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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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11)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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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06 ㅣ No.546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11)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냐?”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너무 달라서 우리가 그분을 묘사할 수 있는 언어와 심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께 관한 인간적인 관점들은 종종 빗나가게 된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역시 그 메시지를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못된 인상마저 받게 된다. 상식적으로 이 복음 읽는다면, 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은 상대적으로 오후 늦게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교회는 그래서 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했다.

 

①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전통적인 해석: 먼저 고용된 일꾼들은 유대인들이고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먼저 구원의 길을 유대인들에게 열어놓으시고 다음에 그리스도인에게 열어놓으셨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보다 더 구원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 3세기 교부였던 오리게네스(Origenes)의 우화적인 해석: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맨 먼저 고용된 일꾼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 비유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을 질책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③ 후대에 은총론적인 해석: 이 해석에 따르면 이 비유는 바오로 사도와 루터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사상을 뒷받침해준다. 곧 한 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구원은 인간 각자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전통적인 세 가지 해석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상식적인 가치기준에서는 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이유는 ‘형평의 원칙’과 옳고 그름, 곧 ‘정의라는 가치기준’, ‘능력에 따른 평가’ 때문에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 비유의 중요한 점은 처음부터 일반적인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주인은 이른 새벽에 만난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합리적인 품삯을 제시했고, 고용된 일꾼들은 이 품삯에 만족했는지 군소리 없이 포도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정해진 그 임금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부당한 처사는 없었다는 점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적 가치 기준이 별로 큰 의미 없어

 

문제의 발단은 제일 나중에 온 일꾼들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는 데서부터 불만과 원성이 쌓이게 된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품꾼을 구할 때는 건강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먼저 고르고 비실비실하고 게으르게 보이는 사람들은 뒤에 처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오후 다섯 시까지 고용되지 않은 품꾼들은 십중팔구 술주정뱅이가 아니면 게으름뱅이, 사회의 낙오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포도원에 와서 한 시간 일한 노동의 질은 보나마나 형편없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현대의 화폐가치로 얼마일지 환산할 필요조차 없다. 요즘 표현으로 따지면, 아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한 시간 노동량에 비하면 한 데나리온은 후한 품삯이지만, 그에 따라 또는 그에 비해 하루 종일 새벽부터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대가가 한 데나리온이라면 결코 후한 품삯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이 비유의 묘미가 있다.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 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20,12) 투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는 서로 다른 노동시간을 두고 똑같은 보수가 주어진다. 정의의 개념이 상대화되어버린 것이다. 정의는 개인 간의 노력과 능력의 차이에 따라 집행되는 임금체계를 당연히 요청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하늘나라를 인간적인 ‘정의’라는 이름으로 체계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 안에는 정의의 개념이 뒷전에 밀려나 있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적 가치 기준이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비유에서 가치, 곧 하늘나라에서의 위치는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여주심으로 측정된다. 중요한 것은, 보수나 노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누구나 포도밭으로 부르는 주인의 무조건적인 초대이다. 예수님의 초대는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다 포함한다.

 

소위 자칭 의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장벽은, 죄인들로 하여금 지금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그분의 메시지 앞에서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세워놓은 윤리적 장벽이나 한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위한 축복을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 달라고 요청할 권리도 없다.

 

죄인에게 무서운 재앙이 닥치라고 선포하는 신흥종교의 묵시문학적 설교는 그래서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은연중에 지나친 상벌관계에 따른 논리에 보복 심리까지 가미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리의 논리로 체계화시켜버리려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마땅히 이러이러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몰아붙이려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 비유의 핵심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냐?”,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냐?”(마태 20,15)고 하는 포도원 주인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정의나 형평의 원리에 따른 사람의 차별화와 능력별 대우가 아니라, 바로 관대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관대함과 자비, 사랑과 너그러우심이 한낱 인간의 판단에 따라 저울질 당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복음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항의한 일꾼과 마찬가지로 그 대목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하늘나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불공평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초월적인 분은 인간의 수고와 선악에 절대적으로 공평한 저울을 가진 분이셔야 했다.

 

 

자신의 인간적인 이해관계에서 복음을 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어

 

그런데 이렇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구절이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진다. 성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오직 용서와 자비 밖에는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사람의 깊은 마음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너무 무모하고 편협해질 수 있고, 더러 위험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물며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가 복음에 나온 비유 중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까닭도 자신의 인간적인 이해관계에서 복음을 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화단에서 놀다가 아주 예쁜 꽃을 발견하고 그것을 꺾어 가지고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들뜬 마음으로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 위로 후다닥 뛰어오른다. 이때 엄마가 흙이 묻은 신발을 먼저 보느냐 손에 들고 있는 예쁜 꽃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그 다음 장면이 상상이 간다.

 

포도원 일꾼이라면 요즘의 기능직하고도 달라 그냥 몸뚱이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막노동꾼이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일꾼의 초조하고 초라한 모습과 그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사회나 현실적인 이해관계에서 나온 관심이 아니라 주님의 관심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겠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1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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