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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학이 만난 영화: 다수의 무지, 더 스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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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23 ㅣ No.892

[심리학이 만난 영화] 다수의 무지, 더 스퀘어

 

 

스웨덴 스톡홀름의 X-로얄 현대 미술관에서 기금 모금 행사가 있는 날이다. 화려한 의상의 스웨덴 최상류층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대기하던 사진 기자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뜨려 댄다. 왕궁을 방불케 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X-로얄의 연회장에는 흥겨운 수다와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정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연회장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번갯불이 번쩍이며 커다란 천둥이 내려친다. 원탁에 둘러앉아 샴페인을 즐기던 사람들은 바로 자기 눈앞에서 펼쳐질 행위 예술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정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마존의 정글을 연상시키는 밀림의 새소리가 들린다. “여러분들은 곧 야생 동물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동물들의 사냥 본능은 먹잇감이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촉발됩니다. 여러분들이 공포를 드러내면 이 동물이 그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도망가려고 하면, 이 동물이 당신을 사냥하려고 끝까지 추격할 것입니다.”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 두드리는 북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당신이 근육을 움직이지 않고, 완벽하게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면, 이 동물은 여러분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숨을 수 있고, 이 동물의 먹잇감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의 정글

 

드디어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녹음된 음향이 아닌 진짜로 내는 소리다. 유명 행위 예술가인 올레그 로고진이 연회장의 입구에 등장한다.

 

로고진은 고릴라처럼 소리 내고 움직였다. 이 행위 예술가는 고릴라에 버금가는 두껍고 커다란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채 반라 상태로 나타났다. 검은색 바지를 입고, 양 손에는 짧고 단단한 검은색 ‘팔꿈치 목발’을 착용했다. 겨드랑이가 아닌 팔꿈치에 지지대가 있는 이 목발 덕분에 로고진은 앞발이 긴 고릴라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이 팔꿈치 목발을 바닥에 쾅쾅 치면, 영화에서 킹콩이 땅을 두드리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로고진의 연기는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로고진은 고릴라처럼 소리내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신사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고 그르렁대며 그의 컵을 깨기도 했다. 울부짖던 고릴라는 결국 신사를 연회장 밖으로 쫓아 버렸다. 고릴라의 울부짖음과 팔꿈치 목발을 땅바닥에 치면서 내는 굉음이 연회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야생 동물과 마주하리라는 안내 방송의 내용은 진짜였던 것이다.

 

화가 잔뜩 난 로고진이 원탁 위로 뛰어올랐다. 여덟 명이 둘러앉은 원탁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뭐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이때, 로고진이 한 여성의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공포에 질린 여성이 도와달라고 말하지만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같은 원탁에 앉은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이 행위 예술가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로고진이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쓰러뜨리고, 머리를 잡은 채로 바닥에 질질 끌고 가도 다들 조용할 뿐이었다. 정글은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2017년 작 ‘더 스퀘어’는 제70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회를 앞두고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을 담고 있다. 도대체 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던 것일까?

 

 

다수의 무지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구성원들 사이에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생기는데, 이를 규범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집단 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배척하며, 심지어는 규범을 어긴 사람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집단의 규범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고 하고, 일단 규범을 파악하면 준수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집단 구성원 다수의 의견을 집단 규범으로 채택한다. 그래서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수의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에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형 강의실에서 한 교수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질문을 해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괜히 질문해서 강의실에 있는 다수의 눈총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결국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채 강의가 끝난다. 하지만 과연 나만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은 모두가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만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해했다는 생각에 질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집단 구성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실제 생각(‘이해하지 못했으니 질문하자.’)과는 정반대의 생각(‘이해하고 있으니 침묵하자.’)이 다수의 생각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되고, 그것이 집단의 규범이 된 것이다. 이를 ‘다수의 무지’(Pluralistic Ignorance) 현상이라고 한다.

 

X-로얄의 연회장에 있었던 참석자들 몇몇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폭력이다. 로고진을 제지해야 한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행위 예술을 감상하는 것 같다. 게다가 행위 예술 시작 전에 안내 방송도 있었다.

 

‘나만 행위 예술을 성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혼자 나서서 로고진을 제지했다가는 로고진의 행위 예술을 즐기고 있던 다수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몰라. 행위 예술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는 없지. 너무 폭력적인 것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행위 예술이 끝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려야겠다.’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침묵은 집단의 규범이 된다.

 

 

이탈자 효과

 

집단 규범에 대한 동조 압력은 집단 내에서 의견이 만장일치를 이룰 경우에 최대가 된다. 모두가 침묵하면, 침묵이라는 규범을 따르라는 압력은 극대화된다. 하지만 집단 내에서 한 명이라도 이탈자가 있으면 규범에 대한 동조는 크게 줄어든다. 만장일치가 깨지는 순간 나 혼자만 집단으로부터 이탈된다는 두려움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함으로써 침묵에 대한 만장일치의 합의가 깨지면, 청중들이 느끼는 침묵에 대한 동조 압력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로고진이 여성을 강간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여성의 비명이 극에 달했을 때, 드디어 한 남성이 뛰쳐나와 로고진을 제압한다. 침묵이라는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이 달려 나와 로고진에게 주먹세례를 퍼붓는다. 규범이 바뀐 것이다, 침묵에서 응징으로.

 

만장일치를 깨는 이탈자가 반드시 멋진 질문이나 영웅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만일 그 이탈자가 강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질문을 해도 침묵에 대한 동조 압력은 크게 줄어든다.

 

그 결과, 침묵은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질문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용감하게 다수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 그 의견이 틀린 경우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 있게 낼 수 있는 것이다.

 

 

엉뚱하고 황당한 사람도 필요한 이유

 

주변에는 엉뚱하거나 심지어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주로 이탈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탈자의 행동은 많은 경우에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이탈자의 행동은 다수의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우리는 대부분 집단 규범에 충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자는 집단 구성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쉽다.

 

이탈자의 시도는 쓸모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집단 규범은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자의 행동이나 의견은 엉뚱하고 황당하기만 할 뿐 아무런 호소력도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만장일치를 깼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탈자는 집단에 새로운 생각과 행동의 공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 덕분에 우리는 다수의 무지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엉뚱하고 황당한 사람도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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