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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응답의 역사 - 은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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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21 ㅣ No.450

[윤주현 신부의 신학 이야기]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응답의 역사 - 은총론

 

 

신앙생활의 바탕인 은총에 대한 이해

 

‘은총’은 모든 신학 분야의 토대가 되는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마치 철학 분야에서 ‘존재’ 개념이 갖는 위상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렇듯 신학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면서도 실상 너무도 모호하게 사용하고 본디 의미를 왜곡하는 것 또한 이 말일 것 같습니다.

 

은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영성생활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은총에 대한 왜곡된 이해 때문에 이단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큰 위험에 빠뜨리고 수많은 신자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멀리는 교부 시대의 펠라지우스주의와 세미펠라지우스주의가 그러했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예정론을 왜곡해서 발전시켰던 이중 예정론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교회를 커다란 위기로 몰아넣었던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16세기 당시 여러 종교개혁가들의 사상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도 대중 신심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웠던 얀센주의가 그러했고, 중세 신비가들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왜곡된 신비주의를 추구했던 조명주의와 정적주의가 그러했습니다.

 

이런 많은 이단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비단 역사 안에서 드러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사고와 실천적인 삶에서도 쉽게 둥지를 틀 수 있는 오류의 덫이기도 합니다. 특히 지나친 인간중심적 전망 속에서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칫 자신의 능력만 믿고 ‘은총’의 본디 의미와 그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이와 반대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세속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에 맞서서 극단적인 보수로 회귀하는 경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하게 ‘은총’만을 강조한 채 구세사에서 차지하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의 자유로운 협력이 갖는 소중함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은총

 

하느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원천인 성경에서는 ‘은총’이 구세사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우정의 관계 안에서, 또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해방 그리고 그와 맺으신 계약을 바탕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은총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과 용서하는 사랑, 그리고 계약에 충실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은총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자될 만큼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에서 은총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의 구원을 드러내는 ‘하느님 나라’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내용으로 보면 이 하느님 나라는 결국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이 말하는 은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생명’이라는 말을 통해, 그리고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이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는 참된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은총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통교이자 건넴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당신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세사의 두 주인공, 하느님과 인간

 

구세사의 전망에서 제시된 은총의 개념은 신학적인 성찰을 거치는 과정에서 다양한 차원으로 분화되어 갔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세사는 하느님과 인간이라고 하는 두 주인공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실현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과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시공 안에서 한 인간이 걸어가는 구세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수놓는 씨실과 날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은총에 대해 숙고하는 가운데 그 개념을 다양하게 분화시켜 왔습니다. 물론 은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 이전에 하느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시지만, 인간이 놓인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작용해서 그 작용 방식과 그것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효과에 따라 은총을 다양하게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간의 여정에는 그 진보 정도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은총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개념

 

신학에서는 다양한 은총 개념 가운데 특히 ‘조력은총(助力恩寵)’과 ‘상존은총(常存恩寵)’의 역할에 대해 주목합니다.

 

조력은총은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믿음을 통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은총은 인간을 죄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의화(義化)를 일으키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의화와 더불어 인간의 영혼 안에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머물며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상존은총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숙시켜 가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력은총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영적 여정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조력은총을 통해 인간에게 거저 주어진 ‘내주은총(內住恩寵)’이 발전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성숙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 내주은총이 인간 안에서 충만하게 작용하는 상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인간이 세례 때 맺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성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상존은총은 내주은총과 ‘변모은총(變貌恩寵)’으로 나뉩니다. 내주은총이 인간과 하느님 간에 관계를 맺고 이 관계를 발전시켜 주는 은총이라면, 변모은총은 이 관계의 발전 과정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부수적인 은총의 선물들을 말합니다.

 

순서로 볼 때 내주은총과 변모은총 중에 내주은총이 먼저 일어나며 더 근본적인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구세사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말할 때는 언제나 짝이 되어 함께 드러나는 인간학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으로 인류를 위해 최상의 상태를 마련하시고 거기에 두실 수도 있었습니다. 또 최고의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이 마치 로봇처럼 그 계획을 따르게 하여 그 계획이 충만히 실현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이 빠져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인간에게 무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하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구세사를 펼치시면서 인간의 자유를 아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일방적으로 보내지 않고 인류를 대표하는 여인, 바로 마리아의 자유로운 응답을 듣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목숨을 인간의 자유라는 손에 맡기셨습니다.

 

결국, 인간은 성자 예수님을 거부하고 모함해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비참한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예견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총과 자유의 균형감각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세사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도권은 언제나 이 둘 사이에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4세기 무렵에 활동한 펠라지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 본성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되고 성화될 수 있는 건강한 능력을 지녔다며 하느님의 은총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반면, 근대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은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했으며 세례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무능해서 제 힘으로는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단들을 거슬러 교회는 언제나 둘 사이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영원으로부터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시되 그가 이 계획을 실현하는 주인공이자 당신의 협조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가 깊이 녹아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로이 그분께 응답하고 협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세사의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사제.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 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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