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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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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07 ㅣ No.40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1) 절대자를 찾아서

 

 

판사의 삶에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을 새겨 넣듯이 살다 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그가 간절하게 절대자를 찾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푸르르!’ 이른 아침 공기를 뚫고 모악산 줄기를 따라 내려간 원평 마을 산 어귀에서 꿩이 날아오른다. 동네는 아직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 중턱 솔숲에서 인기척이 난다. 한 아이가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아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 제발 제 꼬마 친구를 다시 살려주세요!”

 

열두 살 김홍섭이 눈을 꼭 감은 채 산중의 추위를 견디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옆집에 살던 꼬마를 위한 것이었다. 바로 전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하였다.

 

“홍섭아, 전씨네 꼬맹이 아들이 죽었다는구나.”

 

옆집에 달려가 보니 어른들이 포대기에 싼 무언가를 작은 관에 넣고 있었다. 형제가 없이 자란 그에게 친동생 같은 아이였다. 홍섭은 그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자, 고모가 늘 해준 말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야. 우리는 열심히 기도로 청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 힘으론 안 되는 게 없단다.”

 

김홍섭은 한 달 내내 산에 올라가 기도로 청했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내 정성이 부족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것일까?’ 신을 원망하지 않았어도 가슴 한 켠에 의문 부호를 품게 되었다. 

 

‘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은 그 전에도 있었다. 여섯 살쯤이었을 때 외삼촌이 병으로 오래 앓다가 죽었을 때였다.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외삼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어린 홍섭은 안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낸 김홍섭은 보통학교 입학 전 이른 나이에 개신교 신앙을 접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집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던 금산교회는 인근에서 널리 알려진 예배당이었다. 지역 유지인 조덕삼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1905년 자신의 과수원에 터를 잡아 지어올린 이 교회는 일명 ‘ㄱ’자 교회로 유명했다. 김홍섭의 고모는 이 교회 장로 집안에 출가한 후 친정 식구들을 교회로 전도하는 데 열심이었다. 특히 어린 조카 홍섭의 손을 잡고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신앙 분위기와 진지한 성격이 합해져 김홍섭은 자라면서 인간 본질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열심히 탐구하다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느 날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반대로 의혹은 깊어만 갔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죽는다,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혼불멸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면서 영원을 향한 김홍섭의 갈망은 뜨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개신교 신앙에서 적절한 대답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홍섭은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열심히 믿지도 못하지만 그냥 내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의 신앙생활 속에 청년 김홍섭의 암중모색이 시작되었다. ‘새 신을 얻기까지 옛 신발을 버리지 말자’는 격언을 변명 삼아 좌고우면했다.

 

하지만 스무 살 언저리에 결국 김홍섭은 개신교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김홍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신교 전반에 걸친 자의적인 성경 해석이나 목사의 무책임한 설교, 그리고 신도들의 자기 편의에 따른 기도 내용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으면 구원이라는 개신교의 주장은 무엇 하나라도 불합리하고 타당성이 결여된 것에는 마음을 두지 못하는 김홍섭에게 위안을 안겨주지 못했던 것이다. 

 

개신교를 떠난 후 김홍섭은 불교를 향했다. 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던 사찰을 드나들면서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이 시절 그는 스스로에게 ‘자유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불교는 김홍섭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인간의 구제에 대한 불교의 염원은 높고 거룩해 보였고, 중생 모두의 성불을 도모하고자 하는 교의는 참으로 평등한 것이라 여겨졌다. 무엇보다 성심성의껏 계율을 지키며 수행해 나가는 불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높은 진리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수행자, 곧 모든 종교의 신도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불교에서 진리의 그림자를 얼핏 찾아낸 듯한 김홍섭은 그 근원을 캐보고 싶었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며 산중 거사들을 만나 법문을 듣고 불설을 나누었다. 잡다한 세속의 고뇌를 떨쳐버리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불도를 닦는 그들의 모습에 자기 모습을 겹쳐보기도 했다. 서른 살 되던 어느 날, 김홍섭은 노사(老師) 방한암을 찾아갔다. 석가가 세속을 떠나 출가한 시기가 서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산중출가’의 꿈을 가슴에 품어 보았다.   

 

그러나 세속의 시간표는 그의 마음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조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었고 그는 어느새 결혼하여 자식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출가’는 한때의 상념으로 밀쳐 버리고 보통 사람들이 가는 삶의 여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난 나라의 사법부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판사의 삶을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자족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늘 목이 말랐다. ‘생이란 무엇이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아이가 어른이 되었지만 그를 감돌던 고뇌의 핵심은 여전히 삶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었다.    

 

김홍섭은 서른 중반에 6·25전쟁을 겪었다. 전쟁은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납북된 친구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을 하며 김홍섭은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산 피란지에서 판사 김홍섭은 자신이 걸어온 종교 순례의 과정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진짜 하느님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가톨릭’이란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이전에 가톨릭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니었다. 개신교 시절부터 알아왔지만 부정적인 의미였을 뿐이다.

 

‘마리아를 공경하고 교황의 지배를 받으며 유다교의 한 지파인 종교’가 그가 알고 있었던 가톨릭이었다. 어불성설처럼 들렸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불교에서도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하던 김홍섭은 이제 ‘천주의 존재’와 ‘영혼 불멸’을 전제하고 영혼 구원을 위한 실천을 강조하는 가톨릭에 끌리는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홍섭의 정신을 자극한 지적 계기가 있었다. 영국의 문인 체스터턴(G.K. 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글이었다. 그의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수득을 통해서」는 김홍섭을 매료시켰다. 20세기 초 시인이자 수필가, 소설가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체스터튼은 원래 철저한 회의론자로서 가톨릭을 비판하던 이였다. “천주교인이 될 바엔 차라리 식인종이 되겠다”고 극언했지만 마침내 가톨릭으로 귀의한 이였다. 하느님은 일상적이고 현상적인 곳에 계시는 분이며, 공동체 의식 속에서 신앙적 확신을 찾게 되었노라고 고백한 그에게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김홍섭은 타인의 설득이 아니라 홀로 깊은 사색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써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가 나중에 암시한 바에 따르면 체스터튼의 개종에서 자신도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 

 

가톨릭은 어째서 진실하다고 말하는가? 피란지 부산에서 영도 바닷가를 거닐며 끊임없이 자문하던 그에게 어느 순간 빛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가톨릭에는 동(動)과 정(靜), 육(肉)과 영(靈)을 고루 달래주고 정화시켜주는 힘이 있다!  정녕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다니던 참 종교가 아닌가!

 

전란을 피해 잠시 몸을 두던 곳 바닷가의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신앙의 씨앗이 김홍섭의 품을 찾아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 바닥에 떨어진 그 씨앗이 언제 덤불을 헤치고 푸른 잎을 틔우게 될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필자의 말

 

존경받는 법률가는 있다. 양심적인 신앙인도 있다. 이 둘을 겸비한 이도 적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특출한 법률가이면서 고결한 신앙인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지는 인물은 더더욱 적다. 김홍섭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법률의 잣대로 타인을 정죄하는 입장이면서도 절대자 앞에서는 법관이나 죄인이나 모두 작디작은 존재임을 고백했던 재판관이었다. 

 

신앙의 숨을 법의 세상에 불어넣었던 법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법관의 직무 속에서 발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신앙인. 그런 모습을 세상은 사도법관이라고 불렀다. 그가 희구했던 신앙과 정의의 무게추가 오늘만큼 우리 사회에서 절실하게 요구된 적도 없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김홍섭 판사를 기억하고 흠모하고 따르게 하는지, 그 여정의 발걸음을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함께 시작하려 한다. [평화신문, 2015년 2월 8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2) 마침내 영세하다

 

 

1953년 9월 27일 한국 순교 복자 축일이 밝았다. 초가을 맑은 아침 햇살이 서둘러 창문으로 들어와 온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서소문 근처 김홍섭 판사의 관사에서는 늘 조용하던 다른 날과 달리 들뜬 분위기가 있었다. 온 가족이 아침부터 채비하느라 바빴다. 열 살 전후한 세 아이는 마냥 좋아라 이 방 저 방 몰려다니며 까르르 대고 있었다. 김홍섭은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자, 얘들아 이제 가야지. 누가 제일 먼저 나가나 볼까?”

 

김홍섭의 목소리는 유난히 밝고 드높았다.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이 그의 온몸에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세 날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는다. 명동성당을 향해 길을 나섰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앞서가는 아들을 따라 노부모도 걸음을 옮겼다. 일찍이 개신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양친은 아들의 가톨릭 귀의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주었다. 

 

“홍섭아, 네가 한 결정이니 우리는 그대로 따르마. 믿음은 온 식구가 같이 가야 하는 길이니 우리도 기쁘다!”

 

한 치 어김없이 살아온 판사 아들이 내린 결정이니 의혹이 있을 리 없다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김홍섭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이제부터 가는 길은 김바오로가 걷는 구도의 걸음이 될 것이다.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여 예수님 앞에 무릎 끓은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 그의 앞에는 예수님만이 있을 것이라고 김홍섭은 확신했다.

 

김홍섭은 늘 삶의 근원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었다. 사진은 영세 후 성당 앞에 선 김홍섭.

 

 

김홍섭이 가톨릭 입교를 결정하고 영세하기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피난 시절을 마친 정부는 환도하여 바야흐로 전쟁 복구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시작한 터였다. 바로 몇 달 전인 3월 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한 김홍섭도 가족들과 상경해 서대문 관사에 짐을 풀었다. 부산에서 피난살이 하는 동안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넷째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어린 아이들과 노부모를 모신 가장이었지만 변변한 집 한 채 있을 리 만무했다. 청렴하기로 호가 나 있었던 김 판사의 사정을 알고 당시 고등법원장이 관사를 대신 쓰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살림을 다 풀기도 전에 김홍섭이 제일 처음 한 일은 명동성당을 찾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가톨릭 신자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남들처럼 천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었다.

 

김홍섭은 당시 명동성당 주임 사제인 장금구(요한 크리소스토모, 1911~1997) 신부를 찾아 상의했다. 

 

“신부님, 가톨릭 신자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김홍섭의 문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임 사제는 김홍섭이 아주 잘 준비된 신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것에 불과했지만 장 신부는 그 어떤 예비신자보다 김홍섭의 신앙관과 구도관이 철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을 찾아 김홍섭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금세 알아본 것이다.

 

“형제님, 아무 염려 마시고 곧장 영세하십시다!”

 

김홍섭은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여 교리기간을 단축시켜 준 장 신부의 결단을 ‘대범한 찰고’라며 내내 고마워했다. 「교리 문답」 320문항의 첫 번째 질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는 김홍섭이 오랫동안 숙고해 왔던 바로 그 문제가 아니었던가!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나이다.’ 그 대답은 김홍섭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죽는 존재일 리가 없는 것이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구령을 하여 천주께 돌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김홍섭은 소리 내어 외치고 싶었다.

 

세례 날 명동대성당에 들어서며 김홍섭은 자신이 참으로 진교(眞敎)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지난 순례의 길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개신교와 불교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중요한 안내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있었다. 부산 중앙성당이다. 피난 시절에 가톨릭에 대한 의문을 풀게 해 준 중요한 곳이었다. 중앙성당은 용두산공원으로 가는 길 바로 옆에 있었다. 어느날 김홍섭은 매일 법원 출퇴근 길에 늘 눈길이 가던 그 성당으로 찾아가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가톨릭에 대한 의문을 좀 더 가까이서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피란 신자들로 북적대는 성당은 시골 장터 같기도 했고 바로 지척에 있는 자갈치시장만큼이나 번잡스러웠다. 중앙성당은 원래 1937년에 일본인 사찰인 ‘지은사’로 지어졌다가 해방 후 천주교에서 불하받아 대웅전을 개조한 후 1948년 성당으로 새롭게 축성한 건물이었다. 김홍섭은 생각했다. ‘절에서 성당으로 바뀐 이 공간처럼 불교에 한참 머물러 있던 나도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섭이 중앙성당에 첫 걸음을 했던 그 때에도 그는 본당 사제에게 면담을 요청했었다. 당시 중앙성당의 주임 사제는 서른 중반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한 장병룡(요한 사도, 1917~2010) 신부였다. 그는 생전 처음 성당을 찾아온 ‘외인’ 김홍섭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김홍섭은 마리아 공경이니 교황의 지배니 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으며 ‘고집 센 가톨릭 혐오병자’ 같은 태도를 보였지만 장 신부는 하나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진지하고 차근차근하게 설명해 주었다.

 

영세 후 혼배.

 

 

김홍섭은 중앙성당에서 가톨릭을 단지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행동하는 가톨릭, 살아 움직이는 신앙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신부님, 우리 애가 열이 많이 나요. 어쩌면 좋아요?”

 

“자매님, 걱정하지 마세요. 성모님께서 보살펴 주실 겁니다. 어서 메리놀 병원으로 데리고 가봅시다.”

 

피란지 성당의 주임 장 신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전란을 피해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 신자들의 양식과 잠자리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성당을 통째로 내어 놓았는데, 하느님의 집은 진정 모든 이들의 거처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단을 펄럭이며 바삐 움직이는 장 신부를 보며 김홍섭은 천주교에서 강조하는 ‘인간 구령’과 ‘자선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믿으면 구원’ 이라는 개신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가톨릭에서는 구원이 선한 행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란 신자들의 모습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고단한 피란지 생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마치 자신들의 신앙을 단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시 수도 부산의 중앙성당, 당시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김홍섭은 가톨릭에 대한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명동성당의 세례식장에 문답 소리가 울려 펴졌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김홍섭은 온 숨을 다해 대답하였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바오로에게 세례를 줍니다.”

 

김홍섭의 이마에 성수가 흘러내렸다. 참 생명의 물이다. 그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참 생명수였다. 곁에 선 대부 최 베드로가 이마를 닦아 주었다.

 

“아멘!” 

 

김홍섭에 이어서 아내 김자선 엘리사벳이 대답하였다. 노부모는 요셉, 마리아로 이름을 받았다. 맏딸아이 철효 골룸바, 정훈 베드로, 금효 아녜스, 그리고 품에 안긴 난효까지 발바라로 영세하였다. 그는 온 가족을 둘러보았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언제나 양식 걱정을 해야 하는 식구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홍섭이 애닳아 한 것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었다. 영혼의 주림을 언제 풀어낼까, 그것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천주 대전에서 무릎 꿇고 나란히 영원한 양식을 받아 모시게 되었으니 죽을 때 까지 배고픈 일은 없을 것이다. 

 

“주여 제가 이제 가난을 면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평생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김홍섭은 높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주께 감사드렸다. 이날부터 12년간 지상에서 신앙의 밭을 일군 하느님의 일꾼 김홍섭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2월 15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3) 법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학창 시절의 김홍섭.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전북 김제군 수류면 금산리에서 아버지 김재운과 어머니 강재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선대부터 임실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집안 중에 세금징수직을 맡아 일하던 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바람에 일가친족 전부가 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그 후 온 집안이 금산으로 옮겨왔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어 부친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금산리 원평 마을, 그중에도 홍섭의 집은 바로 큰길가에 있었다. 전주로 나가는 네거리 옆으로 마방이 있어 옛날에는 말과 마차들로 붐볐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화목차 같은 것도 자주 보이게 되었다. 금이 나는 곳이라 하여 김제라는 지명이 붙은 이 지역은 또한 손꼽히는 곡창지대 김제평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섭이 태어나던 시절 그 넓은 들에서 거두어들이는 볏섬은 나라 잃은 농민들의 몫이 될 수 없었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으로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김홍섭은 부모가 혼인한 지 여덟 해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김홍섭이 아파서 결석하게 될 것 같으면 십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줄 정도였다. 자신은 가난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그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보통학교 입학 전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했던 김홍섭에게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한학과 자연의 세계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홍섭은 조부 김광언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받아들였다. 원릉 참봉을 지낸 분으로 학문이 깊었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한학은 물론 천지의 이치와 자연의 순리까지 두루 넓게 알게 해주었다. 조부의 가르침에 대해 김홍섭은 나중에 이렇게 기억했다.

 

“나의 조부는 정심성의, 즉 사람의 가죽을 쓰고서 거짓을 따를 수 없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된다는 내 윤리관의 기초를 닦아준 분이다.”

 

여름밤이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북두칠성과 삼형제 별자리 등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무궁한지를 알게 해주었다. 이때부터 김홍섭은 천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천체도와 망원경은 그가 평생 성경책과 더불어 필수로 지니고 다니던 물품이 되었다.

 

별과 더불어 어린 김홍섭의 마음을 키우는 데는 풀이나 꽃이 있었다. 봄마다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꽃싸움이나 풀놀이를 하였는데 꽃이나 풀을 가짓수대로 뜯어와 겨루는 놀이였다. 김홍섭은 아이들과 놀이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시든 꽃잎이나 풀들을 모아가다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한낱 작은 것들이라도 생명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홍섭의 고향 마을 어귀에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거목의 그늘은 동네 사람들이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마당이 되기도 했고, 아이들이 모여 돼지 오줌보로 공놀이를 하는 동네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김홍섭은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앉아 책을 보는 아이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김홍섭은 공부 잘하고 책 많이 읽는 아이, 착하고 성실한 아이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김홍섭이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형편이 조금만 되었어도 가까운 지역의 농림학교로 자식들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1년 정도 김홍섭은 나뭇단을 지고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그런 어느 날 김홍섭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오수에서 사는 고모부의 도움으로 집안이 그곳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부친에게는 물레방앗간 일자리가 생겼고 홍섭에게는 일본인 송기(마쯔야끼)가 운영하는 약방의 점원 자리가 났다. 

 

김홍섭은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일은 물론이고 주인집의 허드렛일, 심지어 아기 보는 일까지 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그 대신 짬 날 때마다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둥에 기대선 채 책을 읽었고 밥을 먹을 때라도 읽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이구, 저기 홍섭이 좀 봐라. 저렇게 책을 열심히 읽고 있네. 길을 걸어가면서 읽고 있잖아. 도랑을 건널 때도 책을 보네!”

 

- 1940년 8월 조선 변호사 시험 합격자들과. 가운데줄 왼쪽 끝이 김홍섭.

 

 

진학하지 못한 김홍섭에게 책은 가장 확실한 길잡이며 가장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홍섭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다. 특히 링컨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았다. 켄터키 시골에 살던 가난한 링컨이 통나무를 베면서도 틈틈이 법전을 꺼내 보며 공부했다는 대목에서 김홍섭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김홍섭과 같은 해에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성적이 좋은 것을 보자 나의 아버지는 일본 사람의 세상에서도 그저 무던히 살게 하려면 판사나 검사 같은 것이 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꼭 법과를 가라고 하셨다.’ 

 

당시 어른들의 생각이 일반적으로 그러했지만 김홍섭은 남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 결심하고 결정했다. 10대 청소년 김홍섭은 중고 법전을 구해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던 그가 어느 날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수를 벗어나 대처인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서는 마침 같은 고향 사람 조남석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김홍섭은 일본인 구영(히사나가) 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홍섭은 일본인 변호사에게 정중히 절을 한 후 청을 했다. “급료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법률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조선인이라면 쉽게 경멸하고 능력을 의심하는 일본인들이었지만 김홍섭의 사람됨을 알아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영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김홍섭은 성실하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탐색했다. 그 시기에 난 공고를 보고 군산 지방법원 서기 시험에 응시하여 어렵지 않게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닦았다. 그 후 법원에 들어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근무도 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김홍섭은 결코 자신의 꿈을 낮추지 않았다. 변호사에 자신의 목표를 이미 정하고 있었던 그는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하고 싶었다. 경제적인 형편이 가로놓여 있었지만, 전주에서 알게 된 친구 오평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화순에서 가까운 지역인 동복 출신인 만석꾼의 아들 오평기는 이 시절부터 김홍섭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어가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1939년 봄 김홍섭과 오평기는 동경의 니혼 대학에 함께 입학하였다. 둘은 같은 하숙집에서 서로 격려해 가며 변호사 공부를 했지만, 김홍섭이 언제나 더 열심히 했다. 오평기가 이런 불평을 할 정도였다. “홍섭이, 자네는 도대체 언제 잠을 자는가? 내가 오늘은 기어코 자네보다 늦도록 공부해야지 하면서 지켜보았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을 자고 말게 되더구먼. 아무리 해도 자네한텐 못 당하겠어. 정말 대단한 친구야, 존경하네!”

 

김홍섭은 불기도 없는 차가운 다다미방에서 주전자에 떠다 놓은 물을 들이키며 공부에 일로 매진했다. 그리고 법과대학 1년 만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경성에서 치러진 법관 시험의 경쟁률은 대단히 높았다. 1940년 조선에서 있었던 마지막 사법시험이라고 알려진 이 시험에 무려 600여 명이 응시하여 단 18명만이 통과하였다. 합격자 명단에는 김홍섭과 오평기, 그리고 해방 후 함께 검사로 일하게 된 조재천도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김홍섭은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를 일본에 잡아두었다. 김홍섭은 와세다 대학 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였다. 그 공부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조국이지만 그 속에서 변호사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김홍섭은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법률가로서의 삶이 펼쳐질 순간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1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4) 해방된 조국에서 법률가의 첫발을 내딛다

 

 

김홍섭과 부인 김자선, 김홍섭의 어미니(가운데).

 

 

“판사 검사 다 때려죽여! 재판소도 부숴버려!”

 

“공산당 만세!”

 

1946년 7월 29일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날, 법정 밖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방청객으로 몰려든 공산당원들이 적기가를 높이 부르고 삐라를 날려대고 있었다. 공산당 간부들이 위조지폐를 찍어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을 두고 그들은 허위 날조된 사건이라며 재판을 방해하려고 난동을 부렸다. 정판사 사건은 정치적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우리나라 형사재판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첫 공판에서 1심 판결까지 재판이 33회나 열렸다. 무장 경찰이 경호에 나섰고 그 와중에 3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등 재판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한 이 사건은 또 당시의 검사로서 그 재판에 참여한 김홍섭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변호사 시험 동기인 조재천 검사와 함께 정판사 사건을 맡은 김홍섭은 엄정하고 공평무사한 태도로 재판에 임해 세간에 깊은 인상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좌ㆍ우익의 엇갈린 주장과 공격으로 바깥은 시끄러웠고 법정 안은 사건 관련자들이 진술을 거듭 번복하면서 재판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검사 김홍섭을 힘들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미군정청의 외압이었다. 이때 김홍섭은 다른 사건에서 경제 단체의 두 인물을 소환하여 심문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런데 미군 장교가 김홍섭을 찾아와 그들에 대한 조사를 그만두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불응할 경우 불이익을 각오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46년 9월 24일 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지난 19일 돌연 사표를 제출한 김홍섭 검사 문제를 싸고 사법당국 내에 긴장이 흐르고 있다. 검사국은 회의를 열어 검사의 직권 행위를 보장하고 검사 무시와 법의 위신을 훼손한 배후 인물을 엄중 처벌할 것을 미군 사법부 코넬 소좌에게 건의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검사 총사직으로 항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은 외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미력한 조국이었다. 김홍섭은 생각했다. 검사의 온당한 권한이 보장받지 못할 바에야 사법부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법은 그 자체로 온전히 서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는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법이란 무의미하다고 보고 사표를 던졌고 그의 행동은 동료 검사들을 일깨워 총사퇴 결의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의 위상을 뒤흔드는 것은 권력층만이 아니었다. 정판사 사건 재판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검사 관사에 몰려와 돌멩이를 던지고 가족까지 위협했다. 김홍섭도 며칠간 몸을 피해 있어야 했을 정도였다. 결국, 김홍섭은 검사직에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검사로서 법조계에 들어설 때 자신이 머뭇거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그전부터 김홍섭은 법조계 입문이 그저 하나의 생활 방편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하 보신책으로 법조계를 택했지만 내가 그 은덕을 입은 것은 단발령일 때 자유업을 내세워 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정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변호사로 지내던 그가 해방 조국에서 굳이 검사직을 맡은 것은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홍섭이 일본에서 돌아온 1941년, 그는 아직 망국 지식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막막하던 당시 가인 김병로와의 만남이 그를 이끌었다. 니혼 대학의 대선배이기도 한 애국 법률가 가인은 독립 운동가를 비롯하여 동포들을 위한 헌신적인 변호 활동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가인의 주선으로 김홍섭은 서울 안국동 근처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동포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으니 변변한 수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가운데도 김홍섭은 법률뿐만 아니라 문학과 종교까지 두루 섭렵하며 깊은 사색의 세계를 내면에 키우고 있었다.

 

이때 김홍섭을 ‘놀라운 청년 법률가’라며 매우 아끼던 가인은 결국 중매에까지 나섰다. 상대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 주필에서 물러나 있던 낭산 김준연의 집안이었다. 낭산은 훗날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법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었다. 고하 송진우까지 적극적으로 나선 터라 김홍섭과 낭산의 막내딸 김자선은 광복 한해 전 1944년 7월에 혼인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장인과 김홍섭.

 

 

그리고 이듬해 8월 15일 일본이 물러가고 조선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국제 정세의 거대한 변화 흐름을 타고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었다. 새로운 조국의 현실 안에서 김홍섭은 고민했다. 과연 법률가의 길을 계속 갈 것인가? 그의 마음속에는 법이 아닌 다른 길을 찾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다. 당시 동료 변호사 양회경에게 김홍섭은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제 내가 가진 법률 서적들을 모두 내다 팔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네.”

 

“아니, 자네 왜 그런 말을 하나?”

 

“내가 법률가로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제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위해서였네. 이제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그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하지만 김홍섭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새로이 탄생한 조국은 그에게 응분의 노고를 요구했다. 독립 국가로 출범할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석을 놓고 그 기반을 다지는 일에 김홍섭은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홍섭은 1945년 10월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받아 법조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랬던 김홍섭은 결국 혼란한 현실 속에서 수사권 독립과 검사직에 대한 회의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물러나기로 했지만, 검사로서의 마지막 임무였던 정판사 사건의 구형 공판 논고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번 사건으로 좌ㆍ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사람으로,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법률가 입장에서는 형사 사건이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조선의 기근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김홍섭은 특히 위폐 제조 기술 업무를 맡았던 한 피고인을 가리켜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롯(이스카리옷) 유다의 비극’을 생각하게 한다며 역사의 급류에 휘말린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인간적인 상념을 표시했다. 당시 사회 여론은 반대파에 대해 여지없이 공세를 퍼붓는 분위기였는데 놀랍게도 좌우익 어느 쪽에서도 김홍섭 검사에 대해서는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김홍섭은 검사이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이미 성과를 얻고 있었다.

 

김홍섭은 혼란스런 세상, 탁류가 흐르는 세속에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사상의 공터’, ‘역사의 여백’,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다. 야욕과 야합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물러난 채 ‘장인의 버려진 돌’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뚝섬이었다. 식솔을 모두 데리고 들어가 농사를 지어볼 요량으로 허름한 가옥에 세간을 풀었다.

 

‘동쪽 물가에 씨앗을 심었더니 고랑마다 무성히 싹이 돋았네.

날 저물어 섶나무 수레를 덮고 길이 어두우니 빛은 이미 저녁

저녁 불빛 따라 집에 돌아오니 어린 아들 처마 밑에 기다리네.’

 

김홍섭은 도연명의 시구를 읊조리며 두어 해 흙 속에 묻혀 살았다. 하지만 농사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채소를 심고 돼지를 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어리숙한 농군의 셈은 언제나 밑지기만 했다. 농사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결국 법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된 가인 김병로가 그를 직접 찾아왔다. 소년부 지법원장으로 법의를 입은 판사 김홍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8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5) 꽃 있는 법정

 

 

1948년 어느 봄날, 김홍섭은 녹색 기운이 완연한 우이동 계곡에 올랐다. 그곳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홍섭은 틈나는 대로 고아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위로해 주곤 하였다. 고아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던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가리켜 사람 사이에 피는 인정의 꽃(人情花)으로 표현했다. 고아들을 만나고 돌아올 적마다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산에서 나무하는 아이를 돕고 있는 김홍섭.

 

 

이때 그는 자신이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나섰으면 하는 염원을 가져보았지만 대법원장의 권유를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아직 뚝섬 농사꾼으로 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사람이 사람을 단죄해야 하는 재판, 그것에 대한 회의 때문에 복직은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김홍섭은 결국 법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대신 김홍섭은 소년심판소(소년부 지원)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 소년부 일은 법원 내에서 인기가 없는 부서였다. 소년범 재판이나 하는 판사는 힘없는 판사라고 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생각이 달랐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제일 시급한 문제가 아이들을 곧게 길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밀려나 법의 지붕 아래 들어온 소년범들은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아이들을 성인 범죄자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았다. 소년범 교화는 교육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김홍섭의 소신이었다. 

 

사실 검사 시절부터 그는 소년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죄를 짓고 잡혀온 소년들을 심문할 때마다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죄지은 아이들의 형편을 헤아리다 보면 언제나 벌을 주는 쪽보다 훈계하여 내보내는 쪽이 되곤 했다. 그런 김홍섭을 두고 선배 검사는 ‘변호사 겸임의 검사’라며 핀잔했다. 이제 소년부 지원장이 된 김홍섭은 소년 교화를 통해 법의 미래 가치를 실현해 보겠다는 결심을 품었다. 

 

소년범 재판에서 김홍섭은 판사라기보다는 친부모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나무라거나 호통치지 않고 타이르는 법관이었다. 부득이 소년원으로 보내야 할 때라도 몹시 주저하며 가위탁을 받아 줄 사람이나 사회단체를 물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김홍섭은 ‘꽃 있는 법정’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이 꽃을 어이 버리랴 /…꺾이운 꽃 짓밟혔기로니 / 이 꽃을 차마 버리랴 / 버릴 바 없어 실에 엮어 벽에 꽂아두노라면 / 양춘 삼월 혹연 재생도 하리.’

 

그의 눈에는 법정에 선 아이들이 모두 소중한 꽃봉오리였다. 모진 바람을 맞아 잠시 스러졌지만 이내 싱싱한 망울을 피워 올릴 꽃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니 다시 일으켜 세워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게 어른의 책임이라고 김홍섭은 믿었다. 

 

그는 소년 교화에 대해 사회 전체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도 앞장섰다. 1950년 1월 한 일간신문에 사흘간 연속으로 ‘소년 교화’에 관한 그의 글이 실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년 범죄에 대한 형벌이나 규칙은 성인 범죄와 크게 구별이 없어서 이를 시정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김홍섭은 소년 범죄 대책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키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또 ‘17세기 로마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감화 감옥을 설치하여 범죄 소년에게 적당한 교훈과 직업을 수여함으로써 가정에 유익한 인재가 되도록 하라는 지시가 서구 사회의 소년 사법 보호의 지도 정신이 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김홍섭은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가톨릭 정신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국내 소년 보호 시설이 미비한 실정을 개탄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도 하루빨리 소년 교정 관련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아원을 찾아 원아들과 함께하는 김홍섭(가운데 점선 안).

 

 

소년 지원장으로 있었던 이 무렵이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음은 김홍섭의 글에서 많이 드러나 보인다. 단죄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법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었을까. 당시 김홍섭은 남매를 두어 가정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법관으로서도 적이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 6·25 전쟁과 피란 시절을 겪어야 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 그는 고등법원과 대법원 판사로 승진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소년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소년부 지원장을 지낸 지 십수 년 후인 1964년 1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평소 가까운 사이로 지내던 서정원씨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서정원씨는 1948년 김홍섭이 소년부 지원장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공채 선발한 직원이었다. 법원 내 서열상 차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판사와 직원 이상의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을 받지 않는 김홍섭이었지만 서정원씨는 유일하게 설렁탕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퇴근 후 둘은 자주 긴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김홍섭의 고민은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내가 고등법원장으로 있는데, 소년부 지원장으로 간다고 하면 욕이 될까요?” 

 

오랜 세월 김홍섭의 곁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온 서정원씨로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펄쩍 뛰면서 극구 만류했다. 

 

“그게 말씀이나 될 일입니까, 원장님. 직위가 있으신데요. 그리고 고등법원장하고 소년부 지원장은 월급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직위야 강등시켜 달라고 하면 되지요. 월급이야 주는 대로 먹고살면 되는 것이고요.” 

 

“원장님, 자제분들이 벌써 몇이고 가족이 얼마나 되시는데,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오늘날까지 그 어려운 생활을 하시다 이제 어느 정도 월급도 좀 오르셨는데요.” 

 

그렇게 말리고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서정원씨는 더 기가 막히는 소리를 들었다. 고등법원장 김홍섭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오늘 대법원장에게 가서 소년부 지원장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강등시키고 월급도 줄이고 해서 그쪽으로 꼭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물론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사 행정상 불가능한 일이라며 대법원장이 일언지하에 잘랐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섭은 거기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김홍섭은 이렇게 결심했노라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법원에 있어 가지고는 불우한 애들을 돌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 애들을 돌보기 위해서, 내가 이 관직을 다 버려야겠어요. 그리고 고아원에 가서 직접 고아들하고 생활하면서 애들을 가르쳐야겠어요. 내가 잘 길러내야겠어요.” 

 

그는 가족들을 생각해보라는 주변의 만류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집사람은 고아원에 가서 부엌에서 밥하면 되고, 애들은 고아들하고 같이 공부하면 되죠. 그렇게 하면 고아들 마음에 큰 흠 나지 않고 바로 자랄 수 있게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김홍섭의 그 결심은 실행되지 못했다. 불과 두어 달도 안 되어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그 시기까지 김홍섭의 마음에는 불우한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하시며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고자 한 것일까? 

 

김홍섭은 어린 생명을 지키고 길러내는 일은 바로 인간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행위라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실천에 자신을 기꺼이 던지고자 했던 사랑의 인간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15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6) 사형수의 대부가 되다

 

 

대자의 묘소를 찾아 기도하는 김홍섭.

 

 

1959년 1월 초순, 외투자락을 여미어 보지만 겨울바람 끝은 칼날이 되어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김홍섭 판사는 퇴청하여 법원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서대문 형무소로 가는 길이었다. 앙상한 가지만 단 채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가로수를 보며 김홍섭은 차가운 감옥 바닥을 견디고 있을 대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은 장성도를 만나는 날이었다. 사형수로서 영세하여 가톨릭 신자가 된 대자 중 하나였다. 김홍섭은 면회실에 들어서자마자 장성도의 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소? 아픈 데는 없소?” 

 

“예, 대부님 덕분에 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2년 전 사형수 장성도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자주 횡포를 부리는 골칫거리 수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책갈피에 꽂힌 한 장의 명함을 보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주소로 연락 주시오. 김홍섭’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다. 교도관은 그분이 판사라고 말해주었다. 연락이 닿아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장성도는 면회실로 들어선 김홍섭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분명히 판사님이라고 들었는데 저토록 허름한 차림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시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낸 것인가? 의아한 표정의 장성도에게 김홍섭이 인사를 건넸고 둘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얼마지 않아 장성도는 세례명 바오로로 입교하였다. 당연히 김홍섭이 대부를 섰다.

 

영세 후 장성도는 대부 김홍섭을 육친인양 의지했다. 그 날 면회를 마칠 무렵 김홍섭이 말했다. 

 

“이제 내가 자주 오기가 어렵게 되었어요. 전주로 전근을 갑니다.” 

 

서운한 표정의 장성도에게 김홍섭이 달래듯 말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변하기 쉽고 약한 사람이라 믿을 바 못 되니 섭섭히 생각 말아요. 그저 불쌍한 인간을 생각하시며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늘 동반해 주시는 천주님만 신뢰하십시오. 천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시고요. 종종 편지를 내도록 해요. 우리 편지로 이야기합시다.”

 

사형수 대자 장성도가 대부 김홍섭에게 보낸 편지.

 

 

그날로 만남이 마지막이려니 했던 장성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날 김홍섭이 또 찾아왔다.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왔어요. 끝까지 열심히 예수님께 의탁하는 거 잊지 말아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재차 당부를 한 김홍섭은 일어서기 전 장성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주모경 한 번 드리고 헤어집시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김홍섭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 네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며 네 나라이 임하시며 네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룸 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나란히 기도를 드리던 장성도는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옆에 있던 교도관도 돌아선 채 눈물을 훔쳤다.

 

감옥에 갇힌 수인들에 대한 김홍섭의 전교 활동은 1956년 10월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김홍섭은 우연히 담당하던 재판의 참고인으로 허태영을 만나게 되었다. 허태영은 ‘김창룡 암살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갇혀 있었다. 

 

그해 1월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 팔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허태영 대령과 그의 부하들이 주모자로 잡혔다. ‘정의를 위해 거사를 단행’했다는 허태영은 중죄인답지 않은 의연함을 보였고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홍섭은 가톨릭 신앙을 권하였다. 당시 36세이던 허태영은 죽기 전 천주 알기를 진정으로 원하여 몇 번의 만남 끝에 스스로 마태오라는 본명을 정하고 영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신자로서 형장에 선 허태영은 당당하고 깨끗하게 최후를 맞아들이며 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대자 장성도는 편지에서 “도라(돌아)오다 형장을 보며 혼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저 문지방을 넘어야 우리 사랑하는 아버지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이 문득 나고…”라고 적는 등 자신의 신앙을 편지에 적어 대부에게 보냈다.

 

 

허태영과의 만남을 통해 김홍섭은 법과 신앙이 서로 보완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법으로만 충족되지 않았던 점을 신앙으로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후 김홍섭은 본격적으로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사형을 언도받은 수인들을 만났다. 곧 닥칠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찾게 해주고 싶었다. 각종 서적과 봉함엽서를 명함과 함께 감옥에 넣어주며 누구든지 자신에게 연락할 수 있게 하였다. 판사가 사형수를 직접 찾은 것은 그 전에 없던 일이었다. 김홍섭은 사형수를 만날 때면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신앙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맙시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하라’는 성경(히브 13,3) 구절은 늘 김홍섭 가까이 있었다.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가리지 않고 김홍섭은 철창 너머의 수인들을 만나러 갔다. 김홍섭의 따스한 손길은 그들의 무거운 멍에를 풀어주고도 남는 사랑이었다. 판사와 사형수 사이에 눈물 어린 편지가 오갔다.

 

‘육신의 고기덩이를 찾아주신 선생님의 이 면회가 3, 4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고마울진데 영벌(永罰)을 면치 못할 이 하잘것없는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님의 은혜를 어찌하여 깨닷지 못하였는지 이놈의 정신을 사정없이 두둘겨 주고 싶은 생각 한시인들 가시지 않음을 어찌하리이까!’ (사형수 김기준의 편지)

 

‘저와 같이 인간의 탈을 쓰지 못한 인간을 면회하여 주옵시요니 감사하온 말삼을 여하이 표현할지 알 수 업슴니다. 과연 반가운 사람을 대하여서 왜 달기똥 같은 눈물만이 흐를까요.’ (사형수 박남용의 편지) [평화신문, 2015년 3월 22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7) 전교의 여정에서

 

 

김홍섭이 전주지방법원장으로 부임하고 석 달이 지났을 무렵인 1959년 4월 20일 그의 수첩에 적힌 메모이다.

 

‘오전 치명산과 치명터 숲정이, 오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집터 완주군 이서면 초남 부락 답사.’ 

 

전주 지역 순교 유적지 답사 일정이었다. 일행은 김홍섭과 교구 본당의 김 신부, 그리고 교우 박씨, 세 사람이었다. 박해시대 전주 지역의 역사적 고증을 위해 시간을 내어 나선 걸음이었다. 

 

치명산은 김홍섭이 전주로 부임하면서부터 자주 찾아간 곳이다. 전주시에서 남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산은 첫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 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유항검과 그의 가족들 묘가 있는 곳이다. 해발 500m의 꽤 가파른 산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거의 매일 치명자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김홍섭은 전주에서 지내는 동안 순교자들의 역사적 고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주와 인근 김제 지역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년기 꿈을 키우며 지냈던 고향이었다. 지법원장으로 금의환향한 곳에서 김홍섭은 박해 시대의 역사를 짚어 가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을 새롭게 다져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이 루갈다(1782-1802)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순이 루갈다는 남편 유중철(요한)과 동정 부부로 살다 순교하여 그 아름다운 사연이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기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가톨릭 교계 일부 이외에는 루갈다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당시의 정황을 두루 섭렵하여 루갈다의 생애와 사적을 널리 소개하고자 애썼다. 서울 왕손의 집안인 이 루갈다는 열다섯에 전주 지방 토호 유요한과 결혼하였다. 일찍이 천주교를 안 이들은 동정 부부로 살기를 맹세하고 오누이 같이 지내다가 박해의 칼날 아래 서슴없이 목을 내놓았다. 김홍섭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치명한 이 루갈다의 행적을 ‘순교의 정열과 초인적인 극기순의의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컸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길에서 천주를 우러르는 기쁨을 가지게 할 수 있었는지, 그는 못내 부러워하였다. 

 

그는 순교 정신은 가톨릭 신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표본으로 여기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본시 진격하려는 교도에게 있어 순교자의 정신과 그의 사적이란 훌륭한 하나의 도표요 봉화이며 위안이요 격려이기도 한 것이다. 지신, 수계, 수덕, 전교에 있어 순교자의 정신을 상기하고 그를 본뜨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일 것인가! 천만 사랑이 하나의 행?실천만 못하기 때문이다.’ 

 

순교는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믿음의 실행이라고 그는 여겼다. 김홍섭이 가톨릭에 귀의한 연유 중 하나가 가톨릭 구원이 신앙 외에 선행도 겸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홍섭은 1953년 영세 이후 특히 이 점에 유념하여 선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에 투신해왔다. 기도와 일상생활 속에서의 개인적 신심 활동을 넘어 당시 복지사업을 시작하고 있던 윤을수 신부를 도와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학교인 후생학교 건립에도 꾸준히 참여해 오던 터였다. 

 

‘그는 왜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김홍섭은 이 루갈다에 대한 숭앙과 동경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루갈다 무덤 앞에 자비를 들여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길 문구와 문양도 직접 디자인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비석 앞면에는 루갈다가 남긴 구절을 넣었다. ‘모든 도덕을 구함이 좋으나 그중에 으뜸은 신ㆍ망ㆍ애 삼덕이니 이 세 덕이 영혼에 참으로 들어가면 다른 모든 도덕이 절로 따르리라.’ 그리고 비석 뒷면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대신 ‘무명 후인’이라고만 써두었다. 자신도 ‘동교후생’으로서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김홍섭은 전주에서 재임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1960년 1월 26일에 서울 대법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루갈다를 기리고자 하는 마음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있었다. 

 

‘루갈다 무덤을 일순하고 그 위의 잔디 두서너 잎을 뜯어서 수첩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나는 다시 그것들을 좀 더 넉넉히 뜯어 원근 지우에게 선사하고 싶은 생각도 가져보았다.’ 

 

순교자 무덤가에 핀 풀 이파리를 세상에 나눠주고 싶어 한 마음은 순교 정신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바람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김홍섭의 그런 희망이 그대로 이어져 후대 전주지역의 교우들에게 전해진 것이 틀림없다. 2000년부터 해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요안 루갈다제’ 신앙축제를 열어 순교정신 현양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그 분명한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자랑스러운 일은 김홍섭이 깊이 경애한 이 루갈다가 2014년 마침내 124위 복자 명단에 남편 유 요한과 시부 유항검 그리고 시제들과 함께 그 영광스런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박해 유적지를 돌보고 순교 정신을 기리는 일에 앞섰던 김홍섭은 가톨릭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일찍이 깨달았던 진정한 선각자였다. 평신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일이야말로 후배 평신도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홍섭은 개인 차원의 구령에만 몰두한 신앙인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전교 활동에서 그는 매우 적극적인 실천가요 행동가였다. 천주교회 앞을 지날 때면 응당 가슴에 십자성호를 긋는 김홍섭이 천주를 모르는 이를 찾아다니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와 김홍섭은 지인에게 자신의 전교 활동 소감을 이렇게 전한 적이 있다. 

 

‘촌민들이 마음의 의지할 바를 몰라서 미신을 숭상하는 것을 보고 천주 계심과 영혼 불멸 등 천주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네. 그들이 기꺼이 마음을 드러내니 내가 자주 찾아가서 교리를 설명해 주고 있네. 신자들이 많은 곳이 내게는 노다지나 다름없다네.’ 

 

김홍섭의 전교 여행은 먼 도서 지역까지 망라했다. 왕복 뱃길로 꼬박 열흘 걸리는 백령도 인근 역시 그의 전교지에 포함되었다. 대청도와 소청도 등 당시 도서 지역에는 상주 신부가 있을 리 없었다. 여름철에 서울교구의 윤을수 신부가 의과 대학생들과 순회진료팀을 이끌고 그곳을 방문할 때 김홍섭은 기꺼이 동행했다. 그는 소청도 공소에서 수십 년 만에 나오는 첫 영세자의 대부를 서는 감동의 순간을 맛보기도 하였다. 소청도의 첫 교우로 김홍섭의 대자인 김준수(베드로)씨는 현재 대구에 살고 있다. 자상하고 다정했던 대부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대부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옛날 우리 군인들이 입던 사지 쓰봉, 사실은 모직 바지예요. 여름인데 두툼한 그 바지에 꺼먼 물, 그것도 옳게 물이 들지 않아 얼룩얼룩하게 된 것에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위에는 하얀 남방, 축 처지는 상의를 입고서 그렇게 다니셨어요. 다음 해 여름방학 때 또 저를 찾아 소청도에 오셨지요. 그때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양복 같은 건 없으시더군요.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형수님이 해주는 칼국수를 저하고 맞상으로 한 그릇을 다 자시면서 아주 고맙다 하고서는 떠나신 적이 있어요.” 

 

김홍섭의 검소한 옷차림은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였다. 전주 부임할 때도 제대로 입을 외투 하나 없는 그를 걱정해 지인들이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한 벌을 사 입혀 보냈을 정도였다. 검소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의 행색은 웃지 못할 해프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불심검문 중에 순경이 김홍섭에게 누구냐고 물어 판사라고 대답하면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경찰이 결국 대법원 판사라는 것을 알고 백배사죄했다는 일화도 있다. 출장길에 열차 이등칸을 타고 가노라면 역무원이 김홍섭의 부하직원들에게는 예를 갖추면서 정작 ‘영감님’인 그에게만 의심의 눈초리로 검사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럴 때마다 김홍섭은 언제나 공손한 자세로 자신의 신분증이나 기차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지위가 높다고 으스대는 모습은 그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명함에도 판사라는 직함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존귀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29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8) 인간 사랑의 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광주를 떠나며 남동본당 교우들과 함께 사진 찍은 김홍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1962년 10월 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이었다.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사배 사형, 박석운 사형, 정회근 사형!’ 

 

3명의 피고인에게 형을 언도한 후 재판장은 잠시 멈췄다. 법정은 숙연한 침묵으로 일순 낮게 가라앉았다. 김홍섭 판사의 목소리가 다시 법정에 울려 퍼졌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수인들 각자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방청석에서는 수인들 가족이 낮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죄를 지었으나 가련한 이들이었다.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에는 고뇌와 연민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연민의 대상은 법대 아래에 선 피고인뿐만 아니라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제에게 죽음의 형을 내리는 자신을 김홍섭은 정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0년 12월 16일 일어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상 최대의 해상 납치 사건이었다. 일단의 좌익 세력이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로 가는 여객선 경주호를 탈취하였다. 애초 중국으로 향하려던 이들은 항거하는 군인 2명을 살해하는 등 필사적으로 월북을 시도했다. 그 무리 중에는 부녀자, 학생,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으로 22명이 구속되었고 처음 1심 판결에서는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납북을 기도하고 인명을 살상한 이 사건에 대해 사회여론은 격앙되어 있었다. 동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이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감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김홍섭은 법관으로서의 공평무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재심 판결을 맡았던 김홍섭은 심문 과정에서도 마치 친부모인양 부드럽게 처신했다. 그는 납북 범죄자들과 판사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과 나는 불행히도 서로 세계관이 달라 오늘 이렇게 서로 위치가 달리 있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에게 ‘세계관이 다르다’고 한 표현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김홍섭은 늘 자기 소신을 당당히 지켰다. 1961년 7월11일 대법원 판사 김홍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 4명 중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다.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은 현역 장교가 맡았다.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 범죄를 중점적으로 일벌백계주의로 엄정 신속 처리함으로써 혁명 정신 완수를 수행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깡패, 반혁명적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은 군법을 기준으로 진행되어 극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홍섭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한 달 만인 8월에 김홍섭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왜 광주로 떠나갔을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홍섭에게 사형은 선고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제도였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으로써 처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인 김홍섭에게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평소 그는 판결에서 되도록 사형을 피하고자 했으나 국가의 사법체계를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혁명재판소 재판을 피하려고 광주로 내려간 그가 다시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주호 재판을 맡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참으로 힘에 겨웠을 게 분명하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늘 새벽미사와 저녁 성체조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의 본당이었던 광주 남동본당 교우들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는 김홍섭 바오로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그 기도문을 김홍섭은 얼마나 깊게 묵상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사형을 선고하는 자신도 분명 죄인이라고 그는 믿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사법적 기준으로 보아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판사 김홍섭의 행보는 사형의 반인도적 본질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형 제도 폐지 움직임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이미 김홍섭은 사형 폐지 운동의 선구자로서 첫발을 떼놓았던 것이다. 그의 선구적 믿음은 ‘사형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올바른 방식 또한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판사 김홍섭의 화두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는 ‘과연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재판한다는 말입니까?’(야고 4,12)라는 성경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신앙심 깊은 법관이었다. 이웃을 재판해야 하는 그 직을 떠나고자 애쓴 적도 있었던 그는 결국 법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부터는 늘 이렇게 다짐을 했다.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 

 

죄지은 이들을 법으로 단죄할 때라도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해 패배자가 되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고자 했다. 

 

김홍섭이 6·25 전쟁 후 있었던 부역자 재판에 관련된 일화도 그의 이런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재판이 있었던 날 저녁 밥상을 받은 김홍섭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오늘 재판에서 부역자로 재판정에 선 남자가 있었다오. 방청석에는 그 부인과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소. 나이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 쳐다보고 있었소. 재판하는데 아비가 공산주의자로 죄를 받으면 나중에 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걱정이 되더란 말이오.…내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소. 그 아이들은 지금 저녁도 못 먹고 있을 텐데 말이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역시 겸손한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남동성당은 한옥이던 옛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기로 했는데 평신도 사도회 의장으로 뽑힌 김홍섭은 주일이면 직접 삽을 들고 벽돌을 나르며 앞장서 일했다고 한다. 허름한 차림으로 성당 마당에서 잡초를 뽑거나 돌을 치우는 김홍섭을 고등법원장으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김홍섭의 광주 재임 기간은 거의 3년으로 꽤 긴 시간이었다. 

 

1964년 3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간 다음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홍섭이 그동안 남모르게 했던 봉사 활동으로 광주 동광원 방문이 있었다. 동광원은 그 무렵 광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으로 갈 데 없는 환자나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김홍섭은 이곳을 찾아가 기도 모임을 함께했고 특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환자 중 김인옥이란 청년을 돌보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로 가족들에게서도 버려진 채 누워 지내는 불쌍한 환자였다. 김홍섭은 어둡고 냄새나는 움막에 누워있는 환자를 매주 찾아와 머리맡에서 복음서를 읽어주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섭이 사제에 대해 표한 존경심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갓 부임한 보좌신부를 대할 때도 귀한 부름에 응하듯 언제나 공손히 “예”라고 했고, 어떤 사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공무를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찾아가 보살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남동성당 시절 김홍섭의 대자였던 임기석(아우구스티노)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김홍섭 판사님은 법관이라는 인상보다는 인자한 아버지 같고 조용하고 침잠한 영혼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더운 여름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에 얼굴을 씻은 것 같고 유순한 가을 하늘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법관 김홍섭은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인 김홍섭은 그 대견한 존재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겼다. 다 같이 하느님의 자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5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9) 자연 영성가 김홍섭

 

 

산과 밤하늘의 별 보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판사 김홍섭. 그는 자연 속에서 신의 숨결을 느끼며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일찍이 깨닫는 자연법 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김홍섭은 공사다망한 가운데도 산을 아주 좋아했다. 금강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 오대산, 한라산…. 시간과 형편이 닿는 대로 그는 산을 찾아 올랐다. 그러나 자신은 등반가가 아니며, 산을 타는 목적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했다. 흔히 내세우는 이유가 아니라 바위와 나무와 풀들 앞에 서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 앞에 서서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마주 설 때 분명히 나는 거기서 신의 손자국과 호흡을 느끼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내 수고에 비겨 너무나 많은 것을 주어왔다. 이리하여 그에 대한 내 동경과 애착은 그것을 있게 한 이에게 대한 공경의 한 발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홍섭은 자연 속에서 바로 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풀 한 포기 꽃 한송이가 귀하게 여겨지기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가 있었던 김홍섭은 자연의 온갖 형상을 화첩에 정성스레 담아놓았다. 먼 풍경 속의 산사, 장엄한 바다, 나무와 꽃들, 해변의 조개와 풀 섶의 벌레들이 그의 시선으로 들어올 적마다 그 모습을 작은 메모지 귀퉁이에라도 연필 스케치로 담아 놓았다. 그것들이 어지간한 작품집을 이룰만한 분량으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 중에서도 김홍섭이 가장 좋아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밤하늘의 별 보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조부의 무릎 위에서 북두칠성과 삼 형제 별을 찾아 배우면서 별을 알게 된 이후 천체 관측은 그에게 평생에 걸친 사랑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별 보기는 그저 하나의 낭만이나 취미에 그치는 일이 아닌 어떤 경외로운 행위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 성의는 대단하여 6·25전쟁 피란 보따리 속에도 망원경 한 자루와 천문서 두세 권을 챙겨 넣는 것을 잊지 않았노라고 한다. 그는 전쟁 중 부산에 살면서 별 헤는 일과 관련된 일화를 남겨놓기도 했다. 부산 시내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서 늘 원하던 천문사전을 발견하고 흥분할 정도로 좋아하였지만 그는 이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형편에 비해서는 책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오후면 책 가게엘 갔다, 아직 안 팔리고 있었다. 이튿날도 갔다. 역시 안 팔리고 있었다….’ 천문에 관한 그의 열정을 이렇듯 솔직하고 강했다. 마침내 봉급에서 가불하여 그 책을 구입하고야 말았는데 호기롭게 책을 사서 집으로 오던 그는 올망졸망한 집안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피란살이에서도, 출세에 지장이 있다 할지라도’ 별 보는 일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한 그는 이런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혹연 내 생활에 어떠한 변혁이 있을지라도 나는 복음서와 함께 성좌도 한 장을 휴참할 것을 명념할 것이다. 창세기와 천체도를 조화시키는 것 그것은 나의 천문학인 동시에 내 전 인생의 주제인 것이다.’ 

 

그에게 별은 영원을 동경하게 하는 입문이면서 또 영원을 확신하게 하는 표지였다. 별빛 속에 새겨진 신의 음성을 듣노라면 땅 위의 시름은 공허하고 찰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주의 성좌들은 그에게 무상의 세상 너머를 살피는 창문이며 삶의 활력의 비결,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성찰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내 취미는 내 세계관에 직결되고 있다’는 김홍섭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홍섭은 1964년 1월에 성 프란치스코 3회(현재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자신의 본명은 프란치스코, 부인은 안젤라로 하였다. 재속회로 들어간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가졌던 수도회에 대한 소망이기도 했다. 김홍섭은 세상사에 정을 붙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태도가 성사거리라고 반성한 적도 있었다. ‘세속은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한 번의 공을 세울 기회로 천주의 안배가 이뤄지는 바탕이 되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다짐하며 법관으로서 성실한 삶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 김자선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여 못해 ‘애절했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북해도 트라피스트 수도원 사진집을 늘 곁에 두고 보면서 김홍섭은 입버릇처럼 ‘이 다음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가서 문지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주위에 말하곤 했다. 김자선 여사는 남편이 결혼한 몸이 아니었다면 분명 수도자의 삶을 택했을 것이라는 증언을 한 적도 있다. 김홍섭은 백설로 덮인 북해도 수도원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침묵과 고독 속에 침잠하여 기도와 묵상으로 사는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김홍섭이 관심을 두었던 트라피스트는 성베네딕도회의 한 갈래로 900년 역사를 가진 수도회였다. 당시 아시아엔 일본 홋카이도에 있었고 한국 진출은 한참 나중에 이루어졌다. 김홍섭은 광주 법원장 시절에 대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방문한 후 입회를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난과 겸손을 모토로 하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는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다스리고자 하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사실 가난이나 겸손의 수련은 김홍섭에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그의 삶 자체가 청빈이었고 자신을 낮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관용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출퇴근하던 그는 늘 도시락을 옆에 끼고 다녀 ‘도시락 판사’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반찬이라야 짠무지 하나였고, 더러는 고구마 몇 알로 점심을 대신하곤 하던 그는 가까운 친지라 해도 식사자리를 갖는 일은 없었다. 혹 재판에 폐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법원 바깥에서도 대법원 판사니 고등법원장이니 하는 자신의 지위를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라면 어느 정도의 대접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던 주변 사람들을 충분히 부끄럽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청빈을 기꺼이 감당한 김홍섭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과 아주 많이 닮았기도 하다. 태양과 달, 바람과 물을 형제자매라 칭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김홍섭도 일찍이 자연 속의 것들과 자신은 신에게서 나온 한 형제요 자매임을 밝히고 있다. 언젠가 그는 제주도 백록담에 올라서 풍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뾰족뾰족 서 있는 나무…심록일색의 소나무…끝없이 뻗어 간 숲들…고요한 바다…꾀꼬리 소리…뻐꾸기 울음…고산초화…이미 반 하루를 한가지로 정과 호흡을 섞어온 터다. 하물며 높으신 한 어른의 전지와 전능에 의하여 동포요 형제로서 저의 나 사이임에랴.’ 

 

김홍섭은 자연을 통해 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은 천주께서 만드신 한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생태신학이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연구되고 있다. 반세기 훨씬 전에 김홍섭은 이미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일찍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법관 김홍섭이 자연법 사상가로서 자리매김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자연을 찾고 애모한 정은 단지 풍경에 혹해서만이 아니다. 그 순리의 법칙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법은 역리의 모습을 피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는 법은 자연의 법칙처럼 엄호하고 공명하면서도 골고루 타당성을 줄 수 있어야 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을 최대한 갖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정법으로 보면 ‘악법도 법’이긴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미래 언젠가에 그런 말을 법언집에서 지워버릴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 인권은 법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 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는 것이 법관으로서 기본 신조’임을 밝힌 김홍섭은 순리의 자연법을 법 속에서 구현할 때에 법관으로서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자연의 세상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와 찬탄을 금치 못했던 김홍섭은 사람의 세상에서도 생명을 죽이는 법보다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다시 살려내는 법을 펴는 그런 법관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12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10 · 끝) 사랑을 실천한 사도법관, 지다

 

 

김홍섭은 1965년 새해 벽두 한 일간지에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글을 실었다. 

 

‘꿈을 이루어 보려는 희망을 간직해본 적이 있었소.… 그러나…이제는 한걸음 또 한걸음 오직 평상심으로 발 앞을 살펴 실족의 화를 조심하고자 할 따름이오.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아 안 것 같소.’ 

 

그가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에 쓴 글이다. 그 전 해 1964년 6월 즈음 병원을 찾은 김홍섭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채 1년도 안 되는 투병 기간이었다. 김홍섭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조용하고 단아했다. 경기도 양주 천주교 묘원에 가족묘를 만들어 자신이 갈 자리도 마련해 두었고 묘비의 문구도 새겨 넣었다.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64년 10월 가족 묘지에 비석을 세운 뒤 카메라 앞에 선 김홍섭.

 

 

김홍섭은 어느 하루 자신과의 대립을 의식함이 없이 지낸 날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지상의 지혜를 포기하고 천주께 순종함으로써 피안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병마에 잡힌 육신도 ‘천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니’ 하는 말로 오로지 천주께 순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홍섭은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법원에 출근하여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청렴한 자세도 결코 잃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장 김홍섭을 1년간 옆에서 모신 비서관 김남수씨는 당시 그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때 휴멘이라는 약이 있었어요. 당시에 아주 귀한 고가의 약품이었어요. 그걸 누가 한 병 구해다 가져왔는데, 그때 돈으로 저희들 한 달 봉급하고 맞먹는 것으로 국내 생산이 안 되고 군 쪽을 통해서 구할 수 있었지요. 그 약을 주사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딱 물으시더라고요. ‘이게 뭐냐’, ‘휴멘입니다’ 근데 그때 당신은 마음의 정리를 다 하신 단계였어요. 끝내 주사를 맞지 않으시더라고요.” 

 

주변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여 지인들 중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김홍섭이 특히 아끼던 한 후배 법관이 치료비에 보태기를 원하며 돈을 보내왔는데 당연히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쪽에서 다시 보내오고 그렇게 하기를 서너 번, 결국 그 돈을 어느 수녀원에 보내는 조건으로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병원 진료를 받으러 다닐 때도 그는 한결같은 태도였다. 당시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주치의가 아무리 말려도 그는 일반 환자들과 함께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진찰을 받았다. 고위 공직자라 해도 생활에서는 남들과 똑같은 시민이라는 의식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그는 허름한 행색의 자신을 불친절하게 대하는 간호사를 보며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나, 법원을 찾는 사람이나 해당 직원들이 친가족처럼 대해줄 수 없는지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루하루 기력이 쇠잔해 갔지만 김홍섭의 신앙생활은 여일했다. 일찍 일어나 반드시 새벽 미사에 참례했다. 병문안 온 대자가 하룻밤 묵고 갈 때라도 일찍 일어나 함께 미사를 갔다고 한다. 옆에 있는 이들에게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준주성범을 읽으며 신앙의 두레박을 더욱 깊이깊이 내렸다. 광주 남동본당 시절부터 알아온 이영수 신부에게서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죄 많은 일생으로 천주 대전에 서기가 저어된다고 절친한 후배 법관에게 고백한 적도 있다. 

 

김홍섭은 1965년 3월 16일 50세를 일기로 천주의 품으로 날아올라갔다. 연로한 양친과 8남매를 아내에게 맡기고 가는 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는 천주께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노라고 했다. 평화로운 표정으로 임종을 맞이하기 전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주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살아요. 다 잘 될 거요. 그리고 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초봄, 제10대 서울고등법원장 김홍섭이 선종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 사직공원에서 있었던 장례식에는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놓였고, 삼부요인을 비롯한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이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종로성당에서의 장례 미사는 노기남 대주교가 직접 집전하였다. 도하 언론도 청렴 강직의 상징, 사랑과 청빈을 실천한 법관의 때 이른 죽음은 우리 사회의 큰 손실이라며 크게 안타까워했다. 장면 전 총리는 추모사에서 김홍섭을 ‘사도법관’이라 부르면서 ‘법관인 동시에 또한 평신도 사도직의 뛰어난 표본’이라는 평가를 바쳤다.

 

자상한 아버지로서 매일 새벽 미사와 저녁 만과를 중심으로 온 가족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온 그의 유지는 8남매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맏아들 김정훈은 사제의 길을 가고자 가톨릭 신학대학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부제품을 받고 나서 뜻하지 않은 등반 사고로 1977년 6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제 수품을 불과 몇 달 앞둔 즈음이었다. 당시 미국 사목방문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인스브루크까지 날아가 “마치 자식을 잃은 듯한 슬픔”이라며 장례 미사를 집전했다. 생전에 아버지를 유난히 존경했던 김 부제는 ‘언제나 참된 것을 찾는 듯한 표정의 맑은 인품’의 소유자로 김홍섭을 그대로 닮았었다고 전해진다.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는 아버지 김홍섭의 수상집 「무상을 넘어서」의 맥과 깊이를 그대로 잇고 있다. 

 

언제나 조용히 내조에 힘쓰던 부인 김자선 여사는 남편이 떠난 후 홀몸으로 집안을 돌보는 고생 속에서도 교정사목 활동에 전력했다. ‘남편이 하던 일이니 내가 따라서 하는 게 당연하다’며 지난 4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사형수인들을 찾아 위로하고 영치금을 넣어주고 보살펴 주어 ‘사형수의 대모’라 불리고 있다.

 

김홍섭이 대한민국 사법부에 남긴 족적은 크고 뚜렷하다. 1972년 그에게 제1회 율곡법률문화상이 주어졌다. 정부는 199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법관 김홍섭의 정신을 기렸다. 올해 2015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반 세기가 되는 해이다. 지난 3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김홍섭 서세(逝世) 50주년을 추모하는 공식 행사가 열렸다.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법관의 표상인 김홍섭이 던지는 의미는 오늘 이 땅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가인 김병로와 더불어 법관 김홍섭은 법관이란 마땅히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이다. 최근 어느 신임 법관은 김홍섭의 정신이 ‘21세기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표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홍섭은 소년범 교화에 앞장섰고 사형수 구령에 헌신적이었으며 순교자 현양에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교 활동에서도 그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김홍섭은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교세가 그리 크지 않던 시절에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모범은 동료 법관들, 법원 직원들과 사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이끌었다. 사도법관 김홍섭, 그를 가리켜 ‘법복 안에 성의를 입은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굳이 성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평신도로서 충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삶, 그것이 평신도의 몫임을 증명한 이다. 법관이라는 직분 안에 신앙인의 삶을 새겨 넣고 실천한 자랑스러운 평신도인 것이다. 

 

그가 행한 인간 사랑의 실천은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그대로 따르고자 한 신앙인의 진실한 자세였다. 그의 생은 천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에서 얻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참된 것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교우 김홍섭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 오는 것 같다. 

 

‘천주를 향해 그저 한발 한발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그리스도 사랑의 모습을 닮아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분명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19일, 권은정 작가(유스티나 루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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