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말씀과 성찬: 친교의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두 원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23 ㅣ No.452

[증언, 한국교회의 과제] 말씀과 성찬

 

친교의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두 원천

 

 

‘공감과 소통’은 삼위일체에서 나온 복음적 친교가 사람 사이에서 ‘육화’되는데 필수불가결한 실천 도구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참으로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교회 공동체의 참된 친교를 위해 말씀과 성찬이 어떤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말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소중한 소득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 말씀을 교회생활의 중심으로 바로 세웠다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에 하느님 말씀과 관련하여 나온 사도좌의 모든 가르침이 이를 뒷받침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 또한 복음화(선교)의 맥락에서, 교회생활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재확인해 준다. 교종은 성경이야말로 복음화의 원천이고, 끊임없이 스스로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복음화하지도 못하므로, 말씀이 반드시 점점 더 온전하게 모든 교회 활동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7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조한, ‘말씀 읽기’와 ‘세상 읽기’는 둘이 아니란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말씀을 경청하듯 사람들에게도 귀 기울이면서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전략’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읽기의 본질에서 곧바로 샘솟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 메시지를 읽는 참된 영적 감수성이다”(154항 참조).

 

이렇듯, 묵상이나 기도의 영역에만 얌전히 머물지 않고 세상 안으로 침투(육화)하는 것이야말로 말씀의 운명이다. 그래서 ‘영성’ 또한 개인의 기도 체험이나 성덕의 내밀한 공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현실에 광범위하고도 깊게 개입하고 간섭하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사실 비복음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도는 위험한 것”(토마스 머튼)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거룩한 독서’는 기도 체험을 풍요롭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인과 교회의 복음화(쇄신), 그리고 온 세상의 복음화(복음적 변혁)를 지향한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볼 때 말씀이 말씀으로만 머물면 참말씀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또 밥(빵)이 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음성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는 늘 당신 자신을 통째로 건네주신다.

 

또한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고 비우고 돌아가신다. 그분에게 ‘말씀’은 곧 ‘내어놓으심(자기 증여)’이다.

 

말씀의 이런 특성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나자렛 예수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십자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우리의 태도(‘말하는’ 태도)에 중대한 도전이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말씀은 (성체)성사와 연결된다.

 

 

성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이 곧 나 자신을 받아모시는 것이라고 했다(「설교」, 272,1). 말씀께서는 나에게 자신을 내놓으신 나머지 나 자신이 되어 버리셨다. 나의 살이 되시고 나의 피가 되셨으며, 나의 가장 내밀한 ‘나’가 되셨다. 그분의 생명 또는 얼굴이야말로 하느님 안에 숨겨진 나의 본디 면목이다(콜로 3,3 참조).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하지만, 성찬이 교회를 만든다. 교회의 친교, 아니 친교로서의 교회가 성찬례 거행에서 탄생하고 성장한다. 여기서 세상에 확산된 그리스도”(보쉬에)이며, 지상에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인 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디다케’는 성찬을 두고 단순히 ‘쪼개진 것(klasma)’이라 한다. 피가 되어 흐르고, 살이 되어 바쳐지지 않으면 말씀이 아니듯, 이웃을 위해 쪼개지고 나누어지지 않으면 성찬이 아니다. 이 ‘쪼개짐’과 ‘나눔’은 물질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 연대를 전제로 한다.

 

지난해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 주교단에, 온유하지만 더없이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 달라.” 교종의 이 말은 구약 예언자들의 전통에만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의 직접 원천은 바로 성찬이다.

 

교종은 이 맥락에서 성찬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 지극히 중요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1코린 11장을 언급한다. 부유한 형제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기다려주지”(33절) 않고 그들끼리 먼저 먹고 마심으로써 교회를 하나의 ‘사교 모임’이나 ‘그들만의 집단’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이것은 가난한 형제들을 업신여긴 행위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짓이다”(22절 참조). 또한 이웃에게 무관심 할 때, 교회 친교의 원천이요 표지인 미사가 분열의 원천이요 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교 - 말씀과 성찬의 공통 토대

 

말씀이나 성사나, 공통적으로 ‘친교’에 토대를 두고 친교를 지향한다. 친교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늘 ‘자기’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태도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거듭 “자기 바깥으로 나가자, 변두리로 나가자.”는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런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자기 밖으로 나가기’, 이것이야말로 ‘엑스타시(extasy)’란 말이 본디 뜻하던 바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듣는 말이다. 이 상태에서 ‘나’에 대한 평소의 강박적이고 중독에 가까운 관심은 놀랍게도 사라진다. 상대방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젊은 엄마는 하루 종일 갓난 아기를 보살피느라 지쳤음에도 한밤중에 아기가 바스락 소리만 내도 깬다. “몸은 잠들어도 마음은 깨어 있기”(아가 5,2)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엑스타시’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다. 고대 그리스 교부들은 이런 사랑을 ‘신적 에로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받는 사람은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냥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쁨’이란 말은 이런 맥락에서만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 ‘기쁨’이야말로 친교의 원동력이며, 말씀과 성찬은 교회가 바로 이 원동력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생생한 원천인 것이다.

 

 

제언

 

이제 말씀과 성찬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친교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 교회가 쇄신되고 성장하려면 (특히 ‘공감과 소통’과 관련하여) 어떤 구체적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몇 가지를 제언해 본다.

 

먼저, 공감과 소통을 위해 무엇보다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원천으로 돌아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진보와 보수’라는 논리에 빠지면 ‘공감과 소통’보다는 ‘공격과 소외’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면 사랑에 찬 상호존중과 수용, 상생의 복음적 수행이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말씀과 성찬이라는 원천으로 돌아가면 공감과 소통을 위한 최소영역은 확보될 것이다. 사실 얼마나 그리스도의 제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참된 보수냐 또는 그 반대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복음적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다.

 

둘째로, 교회 언어의 ‘참여적 사용’을 계발하자. 말씀도 성찬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놓기보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주어졌다. 교리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는 우리를 남(비신자)들과 구분 짓는 신분 표식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하느님의 친교, 그 기쁨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1요한 1,3 참조) 주어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 교우들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교도권과 사목자들의 언어 습관이 프란치스코 교종의 모범대로 나아간다면, 권위주의도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연설하신 것처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단호하게 포기하자. 이것이야말로 친교와 정확히 맞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많은 교회공동체들 안에서도 활개치는 중요한 이유는 들키지(인식되지) 않아서다. 자기 확장과 자기 보존의 생물학적 욕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과 집단이 어디 있으랴.

 

복음의 빛으로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직시하면, 우리도 ‘성취와 힘’이라는 기준에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휘둘리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이를 문제 삼지 않는지, 성령께서 보여주실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순교자 현양 사업’이 우리가 그분들의 복음 증언에 ‘참여’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성장과 보존을 위한 '사업'에 더 가까운지 잘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도 성찬도, ‘자기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를 빚어낸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찬에서 샘솟는 이 친교의 물길에 더 온전히 몸을 적실 때, 교구와 교구 사이, 교구와 수도회 사이, 그리고 각 공동체는 화해와 친교의 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공감과 소통’은 ‘친교의 교회’의 특징으로 인간관계의 여러 부문에 뿌리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 이연학 요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 수도원장을 했다.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에 수도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이연학 요나]



6,299 2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