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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복음으로 세상 보기: 근로에서 노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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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04 ㅣ No.1061

[복음으로 세상 보기] “근로에서 노동으로”

 

 

벌써 몇 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소임을 하고 있는 노동사목위원회에 예전에 보좌신부로 살았던 본당의 복사단 친구들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초등부 주일학교 학생들과 자모 몇 분이 본당을 떠난 저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아이들은 늘 제가 성당 마당에서 수단을 입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사무실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것을 보며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제 책상도 기웃거리고 책장의 책들도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왜 예전 우리 보좌신부님이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 했고, 그보다 여기가 무엇 하는 곳인지, 신부님은 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활동들을 소개하기 위해선 하는 수 없이 ‘노동’이 무엇인지를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얘들아.. 노동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 먹을 수 있게 돈을 버는 것이니 좋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힘들거나 돈을 조금 받거나 아니면 하기 싫은 것 정도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은 사실 참 솔직한 것이었습니다. ‘보람’, ‘기쁨’, ‘자아실현’ 등을 먼저 떠올리지 못하고 ‘힘든 것’, ‘가난한 것’, ‘육체적인 것’ 등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워보였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고 어른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노동’의 이미지가 그러했기에 아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재로 지난 2016년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 약 1000명을 대상으로 노동인식 조사를 한 결과도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노동’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고르게 한 질문에 ‘힘듦’, ‘노력’, ‘삽.망치 등 공구’ 등이 상위를 차지했고, 이는 대체로 육체노동을 하는 직업에 대해 ‘노동’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고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노동자라고 생각한 직업을 고르게 하니 마트계산원, 아파트경비원, 농부, 운전기사 등을 많이 선택했는데,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을 고르게 한 질문에서는 교사, 의사, 과학자, 경찰관 순이었습니다. 즉, 내가 되고 싶은 직업에서는 노동자라고 생각한 비율이 낮게 나타났습니다. 자연스레 노동자는 나와 다른 사람, 노동은 나와는 먼 이야기로 생각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노동’이란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 무엇 때문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노동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일까요?

 

 

이념적 거부감에 ‘노동’이란 단어를 터부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노동’이란 말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없었던 우리네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노동은 이념적인 단어로 인식되었고 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서 더 자주 사용했던 단어이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이 말을 쓰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을 대체할 용어로 ‘근로’를 사용하게 됩니다. 근로자, 근로자의 날, 근로시간, 근로조건 등을 사용하며, 이념적 거부감에 ‘노동’은 터부시 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로와 노동은 분명 의미의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노동이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반면 근로는 ‘부지런할 근(勤)’ 자에 ‘일할 노(勞)’ 자로 구성된 단어로 말 그대로 ‘부지런히 일함’을 뜻합니다. 일을 중립적 가치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윤리적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근로’라는 말이 일제 강점기 ‘근로정신대’나 ‘전시근로동원법’ 등처럼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수동적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을 강요하던 의미를 내포한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 실재로 우리 헌법은 물론 법률에서도 ‘노동’이 아닌 ‘근로’를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밝히고 있는 헌법 32조에서도 ①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하략) / ②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하략) 등으로 표시합니다. ‘일할 권리’ 혹은 ‘노동의 권리’라 표현하지 않고 ‘근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법률에서도 ‘근로기준법’, ‘근로복지기본법’,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같은 경우는 2조에서 ‘근로’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상위 개념이 ‘노동’이 되지 못하고 ‘근로’가 등장해야 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는 인간 존엄성의 가치, ‘노동’ 단어 사용해야

 

이렇게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 헌법과 법률상 용어로 ‘노동’이 아닌 ‘근로’가 사용되면서 그 부작용은 크게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었고 폄하하게 되었으며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항상 노동의 가치가 바로 인간 존엄성의 가치임을 가르쳐왔는데, 사회에서 노동을 부정한 것, 혹은 이념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바람에 그 풍요로운 정신이 잊혔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인간의 소중한 행위인 ‘노동’이 잘 드러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참된 노동의 가치를 다시 기억하고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노동’이라는 단어를 당당하게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헌법 전문을 “근로에서 노동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일상 법률상의 용어로 노동이 자리 잡을 것이고 시나브로 노동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념적 색채도 엷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에 대해서도 존중 될 수 있고, 나 스스로도 노동자로서 온전한 한 인격체를 완성해 감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사람은 노동을 통해 더욱 사람다워집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역사적 배경에 ‘근로’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다면, 이제 우리 시대에서는 ‘노동’의 의미를 기억하며 좀 더 활발하게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이 인간존엄의 가치를 실현 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근로에서 노동으로!" 헌법 32조 개정 운동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2월호,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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