로서 이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그 후에도 그는 평신도 신학을 정립하기 위하여 계속 탐구했다. 그 결과물로서 평신도 신학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펴낸 그에게 ‘평신도 신학자’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 양한모의 정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다만 교회에서 실종된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신분을 어떻게 우리 역사와 현실에서 올바르게 실천할 것인가에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6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아우구스티노(1921-1992)

 

(10 · 끝) 주님 부르심에 응답한 평신도 신학의 선구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미사 도중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에 대해 강론하는 양한모.

 

 

통일 신학을 제안하다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나라 밖에 알리는 일에서 양한모는 작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번에는 체포되거나 연행되지 않았다. 함께한 오태순 신부가 잠시 도피 끝에 자진 출두하여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동조자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 준 덕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한모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가톨릭에 귀의한 직후인 1970년대에는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을 구명하는 신도 신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와 그 일부인 평신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당시에 한국 가톨릭 교회가 어느 면에서 신앙과 지상의 현실, 교회와 세속을 구분함으로써 초월주의적인 입장에서 압박받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적 구원에만 치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세상 안에 존재하며, 그러기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모순된 현실을 끊임없이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세상의 문제에 교회 나름의 방식으로 뛰어들어서 세상을 그리스도의 세계로 변화시킬 임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의 임무는 무엇일까. 양한모는,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한국이라는 현실에 자리 잡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임무 역시 민족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한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나아가 그 문제를 푸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고통은 분단에 있고, 그러니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임무는 통일이며, 그런 만큼 가톨릭 교회는 당연히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양한모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정립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1983년 봄에 사제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에서 모인 70여 명의 사제 앞에서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통일 신학’의 출발을 제안했다.

 

그는 이날 우리 민족이 겪는 슬픔과 번뇌, 기쁨과 희망은 곧 한국 가톨릭 교회의 슬픔과 번뇌, 기쁨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 민족이 고통스러워서 신음하는 소리는 바로 교회가 아파서 외치는 신음 소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교회의 자각을 촉구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의 비극과 통일을 향한 미래의 희망을 성경의 메시지에 비추어 해석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제를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보며 풀어나가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그 실현 방안의 하나로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일이기도 한 북한 선교에 소명감을 가지고 임하자고 호소했다.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는 경제·정치·언론의 현장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에 요긴하게 쓰이기를 마다치 않았다. 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말년의 양한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데 일조하다

 

이렇듯 현실적이고도 간곡한 제안을 하면서, 그는 통일 신학의 원칙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남북한 백성 전체의 회심을 요청한다.

둘째, 화해 정신에 입각한 남북 관계 개선으로 통일을 향한 대화를 시도한다.

셋째, 복음의 자유와 복음을 위한 자유를 확보한다.

넷째, 평화 확보를 우선 과제로 삼고, 평화의 복음을 통해 통일을 성취한다.

다섯째, 복음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원점, 곧 일체성을 회복한다.

여섯째, 우리 스스로 새 인간, 새 민족이 된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하루라도 서둘러서 연구소를 세워 가톨릭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제언도 잊지 않았다. 사실, 당시만 해도 한국 가톨릭 교회는 통일 문제나 북한 선교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이나 기관이 통일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강연을 전후로 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져 갔다. 1982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북한 선교를 채택했고, 12월에 실무 담당 부서인 ‘북한선교부’를 설치했다. 북한선교부는 1985년 10월에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주교회의 상설기구인 ‘북한선교회원회’가 되었고, 1988년 5월에는 산하에 ‘한국천주교 통일사목연구소’를 두어 통일 사목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편, 양한모는 개인적으로 통일 문제를 가톨릭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틈나는 대로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선교위원회라는 실천의 장에서도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90년에는 발표한 글들을 모아서 「민족 통일과 한국천주교회」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복음적이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복음적 통일은 남한과 북한의 화해로써 분열에서 일치로 향하고, 친교로써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며,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그 나름의 통일 신학의 방향을 제시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

 

20세기 후반부터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국가들이 스스로 붕괴되었다. 이로써 공산주의는 그 결함을 이론으로도 실제로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한때는 수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에 매료되었다. 양한모 역시 그러했다. 소년 시절에 일찌감치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한동안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세상 또는 그런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공산주의는 해답이 아니었다. 그 점을 깨닫는 순간, 그는 전향을 결행했다. 온갖 비난이며 불이익이 예견되었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가 판단한 대로 공산권은 몰락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의 전성시대를 노래했다. 그러나 양한모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인류를 구원하거나 이끌어 갈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상적 흐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한 공산주의자가 전향하고 변신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체험과 교훈을 후대에게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고뇌와 그에 따른 노력으로 남은 생애를 일관했다.

 

이렇게 그가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곧은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굽은 길을 돌아서 뒤늦게 온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채비를 차리고서 올곧게, 때맞춰서 왔을 따름이다. 가령, 그는 사상적으로 준비되어 있었기에 이 땅의 평신도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선각(先覺)이자 선구(先驅)로서, 그는 자신이 알게 된 바를 실행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경제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에 요긴하게 쓰이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러기에 1992년 세상의 삶을 마감할 때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13일,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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