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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신앙의 땅: 광주대교구 소록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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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02 ㅣ No.529

[신앙의 땅] 광주대교구 소록도성당


작은 상처는 큰 상처를 만나면 치유된다

 

 

- 소록도 1번지 성당과 1번지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 하느님의 눈물.

 

 

광주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대주교님이 강론 중에 ‘고통이 많아 은총의 공장’이라고 했던 소록도를 방문하기 위해 소록대교를 건넜다. 방문 전 소록도성당 김연준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과 약속을 정했던 터라 신부님께서 미리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소록도는 변형된 외모와 편견 때문에 타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로부터도 천대와 멸시 그리고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한센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생활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천주교는 1935년 11월 장순업 프란치스코가 입원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박해 때문에 신자로서의 신분을 밝히지 못했으나 장순업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자 강기수 바오로와 허영원 요셉 등도 용기를 내어 함께 했다. 이들을 통해 최초로 병사지대에서 공소예절이 시작되고 전교가 이루어졌다.

 

1943년 7월15일 환우들을 위한 병사 공소가 설립되어 첫 미사가 이루어졌고, 1960년 8월13일 소록도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61년 10월11일 소록도 직원성당(1번지 성당)이 완공되었고 1962년 5월10일에는 소록도 환우성당(2번지 성당) 성모동굴에 대한 축성식이 있었다.

 

- 소록도 2번지 성당.

 

 

1984년 5월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셨고, 그때 환우들에게 주신 십자가는 성당의 전면에 걸려있다. 소록도 환우성당은 2016년 6월1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65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우리 신자들이 물적 봉헌을 통해 건립하곤 하는 통상적인 성전건립과 비슷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연준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가 이곳 신앙의 땅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유전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편견으로 인하여 환우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받았을 고통, 잠시 시간이 지나면 잊히곤 하는 고통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고 난 후 그들에게 스며든 뼈저린 영혼의 고통, 바로 그런 고통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환우들에게는 용기와 믿음이라는 신앙의 힘이 있었기에 실제로 피와 땀을 흘리며 이루어 낸, 희망이라고 하는 성전이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한센병 환우들의 피땀으로 세운 성당

 

- 소록도 환우성당 공사장면(위)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방문.

 

소록도공소는 한센병에 대한 두려움과 재정적인 열악함 그리고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1000명이나 있었음에도 본당으로 승격되지 못했다. 그러나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권 야고보 신부의 지원으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이에 한센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병원 규정에 따라 사제관을 지어야 했을 때 이들은 직원들과 힘을 합하여 모래를 나르고 벽돌을 찍어내어 직접 사제관과 성당을 건축하였다.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은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자신들의 상처 난 손과 발 그리고 오그라든 손으로 경사지에 대지 마련을 위해 평탄작업을 하였고, 바다모래를 세척하여 벽돌을 제작하였다. 이렇게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벽돌 하나하나에 사랑과 희망을 얹어 하느님의 성전인 직원성당과 환우성당이 소록도에 세워지게 되었다.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이곳 신앙의 땅에서 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소록도성당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바로 작은 상처는 큰 상처를 만나면 치유되며,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느끼는 모든 불평불만은 이곳에 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하여 위로를 받게 된다. 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고 그 괴로움에 조개는 눈물인 보호물질을 계속 방출하여 모래알을 감싸게 되고 결국은 모래알이 진주로 변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진주는 소록도의 한센인들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 다시 말해 그들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신앙으로 극복했던 속 이야기를 들을 때 고통은 벌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고통이 구원으로 승화된 것이 1번지 성당 압시데(정면 반원인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겨있다. 세계 최초의 돔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한다. 그 제목은 ‘하느님의 눈물’이다. 붕대에 감긴 가운데 십자가는 환우를, 십자가 밑의 삼각형은 소록도를,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은 하느님의 눈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센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느꼈을 고통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원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구원(영원한 생명-스테인드글라스의 푸른색)을 위하여 당신도 눈물을 흘리면서 고통을 허락할 수박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통을 통해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다.

 

 

소록도의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 마리안느와 마가렛.

 

 

이곳 소록도에는 실천된 신앙의 힘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간호사들이다. 수녀라고 잘못 알려진 그들은 오스트리아 그리스도 왕 시녀회 재속회원들이다. 그녀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었을 한센인들을 맨손으로 어루만지며 치료하는 일을 스스럼없이 해낸 소록도의 천사들이다. 그녀들은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스트리아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야 했고 한센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기도 했다. 잘못 인식되었던 수녀라는 호칭은 후일 그녀들에게 박해가 되어버렸다.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엔 그녀들이 수녀이기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40년 이상을 하느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자 자신을 봉헌했던 그녀들은 이제 나이 들고 병들었을 때 그녀들이 헌신했던 나라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함께한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편지 한 장 남기고 조용히 자신들의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이젠 우리가 그녀들을 보살펴야 함에도 오스트리아 정부가 대신하고 있다니 아쉽다.

 

그러나 그녀들의 희생을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는 보좌신부로서 마리안느와 마가렛과 함께할 때 사제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던 때를 회상한다.

 

사제의 생활을 힘들어 할 때 마가렛이 “예수님은 제자들 발을 닦아드렸어요. 그것이면 돼요.”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은 섬기려하지 않고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교만함을 버리고 섬김의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제관의 액자 속에는 그녀가 남긴 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2014년 주임신부로 다시 소록도성당에 발령받은 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소록도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바로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 대표를 맡아 두 분의 삶을 알리고 소록도 사람들이 40여 년 간 받은 은혜를 똑같이 지구상의 가장 어려운 곳에 은혜를 갚는 일과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처럼 사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들의 작은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4월호, 김경남 알베르토(광주 S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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