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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순교자 집 여성들의 삶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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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9-24 ㅣ No.1054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순교자 집 여성들의 삶과 기도

 

 

신유박해는 1801년 벽두부터 시작되어 1년 내내 계속되었다. 잔인한 심문과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체포와 처형에 민심은 흉흉해졌다. 결국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 22일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연말 안에 모든 송사를 끝내고 형 집행도 마무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 이경도를 비롯한 15명이 음력 12월 26일에 순교했고, 이틀 뒤 전주 숲정이에서 이경도의 동생 이순이와 그 일가친척들이 처형되면서 공식적인 형 집행이 끝났다.

 

 

잊혀진 순교자 집 여성들

 

박해는 현세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마감하게 했다. 동시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치명자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순교자의 어머니, 누이, 아내, 딸, 처제, 처형 등이 특별한 행로를 밟아야 했다.

 

초기 교회를 세우는 데 기여했던 인사들의 가족은 연좌제를 모면할 수 없었다. 숲정이에서 처형된 이순이와 그 가족도 각각 관비로 선고받은 이후에 처형된 사람들이다. 황사영의 가족(어머니, 아내, 아들)과 그 노비들이 관의 노비가 된 것도 알려져 있다.

 

윤지헌은 제사 문제로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이었다. 그는 1801년 전주에서 유항검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부인 유종항은 흑산도 관비, 아들 종원(15세), 종근(13세), 종득(4세)은 각각 제주목, 거제부, 해남현에 관노로 갔고, 딸 영일은 경흥부의 관비로, 성애는 평안도 벽동군의 관비로 갔다.

 

또 주문모 신부를 모셔 들였던 윤유일과 지황의 뒤를 이어 북경 연락을 맡았던 황심도 신유박해 시기에 처형되었다. 황심의 부인 증분은 진도군 금갑도 관비, 아들 가록(5살)은 전라도 흥양군 사도에, 오록(2살)은 경상도 남해현에 관노로 보내졌다.

 

연좌제는 모반과 대역을 한 죄인의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다. 죄인의 부자 · 처첩 · 조손 · 형제자매 · 자식의 처첩까지 해당되었다. 심지어 사위와 시집간 딸에게 연좌제를 적용할 때도 있었다. 천주교 신자는 본디 역모를 일으킨 대역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왕래, 대박 청래, 신부 영입 등에 관련된 이들을 역모죄로 처형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연좌제를 완화하려고 노력해 왔다. 박해 얼마 전인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병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한 괴수의 경우라도 2-3세 아기는 정배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앞에서 보듯 2-3세 아기도 관노로 보내졌다. 부모로서 스스로 세속적 부귀영화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철모르는 자식의 처벌을 보면서 신앙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좌제는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물론 유배당한 여성도 많았다. 보통 죄인들이 유배형을 받으면, 도사 또는 나장들이 지정된 유배지까지 압송했다. 그곳에서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고, 수령은 죄인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했다. 보수 주인은 유죄인에게 거주할 곳을 제공하고 그를 감호하는 책임을 졌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는 유죄인의 생활비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했다.

 

또한 유죄인에 대한 능멸과 학대도 심했다. 유형은 기한이 없는 종신형이었다. 간혹 죄가 감형되거나 사면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형벌이었다.

 

 

순교자 집 여성들의 인권 유린

 

죄인 명단에 없는 순교자 집 여성도 많았다. 제사 문제로 순교한 윤지충에게는 13세의 딸이 있었다. 그는 진산 사건 뒤 임시로 자기 아버지의 제자였던 아전 김토마스의 집에 가서 숨었다. 낮에는 후원에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그는 자기 처지에 따라 공주 지방 숯방이의 송씨 집으로 시집갔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따라 사위의 집으로 가서 천주교를 계속 믿었다고 하지만, 그 뒤 이들은 교우들과의 접촉이 끊어졌다.

 

심문 과정에서도 여성 인권이 유린되었다. 김흥금은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 신유박해 때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그는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경북 진보 머루산에서 19세 된 아들 장복과 혼기에 이른 딸 작단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경주 진영을 거쳐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신문을 거쳤다. 그런데 그의 딸은 안동으로 압송되고 얼마 안 있어 관속에게 강탈되었다. 그러나 관변 기록에는 딸이 배교해서 만경현으로 유배 보냈다고 되어 있다.

 

그나마 여성은 기록에 남겨지기조차 쉽지 않았다. 신유박해 때 김사집은 교회 서적을 베껴 나누어 주고 교리를 가르치다 체포되어 결국 청주 장터에서 곤장을 맞고 치명했다. 그런데 김사집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세히 전하지만, 그와 함께 처형된 골룸바 세례명의 여성 신자에 대해서는 “덕산 고을 별암에 살던 이모라는 양반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죽음에 대하여는 믿을 만한 사항을 도무지 알 수 없다.”라고만 전해진다.

 

 

묵은 교회에 새싹 틔우고

 

조선 사회에서 신자임이 드러났을 때 치르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잠재적 죄인’들이 사회에서 받은 침해는, ‘자신의 딸을 외교인들에게 빼앗기고 식구를 살린’ 김도미니코 회장의 사례가 대변한다. 더욱이 조선은 신분에 따라 법을 달리 적용했다.

 

예컨대 노비가 일반인을 구타한 경우에는 가중 처벌했지만, 양인이 노비를 구타한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처리했다. 이런 사회에서 법이 보호하지 않는 천주교인들, 게다가 여성들의 생활은 훨씬 큰 어려움이 있었다.

 

신앙의 자유가 온 뒤에 르메르 신부는 박해 중 외교인들에게 시집간 여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찾지 않은 순교자 집 여성들의 삶이 이 범주에서 크게 넘어서지 않았으리라.

 

신유박해의 생존자들은 교회를 새로 세우고자 했다. 30여 년 동안 신자들은 노력했고 그 지극 정성은 교회 재건뿐만 아니라 아예 교구 설정에 이르게 했다.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기도와 한숨, 고통이 밀알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로마 교회라는 ‘고목나무’에 새로 필 꽃의 ‘텃밭’이었다. 그 위에 한국 천주교회는 싱싱한 나무로 성장했다. 교회 재건기를 다루며 그들의 기도를 듣게 될 것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 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9월호, 글 김정숙, 그림 하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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