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12 ㅣ No.958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1)

 

 

교부들은 누구인가?

 

이미 우리는 앞에서 몇몇 교부, 즉 에우세비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 교의 또는 전례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저자들을 흔히 ‘교부’라고 부른다. 우리가 교부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교부들이 우리에게 교회사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전승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텍스트가 전승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공동체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서로 다른 사고와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메시지가 흡수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교부학’이라고 불리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는 수천 권의 책을 섭렵해야 하는 아주 방대하고도 특별한 분야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다루는 분량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것이다.

 

‘아버지(교부)’라는 단어는 ‘출발선상’을 가리킨다. 즉 어떤 것이 처음 시작될 때에 그 출발선상에 서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라는 말은 종종 조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공교육의 선조들’에 대해 말한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가 있는 사람으로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성장하도록 인도해 주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옛날에는 스승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아버지’란 ‘지식과 동시에 인생의 길’인 지혜를 전수해 주는 사람이다. 예수가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음(마태 23,8-11 참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교회 안에서 상당히 널리 사용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15) 그리고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 나온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을 가르친 사람의 아들이며, 가르친 사람은 그의 스승이 됩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수도 생활의 초창기에 아버지(수도원장)의 중요성도 살펴보았다.

 

초세기 교회에서 주교는 가르치는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때때로 주교는 ‘교황’이라는 의미였다. 비유적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과 교사들,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켜 그들이 주교가 아니었어도 그들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라는 단어에서는 안전감과 신뢰감이 느껴진다. 또한 아버지는 전승을 유지해 주는 사람이다. ‘아버지’라는 말에 담긴 이 모든 의미가 교부(교회의 아버지)들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2)

 


복음과 문화의 만남에 대한 증거자

 

교부들의 저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원천으로 데려다준다. 교부들은 시간적으로 훨씬 더 원천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천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일종의 퇴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으로 나타난, 아직 시대 검증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삶과 사고를 찾아내고 싶어 한다. 교부들의 경우, 그들은 신약 성경의 첫 독자들이었다. 교부들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언어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양식으로 제공해 주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구약 성경을 읽는 방법을 제시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인 방법으로 읽도록 권장했다. 오랜 세월의 퇴적물이 우리로 하여금 본래의 그리스도교 메시지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1500년 혹은 2000년의 교회 역사를 대충 건너뛰거나 무시하지 않고 직접 교부들의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퇴색되지 않은 순수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임의적인 판단이겠지만, 전통적으로 신약성경이 저술된 다음에 쓰인 작품들로부터 교부 시대가 시작되고, 8세기에 끝이 난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 문학이 고갈되어 가던 시기와 일치하는데, 특히 서방 교회에서 그랬다. 교부 시대가 끝나 가면서 동시에, 또 다른 그리스도교 문학이 점차 발전해 갔다. 예를 들어, 성경을 간단하게 주석을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세하게 주석하기 시작했다. 8세기에 교부 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몇몇 사람들은 12세기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마지막 교부라고 말한다.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쉽게 묵상하도록 도와주거나 자신들이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내적 목적을 위해 윤리적인 권고를 하는 것이 교부들이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비난하고 공격해 오자, 교부들은 그리스도교를 옹호해야만 했다. 복음을 강론할 때, 교부들은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 문화와 라틴 문화를 이용했는데, 그들은 그리스 학문과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스토아 학파의 엄격한 윤리성과 사물 질서에 대한 순응성을 곧바로 창조주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의 섭리 사상에 적용시켰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현세의 가시적인 세상을 떠날 때, 사물을 조성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로 상승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차츰 교부들은 고대 문화 전체를 취해서 그것을 그리스도교화 시켰지만, 이러한 작업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3세기에 이상한 교의들로 인해서 복음의 메시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교부들은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삼위일체 논쟁과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이 발생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생겨난 어려움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신학 또는 여러 가지 신학을 생겨나게 만들었다.

 

교부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하나의 통일되고 획일적인 체계에 의해서 움직인 시대가 아니었다. 교부들은 그 당시에 중요했던 두 개의 언어(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작품을 저술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 몇몇 교부들은 시리아어, 콥트어 아라메아어 등을 사용했다. 이 각각의 언어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담고 있었다. 또한 이들 문화는 각자 다양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흔적을 남겼다. 교부들의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할 때,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찾도록 도와준다. 게다가 오늘날 교회 일치 운동은 교부들의 작품 속에서, 교회가 크게 분열되기 전에 형성된 신학의 공통 뿌리와 교회의 일치를 해치지 않는 표현의 다양성을 발견한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3)

 

 

중요한 라틴 교부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한 라틴 교부들은 그리스 교부들에 비해 신학 사상의 독창성이 많이 뒤떨어졌다. 그들은 그리스 교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밀라노의 집정관(통치자)으로 예비신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새 주교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진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교로 선출하자는 한 아이의 외침에 예비신자였던 그는 세례를 받고 주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 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부자들만의 소유가 결코 아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살로니카 사람 7천 명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참회 예식을 실천하라고 요구했고 사목자로서의 자신의 모든 의무를 충실히 했다.

 

탈마티아(현 크로아티아) 태생인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에서는 방탕한 학생이었지만, 동방에서는 철저하게 수도 생활을 했다. 열심히 수도 생활을 하던 그는 사제가 된 후 다시 로마로 가서 다마수스 1세 교황과 신심 깊은 몇몇 여인들을 위해 일했다. 히에로니무스는 성경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다마수스 1세 교황은 그에게 라틴어로 된 성경 번역본을 알기 쉽게 개정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원본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새롭게 번역했다. 이렇게 개정된 라틴어 번역본 성경이 ‘불가타’성경이다. 불가타성경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라틴어 번역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 안에서 신학사상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교부다. 그는 누미디아에 있는 타가스테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신심이 깊은 모니카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한 다음 그곳에서 선생이 되어 가르쳤다. 그는 오랫동안 진리를 찾아 다양한 철학과 마니교를 쫓아다녔고 한 여인과 동거했는데, 그 여인 사이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두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진리를 찾던 그에게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진리의 빛을 발견했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교부들 중에서, 현존하는 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교부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강론을 하고 교리 교육을 하는 사목자이자 교사였다. 또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주석서들과 철학과 신학에 관한 논고들을 저술했다. 이들 논고 가운데 어떤 작품들은 오류에 맞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저술되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이 있다.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회심에 대해 자세하게 감사의 마음을 설명한 작품이고, 《신국론》은 알라리쿠스(서코트족의 왕)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자,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역사 신학적인 관점에서 쓴 작품이다. 루터, 칼뱅, 얀센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를 추종한 모든 신학자들는 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1,84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