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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와 교우들의 삶: 문학으로 만나는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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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11 ㅣ No.1166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와 교우들의 삶


- 문학으로 만나는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 -*

 

 

국문초록

 

이글은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초기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재구하고 분석하였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 형성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에서 창작, 향유, 전파된 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그 결과 《신태보 옥중수기》, 〈빈낭유학기〉 및 정규하 신부의 서한에 수록된 이야기, 〈문베드로 자탄가〉, 〈경축가〉를 비롯한 천주가사, 〈조 마리아 할머니 이야기〉를 비롯한 구비전승된 이야기, 소설 〈용문산 김회장〉 등을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남긴 천주교 문학의 유산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풍수원 천주교 초기 공동체의 삶과 신앙을 조망하고 분석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풍수원 천주교회의 역사는 〈경축가〉에서 말한 것처럼 풍요롭다. 풍수원은 떠나온 자들의 교회, 이주자들이 모여 신앙으로 일군 새 하늘 새 땅이었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순교자들의 유가족과 박해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모여 신앙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본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풍수원 성당이 설립된 이후에는 신자와 사제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성당을 짓고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고 나이 들어간 곳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신앙은 노래와 이야기로 표현되고 전해질 수 있었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남긴 글들을 ‘풍수원 천주교 문학’으로 명명한다면 풍수원의 천주교 문학 역시 풍수원 천주교회의 보배로운 유산이다.

 

정제된 표현으로 승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구비문학뿐 아니라 풍수원의 글쓰기에는 순교자 문학, 사제의 문학, 평신도 문학의 유산이 있다. 그들은 수기와 여행기, 서간과 소설, 그리고 노래와 가사를 남겼다. 그것은 한 지역의 문학으로서뿐 아니라 한국천주교 문학의 상징성을 응축하였다. 풍수원 천주교회가 한국 교회사에서 지역 교회의 의미를 넘어서는 상징성과 대표성이 있듯이 풍수원 천주교회가 남긴 문학 활동, 글쓰기 역시 그렇다.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후속 연구를 통해 앞으로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남긴 문학이 제대로 평가받고 전승되어야 할 것이다.

 

 

Ⅰ. 들어가며

 

이글에서는 풍수원 신앙공동체가 남긴 글, 특별히 문학 작품을 통해 초기 풍수원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재구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풍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교회 공동체를 지칭한다. 풍수원 성당은 예수성심을 주보로 1888년 6월 20일에 설립되었다. 이글에서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풍수원 성당 설립 이전 시기에 있었던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포함한다. 또한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에서 창작, 향유, 전파된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다만 전문 작가들의 작품으로 문학활동을 한정하지 않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남긴 글쓰기 중 문학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였다.

 

풍수원 성당이 한국문학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예는 찾기 어렵다.1) 그렇다고 풍수원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문학 활동이 없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한국문학의 대상이 되거나 주제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풍수원 신앙공동체가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들의 삶과 신앙을 글로 남기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해서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작품을 발굴하고, 그 작품들을 통해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삶과 신앙을 찾아보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글은 그동안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풍수원을 천주교 문학사 안에서 호명하는 글이다. 이를 위해서는 풍수원을 배경으로 혹은 풍수원에서 창작된 작품들을 발굴하여 문학 자료로 확보하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앞으로도 이어져야 할 풍수원 천주교 신앙공동체 문학 연구의 과제이다. 다만 이글에서는 지금까지 찾은 풍수원 신앙공동체가 남긴 작품을 분석대상으로 한다. 즉 〈신태보 옥중수기〉, 〈문베드로 자탄가〉, 〈빈낭유학기〉, 〈용문산 김회장 〉, 정규하 신부 서간과 르메 신부 서간 및 공소 이야기, 구비문학 자료집에 수록된 풍수원 소재 작품, 《경향잡지》 소재 글 등이다.

 

 

Ⅱ. 새 하늘 새 땅, 순교자 유가족과 함께 : 《신태보 옥중수기》

 

강원도 지역 천주교는 신유박해로 인한 신자들의 도피를 기원으로 삼는다.2) 강원도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신자들이 도피하면서 형성된 시련의 산물이며, 풍수원 성당은 숨어서 지킨 신앙3)을 대표하기도 한다. 1801년 신유박해는 강원도 교우촌 형성을 촉발시켰다.4) 풍수원도 그러하였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이 《신태보 옥중수기》이다.

 

신태보는 강원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 때문에 강원도로 이주한다. 그의 이주5) 과정은 그가 남긴 《신태보 옥중수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원희에 따르면, 신태보가 이주한 곳이 정확히 강원도의 어느 지역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횡성의 풍수원일 가능성이 높다.6) 또 풍수원 인근에 있는 유현 2리 수구대라는 골짜리로 보고 있는 시각도 있다.7)

 

《신태보 옥중수기》는 그가 1836년 12월 28일에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샤스탕 신부의 요청으로 옥 중에서 쓴 기록으로 추정된다.8) 이것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그 내용이 인용된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도 신태보에 대해 서술하고, 《비망기》에서보다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다. 샤를르 달레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원사료로 하여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신태보 일기를 소개하였다. 2016년 유소연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삽입된 신태보 옥중수기를 번역하여 단행본 《신태보 옥중수기》로 간행하였다.9) 유소연은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의 프랑스어본 중 신태보 관련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특히 다블뤼 주교가 신태보의 옥중수기를 인용한 부분과 다블뤼 주교의 노트를 구분함으로써 신태보 옥중수기 내용을 생생하게 전하였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유소연이 펴낸 《신태보 옥중수기》를 정본으로 삼는다.10) 《신태보 옥중수기》는 신태보가 전주 감옥에서 쓴 수기이다. 현전하는 《신태보 옥중수기》에서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강원도 지역, 풍수원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담고 있다. 다블리 주교는 박해 이후 산촌으로 이주하는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아져서 조선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은 신자들로 가득 찼으며, 고통과 희생을 감수했음을 전한다. 그중 신태보의 옥중수기는 “수많은 교우들이 겪었던 시련을 눈에 선하게 보여주는”11) 글이라 소개한다.

 

《신태보 옥중수기》에는 신태보가 쓴 옥중수기가 열한 번 인용된다. 수기의 내용은 1~7까지의 이야기와 8~11까지로 나뉜다. 전반부 내용을 아우르는 마지막 일곱 번째 이야기는12) 신태보가 강원도로 이주하기까지의 여정과 그곳 생활에 대한 글이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앞서 인용된 여섯 개의 인용문보다 내용이 길고 구체적이다. 그만큼 강원도로의 이주 이야기가 신태보 옥중수기에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이야기는 1827년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1804년 신태보는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곱 번째 이야기는 1801년에서 1804년 이전까지, 신태보의 원래 거주지였던 이천과, 신태보가 순교자들의 유가족들이 살고 있음을 알고 찾아간 용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주하게 된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한다. 주문모 신부님을 찾아다니던 신태보는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하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신유박해 직후 신자들 사이에서는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하여 당시의 순교자들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는 일들이 빈번하였다. 신태보도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더욱 깊어졌지만 “박해는 어지간히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우리에게는 우리 둘뿐이었고 기도서도 다 잃어버리고, 무슨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13) 처럼 신앙생활의 위기와 갈증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순교자들의 유가족이 모여 산다는 용인이었다. 그들과 함께 “다시 기도서를 읽기 시작하였고 주일과 첨례를 지켰”다. 게다가 유가족들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부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와 신부가 권고했던 내용들을 들을 때면 마치 내가 신부를 직접 뵈옵는 양 내 마음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쳤다.” “천사와 같은 교우들”과 함께 외교인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이천에서 용인까지 40리 길을 오갔던 신태보. 결국 유가족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가서 작은 촌락을 이루며 살기고 작정하”고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이주한다.

 

부지불식간에 농사철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드니 눈이 쌓이고 다니던 길들이 막혔다. 인근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이웃과 왕래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라 40명이 넘는 우리는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다. (중략)

 

아이들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달라며 울어 대고 어른들조차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였다. 살 가망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어디를 보나 우리는 죽을 판국이라 그들은 자기네를 이 끔찍한 처지로 몰고 간 원인이 천주교 때문이라고 투덜대며 이러한 불행을 자초한 자기들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그 병을 고치고 그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딱 맞는 유일한 약은 식량이었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게 소용없었는데, 어디서 식량을 구한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모르는 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바깥으로 돌아다니고 산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있는 데서 70리가량 떨어진 곳에 최 진사라는 부자가 살고 있다는14)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이틀을 묵으며 우리 식구가 처해 있는 끔찍이도 가난한 형편을 낱낱이 고하니 그가 벼 열 섬을 얻도록 주선해주었다. 나는 운반비를 안 들이려고 벼를 꿔 준 마을 사람들에게 찧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그렇게 받은 쌀에서 일부는 팔고 나머지는 이삼일에 걸쳐 나르게 하였다. 그 쌀은 모두 정해진 기간에 조합[계]에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일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나는 다시 우리 식솔들을 애써 다독였더니 그제야 비로소 내 말을 들었다. 우리들 사이에 다시 기쁨이 살아났고 참으로 서로를 아끼는 듯하였다. (중략)

 

여기저기서 꾸어 쓴 돈이 100냥이 훌쩍 넘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빚이 얼마까지 불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조심해서 아껴야 한다고 말하면 모두들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침통해 하였다. 그저 되는 대로 살아야 했다.15) (밑줄은 논자)

 

다블뤼가 전한 신태보의 수기 중 강원도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끝난다. 그 이후 강원도 교우촌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옥중수기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위 인용에서처럼 큰 결심을 하고 신앙으로 결단한 강원도 산골로의 이주 후 그들은 가난과 추위, 굶주림과 절망과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신태보가 이 수기를 쓴 것은 1839년을 전후 즉 강원도에서의 생활이 35여 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신태보는 강원도 산골에서의 생활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한다.

 

이 이야기를 신태보의 시점이 아니라 공동체를 중심으로 분석한다면 풍수원 초기 공동체의 성격을 다 명확히 알 수 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살기 위해, 기쁘게 살기 위해 이주한 이주 목적이라든가 이주를 위한 준비와 과정, 이주 후 생활의 어려움이 이 수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순교자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동체였으며,16) 신태보 외에 이들을 책임질만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였다. 구성원은 주로 여성들과 노인들, 아이들이었다. 순교자들의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 노인, 아이들의 공동체였기에 생계의 어려움이 더욱 절박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강원도 산골은 외교인들을 피할 수 있는 것 외에는 기후도, 땔감도, 식량도 모두 다 열악했다.

 

박해자들의 눈에서 벗어나 숨어서라도 어렵게 다시 찾은 신앙의 기쁨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굶주림은 순교만큼이나 어려운 십자가였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도 먹어야 했다. 신태보의 “어디서 식량을 구한단 말인가”라는 탄식이, “그저 되는대로 살아야 했다.”는 허탈함이 당시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힘겨웠던 실상을 전해준다. 그렇게 새 하늘 새 땅, 풍수원의 교우촌은 시작되었다.

 

 

Ⅲ. 페낭 유학생, 풍수원의 사제가 되어 : 〈빈낭유학회고기〉(1943.11), 《사목서한》(1896~ 1929)

 

풍수원 성당은 1백여 년 동안 40명에 가까운 사제와 많은 수도자들을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도 유명하다. 사제 양성은 한국천주교가 시작될 때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절실한 과제였다. 풍수원 천주교회는 조선의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페낭 유학까지 다녀온 정규하 신부가 부임한다. 르메르 신부에 이어 1896년 2대 주임신부가 된 정규하 신부는 1943년 81세로 선종하기까지 47년 동안 풍수원에서 사목한다. 정규하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에 이어 한국에서 강도영 신부, 강성삼 신부와 함께 세 번째로 서품받았다. 게다가 김대건 신부과 최양업 신부가 중국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정규하 신부는 조선 땅에서 서품받은 첫 번째 방인 사제이다. 그런 그의 첫 사목지이자 마지막 사목지가 풍수원이었다.

 

《신태보 옥중수기》에서 교우들이 신앙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했던 것처럼, 정규하 신부도 1884년 11월 사제가 되기 위해 고국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해야 했다. 이 여정을 기술한 글이 〈빈낭유학회고기〉이다. 이 작품은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에서 사목하던 1939년을 전후한 시기에 쓴 글로 《경향잡지》 1943년 11월호(통권 964호)에 발표된다. 잡지사로 보냈던 정규하 신부가 쓴 원본도 현전하고 있어서, 원본과 출판본을 함께 비교할 수 있다.

 

(전략) ... 그 〈빈낭유학기〉를 이번에는 〈은화〉 대신 실리기로 하였다. 이 빈낭유학회고기는 4년 전 본지 주필 바오로 한 신부가 별세하였을 때 그의 동기동창인 아오스딩 정 신부에게 기록하여주기를 청하였더니 성무에 분주하여 몇 달 지난 다음에 보내었으므로 기회가 지난 것이라 그대로 보관하였다가 이제 신부의 별세를 당하여 신부께서 쓰신 그대로 발표하는 바이다. 현대에 학생들이 해외 유학한 이야기는 시장에 나와 도는 보통 상품이라면 우리 선대 신부들의 이런 유학 회고기는 고려자기(高麗瓷器)이라 읽어주기를 바란다.17) - 편집자- (맞춤법 교정 및 밑줄 : 논자)

 

작품 서두에 소개된 편집자의 글이다. 《경향잡지》 1943년 11월호에는 10월 23일에 선종한 정규하 신부의 부고가 실렸는데, 그와 별도로 정규하 신부를 추모하며 발표된 글이 〈빈낭유학회고기〉이다. “반도에서 81세까지 장수한” 최초의 신부 정규하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빈낭유학회고기〉가 《은화》 대신 발표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편집자가 〈빈낭유학회고기〉 역시 《은화》처럼 사제가 쓴 가치 있는 한국 천주교 문학 작품으로, “고려자기와 같은 귀한 예술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이 작품이 정규하 신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빈낭유학회고기〉는 4년 전 즉 1939년 “전 본지 주필 바오로 한 신부가 별세하였을 때” 그의 동기동창인 아오스딩 정 신부가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한기근 신부 선종을 추모하기 위해 빈낭유학기를 청탁했으나 정 신부가 성무에 분주하여 몇 달 지난 다음에 원고를 보냈기 때문에 발표의 기회를 놓치고 선종 후 유작으로 발표된다. 편집자는 “신부께서 쓰신 그대로” 발표한다고 하였지만, 남은 원본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제목이 바뀌었다. 작품의 원제목은 〈빈낭유학회고기〉가 아니라 〈사인 생도 빈낭학교(四人 生徒 檳桹學校)로 가던 로뎡긔〉이다.18) 《경향잡지》에 발표된 〈빈낭유학회고기〉라는 제목은 페낭 유학시절에 대한 글로 연상되는 제목이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페낭 유학 시절에 대한 글이 아니라 원제목처럼 조선을 떠나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노정기이다.

 

명치 16년(1883) 8월 18일 경성 종현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하다가 동 17년 11월 초에 한 바오로, 최 바오로, 문 바오로, 정 아오스딩 4명 생도를 빈낭학교로 가라하신 백주교 명령이 나리셨더라. (〈빈낭유학기〉, 86쪽)

 

작품의 시작 부분이다. 유학을 가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1883년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었지만, ‘명치’나 ‘경성’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작품에서는 일제의 연호와 지명을 쓰고 있다. 발표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는 ‘순사’라는 말도 나오는데, 모두 일제강점기를 반영하는 말들이다.19) 이 노정기에는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시카를 들러 홍콩에 도착, 다시 싱가폴을 거쳐 페낭까지 이르는 여정과 일화들이 소개된다.

 

백 주교 즉 블랑 주교의 명령을 받은 네 명의 신학생은 학당의 부인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길을 떠난다. 바빠서였는지, 바느질 대신에 부인은 풀로 옷단을 칠하고 인두로 지져 옷을 만들었다. 배를 타기 위해 인천으로 향하는데, 마침 진눈깨비가 쏟아져서 두루마기가 젖어 결국 옷단이 풀어져 너불거린다. 그러나 길 가는 중이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또 남이 수상하게 여길까 봐 불안한 마음에 손을 쓰지 못한다. 신학생들은 일부러 날이 저물어 인천 항구에 도착한다. 여관집에서 저녁을 먹고 밥풀을 이겨서 두루마기 단을 칠해 화로에 말려 입고는 밤중에 거룻배를 얻어 타고 가만가만 노를 저어서 일본 화륜선에 오른다. 그렇게 페낭으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일본, 부산, 나가사키를 거쳐 홍콩, 싱가폴, 페낭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각 장소에서마다 에피소드를 통해 여정이 전개된다. 특히 여정 초반부에는 순사를 피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애를 태운다. 이는 《신태보 옥중수기》에서 강원도 산골로 피신해 가던 교우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홍콩에로 갈새 우리들이 어케 어리석든지 음식을 우리에게로 가져 오려니하고 점심을 기다리나 한 무소식이라. 이와갓치 잇흘, 거의 3일동안 기다리나 도무지 아무 동정이 업스니 최바오로, 문바오로 두 아해들은 참다못하야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어하려하느뇨 하며 누어 일어나지 못함을 보고 마지 못하야 배웃층에로 간신히 올나가 살펴보니 선장 비슷한 양인이 지나감을 보고 모양 업는 경례를 하며 언어는 통치 못하고 손짓으로 입을 가르치며 먹을 것을 애걸하매 그 사람이 닫고 가더니 얼마 잇다가 면보 세개와 홍주 두 병과 향유 (더) 두갑을 청인에게 들리고와서 먹는 형용하야 가르치고 간 후에 네히 안저 이것을 먹고나니 정신이 나더라. (〈빈낭유학기〉, 87쪽)

 

외국으로 가는 항해를 처음 하는 네 명의 신학생은 언어가 통하지 않고 도와 줄 사람도 곁에 없었다. 사흘을 굶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하려 하느냐”는 탄식, 손짓으로 “먹을 것을 애걸하”는 모습은 《신태보 옥중수기》에서 신태보와 교우들이 겪었던 굶주림과 비슷하다. 사제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그들 역시 굶주림과 고통의 여정을 통과해야 했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페낭 신학교에 도착했을 때의 기쁨은 컸다. “너무나도 즐거우며 그곳에 동향 생도들을 만나 볼 제 부모같이” 반가웠다는 기쁨으로 노정기는 끝난다.

 

〈빈낭유학회고기〉가 페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통해 신앙의 길, 사제 성소의 길을 서사화했다면, 그가 풍수원에서 사목하며 남긴 서한 《풍수원에서 온 편지》는20) 사제 생활을 통해 만난 풍수원 공동체의 삶을 전한다. 《풍수원에서 온 편지》에는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에서 작성한 105통의 서한을 포함해 풍수원 사제로 살면서 작성한 114통의 서한이 있다. 1896년 사제가 되어 풍수원으로 소임을 받은 정규하 신부는 1920년대까지 33년에 걸쳐 풍수원 천주교회 공동체의 삶을 기록한다. 판단이 어려운 일을 주교에게 묻고 의견을 청하던 젊은 사제의 편지는 후에는 주교의 명령도 융통성 있게 행할 수 있는 성숙하고 독립적인 사제로 변화한다. 무엇보다 정규하 신부의 서한은 당시 풍수원 천주교회의 모습을 전한다.

 

그가 만난 풍수원의 첫 모습은 세례를 받기 위해 290리 길을 무릅쓰고 온 여인, 매우 가난해서 매일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이지만 외교인 부인을 만나 살림을 차린 홀아비, 십이단을 외우며 교리를 익혀 세례를 청하는 여인을 통해 시작된다. 풍수원의 신자들은 소성당 건축을 위험 가운데에서도 시작하는가 하면, 혼배성사 전에 이미 가정을 이뤄 신부를 난처하게 한다.[서한 1] 이 모두가 그가 책이 아닌 삶으로 만나는 조선의 교회, 풍수원 성당이었다.

 

서내 공소의 한 여인은 호랑이한테 잡혀 몸통만 발견되기도 했고[서한 2]21),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서한 3] 문답은 괜찮지만, 교리 이해가 부족하여 고생하는 신자들이 있었고, 투전 노름에 빠진 신자들, 의병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당한 여신도들도 있었다.[서한 3] 신자인데도 르메르 신부를 괴롭혀 중상을 하고 착복을 하는가 하면, 고인돌로 사목방문을 갔을 때는 외교인들이 정규하 신부와 신자들에게 “그 서양 사람이 해마다 자기 신도들, 특히 부인들을 방문한다고 찾아오는데, 부인들이 각자 곱게 차려입고 그 서양 사람이 머무는 집을 들락거리니, 필경 모두 더럽혀졌을 것”이라고 능욕하기도 한다.[서한 3] 늘어나는 고아들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서한 4] 그 고아들 중 많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서한 5] 정규하 신부 부임 초기부터 의병 문제는 풍수원 성당의 난제였다. 세 번째 서한인 1897년 2월 7일자 서한에서부터 나타난 의병문제는 최중규 사건[서한 6, 서한 9]을 거쳐 풍수원 신자들이 의병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서한 35] 등 신자들의 고충, 교회의 어려움이 되었다. 관리들에게 자신의 어여쁜 신부를 빼앗겨 자기 아내를 찾아달라고 청원했다가 오히려 살해당한 예비신자 이인규도 있었다.[서한 7] 40여 명의 신자가 일진회에 빠지기도 했고, 봄철에는 기아가 너무 심해서 몇몇 공소에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어떤 사람들은 칡뿌리로, 어떤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다.[서한 29]

 

1918년 사목서한에서 “신자들이 돈 버는 데에 골몰하고 근심 걱정”을 한다는 내용이나, “신자들 자신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니나, 신심이 너무 없어 보인다.”고 비판하며, “지금은 정치면에서 보나 사회 악습면에서 볼 때, 박해시대보다 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옵는데, 좋지 못한 풍조가 도처에 깔려 있고 성행하기 때문”이라는 고백도 한다,[서한 70] 특히 편지 후반부로 갈수록, 일제 강점기 경제침탈 때문에 더욱 가난에 허덕이는 교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자들은 어렵게 살고 있어서, 돈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대단히 냉담해져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서한 92] 라는 볼멘소리는 그만큼 풍수원 공동체의 가난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제관이 총독부 금서를 접한 일로 수색을 당하기도 하고, 청년 셋이 옥에 갇히는 일도 있었다.[서한 71] “청년 셋이 옥에 갇혔는데 그들 중 한 명은 한문 선생입니다. 취조 결과 많은 소년이 용산 신학생들로 밝혀졌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고, 다만 많은 수가 고소당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이제는 책뿐만이 아니라 노래하는 것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중략) 금서에서 베껴 쓴 것들을 갖고 있거나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주었는데, 용산 신학생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용서가 있었으면 합니다. 신학생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분명히 다시 취조가 있을 텐데, 틀림없이 풍수원 아이들의 대답과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아 두렵습니다.”라는 탄식과 걱정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당하는 조선의 현실, 신학생들의 고충이 드러나며, 이에 대한 정규하 신부의 걱정과 자애를 읽을 수 있다.

 

정규하 신부는 신학생을 아꼈다. 잘못을 저지른 신학생을 대신하여 주교님께 용서를 간청하기도 하고,[서한 98] 그들 때문에 슬퍼하기도 한다.[서한 99] 정규하 신부는 사제성소를 위해 노력과 애정을 쏟았다. 신학교 입학이 어려운 소년을 위해서는 기꺼이 주교님께 입학을 청했다, 《통감절요》을 읽을 정도로 한문을 아는 소년과 한자를 전혀 모르는 신입교우 소년도 신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형제 없는 독자 중에서도 신학교를 가겠다는 소년이 있었다. 이들의 입학을 도운 게 정규하 신부였다. [서한 22, 1902.9. 9.]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에 순명하지 않았던 김 마르코가 이제는 회개하여 용산 신학교 교장 신부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신학교로 돌아가기에 김 요셉은 전에 제가 주교님께 말씀드린 학생으로, 주교님께서는 독자(獨子)이기 때문에 입학이 어려울 거라고 하셨으나, 그의 부모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자기 아들이 입학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자신들은 전적으로 존경하올 주교님의 의사에 따르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하였습니다. 만일 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신학교에 들어간 모든 경비를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경하올 신학교 교장 신부님의 허락 아래 그 소년을 신학교에 보냅니다.”22) 여기서 소년 김요셉은 후에 사제가 된 김휘중 신부이다. 1905년에도 신학교 지원자 신 마르코를 보내는데, 당시 풍수원에는 신학생 서 바오로, 김 요셉이 있었다. [서한 28, 1905. 9. 19참조] 반면 신학생들의 언어 문제로 신학생들을 훈육하다가 불순종하는 신학생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서한61, 1915. 9. 1],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신학생 때문에 신학생 가족들로부터 고초를 겪기도 한다.[서한75, 1919.10.14.]23)

 

신학생 교육뿐 아니라 정규하 신부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더불어 풍수원 공동체는 어려운 형편에도 교육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한다.[서한 113]. “오래전부터 저는 남학교 하나를 세우고 싶었는데, 올해 그것을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큰 호의를 가지고 있어서, 만일 금전적으로 도울 수 없으면 적어도 부역으로라도 저를 도울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마 18칸 되는 한옥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서한 93]에서처럼 돈이 없었어도 풍수원은 교육열이 부족하지 않았다. “많은 신자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러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칡뿌리고 연명하는 사람들도 많”을[서한 99] 정도로 가난했지만, 학교를 지었고, 그곳에서 젊든 나이가 들었든 소년 교육과 신자 교육에 봉사했다.

 

 

Ⅳ. 노래하는 교회, 기도하는 공동체 : 천주가사 〈문베드로 자탄가〉 및 구전 가요


1. 〈문베드로 자탄가〉

 

천주가사는 한국 가톨릭교회 초기 신자들의 신앙의 표현이면서 또한 우리의 문화적 산물이다.24) 풍수원 천주교회 공동체에서도 천주가사를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이 〈문베드로 자탄가〉이다. 《경향잡지》 1948년 8월호부터 10월호까지 3회에 걸쳐 〈자탄가(自歎歌)〉가 소개된다. 작품 전문을 싣기에 앞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을 글을 덧붙인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 자탄가는 20여년 전에 강원도 일부 교중에 애독되고 있던 것으로서, 문베드로라 하는 교우가 성교회에 나아와 열심애주하면서 30여년 동안 신병으로 고통하던 끝에 자기 허물과 세상의 허탄함을 탄식하면서 애주애인을 권고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나 과연 그러한지, 만일 그렇다면 문베드루는 어디 살던 사람인지, 언제쯤 이것을 썼는지 알수 없다. 이를 아는 이가 있거든 참고로 본사에 통지하여 주었으면 고맙겠다. 손으로 베끼어 여러 고비를 넘었으므로 그동안 잘못 기록한 문구가 있는 상 싶어 약간 수정하였으나, 될수 있는대로 원문이라는 것을 그대로 이 아래 소개한다. 그래서 알아듣기 어려운 문구가 아조 없지 않다.25)

 

편집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48년을 기준으로 20여년 전, 즉 1928년 강원도 교중에서 애독되던 작품이다. 편집자는 저자가 문 베드로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므로 아는 사람은 통지해 달라는 부탁도 한다. 그런데 석달 후, 〈자탄가〉 연재를 마치며 작품 끝에 그에 대한 정보가 더해진다. “이 자탄가는 사실 문베드루가 지은 것이라 하며, 씨는 약 1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는데 강원도 풍수원서 7, 8년 동안 살을 때 이것을 지었다고 한다.”26)라는 내용이 작품 끝에 실린다.

 

〈자탄가〉는 문 베드로가 풍수원에서 살 때 지은 천주가사로 전해진 작품이다. 풍수원 지역에서는 〈자탄가〉가 〈문베드로 자탄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실제로 곤의골 공소에서 이 작품을 필사한 노트가 발견되기도 했다. 1990년 10월, 원주 육민관 고등학교 선생이 곤의골 공소에 전해오는 필사본 천주가사 일부를 한경순(요셉, 당시 82세)과 그의 딸 한창식(당시 58세) 그리고 지영환(당시 58세) 회장으로부터 수집하였는데 그 노래가 〈사말의 노래〉와 〈이별가〉, 〈자탄가〉였다.27) 이 노트에는 ‘자탄가’라는 제목 아래에 “문 베드로가 병오(丙午)년 10월 15일에 지은 것이라 하고 너무 길어서 일부만 옮긴다 했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자탄가〉 중 12행이 소개되었다. 병오년이면 1906년이거나 1846년이다.28)

 

〈자탄가〉 혹은 〈문베드로 자탄가〉라 불린 이 작품의 필사노트는 풍수원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고, 1983년에는 충청도 예산에서는 〈문베드로 자탄가〉로 가창된 천주가사가 채록되었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에서 지어지고 불린 천주가사가 풍수원을 넘어 한국 천주교회로 퍼져나간 것이다. 또 고문서 수집가이기도 한 송명근은 고서점에서 찾은 〈자탄가〉를 자비로 해제를 하였는데, 그는 이 작품이 학계에 처음 보고되는 작품이며,29) 저자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으로 볼 때, 50~60 남성으로 천주교 교리에 밝은 사람으로 파악하였으며, 1920~40년대 창작되고 이후 재필사되었다고 소개하였다.30) 그런데 이 〈자탄가〉가 〈문베드로 자탄가〉와 마지막 필사자의 부기를 빼고는 내용이 같다. 〈문베드로 자탄가〉가 풍수원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파된 예가 될 수 있다.

 

〈문베드로 자탄가〉에서 화자는 30여 년 동안 신병으로 고통당하다 자기 허물과 세상의 허탈함을 탄식하고, 애주애인을 권고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지었다는 밝힌다. “우리항상깨어빌어 천당영복얻읍세다 사랑하게사랑하세 우리서로사랑하세 애우애인잘하면은 천당길이여기있소”라는 마지막 결구는 〈자탄가〉의 주제이기도 하다. 4.4조 4음보의 연속체로 총 303구의 내용으로 《경향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될 정도로 그 분량이 긴 이 가사는 무엇보다도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슬퍼하고 탄식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것은 천주교 신앙을 통해 얻은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탄가〉의 화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10세까지의 자신의 생애를 약술한 후 부모를 여의고 참된 즐거움을 찾는 중에 이단서를 보고 실망한다. 천주교를 찾기 전에는 참된 즐거움을 몰라 답답하였고, 천주를 찾은 후에 애달픈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문베드로 자탄가〉에는 강원도 지역을 연상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천주전능온전하사 모든영광다주시네 일월성신조림하여 죽은육신안보하니

청산에다터를닦고 영원집을경영하네 축도봉분하여놓고 금잔디로칠을덮고

뺑쑥으로정자짓고 청송으로울울하고 죄막강산금백년에 두견접동벗을삼고

밤이면은찬이슬에 슬픈바람소실하고 아침날이재앙하면 새소리는슬피울고

설악산림가마귀는 이내무덤조상하네 춘하사이이슬빛은 이내무덤윤택하여

부활지정연구하면 상생으로인도하네 춘하추동사시월에 초목군생자락하네

(밑줄 논자)

 

일월성신을 비추어 죽은 육신을 보살피는 천주의 전능을 무덤가에서 노래하던 〈자탄가〉의 화자는 설악산림 까마귀가 무덤을 조상한다고 읊는다. 〈자탄가〉에서는 아름다운 산천조목과 그 풍광들이 읊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설악”이라는 산 이름이 호명된다.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세는 죽은 다음 하늘로 가는 길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산은첩첩천봉되니 산밖에도산이 있고, 물은흘러강수되니 이골저골물도많다”는 표현은 강원도의 자연이 천주의 신앙을 통해 죽음 이후의 하늘길로 묘사된 듯한 장면이다.31)

 

〈문베드로 자탄가〉는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자연과 일상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탄원하고 사랑의 삶을 결심하는 노래이다. 아름다운 강원도의 풍광은 때로는 죽음 이후 만나게 될 하늘로 가는 길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자연의 생명 하나하나가 마치 하느님의 뜻으로 노래 부르는 듯 의미화된다. 해와 달은 하느님이 지켜주시는 빛으로, 설악산의 까마귀는 죽은 이들을 조문(弔問)하는 지저귐으로 표현된다. 신앙으로 고백된 자연, 그리고 신앙 안에서 성찰한 한 개인의 속죄는 탄식의 형식으로 강원도 교중이 애독하는 천주가사로, 더 넓게는 조선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낭송하고 가창하며 묵상하는 천주가사가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 베드로가 지어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함께 부른 자탄의 영성은 시적 화자가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는 자, 탄식을 통해 회개하는 자, 회개를 통해 애주애인의 삶으로 초대받은 자로 형상화되면서 당대 천주교인들의 신앙과 삶을 독려할 수 있었다.

 

〈문베드로 자탄가〉의 필사 노트가32) 전해지는 곤의골 공소에는 1990년 〈문베드로 자탄가〉와 함께 채록된 천주가사가 있는데, 〈사말의 노래〉와 〈이별가〉이다.33) 〈사말의 노래〉는 천주가사 〈사향가〉와 비슷한데, 이를 통해 〈사향가〉가 풍수원 천주교회에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별가〉는 공부하러 떠나는 형을 전송하면서 부르는 동생의 노래인데, 《임방지거 가첩》에 전해지는 〈리별가〉와 같은 작품으로, 그 일부분이 채록되었다. 〈이별가〉의 주인공은 이내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로 그의 아우인 이 프란치스코가 형을 사별하고 평소의 정을 잊지 못하여 지은 노래이다. 〈이별가〉는 이본이 여럿인데,34) 곤의골 공소에서 채록한 〈이별가〉 역시 그중 하나이다.

 

 

2. 〈경축가〉, 〈숫자풀이노래〉, 〈신년축하 노래〉,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문베드로의 자탄가〉나 〈사말의 노래〉 〈이별가〉 외에도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와 그 지역에서 불린 천주가사와 노래들은 《경향잡지》와 기타 다른 구비 전승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선 《경향잡지》 1921년 9월호(통권477호) 회보에는 “정신부 은경축”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경축가〉가 실려 있다.

 

경츅가

(독챵) 일쳔구이십일년 신유칠월이십일일 졍신부의경츅이라 엇지그리더왓나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녯젹신유치명쟈의 강개은발마가지 반도강산삼쳔리에 만학쳔봉골골마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도퓌여만발고 입도퓌여무셩니 오주예수즐거우샤 퍼붓이강복이라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셩교창셜이년에 죠션신부은경츅을 공경올졍신부 간션야두셧도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풍셩풍풍슈원이 어하말복되도다 어하우리동포형뎨 풍셩온은혜닙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용약에셔 감동지심흥이나니 손을들도발을굴너 우슬우슬츔춥세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산고곡심강원도 헛허잇양의무리 이목구비오관삼 각각병셰극즁야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듯긴듯고못듯병 보긴보고못보병 슬거운듯우몽한병 이러온즁병셰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의약당졔방법으로 이십오년치료제 풍우한파불고고 쥬야불식근로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긔진진쇠로와 검은머리발이라 피골상련쇠안모 황공복디못보겟네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

(독챵) 치료밧은양의무리 감츅지심엇더고 합쟝며쟝궤고 눈물려츅원키를

(합챵) 즐겁도다이날이여 복되도다이날이여35)

 

이 가사는 4·4조 연속체로 후렴구인 합창이 붙어 있다. 1921년 7월 21일 (양력으로는 8월 24일) 정규하 신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며, 이날이 빨리 온 것이 아니라 ‘더디왔다’는 말이 이채롭다. 그의 은경축은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맞는 은경축이었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교회 창설 2백 년에 조선 신부 정 신부의 은경축을 하느님의 간선으로 여기며, 특히 풍수원의 ‘풍’자를 이용해,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곳으로 풍수원을 찬미한다. 정 신부의 사목을 병의 치유에 비유한 점도 흥미롭다. 실제로 정규하 신부는 환자들을 침을 통해 치유해 주기도 했다. 정 신부가 신자들을 25년간 치료하느라 노쇠해지고 백발이 되어 황송하지만, 신자들이 감사하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한다고 노래한다. 12명의 신부와 1500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은경축을 마치며, 정신부는 “25년간 서로 잘못한 것은 금일에 온전히 잊어버리고 금일부터는 일심단체로 도덕의 길로 나아가다가 천당에서도 다시 함께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로 화답하였다. 이 시기 천주가사는 교회의 행사를 경축하는 노래가 가장 많았다. 풍수원 정규하 신부의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 풍수원 공동체가 함께 만들고 부른 이 노래 역시 그러한 천주가사 중 한 편이었다.

 

《횡성의 구비문학》36)은 강원도 횡성지역의 구비문학 작품을 채록하여 정리한 구비문학 자료집이다. 특히 풍수원 천주교회가 있는 서원면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작품이 전해진다. 여기에 채록된 노래들은 천주교회에서 조사한 것이 아니라 횡성문화원 주관으로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채록하였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받아적지 못한 오류가 보이기도 하지만, 천주교 관련 작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원면 {2] 일자나한자 들고보니(숫자풀이하는소리)

일자한자 들고보오 일구월신 생각하니 천당복락이 치기일세

이자한자 들고보오 이천년전 예수님은 만민의죄를 구속하시려

이세상에 탄생하셨네

삼자한자 들고보오 삼위일체 도리를배워서

삼위일체 도리를 지켜나가세

사자한자 들고보오 사사신경 배워서 산고준장 이겨나가세

오자한자 들고보오 오주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수고수련에 묵상합시다.37)

 

시집와서 들었다는 이 노래는 제보자인 김지연 할머니가 배우다 말아서 끝까지 내용을 다 부르지는 못한 노래다. 숫자풀이는 민요풍의 노래다. 이 노래는 제보자인 김지연 할머니가 시집와서 들은 노래라 하니, 풍수원 천주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불린 노래라 할 수 있다. 1부터 5까지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을 쉽고 단순하게 믿음의 밀씀과 소리를 접목해서 불렀다.

 

숫자풀이 노래는 이 노래 외에도 유현리에서 채록한 안복순 할머니의 경우도 있다. “천주교에서는 뜻이 엄청 좋아요, 말하자면, 신앙으로는 근데 여느 사람이 들으면 별 볼 일 없지요.(중략) 각설이 타령 비슷하게. 일자부터 십자까지 해고나선, 또 후렴이 길어요”38)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숫자풀이 노래를 불렀다. 조사자나 채록자는 이 같은 숫자풀이 노래를 민요로 알고 있지만, 숫자풀이도 천주가사의 하나다. 채록자가 ‘각설이 타령 비슷하게’라고 말했듯이 각설이 타령(장타령)의 영향을 받아 일부터 십까지의 숫자에 맞추어 노래한다.39) 천주가사 중 〈천주십계〉나 〈천당가〉가 이에 해당된다. 〈십자풀이가〉 역시 1920년대 장타령을 차용했지만, 구걸을 위한 도입부나 흥을 돋우는 후렴구, 신세한탄, 팔자타령은 빼고 숫자풀이만을 취하여 천주교 교리와 신앙을 표현하였다. 서원면 지역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이러한 숫자풀이 노래를 부르며 교리를 익히고 신앙을 돋운 것이다. 슬픔과 탄식을 노래로, 기쁨도 노래로, 교리도 노래로 부르며 그들은 신앙을 생활화했다.

 

[15] 신년축하 받으소서 (신년축하소리)

삼천삼백 우리독자 신년축하 받으소서

팔만팔천 형제자매 새해문안 울지나간들 주의말씀 변할쏜가

보배세월 허송말고 우리공부하여 영신학문 공부하세

사랑하는 우리독자 ○○말게 늙지말게

불로초를 캐다줄까 불사약을 사다줄까

주의성총 주의성체 ○○과 볼로초라

뼈를붉은 꽃이없고 한번가기 쉬운게라

가련하온 우리인생 ○영금영 장관일세

고향에로 가려하면 구령사종 떠니니

금년삼백 육십오일 속행영어 힘써하야

영생재산 모든생공 귀향기에 잔뜩싣고

호수천신 날개비로 구중천산 날아가세.40)

 

제보자 최학선 할머니에 따르면, 이 노래는 옛날에 신년 축하노래로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다. 어려서 〈병인잡지〉에 나오는 것을 보고 언니들이 읽는 거 보고 듣고 배웠다고 하는 데 여기서 말하는 〈병인잡지〉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병인잡지〉가 아니라 《경향잡지》로 보인다. 이 노래 역시 4.4조의 천주가사다. “천주가사”라는 명칭이 1970년대 이후 한국문학 연구 안에서 명명되었기 때문에 이분들이 ‘천주가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먼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그간 구전되던 천주가사들이 대거 필사되기도 하고, 특히 《경향신문》이나 《경향잡지》을 통해 출판 유통된다. 1906년부터 1930년까지의 천주가사는 《경향신문》이나 《경향잡지》에 115편, 필사본 20편 모두 135편 정도가 전해지는데, 이 중 천주교회 내부 행사와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많았다. 성직자의 취임축하, 회갑축하, 새성전 건축 축하, 신년축하, 교우환영가, 절기행사 등이 천주가사로 읽고 불렸다. 특히 이 시기의 천주가사의 특징은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교회의 행사를 기념하는 노래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41)

 

최학선 할머니가 부른 〈신년축하받으소서〉 역시 신년을 맞아 교회 공동체가 함께 신년을 인사하고, 주의 말씀으로 공부하며 새해에도 영생을 위해 힘쓰자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1917년 새해를 맞이하여 《경향잡지》 편집자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노래로 보인다. 《경향잡지》에 신년축하 천주가사는 1912년에 처음 등장한다. “어화우리 동포님은 이내츅 드러보오 묵은는 젼송고 새로새 마져보셰”로 시작하는 천주가사이다. 이후 1914년 1월호, 1917년 1월호, 1918년 1월호 등에 신년축하 가사가 실린다. 특히 1917년부터 독자를 부르면서 가사가 시작되는데, 최학선 할머니가 부른 신년축하 노래와 《경향잡지》 1917년 1월에 발표된 〈신년축하〉 노래의 서두가 유사하고 본사와 말사는 1918년 《경향잡지》에 발표된 〈신년축하〉와 유사하다.

 

1917년 〈신년축하〉는 “쳔삼 독쟈졔공 팔만여명 동포교형 신년경츅 하례셰 분도교황 셩샹폐하”로 시작하여 교황과 주교를 호명하며 새해 인사를 드리고, “구하오니 인자천주 엄한의로 거두시고 1917년은 태평성세 삼으로서”로 끝난다. 한 해의 태평성대를 희망하며 부른 노래다. 1918년에 발표된 〈신년축하〉 노래는 “5천여명 우리독자 신년경하 받으소서 금년박색육식오일 덕행으로 신들메고 천국본향 차자가세 천리만리 험한길에 배고프면 못가나니 삼시상종 조만신공 일용음식 궐치말고 매괴경과 본회신공 노정기도 잊지마세”로 시작하여, “천신성인 뒤를따라 천상풍악 천상노래 승전가를 읊으면서 천국본향 들어간다”로 끝난다. 똑같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노래들이 풍수원 천주교회 공동체에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노래는 특히 풍수원 성당이 있는 유현리에서 채록한 노래이다.

 

[137]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가창유희요)

안복순 :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우리를 도우소서

천상천주에 나너를믿고 바라고 또 사랑하니

삶도은혜를 죽을날까지 동해하오니 받아주소서

천상천주여 나 너를 믿고 천상천주여 나 너를 믿고

(그걸 연이어서 나가는데, 후렴이 )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42)

 

제보자 안복순 할머니는 이 노래가 시집 안 가고 사는 동정녀들이 있었고 그들이 부른 노래로 전한다. 이 동정녀들이 풍수원 성당에 있었던 안나회 회원일 것이다. 안나회는 정규하 신부가 발족한 회이다. 안나 회원들이 만과 때마다 불렀다는 성모님을 찬송하는 노래, 동정녀들이 부르고, 또 엄마들이 아기들을 품에 안고 부르던 노래라고 하는데, 예전부터 천주교인들이 드리던 성모호칭기도나 성모님께 드리던 성모 찬송과 같은 기도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문 베드로 자탄가〉와 같은 천주가사의 발원지이자 이 작품을 비롯하여 여타의 천주가사가 애독되고 애창되었던 공동체였다.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으로 남아있는 풍수원의 천주가사들은 천주가사가 천주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노래와 기도로 일상화되고 전승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Ⅴ. 이야기의 산실, 전교 공동체 : 〈조 마리아 할머니〉, 《용문산 김회장》 외

 

교우촌에서 시작된 풍수원 성당은 평신도들의 이야기가 이어졌고, 이들 이야기를 통해 신앙생활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남겼다. 풍수원 공동체가 남긴 이야기는 주로 구전되다가 기록된 구전 기록, 사제가 남긴 서한에 수록된 사연, 또 《경향잡지》 등 교회 매체에 발표된 수기와 소설, 기사들이다. 이중 풍수원 신앙공동체의 삶,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풍수원 할머니, 조 마리아 이야기

 

풍수원 성당 뒷산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 무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비석이 놓여 있다. 구전되던 이야기가 비석을 통해 기록으로 남았다. 무덤의 모습과 비석에 적힌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할머니의 삶

조 마리아 할머니는 불구의 몸으로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뒷면 참조)

첫째 일제치하시 네 명의 고아를 돌보신 우리의 할머니

둘째 반신불수와 중증치매 등 두 분의 할머니를 밥을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하신 우리 할머니

셋째 6·25 전쟁 때는 피난도 못 가고 성당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보존하여 주신 우리 할머니

넷째 동네 노인 임종 때마다 며칠씩 밤을 새며 유족과 함께 하고 돌보신 우리 할머니

다섯째 살기 어려운 집 어린 애들을 돌봐줘서 부모들이 안심하고 농사일 할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이런 할머니를 보면서 살아온 후생으로써 그 고귀한 희생과 봉사가 잊혀지고 사라져감이 너무 안타까워 그 흔적을 이 돌에 새겨 우리 후생들이 본받고 실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면서 이 비석을 세웁니다.

2017. 11. 풍수원 송요셉(순호)

 

(뒷면)

조 마리아 (이분)

1891년 10월 16일 출생

1971년 6월 24일 사망

할머니는 6세 때 아버지를 잃고 의부 밑에서 고생하다 9세 때 민 며느리로 보내졌으나 시모의 학대와 구타로 한쪽 눈을 실명했고 고관절 파열로 절름발이가 되어 쫓겨나서 전전하다 풍수원에 당도하여 남의 애 보기와 살림을 거들다 당시 정규하 신부님의 배려로 안나의 집 문간채에서 소량의 쌀을 지원받아 고아와 장애인 등 7명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고 땔감을 손수 장만하면서 공동생활을 꾸려가는 봉사와 희생을 실천하였습니다.

 

조이분 마리아 할머니는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낳은 할머니, 풍수원 공동체와 함께 한 할머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풍수원 성당은 그분을 성당 뒷산에 모셨고 그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조 마리아 할머니의 삶은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지향한 신앙을 그대로 보여준다. 불편한 몸으로도 고아들을 돌보고,43) 노인을 돌보고, 아이들을 돌보고, 임종 때는 상가에서 유가족과 함께 하는 삶, 그것이 할머니를 통해 드러나는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한국 전쟁 때는 피난도 가지 않고 성당을 지켰다. 구전에 따르면 성당이 중공군의 막사로 점령당하자 할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자신의 집 부엌 바닥을 파서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묻고, 성당과 성당의 제의방을 오가며 제의와 제구, 여러 성물을 하나씩 보자기에 싸서 옮겨와 항아리 속에 넣어 보존하였다. 풍수원의 중요한 신앙 유물들은 대부분 할머니가 이 항아리에 옮겨 담아 보존된 것이다. 당시 보존된 유물(제의와 제구, 성물, 도서 등)은 현재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부는 풍수원 천주교회 구사제관에 마련된 풍수원 성당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정규하 신부의 서간에서도 조 할머니라 여겨지는 이야기가 있다.

 

저의 공소 고인돌에서 살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내용인즉, 시아버지가 남편과 함께 닷새 동안 자부(子婦)를 너무 때려서 며느리가 집안 전체의 강압을 참지 못하고 강물로 뛰어들어 실종된 사건입니다. 그들은 외교인들의 추문을 무릅쓰고 그렇게 포악하게 자기 며느리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단순하고 무엇인가 좀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이름은 조(趙) 마리아라고 합니다. [서한 22, 1902.9.9.]

 

앞에서 소개한 비석의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비석에서는 시집에서 쫓겨났다고 되어 있는데, 정규하 신부의 편지에서는 시집의 강압에 못 이겨 며느리가 강물로 뛰어들어 일어난 실종사건이었다. 이 차이는 당시의 상황 논리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편지에 따르면 이 사건은 고인돌 공소의 신자 가정에서 일어났다고 전한다. 비석의 내용과 정규하 신부의 서간을 종합하면, 1891년에 태어난 조 마리아 할머니는 의붓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다 9살에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1902년 12살의 조 마리아는 시댁에서의 구타와 구박에 못 이겨 자살을 결심하고 강물에 뛰어든다. 그런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는 없고 실종된다. 정규하 신부님은 12살 며느리를 구박한 시아버지와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고인돌 공소 가정이었는데도 ‘포악하게 며느리를 대한’ 그 집의 시아버지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실종됐던 조 마리아는 풍수원에 오게 되고, 풍수원에서 애 보기 등을 하며 지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규하 신부님의 배려로 안나의 집 문간채에서 지내게 된다. 이후의 생애는 비석에 나와 있는 그대로다. 가정적으로 불우했던 할머니는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고, 그것은 그대로 교회 공동체에도 사랑으로 되돌려질 수 있었다.

 

 

2. 안나회 활동과 의병 활동, 기도와 기적 체험 이야기

 

조 마리아 할머니가 기거했다는 ‘안나의 집’은 풍수원의 정규하 신부님이 만든 ‘안나회’의 주거공간이다. 안나회는 1911년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2년부터 안나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정규하 신부는 1926년~1927년 연례 보고서에서 “안나회라는 부녀회가 있는데 회원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매일 미사참례와 성체 조배를 하며, 돈을 모아 가엾은 할머니들과 여신도들과 입교를 원하는 외교인들을 위한 집을 하나 샀다.”고 보고한다.44) 그런데 유현리에서 채록한 구비문학 중에도 안나회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45)

 

[148] 마귀 쫓아냈던 이야기.

안창훈 : 제가 실제로 본 얘기는, 그전에 안화회래는 여자들의 모임이 있어요.46)

조사자 : 네.

안창훈 : 집을 따로 가지고 생활하시던 분들이 있었는데, 그 뭐라 그럴까. 무슨 귀인이 씌였다 그랬지요.

조사자 : 그 재밌는 얘기네요. 한번 해 줘보세요.

안창훈 : 귀신이 씌였다는 여자를. 아기가 하나 있고 그 여자를 데려온 걸 봤어요. 제가.

조사자 : 네.

안창훈 : 마귀를 쫓아다니는 거지.

조사자 : 네.

안창훈 : 그래서 그 실제로 쫓아서 정신이 나는 걸 봤어요,

조사자 : 마귀를 들린 사람을?

안창훈 : 네. 그렇지. 교회에는 물이 성스러운 물이라 그래서 성수가 있고, 울 기독교 계통 전체 신자들이 뫼시는 고상이 있잖아요. 십자가.

조사자 : 네.

안창훈 : 근데 그 세 가지 가지고 고치는데, 그 성수를 뿌리면 뜨겁다 그래. 왜 나를 불을 뒤집어 씌우냐고.

조사자 : 실제로는 뜨거운 물이 아닌데?

안창훈 : 아니지. 찬 냉수로 되 있는 소금물이지요. 뜨겁다 그러고 묵주를 갖다가, 그 불교에서 쓰는 염주 비슷하지요, 묵주가. 근데 그걸 갖다가 목이다 걸면, 나를 왜 목을 매다는냐 그러고. 십자가를 우리가 얘기하기에는 고상이라 그러는데, 고상을 가슴에다가 옮겨 놔갔고 날 죽일라 그러느냐. 이런 식으로 해서 그 사람이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이르러요. 그러면 잠깐 치웠다가 또 하고, 그거를 한 사흘만에 이 사람 이 정신이 동아47) 오는걸 봤는데. 거 어려서 본 것도 정신이 뚜렷해요. 뭐 노래 비슷하게 무슨 소리하느냐 하면은 이승에선 나 더 이상 못 살겠다. 나는 떠난다. 너희들 잘살라. 그리고선 한잠 푹 자고 일어나대요. 멀쩡하게, 사람이.

조사자 : 귀신 소리?

안창훈 : 모르지요. 하여간 눈을 감은 채 이승엔 더 이상 못살겠다. 나는 떠난다. 너희들 잘 살아라 그리고선 한잠 푹 자고 일어나대요. 멀쩡하게, 사람이.

조사자 : 귀신이 나갔단 얘기잖아요?

안창훈 : 그렇다고 봐야지. 내 어려서 그걸 분명히 봤단 말이야. 그래서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

조사자 : 네.48)

 

2001년 서원면 유현리 안창훈 씨에게서 채록한 〈마귀 쫓아냈던 이야기〉이다. 제보자 안창훈은 안창훈의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다. 조사자는 ‘안화회’라고 썼지만 이는 풍수원 성당의 안나회이다. 이 이야기는 안나회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친 내용이다. 안창훈이 당시 68세였으니, 그가 어린 시절이라 하면, 1930~40년경이라 추정된다. 성수와 고상과 묵주로 사흘 동안 돌보았는데, “이승에선 나 더 이상 못 살겠다. 나는 떠난다. 너희들 잘 살라.”라는 말을 하더니 멀쩡하게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제보자 안창훈은 자신이 어린 시절 틀림없이 보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구마 행위를 했는지와 무관하게, 마귀 들린 여인과 아이를 보호하며 그들과 함께 성수와 묵주와 고상을 이용해서 함께 기도하며, 귀신 들린 여인을 도운 안나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본 어린 시절의 제보자는 이것을 ‘기적 체험’으로 회상한 것이다.

 

마귀 들린 이야기와 관련된 부마 이야기는 정규하 신부의 서간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27년~1928년 연례 보고서에서 정규하 신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어떤 신부가 검두라는 공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신자 집 소년들이 신부님 곁에 가까이 와서 인사를 했더랍니다. 그런데 외교인 부인들이 무슨 일인가 보러 가까이 왔는데, 그중 하나가 소년들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웃으면서, “저자가 뭐냐? 너희 아버지나 할아버지라도 된단 말이냐?” 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그 자리에 넘어져 의식을 잃고 땅에 뒹굴면서, 손발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약을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게 웬일이냐고 떠들면서 사정을 알려고 수선을 피웠으나, 부마(付魔)가 아니고는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친척들이 놀라서 신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자들이 그 청을 받아들여 〈성인열품도문〉을 합송하자, 부마 든 여인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즉시 천주교회를 신봉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곁에 있던 다른 친척 여자는 천주교를 싫어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화가 치어 올라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그것은 다 우연이라고 하며 천주교를 욕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도 즉시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먼젓번 여자와 똑같이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먼젓번 여자처럼 별수가 없게 되자, 이번에도 신자들이 다시 그녀를 위해서 〈성인열품도문〉을 합송했습니다. 도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마한 그 여인도 즉시 멀쩡해져서, 맑은 정신으로 천주교는 참 종교라고 공언하고 받아들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가정이 지금 열심히 성교회 기도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서한 113]49)

 

이 이야기도 마귀를 쫓아내는 이야기이다. 외교인들이 신부님을 공경하는 모습에 욕을 하자 그녀는 마귀에 들린 행동을 하게 된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치유된 여인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를 본 다른 친척이 천주교를 욕하였더니 부마에 걸린다. 이 여인도 치유를 받고 천주교를 인정하게 된다. 앞의 구비전승으로 이어진 이야기와는 달리 여기서는 〈성인열품도문〉이 마귀 걸린 여인들을 치유하는 기도로 등장하며, 치유의 기적이 전교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천주교인을 비웃던 외교인들이 마귀에 걸려 교인들의 도움으로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귀 쫓아냈던 이야기〉를 제보한 안창훈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풍수원 성당과 관련한 의병 이야기이다.

 

[149] (설) 외할아버지 의병활동

안창훈: 믿음이 그런 기적을 낳은진 몰라도 요새 기적이라 그러면 좀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런걸 봤어요. 그리고 신자 생활이 할머니, 할아버지 때부터거든. 우리가. 3대째. 그리고 애들이 4대 5대째 교회를 믿는데 우리 할머니 말씀하시는 게 그 한일합방 전에 우리 외할아버지가 의병관으로 계셨는데, 그 할아버지가 뭘 해셨냐면 총이 쓰다가 망가지고 터지고 그러면 그걸 떼워 드리는 땜질.

조사자 : 용접이요?

안창훈 :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땜질이라 그러니까. 그거를 항상 질머지고 댕기셨대요.

조사자 : 네.

안창훈 : 근데 여기 이 저 서면에 약사전.

조사자 : 네, 약사전.

안창훈 : 거기 아시죠?

조사자 : 네.

안창훈 : 약사전에 그전에 의병들이 있었대요, 말하자면 본부야.

조사자 : 의병본부.

안창훈 : 지금 들어가면 아마 의병 비석이 있는 걸 봤어요.

조사자 : 아, 네 약사전에?

안창훈 : 네. 근데 웅리 외할아버지가 풍수원에 사셨는데, 거기를 왜놈이 그때 벌써 들어와서 돌아다닐 때에요. 근데 몰래 숨어서 그 약사전을 내려가서 무기 수리를 해라. 내려가시는데, 왜놈 기병들이 전부 말탄 사람들이 약사전쪽에서 올라온다 이거에요. 그러면이 가을철인데 어디 피할 도리가 없잖아요. 이 자기가 짊어진 거를 보면은 틀림없이 그 물건들이 전부 그런 수리하는 물건들이니까 그거를 알게 됐다 이거야. 잡히면 죽겠고 그래 가지고 인제 볏단, 왜 낫가라고 있잖아?

조사자 : 네.

안창훈 : 그걸 가서 뒤집어 쒸구선 인제 왜놈들이 지나갔지. 볏달인 줄 알고 지나 갔는데, 얘길 들었는데 집에서는 할머니한테 그 징조가 나나탄 거야.

조사자 : 어.

안창훈 : 그래 이제 외할머니가 굉장히 열심히 해요, 기도를. 보통 저녁에 한시간 전에 하고 아침에 일어나시면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세요. 여러 가지 기도를 하시는데, 이 신자가 고상을 걸어 놨는데 고상이 별안간 떳다 이거야. 기도를 마치는데.

조사자 : 남편이 그때 어려움을 당하는 그 시절에?

안창훈 : 그 시절이죠. 그게 막 떠가지고선, 할머니가 그 고상을 품에다 안고 이상하니까 자기 남편 하는 일을 아시니까, 그 길로다가 고상을 가슴에다 품고 나가신 거야.

조사자 : 약사전?

안창훈 : 그렇지. 여기서 약사전이 한 20리 되거든요. 가시는 도중에 왜병 오는 걸 마주친 거야. 그러니까 할머니는 여자니까 고상만 품에다 안고선 고개만 푹 숙이고 지나가셨단 얘기야. 그러니 위험은 면한 거지. 그래 가보니까, 그 고상이 떨던 시간과 할아버지가 그 볏단 가리 에서 쓰고 앉았던 그 시간이 거의 맞더란 얘기에요. 그래 무사하신 거를 가서 할머니가 가서 보셨다고.고 상을 그렇게 아꼈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고상을 누가 가져가서 보관했는지 제가 몰라요.50) (후략)(밑줄 논자)

 

이 이야기는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에서 있었던 의병활동과 성물과 관련된 기적 이야기가 혼합된 내용이다. 풍수원 성당의 의병활동에 관해서는 정규하 신부님과 관련해서 이미 알려져 있다.51) 풍수원 성당의 초기 역사는 일제 강점기와 겹쳐 있었고, 당시 사제 중에서도 조선인 사제로 본당 신부를 했던 정규하 신부님의 항일에 대한 기대는 당시 사람들이나 현대인이나 각별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풍수원 천주교 평신도와 그 가족 이야기다. 의병관으로 망가진 총을 용접하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는 “왜놈 기병”을 피하기 위해 볏단을 뒤집어 쓴 할아버지가 삶의 지혜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여기에 천주 신앙이 더해진다. 바로 그의 아내이자 제보자의 할머니 이야기가 삽입되면서이다.

 

외할머니는 아침이면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는 독실한 신자다. 할머니는 기도 중에 고상을 통해 남편의 어려움을 예감하고 20리나 되는 약사전까지 간다. 도중에 할머니도 왜병을 만나지만 고상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할아버지가 무사한 걸 안 할머니는 아침 기도 중에 고상이 떨었던 시간이 할아버지가 일본병을 피해 볏단을 쓰고 숨어 있던 시간과 일치했음을 알고 이를 주님의 은혜로 여기고 평생 고상을 아꼈다. 일반인들에게야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늘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기도하던 할머니의 신심을 읽을 수 있다.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있었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견딜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 안에서 고상, 묵주, 성물은 때로는 신심의 상징으로, 때로는 기적의 표징으로 표현된다. 당연히 풍수원 신자 공동체에게 성물에 대한 애착은 클 수밖에 없었다.

 

 

3. 풍수원의 유래와 사제와 함께 한 이야기

 

구비 문학으로 정리된 풍수원 이야기 중에는 풍수원 천주교회 공동체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두 개 더 있다. 하나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로, 풍수원 서원면 유현리의 유래를 소개하는 이야기다. 주재용 신부님을 3년 동안 모셨다는 이 이야기의 제보자 김윤식은 그분으로부터 들은 풍수원의 유래를 기억하며 소개한다. 횡성군이 원래는 광천군이었고, 칠봉산에 있었던 서원 때문에 서원면이 되었으며, “일본놈들이 여섯 육자 육리”라고 한 것을 고개 현자를 써서 유현리로 지었다는 내력이다.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를 거쳐 수구대, 떡갈현, 누루개, 오산동에 대한 연유와 풍수원 지명에 대한 이야기, 노랑이 집까지 이어지는데, 그 사이사이 신부님들이 등장한다. 지명의 내력을 소개해준 주재용 신부님, 노랑이 집에 숨어지냈던 프랑스 신부님, 사냥을 즐겼던 구천우 신부님들은 풍수원의 본당 사제는 아니었지만,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에서 기억하는 신부님들이다. 그들에게 풍수원은 피난과 휴식의 공간이 되었다.

 

[158] 풍수원 유래52)

조사자 : 풍수원이?

김윤식 : 풍수원은 이제 횡성군에서부터 내려와야지.

조사자 : 그거 한번 말씀해주세요.

김윤식 : 횡성군은 옛날에 삼수변에 넓을 광자. 광천군이에요. 꼭대기에서부터 화천군, 춘천군, 홍천군, 광천군이 이것이 원주에 원님이 있어요.

조사자 : 아, 그래요.

김윤식 : 네.

조사자 :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데 광천군이라는 말은 저도 첨 들었거든요.

김윤식 : 네, 광천군이에요.

조사자 : 그게 어떤 사료로 나와있지 않죠?

김윤식 : 네, 옛날에 여기 주재용 신부라고 천주교에서 보물 양반이지요. 그 양반이, 전주 교부장으로 있다가, 주교 복색을 입으시다가 주교품을 못 받고,53) 그냥 복색을 벗고 여길 풍수원에 수양을 오신 거야. 오셨는데, 천주교에서 요리문답이라면은 천주교에서 교회 역사를 지닌 교회서나 동양사, 서양사, 아주 무볼통지야.

조사자 : 네.

김윤식 : 그 양반을 한 3년 뫼시고 있어서 지가 그래서 얻은 문자들은 풍월으로 이렇게 맨들은 거에요. 그 양반한테 들었지요.

(중략)

김윤식 : 풍년 풍자, 물 수자를 썼으니.

조사자 : 네.

김윤식 : 풍수리라고 불렀거든. 풍수라는 게. 여기 샘이 150군데 되.

조사자 : 그래요?

김윤식 : 전부 돌아가면서 샘물이야.

조사자 : 이 마을이요?

김윤식 : 그렇지요. 그 샘물이 내려 가다가요, 아래 내려가다가 다리 있는 데가 합친다고 해서 물수자, 입구자, 수구대라고 불렀어요.

조사자 : 네.

김윤식 : 풍수원이라는 게, 그 수구대 골짜구니가 경기도, 강원도 두 갠데 그 골짜구니가 그 골짜구니 고개를 착 넘어서며는 강원도 땅이야. 그리 해 가지고 수구대 골짜구니를 올라와서 이게 국도가 되 있어. 이 길이. 저거는 70년 역사밖에 안 됐어. 지역적으로 왜 강릉넘이냐, 바로 강원도 땅에 들어서서 제일 첫 고개라 해서, 제일 먼저 고개야. 그래서 강원도 강릉을 가려면 강원도 땅의 제일 첫 고개라 해서 강릉넘이야.

(중략)

김윤식 : 여기 강릉넘이 뒷산이, 봉화둑이야.

조사자 : 봉화둑?

김윤식 : 어, 봉화둑이라는 게 이게 산봉우리를 말하는 거야. 봉화둑에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올라가 봉을 해 놔. 그럼 진부령 고개에서 받아 가지고, 대관령 강릉 감사한테 연락이 가는 거야. 거 몽고에 징기스칸에 정치세력 당시에 그런 게 맨들어 논거지. 봉화둑이 있고 강릉넘이가 있고 이렇게 해서 이 길로 올라가고 그다음에 가만히 지역적으로 보면은 대원군 시대 때 천주교 신자를 갖다가 학살을 시키고 자꾸 순교를 모두 시켰잖아. 오죽하면 절두산에 머리만 자르면 한강에 던지고 해가지고 절두산인데. 그렇게 해서 천주교 신자들이 그렇게 노랑이터라고 있어 가지고 그 집이 흔적이 남아있어. 흔적이나 마나 지금 노랑이집이야.

조사자 : 그 왜 그랬는데요?

김윤식 : 강원도 땅에 들어와 가지고 숨어서 거기 들어가 자는 거야.

조사자 : 누가요?

김윤식 : 그 불란서 신부. 한국의 유명한 천주교 신자들, 이런 양반들. 이래 천주교에서.

조사자 : 노랭이터라는 유래가 서양사람들의 외모를 우리가 노랭이라고?

김윤식 : 그것도 생각해야지. 그 사람이 북어새끼나 조기새끼를 한 마리 사면은 매달아 놓고 먹지도 않는다는 거야. 뭐 얼마나 노랭인지 성이 원 노가지. 별명이 원 노랭이.

조사자 : 그분이 살던 집이라고요?

김윤식 : 그렇지.

조사자 : (전략) 한번에 사냥을 가니까 한국 천주교에서 연세가 높아서 돌아가신 양반이 구천우 신부라고. 그 양반이 여길 자주 놀러 오셨어. 사냥을 떡 하니 가니까, 돼지는 왜 장을 차야되요, 옆으로 돌면은 올라간다 그러고 올라가면 돈다고 그러고 거꾸로 알아듣고 설라믄은 사냥을 했어. 사냥을 갔는데, 그날 저녁에 나무는 흔하니까 사랑방에다 불을 얼마나 땠던지 등이 뜨거워서 잠을 못 잘 정도거든. 뜨거워서 앉았다 일어났다 앉았다 일어났다 그러는 판인데 자다가 일어나서 새벽녙에는 쉬 더운 방이 쉬 식어. 두리번 두리번 뭐 덮을게 하나도 없는데. 두내우가 장님으로 살거든. 어린애가 똥을 눠도 그 똥을 못 치워. 그냥 거기에 말라 붙은 거야. 저거래도 우리 내려 덮으세. 구천우 신부랑 몇 이서 옆에 몰이꾼이 제가 나가서 불을 지피지요. 이 사람아, 불을 지폈다가는 뜨거워서 또 잠을 못 잘테니, 춥더라도 좀 참아보세. 그래고 있는 판이야. 똥 묻은 이불을 뒤잡아 쓰고 이러고 잤네. 서로 이불을 끓어 잡아 당겨 가면서 잤는데, 자고서 근방에 돼지가 있다는 걸 알고 거기를 갔어요. 가보니까, 그 돼지 있는 골짜구니를 들어가서 자네는 엽총을 가지고 저기가 서로 하난 여기서고. 구천우 신부가 들어눠 앉았다가 목 떼기가 따갑고 괴로워 죽겟거든. 훌렁 벗어 가지고 보니까 그짓말 보태서 솔가지에 옷에 보리쌀을 갔다가 쏟아 놓것같더래요. 어떻게 이가 많은지. 게 이놈을 솔가지로 씰어 내고선 다시 주서 입고 그러고 있는데, 도네 소리가 나거든. 산돼지가 이제돈다 이말이야. 다섯 마리가 올라오는 거야. 발가벗고 앉아서 이를 잡는데, 올라온다니까 이를 잡다말고 앞에 다리는 몸을 한방 쏴서 한 놈을 잡아 놓니까 한 놈은 옆으로 뛰어 그러한 장소로 여기 있다 이거야.

 

신자들과 사제들의 피난처, 노랑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프랑스 신부님의 거처, 박해가 끝난 후에는 사냥을 하며 즐겼던 휴양의 공간,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머물 수 있었던 곳, “똥 묻은 이불”, “이가 득실거리는” 이불을 덮으면서도 돼지 사냥을 하러 자주 놀러 올 수 있었던 곳이 풍수원이었다. 조사자나 제공자 모두 정확성이 떨어져 내용 전개에 비약이 있지만, 〈풍수원의 유래〉라는 이 이야기는 풍수원이 천주교인들에게 얼마나 각별한 장소였는가를 알려 준다. 풍수원에 살면서도 풍수원을 모르는 이들에게 풍수원의 역사를 알려주는 사제가 머물 수 있었던 곳이었고, 그 사제를 모셨다는 신자는 사제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들의 이야기 속 지명은 풍수원의 고개 고개였고, 그 고개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공소를 짓고 신앙을 키워나간 곳이다.

 

대바위 전설과 유현 3리 밤골, 오상골 이야기를 전하는 〈대바위 전설〉에서도 천주교인들이 와서 살면서 천주교를 전교한 오상골 교우촌 이야기가 나온다. 그곳은 99%가 천주교인이라고 하니, 전형적인 교우촌이었다.54) 신앙으로 삶을 함께 나누며, 신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신앙이었던 교우촌, 그곳이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였다.

 

이상 횡성군 구비문학 중 천주교 풍수원 공동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살펴보았다. 제보자의 연세가 많은 데다가 채록자가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그 내용이 정확하게 남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풍수원 지역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며 마을 공동체 안에서 이어온 신앙 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55)

 

 

4. 순명과 전교, 소설로 남은 김회장

 

풍수원 성당이 건립되고, 정규하 신부님이 사목 중이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풍수원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만날 수 있는 또 한 편의 문학 작품, 소설이 있다. 전문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정제된 문학 양식을 통해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김예석의 〈용문산 김회장〉이다. 이 작품은 1963년 《경향잡지》가 시행한 현상 모집에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1964년 7월호부터 11월호까지 5회에 걸쳐 《경향잡지》에 연재된다. 작가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실화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예석은 원주교구 2대 주교, 김지석 주교님의 형님으로 알려져 있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 회장인 김경희 베드로는 그 부친이었다.

 

주인공인 김 회장은 뮈텔 주교의 일기에도 등장한다. 뮈텔 주교는 세 번째 강원도 사목 방문 때 금두 공소를 방문한다. 그날의 일지에서 뮈텔 주교는 “금두 공소로 떠났다. 그곳에는 같은 계곡에 사는 오산골 교우들도 모인다. 금두는 촌으로 그중에는 박 요셉, 함 니고나오, 김 회장과 같이 유복하게 사는 지주도 몇이 있다. 이곳에는 불쌍한 나병환자가 한 명 살고 있는데, 교우들은 그에게 산 근방에 오막살이 한 채를 마련하여 주었다”(《뮈텔주교 일기》, 1900.11.8)56)고 기록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 회장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소설 속에 교우촌처럼 당시 교우들이 어려운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발표 당시로부터 99년 전, 즉 1864년 태어난 김경희 베드로가 신앙을 갖게 되는 이야기에서부터 용문산 공소회장을 거쳐 풍수원 느루개에 정착, 선종하기까지의 삶을 전한다. 이 작품은 김 회장을 비롯하여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의 모습을 서사화한다. 김 회장은 열다섯 살 때 어떤 상인 계급의 노인이 좀 잘못했다고 엎어 놓고 볼기를 때린 일이 있다. 영세한 후 그는 이 기억이 평생의 짐이 되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의 구분이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그런 일은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그에게 천주교는 누구나 다 같이 천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세상에 태어나고 또 늙고 죽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 소년 김경희는 18살에 아버지를 설득해 공부를 시작한다. 마침 그가 찾아간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였다. 박해시절 그는 한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아버지와 할머니를 설득해 남의 눈을 피해 용문산 갈고개로 이사를 한다. 베드로로 세례를 받은 그는 용문산 갈고개에서 농사를 짓지만 3년 연속 흉작이었다. 그런 중에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 4년 째부터 수확이 좋아 베드로는 용문산의 새로 난 부자로 소문이 난다.

 

백 주교는 베드로를 용문산 갈고개 회장으로 임명한다. 피난을 하던 교우들이 백 주교를 찾아가면 주교는 김 회장을 소개하며 찾아가라고 하였다. 남부여대하여 찾아온 교우들을 김 회장은 “천주님께서 공으로 주신 것이니 같이 먹고 같이 살자고” 했다. 그때 도움받은 몇몇이 베드로와 함께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로 이사를 간다.

 

집에 돌아온 베드로는 이 산골에서는 전교도 안 되겠고 다른 곳으로 찾아다니기도 어려운 일이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갈고개를 떠나 성당 가까운 곳을 찾아 이사한 곳이 바로 횡성 풍수원 본당에서 5리(2키로) 상거하는 느루개라는 동리다. 이곳에 이사를 와서는 자기 집에 객실을 마련해 놓고 동리 사람들은 물론 누구든지 찾아오는 사람이면 재우기도 하며 전교를 해보기도 했다. 한번은 엄동설한 쇳소리 치는 바람은 귀를 도려내는 듯한 저문 날 밖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57)

 

“밥 한술만 주시오.”

문을 열고 보니 한 걸인이 서 있었다. (중략)

“아이구 딱해라 이렇게 춘데 어서 빨리 들어오시오.”

“아니올시다. 그저 한술만 주시면 여기서 먹고 가곘습니다.”

“아니 밥은 줄테니 어서 들어오시오.”

“고마운 말씀이나 신발을 풀기도 안 됐고 너무 지저분해서...”58)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았던 김 회장, 거지도 그에게는 구걸하러 온 더러운 사람이 아니라, 기쁘게 맞아들여 함께 밥을 나누어야 할 형제였고, 전교의 대상이었다.

 

“팔자니 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겨울 동안만 배우면 다 배울테니 염려 말고 다 배워 영세도 하고 봄에 날이 따뜻하거든 어디로 가든지 내 집에서 그대로 있든지 맘대로 하시오.”

 

“공부도 못한 놈이 글씨를 알아야 배우잖습니까?”

“모르면 내가 구전으로 가르쳐주지요.”59)

 

걸인에게 의식주를 다 제공할 테니 겨울 동안 머물면서 영세를 권유하는 김 회장의 모습은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어떻게 교우촌으로 성장하고 이어갈 수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지어 풍수원의 신자들은 걸인이 세상을 떠나도 미사예물을 마련하여 그 사람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다. [서한101, 1924. 5. 1.]60)

 

김 회장은 냉담 교우를 회개시키고자 방문하여 성사를 독려한다. 비록 그 결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더라고 김 회장은 낙담하지 않는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걸인이든 냉담자이든 기쁘게 맞이하고 찾아가는 수고를 감내한다. 집안에 병자가 생기고 큰일이라도 생기면, “빨리 뛰어가서 회장님 좀 오시라구 그래라.” 하며 예수, 마리아, 요셉을 찾듯이 신자들은 그를 찾았다. 김 회장은 달려가 그들과 함께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임종을 지키기도 한다. 김회장은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나이도 많았지만 신부님께는 깍듯했다.

 

베드루가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소지명은 누루개라는 골에 살고 있을 때다. 느루개는 풍수원 본당에 속했으며 정 아오스딩 신부님이 본당신부로 계실 때다. 베드루의 계수 김 상희의 아내 이 누시아가 병석에 누워 임종이 가까워졌다. 베드루는 종부를 청하기 위해 풍수원에 있는 신부님을 찾아 갔다.

 

“왜 왔나?”

“예 종부를 청하려 왔읍니다.”

“종부”

“예”

“누군가”

“죄인의 계수 이 누시아올시다.”

“그럼 나더러 가자구?”

“에 뫼시러 왔습니다.”

“글쎄! 종부를 받을라면 병자를 데리고 와야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략)

“아이고 딱해라. 어서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나는 작난의 말로 그랬는데. 에이 사람들도 지금 막 종부성사 준비를 해놓고 자네오기만 기다리든 참일세.”61)

 

소설 속 정규하 신부와 김 회장의 대화이다. 계수의 종부성사를 위해 김 회장이 신부님을 찾아갔지만, 신부님은 병자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는가 하면, 신부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도 군말 없이 순명한다. “신부님의 명령은 천주님의 명령과 같은 거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생 “복음을 전하고 죄를 보속하여 천당 영복 누릴 공을 쌓기를 소원했던” 김 회장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8세에 주님의 품 안에 잠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지나칠 정도로 전교에 열심이고 신부님께 순명했던 김 회장. 그러나 그런 열성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과 가족, 또 이웃들과 함께 신앙 안에서 기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풍수원 천주교회의 출발은 교우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우촌은 김 회장과 같이 전교의 열성으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나눴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이들이 함께 한 곳, 그곳이 풍수원이었다. 이를 작품화하여 풍수원 문학으로 남은 것이 〈용문산 김회장〉이다.

 

 

Ⅵ. 나가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풍수원 천주교회의 역사는 〈경축가〉에서 말한 것처럼 풍요롭다. 풍수원은 떠나온 자들의 교회, 이주자들이 모여 신앙으로 일군 새 하늘 새 땅이었다. 사제도 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가 그러하였듯이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는 평신도가 모여 신앙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본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풍수원 성당이 설립된 이후에는 신자와 사제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성당을 짓고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고 나이 들어간 곳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신앙은 시와 이야기로 표현되고 전해질 수 있었다. 풍수원 천주교 공동체가 남긴 글들을 추적하면서, 이것을 ‘풍수원 천주교 문학’으로 명명한다면 풍수원의 천주교 문학 역시 풍수원 천주교회의 보배로운 유산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정제된 표현으로 승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구비문학뿐 아니라 풍수원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문학에는 순교자 문학, 사제의 문학, 평신도 문학의 유산이 있다. 그들은 수기와 여행기, 서간과 소설, 그리고 노래와 가사를 남겼다. 이글에서는 이 작품들을 발굴하고 소개하여 풍수원 천주교 문학의 기원과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만 한 본당을 중심으로 한 연구이다 보니, 각론보다는 작품 개괄에 중점을 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풍수원이 남긴 천주가사 〈자탄가〉나 〈빈낭유학기〉, 〈용문산 김회장〉 등에 대한 개별 작품론을 후속 연구로 이어가겠다.

 

풍수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남긴 글쓰기는 한 지역 본당 문학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문학의 상징성을 응축하고 있다. 풍수원 천주교회가 지역 교회의 의미를 넘어서듯이 풍수원 천주교회가 남긴 문학 역시 그러하다. 순교자들의 유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초기 공동체가 신앙의 자유를 얻어 한국인 사제 정규하 신부와 함께 본격적으로 본당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풍수원 천주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그들이 남긴 천주교 문학 역시 본당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제 문학, 평신도 문학, 시문학과 소설,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이 어우러지면서 한국천주교 문학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풍수원의 문학 자료들을 발굴하고, 작품론을 비롯한 후속 연구를 통해 한국 천주교문학 안에서 풍수원이 남긴 글쓰기, 문학 활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전승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주로 아이들, 청년들의 글쓰기보다는 노년의 문학이 많은 풍수원 문학에 어떻게 젊음의 활력을 더할 것인가는 현재 풍수원 교회뿐 아니라 풍수원 천주교 문학의 과제이다. 숨어서 지킨 신앙이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가 되고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면, 그 나무에 깃들여 살고, 새로이 찾아오는 이들이 필요하다. 관광지, 드라마 촬영지 혹은 유적지만이 아니라 풍수원 천주교회의 영성을 기억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살림터, 교회의 마을로 풍수원 천주교의 터전을 이어가야 한다. 그 일에 풍수원 문학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 이글은 2019년 10월 4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에서 개최한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풍수원 심포지엄을 마련해주신 원주교구 특히 문화영성연구소에 감사드린다. 이글은 연구소에서 제공한 자료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자료 제공에 열과 성을 다해주신 이우갑 신부님, 수녀님과 직원분께, 정규하 신부님 자료 발굴에 도움을 주신 원주교구 이성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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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도 천주교의 정치 신학적 고찰〉, 《인문과학연구》 49,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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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횡성군 아라리의 전개양상과 과제 - 횡성의 구비문학을 중심으로〉, 《아시아 강원민속》 29, 아시아강원민속학회, 2015.12.

이원희, 〈강원지역 교우촌 현황 연구(1882~1924)〉, 《교회사연구》 4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 - -, 《강원도 천주교사 연구》, 박사학위 논문, 강원대학교, 2011.

이성희, 〈애주애민의 사목자 정규하 신부〉, 《한국교회사연구자모임(13)자료집》, 2018.8.

이혜정. 〈천주가사의 저작배경과 내용의 변화〉, 《종교연구》 34, 한국종교학회, 2004.

하성래, 《천주가사 연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 - -, 《빛의 사람들 : 순교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의 삶과 생애》,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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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래에 이르러 풍수원 성당은 TV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대중들에게 아름다운 곳으로 부각되었다. SBS 드라마 〈유리화〉, 〈패션 70s〉, 〈조강지처 클럽〉, KBS 드라마 〈애정의 조건〉, 〈그녀는 짱〉, <인생이여 고마워요〉, 〈상두야 학교 가자〉, MBC 드라마 〈러브 레터〉 등 드라마의 배경으로 풍수원 성당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면서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성당 건축의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움 때문이었다. 〈드라마 ·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성당들〉(《가톨릭평화신문》 1094호, 2010.11.28 발행 참고.) 드라마 속 풍수원 성당의 의미는 건축학적 배경 설명만이 아니라 서사 분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현대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풍수원 성당의 서사적 배치와 내용에 대한 분석은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2) 이근세, 〈강원도 천주교의 재인식〉, 《인문과학연구》 40,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461쪽.

 

3) 이근세, 위의 글, 464쪽. 이근세, 〈강원도 천주교의 정치 신학적 고찰〉, 《인문과학연구》 49,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355쪽.

 

4) 최초의 강원도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가 언제인가는 정확하지 않다. 신유박해로 처형된 황사영 백서에 강원도로 도피한 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유박해 전에 이미 강원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유입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5) 김옥희에 따르면 신태보가 신자가족 4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로 도피하여 부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 교우촌이었다. 그런데 ‘최초의’라는 주장은 차치하고라도 신태보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김옥희, 〈한국천주교 박해시대 교우촌 형성에 관한 사적 고찰 I〉, 《신학전망》 54,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1981, 90쪽 참조.

 

6) 이원희, 〈강원지역 교우촌 현황 연구(1882~1924)〉, 《교회사연구》 4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13쪽. 이원희는 이런 가능성이 특히 “풍수원이 양근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인접성이 좋고, 〈교세 통계표〉의 1884년 보고에 공소로 나오고 있으며, 그로부터 4년 뒤인 1888년 본당이 설립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원희, 《강원도 천주교사 연구》, 박사학위 논문, 강원대학교, 2011, 9쪽 참조. 이근세도 이원희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신태보 일행이 용인에서 강원도에 도달하려면 이천과 여주를 지나 원주로 오거나 광주와 양평(당시의 양근)을 통하여 횡성으로 와야 했을 것으로 본다. 천주교 박해 시기가 끝난 후 원주의 용소막 본당이 풍수원 본당에서 분할되었음을 감안할 때, 신태보 일행이 교우촌을 형성한 곳은 풍수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근세, 〈강원도 천주교의 재인식〉, 《인문과학 연구》 40,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461쪽.

 

7) 천주교 원주교구 복음화사목국 편, 《옛 교우촌과 공소이야기》, 6쪽. 134쪽. (미발간 자료로,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제공.)

 

8) 강석진, 〈모진 심문과 박해 속에서 피아난 신앙의 불씨〉, 유소연 편역,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 2016, 11~12쪽.

 

9) 유소연 편역, 《신태보 옥중수기》,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순교자의 숨소리2, 흐름, 2016.

신태보와 관련해서는 그가 남긴 옥중수기 외에도 1995년 하성래가 쓴 신태보 평전 《빛의 사람들 :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의 삶과 생애》가 있다. 하성래의 신태보 평전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신태보 관련 내용을 토대로 기술되었다.

 

10) 그런데 《신태보 옥중수기》를 풍수원 천주교 문학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가 프랑스어로 기술됐다는 점, 《신태보 옥중수기》가 사료인데 문학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점, 《신태보 옥중수기》가 풍수원 문학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는 점 등이 제기될 수 있다.

 

11) 유소연 편역,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출판사, 2016, 70쪽.

 

12) 이것은 유소연이 편역한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출판사, 2016, 70~79쪽에 해당된다. 

 

13) 유소연 편역,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출판사, 2016, 71쪽.

 

14)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더 밝혀야하겠지만, 고인돌 교우촌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고인돌 교우촌은 현재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의 고인돌로 춘천교구가 관할하고 있으며, 공소 강당이 있다. 원주 횡성의 신자들 중 구교우들이 한결같이 이주해 온 고인돌 교우촌은 강원도에서 아주 오래된 교우촌일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 원주교구 복음화 사무국 편, 위의 책, 53쪽. 74쪽.

 

15) 유소연 편역,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출판사, 2016, 70~79쪽.

 

16) 풍수원에 살았던 순교자의 유가족으로는 최양업 신부의 막내동생인 최신정의 처, 송아가다의 경우도 있었다. 그는 말년에 풍수원에서 지내다가 1930년 92세에 선종하였으며, 그의 일생을 담은 〈송 아가다의 이력서〉가 전해진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저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최양업 신부 일가의 이력서〉 참조.

 

17) 고 아오스딩 정신부, 〈빈낭유학회고기〉, 《경향잡지》 1943.11(통권964호), 86쪽. 이후 작품을 인용할 때는 작품명과 인용 페이지를 인용문 끝에 밝히겠다.

 

18) 작품의 원본은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에서 제공해 주었다.

 

19) 예전 교우들은 ‘순사’라는 말이 아니라 ‘포졸’, ‘형역’, ‘포교’라는 말을 쓰곤 했다.

 

20) 정규하, 원주교구문화영성연구소 편, 《풍수원에서 온 편지 :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이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로 표기. 아래에서 인용하는 서한은 이 서한집에 수록된 것이며 [서한번호, 서한날짜]로 표기한다.

 

21) [서한 23, 1902.12.29]에도 원 베드로가 호랑이에게 넓적다리를 물려 하루 만에 죽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 당한 화였다.

 

22) 정규하, 원주교구문화영성연구소 편, 《풍수원에서 온 편지 :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22쪽. 참고.

 

23) 풍수원 공동체가 보여준 사제들에 대한 사랑과 초기 공동체의 상황과 초가 성당의 모습은 르메르의 신부의 서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가성당은 20여칸의 규모로 1909년 120평의 벽돌 성당이 신축될 때까지 풍수원 최초의 성당이기도 했다. “1891년 로사리오의 달인 10월 일에 풍수원에서는 축제가 벌여졌다. 내 구역 신자들이 도처에서 대거 와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로 맞이하게 된 주임 신부(르 메르 신부 자신)에게 인사하였다. 강원도 산골 한가운데에 성당을 짓고 축성하는 날이었다. 성당이라고는 해도 불란서 성당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불란서의 가장 가난한 지방 성당도 말이다. 성당 지붕은 볏짚으로 뎦여 있다. 무슨 형식의 성당이냐고, 고딕식? 로마식? 불꽃양식? 희랍식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조선의 토속적 형식이라고 대답하면 족할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우리 불란서에서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수수하긴 하지만, 내 피와 땀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초가지붕을 반드시 기와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이삼백 프랑 때문이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되었든 성당의 지붕은 덮여 있기는 하니까.”(르 메르 서한, 최용록 신부 판독 및 번역,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사목서한으로 읽는 한국교회사〉, 《교회와 역사》, 2013.10) 참조.

 

24) 김영수, 〈필사본 천주가사집 출현의 배경과 의의〉, 《인간학연구》 52, 인간학연구소, 2003, 223쪽.

 

25) 〈자탄가〉 1, 《경향잡지》, 1948년 8월호(통권 1001호), 120쪽.

 

26) 〈자탄가〉 3, 《경향잡지》, 1948년 10월호(통권 1003호), 153쪽.

 

27) 천주교 원주교구 복음화사목국 편, 《옛 교우촌과 공소이야기》, 130쪽.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제공 자료)

 

28) 〈문베드로자탄가〉의 저작시기나 저자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로 이어갈 예정이다.

 

29) 송명근은 자신이 소장한 〈자탄가〉 필사본이 “학게에 처음 보고되는 작품”이라고 하였으나 이보다 앞서 〈문베드로 자탄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 하성래는 《천주가사연구》에서 〈문 베드로 자탄가〉를 1906년 작품으로 소개했으며, 강영애는 하성래가 채록한 〈문 베드로 자탄가〉를 〈한국 천주교 장례노래(연도)에 관한 연구〉(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 2005. 31~35쪽, 198쪽 참조)에서 채보한 악보를 소개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였다. 다만 작품 전문에 대한 소개는 송명근의 시도가 처음이었으나, 그는 이 작품이 《경향잡지》에 소개된 〈자탄가〉와 동일 작품임을 알지 못했다.

 

30) 송명근, 〈천주가사 자탄가 일고〉, 신성(비매품). 2017, 7쪽. 

 

31) 풍수원 성당의 1대 신부였던 르 메르 신부의 서한에서도 산에 대한 경탄의 글과 시가 남아있다. “조선에는 산이 도처에 있어 수많은 산을 없애지 않는 한 이 길들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산들을 사랑하고 산에 오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산악들이여 / 그대들은 나의 사랑 / 오막살이집에 은거하여도 그대들은 항상 내게 기쁨을 주네/

운율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산속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순교자들의 자손들이 험한 세상을 피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외교인들이 나무 조각 우상을 부숴버리고, 그때까지 몰랐던 하느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르메르, 1890.2.25. 1889~1890년 사목보고서, 풍수원)

 

32) 굳이 필사노트라 한 것은 옛 필사본의 형식이 아니라 〈자탄가〉를 근래의 것으로 보이는 수첩에 볼펜으로 베껴적은 형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원주문화영성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33) 천주교 원주교구 복음화사무국 편, 《옛 교우촌과 공소 이야기》, 2005, 130쪽. (원주 문화영성연구소 제공 자료), 이 자료에 인용된 천주가사 채록 부분은 다음과 같다.

사말(四末)의 노래 : 남녀교우 형님내여 이 내 말씀 들어보소. / 죽음에는 노소없고 죽는 기한 모르나니 / 일월 내어 조림하고 만물 내어 양육하니 / 금세 만복 다 받아도 천당복에 비길소냐 / 동서남북 사해 팔방 어느 곳이 본향인고 / 복지에로 가자하니 메시 성인 못 들었네 / 빈궁 환난 많다한들 몇 해까지 금심하리 / 인간 만복 다 받아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 우주간에 비켜 서서 조화 묘리 살펴보니 / 아무래도 우리 낙원 천당밖에 다시 없네 / 염려되는 이 세상을 초로같이 스러지니 / 보배같은 이 세상을 어찌하여 허송할꼬 / 빈궁 환난없느 세계 어찌하여 공 세울꼬 / 어화 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 가세 /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 원조 내치셨고 / 부귀 영화 얻었은들 몇 해까지 즐거우며 / 이렇다한 풍진 세계 안주할 곳 아니로다 / 세상 만고 다 받아도 죽어지면 그만이라 / 채읍지고 이아니며 차려지서 그 아니랴/

이별가(離別歌) : 이별이야 이별이야 우리 형님 이별이야 / 높고 험한 산곡에다 일가 친척 가 버리고 / 애련 답답 설음이여 모자정이 어떠하며 / 나신 만물 두려마라 천상 나라 주시리라 / 앞서가는 별을따라 허물로써 천주 증대 / 수만리의 타국으로 독신 공부 가실 적에 / 떠나가네 떠나가게 모친 동생 이별할 제 / 형제 애정 어떠한가 애련 답답 설음이여 / (중략)/ 축성되다 사망이여 광명으로 광명찾고 / 천주 고향 오직 예수 (후략)

 

34) 김영수 엮음, 《천주가사 자료집》 하,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460쪽.

 

35) 《경향잡지》 1921년 9월호(통권477호), 392~393쪽.

 

36) 《횡성의 구비문학》, 횡성문화원, 2002. 

 

37) 2001년 7월 27일 채록. 조사장소 서원면 금대리 김지연 댁, 제보자 : 김지연(여, 87세, 원주 신림 태생, 19세에 금대리로 시집), 《횡성의 구비문학》 1, 횡성문화원, 1066쪽.

 

38) 《횡성의 구비문학》, 1197쪽. 다만 채록자의 실수인지, 같은 숫자노래여서인지 인터뷰 내용만 실려 있고, 안복순 할머니의 숫자풀이 노래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39) 강영애, 〈구전되는 천주가사의 음악적 특징〉, 《藝術論集》 Vol.3, 1999, 195쪽.

 

40) 2001.7. 26 채록. 제보자 : 최학선(여, 86세. 원주 고산 태생, 21세에 금대리로 시집), 《횡성의 구비문학》, 1076쪽.

 

41) 김진소는 〈천주가사의 연구〉(《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270~274쪽)에서 현전하는 천주가사를 목록화하여 제시하였고, 이혜정은 김진소 논문에 정리된 천주가사를 내용별로 정리하였다. 이혜정, 〈천주가사의 저작배경과 내용의 변화〉, 《종교연구》 34, 한국종교학회. 김진소에 따르면 교회 내부행사가 전체 작품 중에서 48.2퍼센트를 차지한다. 그 외 설교·신앙 관련 노래가 17퍼센트, 절기행사 14.8퍼센트, 현실의식 8.2퍼센트, 우화 고담이 7.4퍼센트, 교육과 관련된 작품이 4.4퍼센트이다. 이혜정 논문 413쪽에서 재인용.

 

42) 《횡성의 구비문학》, 1195~1196쪽. 

 

43) 고아를 돌보는 일은 풍수원 성당 ‘성영회’의 활동이기도 했다. 성영회 고아들에 대한 내용은 1924년 5월에 작성한 정규하 신부의 〈1923~1924 성영회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정규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 102쪽 참조).

 

44) 정규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 : 정규하 아우구스티누스 신부 서한집》, 김상균 옮김,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251쪽.

 

45) 본고에서 구비문학으로 채록된 이야기들을 인용한 것은 교회기록으로 남겨 보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Ⅴ장 2와 3에서 인용된 작품들은 모두 구비문학 자료집에 수록된 이야기이며, 교회 밖의 자료이기 때문에 가능한 관련 내용을 모두 인용하고자 했다.

 

46) 안나회를 채록자가 ‘안화회’로 잘못 받아 적은 것으로 보인다. 

 

47) ‘동아’는 ‘돌아’의 오타로 보인다.

 

48) 제보자 안창훈 (남 68세, 토박이). 채록일 2001.7.26. 조사장소 : 서원면 유현2리 안창훈 댁. 《횡성의 구비문학》, 1206~1207쪽.

 

49) 정규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 : 정규하 아우구스티누스 신부 서한집》, 김상균 옮김,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254~255쪽.

 

50) 제보자 안창훈 (남 68세, 토박이). 채록일 2001.7.26. 조사장소 : 서원면 유현2리 안창훈 댁. 《횡성의 구비문학》, 1207~1209쪽.

 

51) 《경향잡지》에서도 여러 차례, 정규하 신부의 의병활동 도운 내용을 기사화했다. 의병을 맞이하여 침식을 제공하면서 격려했고, 의병을 추격하여 온 일군에게 시달림도 많이 받았다.(〈풍수원 50년고 정규하 아우구스띠노 신부 일대기〉(1972.1.)) 정신부와 독립운동 지원은 주로 의병 훈련 장소의 제공이었으며, 3·1 운동 당시 횡성과 원주 지역에서 일어난 큰 규모의 만세운동에 풍수원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양떼의 삶에 투신한 정규하 아우구스띠노〉(1991.3.) 고 최석우 신부도 대담에서 “기미 운동 때 상해에서 연락해서 군자금을 대주고 나름대로 조국을 위해 애쓴 풍수원본당의 정규하 신부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그걸 고자질한 게 바로 한국 신붑니다.”라는 증언을 하였다.(〈민족과 함께하는 종교로 거듭나야〉(1994.8)) 1995년 7월호에서도 ‘고통받는 겨레와 함께 숨쉰 정규하 신부’가 소개되고 있다.

 

52) 제보자 : 김윤식(남 76, 토박이), 조사일 2001. 7. 26. 서원면 유현2리 김윤식 댁. 《횡성의 구비문학》, 1217~1221쪽.

 

53) 잘못 기억하는 정보인 듯하다. 주교품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대구 교구장 사임 이후를 이르는 듯하다. 주재용 신부(1894∼1975)는 제2대 전주 교구장, 제4대 대구 교구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대구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춘천교구 양덕원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교회사 연구에 몰두하였고, 1968년 은퇴한 후로 춘천에 머무르면서 교회사 연구에만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擁衛)》(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배론성지》(가톨릭출판사, 1975) 등을 저술하였다.

 

54) [168] (설)대바위 전설: 제보자 : 안경주(남 70, 토박이), 조사일 2001. 7. 30. 서원면 유현3리 복지골 노인회관. 《횡성의 구비문학》, 1231쪽.

 

55) 풍수원 성당을 비롯하여 원주교구가 풍수원 성당의 유산을 기록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구비전승 기록을 살펴보면서 구전기록의 재기록화에도 교회의 관심과 노력이 더욱 필요함을 절감했다.

 

56)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490쪽. 

 

57) 김예석, 〈용문산 김회장〉, 《경향잡지》, 1964년 10월호 55쪽.

 

58) 위의 글, 1964년 11월호, 39쪽. 

 

59) 위의 글, 40쪽.

 

60) 정규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 101쪽.

 

61) 김예석, 〈용문산 김회장〉, 《경향잡지》, 1964년 11월호 44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윤선(고려대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06&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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